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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박재동 화백이 말했다.
실크로드를 다녀오고 나서 자기가 본 것을 혼자만 가질 수 없어, 나누어 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전해주고 싶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고.
나도 그렇다.
여행을 다녀와서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다.
누군가는 여행에서 본 아름다운 세상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고, 누군가는 이렇게 글로 남긴다.
글쓰기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노역이다.
그래서 여행 후 글 쓰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렵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내 추억을 남기는 것이 이 방법 밖에 없어 힘든 글쓰기를 또 시도한다.
그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여독의 고통을 참으며, 있는 힘을 쥐어짜며 이렇게...
7월 24일(1일째)
부산 출발, 시안으로!
작년 여름 윈난 여행 때 계획되었던 실크로드 여행을 드디어 떠난다.
18일 코스 10인에, 뒤 늦게 합류한 12일 코스 두 분 까지 도합 12인이 김해 공항에 모였다.
작년엔 여자들만 10명이 팀을 이루었는데 이번엔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아이와 5,60대 남성 세분이 합류하셨다.
우리 팀 12인 외에 김해에서 오신 이경상님까지 13인이 부산 출발 상해 행 비행기를 탔다.
상해 공항에서 4시간 이상 체류한 후에 시안행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이경상님이 공항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비싼 커피를 우리 일행에게 쏘시는 덕분에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대구에서 출발한 이경상님 일행인 권상철님, 하일님과도 합석하여 지루한 시간을 알차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우리에게 거금을 투척하여 커피를 사주신 이경상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시안에 도착하여 택시를 나눠 타고 한 시간을 달려 숙소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 깊었다.
택시를 타고 들어오며 본 시안성의 야경이 운치 있고 멋있다.
호텔이 도착하니 케이씨님과 작년 윈난 여행 때 함께 한 캡틴박님이 우리를 반겨주신다.
짐을 풀고 바로 숙소 옆 꼬지 집에 가서 인천에서 출발하여 이미 도착한 분들과 맥주와 꼬지로 저녁을 대신하며 첫인사를 나누었다.
꼬박 하루가 걸려 집을 떠나 시안에 도착했다.
7월 25일(2일째)
시안 성벽과 종루, 고루, 그리고 이슬람사원과 시장 둘러보기
오늘 일정은 시안 성벽과 종루, 고루, 이슬람 사원과 이슬람 시장 그리고 대안탑을 둘러보는 코스다.
아침 일찍 숙소 주변에 있는 아침 시장에 가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시장 구경을 하였다.
활기찬 시장 분위기와 우리나라 농산물과 다른 신기한 상품 구경이 재미있었다.
시안 성벽을 찾아 나섰는데 처음부터 방향을 잘 못 잡은 바람에 더운 날씨에 고생을 좀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도시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더운 날씨에 공기까지 나빠 슬슬 짜증이 나기도 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행인들에게 묻고 또 묻고 하여 남문을 찾아 갔는데 성벽을 따라 가는 길이 마음에 들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성벽에 올라가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성벽 위의 길은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넓었고, 한 바퀴 도는데 2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했다.
자전거에 자신 있는 사람이 자전거를 잘 못타는 사람과 짝을 이루어 2인용 자전거를 탔고, 나머지는 1인용 자전거를 타거나 전동차를 탔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고 가니 더위가 가시고 시원하였다.
성벽 위를 자전거로 달리니 기분이 상쾌했지만 울퉁불퉁한 길이라 엉덩이가 무지 아팠다.
오후에 가신 분들 말씀에 의하면 복사열로 더위에 고생이 심했다 하니 성벽은 오전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서문까지 가서 여유 있게 쉬다가 남문 출발점에서 다시 만나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한국인들에게 유명하다는 덕발장에 갔는데 만두가 맛있기는 했지만 가격 대비 만족할만한 건 아니었다.
중국 물가 치곤 엄청 비싼 음식 값이라 그리 추천할만한 곳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식사 후 종루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고 고루는 그냥 주변에서 외관만 본채 이슬람 사원인 청진사에 갔다.
