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2,1ㄱ.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알다’라는 말을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첫째, 아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2000년 넘게 이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것들 중에는 ‘기억 상실증’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커다란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우리는 기억력에 의지하기 보다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억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거나, 기억으로 길을 찾았는데 요즘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길을 찾습니다. 자꾸 사용하고, 만나고, 생각하면 기억도 업그레이드됩니다.
둘째, 아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맥가이버,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작품은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저는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인데 문제 해결 능력은 좋지 않습니다. ‘길치, 기계치, 디지털 문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쉽게 조립하는 의자도 1시간 넘게 고민하면서 겨우 조립하였습니다. 그것도 엉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바로 문제 해결의 능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해결사’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마귀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만, 탐욕, 분노, 시기, 식탐, 나태, 색욕’의 마귀들이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소경, 듣지 못하는 사람, 열병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은 본인이나, 조상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파타(열려라)’입니다.
셋째, 아는 것은 ‘믿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칼은 요리사가 사용하면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살던 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인종차별을 하였고,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잘 안다는 율법학자와 대사제 그리고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미가 비록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하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믿음과 사랑으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재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기억을 넘어,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