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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들의 변기 '매우틀'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사용한 이동식 화장실인 '매우틀'. 우리에게 익숙한 측간은 사용하지 않았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이다./김태식/문화/ 2006.6.1 (서울=연합뉴스) |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거주한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권역은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 취운정(翠雲亭), 한정당(閒靜堂), 상량정(上凉亭), 만월문(滿月問 ) 등으로 구성된다.
문화재청이 16일 일반 공개를 시작하는 이 낙선재 권역은 '궁궐 속의 궁궐'이라 할 만하다.
이곳에는 성종 시대인 1485년 건립된 세자의 거처 동궁(東宮)이 있었다. 하지만 영-정조 연간에 주요 전각이 소실되어 빈터로 남아있다가 헌종 13년(1847) 이곳에 왕 개인을 위한 공간을 건립함으로써 우리가 지금 보는 낙선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헌종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독서를 하곤 했다. 지금도 이곳 건물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사치를 경계한다는 의미로 이 낙선재 권역 건물은 단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이 정말 소박한 곳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뒤쪽 경사진 곳에는 인공으로 동산을 만들었고 그 위에는 상량정이라는 육각형 정자를 세웠다. 이 일대에는 화려한 기교를 부린 것은 아니지만, 기괴한 암석을 정원석으로 가져다 놓고 각종 화초를 심어 신비한 장소로 가꾸고자 한 흔적이 지금도 완연하다.
벼루를 씻던 세연지라는 곳에는 '소영주'(小瀛州)라는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 영주란 봉래(蓬萊), 방장(方丈)과 함께 도교신학에서 영원불사하는 신선들이 거주하고 불사약이 자라고 있다는 3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한 낙선재는 조선 고궁 중에서도 가장 최근까지 사람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즉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 사망할 때까지 산 곳이 이곳이다.
그런 까닭에 어느 고궁 권역보다 조선후기 때 건물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데 이 넓은 권역 어디에도 측간, 즉 화장실이 없다. 도대체 생리적 욕구를 이곳 주인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 해답을 풀기 위해서는 경복궁 안에 지난해 8월15일 개장한 국립고궁박물관에 가야 한다.
이곳 소장품 중에는 '매우틀'이란 유물이 1세트 있다. 가구와 금속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 용도는 이동식 화장실이다. 이 중 나무로 된 가구(크기 49.5 x 112.5 x 12㎝)는 용변을 볼 때 이용하던 기구로서, 배설물을 담은 용기를 넣고 뺄 수 있도록 고안돼 있다.
뒷면 윗부분에는 등받침을 끼웠거나 벽에 고정시켰던 흔적이었음이 분명한 장방형 홈이 발견된다. 형태는 직육면체인데 앞과 뒤에 발을 놓을 수 있는 받침대가 달려 있으며 윗면에 장방형 구멍을 뚫었다. 이 장방형 홈에 엉덩이를 걸터앉아 볼 일을 보았던 것이다.
그 윗면과 발판에는 당초문(唐草紋)을 넣은 직물을 금속 압침으로 고정했다.
청동으로 만든 금속 변기(49.5 x 112.5 x 12㎝)는 선형(船形), 즉, 배 모양이다. 부식되어 일부가 훼손되긴 했으나 그런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변기는 삼국시대 유적에서도 간혹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 유물과 가장 닮은 형태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백제시대 '변기토기'가 있다.
임금은 지존(至尊)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배설물을 일반 서민과 같이 '똥 오줌'으로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임금의 용변을 뭐라 했을까?
매화!
이것이 임금의 용변이었다고 한다.
결코 향기롭지 않은 냄새가 났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터인데 누구의 용변은 '똥오줌'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매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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