이미 터키나 스페인, 인도 등을 여행하며 멋진 이슬람 사원을 본 후라 큰 감동은 없었지만 여행객이 북적대지 않아 좋았고, 시안에서 제일 오래된 사원인데다 먼 서역 땅에서 생존을 위해 동방으로 흘러들어 온 서역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며 뿌리를 내린 곳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사원을 천천히 돌아보고 더위에 지친 몸을 쉬며 사원 지붕의 멋진 푸른색을 감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여행 중 이런 여유가 참 좋다.
원래 대안탑을 가려 했으나 시간이 촉박해 포기하고 이슬람 시장을 둘러보고 숙소로 가기로 했다.
이곳은 회족들의 시장이다.
핏줄과 문화적으로는 중국인이나 종교는 이슬람인 회족(후이족)들은 이곳 뿐 아니라 둔황에 많이 거주 하고 있다한다.
돌아오는 길에 스타벅스에 들러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더위에 지친 하루를 시원하게 달랬다.
7월 26일(3일째)
비림, 병마용갱과 화청지, 그리고 장한가
오늘은 오전에 병마용을 둘러보고 오후에 화청지에 갔다 저녁에 그곳에서 공연하는 장한가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미 8시 30분 공연이 매진되어 우리는 9시 40분 공연을 보기로 했다.
하루에 한번 공연인데 토요일만 2회 공연을 한단다.
공연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교통편이 불편해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이용할 차를 예약했다.
여행사를 통해 입장 티켓과 공연 티켓을 사니 친절한 여자 가이드까지 나와 우리를 인솔해 준다.
처음 간 곳은 비림.
한마디로 돌 교과서.
중국이 세상의 중심으로 수천년을 호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문화와 학문의 힘이었음을 이곳 비림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할 뿐 아니라 섬세하고 정교한데다 아름답기까지 해서 예술의 경지까지 도달한 그들의 학문에 부럽고 기가 죽는 시간이었다.
예술로 승화된 학문의 향기에 심취하여 하루 종일 머물고 싶은 곳이 비림이다.
약속한 시각이 되어 주차장에서 만난 우리는 대안탑으로 향했다.
현장법사의 불경이 보관된 의미 있는 곳이라 입장하여 둘러보려 했는데 어찌 어찌하여 분수 쇼만 실컷 보다 대안탑 외관만 보고 병마용갱으로 향했다.
원래 계획에 없었는데 중국인 가이드에 의해 우리가 이끌려 간 곳은 진시황 지하 궁전.
사기나 고증을 통해 만든 가짜 궁전이다 보니 별 감흥은 없었지만 그 시절 민초들의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져 와서 가슴이 아팠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나라를 세웠으나 그 왕조의 존립 시기가 B.C. 221∼B.C. 206임을 생각하면 진시황의 대단한 업적들도 허망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중국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진시황과 마오쩌뚱을 꼽는데다 그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도 유럽의 여러 나라처럼 작은 국가들로 나뉜 채로 발전해 왔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그가 중국 뿐 아니라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하겠다.
그는 공적만큼이나 악행도 많은 군주였다.
문득 오래 전 본 영화 ‘영웅’ 이 생각났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었을까?
어쩌면 그 시절이 요구한 영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작은 생명도 보듬으며 사랑하고, 통일보다는 다양성과 공존을 존중하며, 도덕성과 정의로움을 가진 지도자가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시황 병마용갱으로 향했다.
토요일인데다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관람객들이 너무 많아 혼잡함 속에서 제대로 감상을 할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실로 대단한 작품들이 무척 많았지만 이상하게 나는 병마용갱에서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조용할 때 여유있게 감상했더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냥 죽을듯한 노역에 시달리고 난 후 죽임을 당한 수많은 영혼들의 고통이 떠올라 가슴이 아픈 시간이었다.
병마용갱을 나와 화청지로 향했다
화청지 역시 나에겐 별 느낌이 없는 곳이었다.
단, 장제스가 장쉐량의 군대에 붙잡힌 1936년의 시안 사건의 현장이 눈길을 끌었는데 우리 일행 중 막내인 12살 현익이가 장제스와 장쉐량, 그리고 국공합작까지도 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허걱! 뭐 이런 똑똑한 초등학생이 있나!! (그 후 현익이는 실로 방대한 지식과 독서량으로 우리 어른들을 여러 번 놀라게 하고 긴장하게 만든다.)
