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국의 이동
『규원사화』<단군기檀君紀>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았다.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황제가 청구국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이『포박자』에 있으므로 단군이 고시의 후손에게 땅을 주어 청구국을 세웠다는 것은 연대의 오류이다. 대황조(치화주 환검)때부터 청구국이 있었다. 청구가 단군때 세워진 국가라는 식의 오류는 신시시대부터 이어진 청구의 1500여년 역사를 지워버리게 된다. 환검을 단군왕검과 동일시하며 생긴 오류이다. 황제가 청구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는 뇌신(雷神) 즉 번개의 신으로 묘사된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가 번개의 신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중국 신화에서 최고의 신으로 자리매김된 황제가 번개신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어느 나라 신화에서나 최고신은 뇌성벽력의 신인 경우가 많으니까. 황제의 어머니 부보(附寶)가 번갯불이 북두칠성을 휘감고 들판을 비추는 것에 감응하여 청구(靑邱)에서 황제를 낳았다고 하며, “황제 헌원(軒轅)은 뇌우(雷雨)의 신”이라고 하니 황제가 뇌신의 신격을 갖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 『중국신화 이야기』김선자, 아카넷, 2004, p252
『태백일사』<신시본기>의 기록을 보아도 복희씨때에도 청구가 있었으므로 단군때 청구를 세웠다는 것은 확실한 오류임을 알 수 있다.
《밀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처 마침내 진에 옮겨 수인, 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에 살았으니 역시 풍을 성씨로 가졌다.
密記 曰 伏羲 出自神市 世襲雨師之職 後經靑邱樂浪 遂徙于陳 幷與燧人有巢 立號於西土也 後裔分居于風山 亦姓風
이러한 혼동으로 인한 오류는『규원사화』와『환단고기』에 여러차례 나타난다.『삼성기 전』 <상편>에 환웅천왕이 신시를 청구에 세웠다는 기록도 있음은 왜 무시될까?
뒤에 환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을 천평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로 정했다. 천부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이라 불렀다. ……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리더라.
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鑿子井女井於天坪劃井地於靑丘持 天符印主五事在世理化弘益人間立都神市國稱培達擇 …… 後人奉之爲地上最高之神世祀不絶 神市之季有蚩尤天王恢拓靑邱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산해경』<해외동경海外東經>에 군자국 북쪽의 북쪽에 있다고 나오니 하얼빈부근이라는 기록이 일치한다.
청구국이 그 북쪽에 있다.
青丘國在其北
청구는 푸른 언덕이라는 뜻이고 약 6천년전이므로 <창세기>에 나오는 약6천년전 아담이 살았다는 에덴동산은 청구일 수도 있다.
청구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 靑丘‧靑丘國 - 예부터 우리나라를 이렇게 불렀다. …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설이 구구하다. 이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하면 한반도, 요동‧요서, 산동반도 등이다. 본문에는 청구국이 동남쪽 땅이라 한 것을 보면 한반도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진다. …… 저자 북애는 한반도로 보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북애『규원사화』고동영 옮김, 한뿌리, 2005, p123 註
* 임승국 주해『한단고기』에서 임승국은 청구를 산동반도 동래(東萊) 지방으로 비정했다.
이렇게 위치가 불분명한 것은『삼성기전』<하편> ‘신시역대기’를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배달한웅은 천하를 평정하여 차지한 분의 이름이다. 그 도읍한 곳을 신시라고 한다 . 뒤에 청구국으로 옮겨 18세 1565년을 누렸다.
倍達桓雄定有天下之號也其所都曰神市後徙靑邱國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여기서 옮겼다는 청구국은 하얼빈쪽이 아닌 산동반도쪽이다. 복희씨와 황제와 연관된 청구는 하얼빈쪽 청구가 아닌 산동반도쪽 청구이다. 이주하면서 이름을 그대로 가져간 것이다. 전통적으로 동이가 산동반도 지역을 가리킨 것은 중국인들이 인식한 청구가 전체청구가 아닌 산동반도쪽 청구의 서쪽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동이가 두 개였다. 선진시대의 문헌에 나오는 동이는 산둥에 살던 다원커우 문화의 신석기인이고,『후한서』이후에 나오는 동이는 동북에 거주한 철기 문화인이다. 다원커우의 동이와 한민족의 선조인 동이는 별개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夷)’자를 ‘대(大)+궁(弓)’으로 풀면서 활 잘 쏘는 민족이라 하는데 다원커우 유적의 경우 뼈로 만든 화살촉은 전체 골기 중 19퍼센트이고 리우린 유적의 경우 300개 골기 중 뼈화살촉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夷)는 사람의 뜻이다. 곽박의 『산해경』주석에도 “東夷從大大人也”라 하였다. - 『소호씨 이야기』김인희, 물레, 2009, p.p.101~102 참고,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에 자부선인은 청구국 대풍산에 살았다는데 ‘기천문’에 전해지는 바로는 대풍산은 백두산이라한다.
《삼황내문경》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맘을 씻고 의에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찌기 삼청궁에 사셨으니 궁전은 청구국 대풍산의 남쪽에 있었다.
三皇內文經 紫府先生 授軒轅 使之洗心歸義者也
先生 嘗居三淸之宮 宮在靑邱國大風山之陽
청구의 위치가 한반도, 요동‧요서, 산동반도 등으로 불분명한 것에 대해 살펴보자. 『신사기』에 삼선사령이라고 나온다. 삼선은 ‘팽우, 신지, 고시’이고, 사령은 ‘풍백, 우사, 뇌공, 운사’이다. 황후인 비서갑신모와 치화주 환검으로 모두 9명이니 9환과 연관된다. 각각이 9환을 대표하였다면 청구는 약 1만리 영역의 광대한 나라였다는 말이되고, 대황조께서 하얼빈부근에 계시다가 산동반도쪽으로 이주하였기에 하얼빈쪽 청구가 산동반도에 나타나게 된다. 1만리 영역이므로 앙쯔강 하구와 산동반도, 요서, 요동, 남만주, 한반도 모두 청구에 속하게 된다. 이렇게 1환의 영역이 청구였기에 복희와 황제와 관련된 청구는 산동반도쪽, 자부선인의 청구는 백두산쪽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주전의 청구는 하얼빈쪽이었기에 『산해경』과 『환단고기』등에는 북만주의 청구로도 나타난다.
신인왕검의 첫 도읍지는 한반도나 만주가 아닌 산동반도에서 양쯔강부근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이유로 단군과 청구의 역사가 겹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만주의 고조선으로 왜곡되며 산동반도쪽 역사가 사라졌다. 청구 - 시안 - 하얼빈(신시, 우수하) - 평양(갈석산 뒤쪽평야) - 아사달(구월산과 북한평양)로 수도를 여러 차례 옮긴 것으로 보이는데 이중 중국대륙에 있던 청구와 시안의 역사가 중국역사독립을 위해 사라졌다. 고조선은 조양시를 중심으로 생겨난 작은 국가였다고 보여지며 나중에 세력이 커지며 한국 고대사 대표국가로 왜곡인식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