화청지를 둘러보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맛있는 요리집에서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지고 난 후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다시 공연을 보러 화청지로 갔다.
사람들이 얼마나 줄을 많이 서 있던지 우리는 더위와 사람들의 북새통에 서서히 파김치가 되어 갔고 공연이 시작할 무렵엔 거의 졸도 직전까지 가 있었다.
아무리 좋은 공연도 컨디션이 좋아야 제대로 감상 할 수 있는 법.
이미 밤 10시가 넘은데다 피곤이 엄습해와 졸음이 쏟아졌다.
장한가는 화려한 무대장치와 볼거리로 거장 장이모 감독의 역작답게 대단한 작품이었는데 그의 창의성과 독창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작년에 봤던 인상리장에 비해 수준이 높고 작품성이 뛰어난 대작임에 확실하다.
그런데, 그런데...
나에겐 감동이 안 느껴졌다.
작년 인상리장을 보며 삶을 이어가기 위한 소수민족의 애환과 원시적 생명력에 눈물 흘리고 가슴이 떨렸던 그 감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행 중 어떤 분은 인상리장보다 장한가에 더 높은 점수를 주었으니 이 역시도 나의 주관적인 관점일 뿐일 것이다.
그렇게 한참 공연을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윤용샘이 하는 말에 그만 빵 하고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빨리 목을 매달아야 끝이 날건데...”
남자인 윤용샘에게 참으로 지루한 공연이었던가 보다.
공연은 양귀비의 목을 매달고도 한참을 계속하였으니 목만 매달면 공연이 끝날거라 믿었던 윤용샘에게는 참으로 지루한 시간이었을 것이다.ㅋㅋ
그래도 장한가는 돈이 아깝지 않은, 창의력이 돋보이는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좀 더 이른 시간에 좋은 컨디션으로 봤다면 훨씬 더 높은 점수를 주었으리라.
공연이 끝나고 12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고단하고 긴 하루를 기절 상태로 마감하였다.
7월 27일(4일째)
시안에서 둔황까지 24시간의 기차여행
아침을 먹고 시안역으로 향했다.
24시간에 달하는 긴 기차 여행이다.
이미 인도에서 세 차례의 긴 기차 여행이 있었던지라 별 걱정 없이 기차에 오른다.
인도에 비해 중국 기차는 깨끗하였고 언제나 뜨거운 물이 준비되어 있어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다만 우리 칸 바로 옆이 흡연실이라 담배연기에 목에 메이는 수준을 넘어 아픈 수준에 이르니 그 고통이 실로 컸다.
점심 시간이 되어 각자 한국에서 준비해 온 것들을 꺼냈고 태어나 처음으로 김병장 전투식량이란 걸 현익이에게 얻어먹어 보았는데 그 맛이 기대 이상이었다.
현익이는 열차 통로 창가에 간이식당을 차려놓고 김병장을 세 개 나란히 요리하여 많은 분들에게 맛 보였다.
태어나 처음 하는 해외여행에 이렇게 적응 잘 하는 초등학생이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나 즐기면서.
나는 햇반을 데워 깻잎과 명이잎 등으로 먹었는데 그 맛이 꿀맛이었다.
한 칸에 침대가 여섯 개 있었는데 우리 일행 다섯명과 중국인 한사람이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와 함께 앉은 중국의 여대생 유몽웨이와 영어로 대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유몽웨이는 상해 근처에 살며 시안에 있는 대학 4학년생인데 그냥 예쁜 정도가 아닌 대단한 미인이었다.
거기다 영어도 유창하게 잘 하는데다 한류 팬이라 한국에 관심이 많아 대화거리가 풍부했다.
하서주랑을 기차로 달리다 끊임없이 길게 이어지는 붉은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사막의 소나기가 차창 밖을 때려 여행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서역에서 중국을 치거나 중국에서 서역을 치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곳, 하서주랑.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에 동원되어 고향의 부모와 처자를 두고 멀리 황량한 벌판에서 죽어간 이름 모를 병사들을 생각했다.
계속해서 차를 마시고 창밖에 펼쳐진 경치를 구경하느라 지겨운지 모르고 시간을 보냈는데 어느새 또 저녁 먹을 시간이다.
이마트에서 사온 육개장국밥을 꺼내 뜨거운 물을 붓고 밥알이 퍼질 때까지 기다렸다 먹었는데 그 맛이 또 기가 막혔다.
기차라는 특수한 공간이 모든 음식을 맛나게 하는 걸까?
아무튼 맛있게 저녁을 먹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 10시가 되면 소등이 된다기에 얼른 씻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3층을 배정받아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천정이 낮아 앉을 수도 없어 애당초 책 읽는 것도 포기하였다.
담배 연기가 올라오고 얼굴 바로 위에서 팬이 돌아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겨우 잠을 청했다.
7월 28일 (5일째)
막고굴과 명사산 그리고 월하천
하서주랑을 밤새 기차로 달리며 고비사막의 별을 보려 했으나 보지 못했고, 새벽에 일어나 일출을 보려고 서 있으니 서서히 해가 동쪽에서 뜨기 시작했으나 내가 상상한 멋진 광경은 아니었다.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아침 9시쯤 둔황역에 도착했다.
도착 직전 청소 하시는 중국인 아주머니들이 한국인 아줌마인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더니 말을 걸기 시작한다.
중국 아줌마들과 한국 아줌마들 사이의 통역은 유몽웨이가 맡았다.
근데 한 아주머니가 순애샘 보고 몇 살이냐 묻더니 마흔으로 보인단다.
실제 나이를 말해주니 기절할 폼이다.
순애샘을 행복하게 해 준 아주머니가 고마워 내가 가지고 왔던 아담한 화장품을 선물로 드리니 아주 좋아하신다.
기차에서 내리니 엄청 더울 줄 알았는데 공기가 선선하니 좋다.
미리 예약해 둔 버스를 타고 막고굴로 향했다.
사실 둔황 오기 전 막고굴에 대한 기대가 엄청 컸는데 실로 아름다운 벽화에 황홀한 시간이었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장경동이라 불리는 17호굴을 볼 때 감격했고 나머지 굴들의 벽화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기대했던 제45굴의 칠존상, 제57굴의 보살벽화, 제285굴의 비천도 등은 보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는다.
게다가 기대했던 한국어 가이드가 없어 중국인이 뭐라 뭐라 설명하는 걸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한데다, 동굴이 어두워 중국인 안내자가 손전등으로 비추는 것만 사람들의 북새통에 끼어서 보는 통에 제대로 된 감상을 할 수 없었다.
벽화를 마주 보며 시간과 공간을 넘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나의 기대는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돌아가서 막고굴에 대해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둔황학이라 하는 학문이 생겼을 만큼 위대한 막고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아쉬운 막고굴을 뒤로 한 채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를 배정 받은 후 우리는 점심을 먹고 저녁거리를 산 후에(이때 거리에서 사온 하미과는 진짜 꿀맛이었는데 이후 신장 지역을 여행하는 내내 그렇게 맛있는 하미과는 다시 맛볼 수 없었다.) 숙소에 와서 빨래도 하고 쉬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5시 30분 쯤 숙소 앞에서 택시를 나눠 타고 명사산으로 향했는데 기본요금인 10위안이 나왔다.
6시쯤 명사산에 입장하여 낙타를 탔는데 오후라서 그런지 낙타를 타고 가는데 별로 더운지 몰랐다.
태어나서 처음 낙타를 탔는데 그 눈이 참으로 순하고 여려 가슴이 찌릿했다.
동물 학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낙타를 타지 말고 걸어 올라 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낙타라는 동물이 인간과 기대어 살며 사람이며 살림살이 등을 이동해 주었으니 어쩌면 그들의 생존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자위하며 올라탔다.(이건 낙타의 입장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입장임을 인정한다.)
사막에서 길게 낙타를 타고 걸어가는 일행들의 모습이 그림같다.
낙타 위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는 윤용샘이 참 고맙다.
낙타에서 내려 월하천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상상해 왔던 사막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행 온 후 처음으로 카메라를 꺼낸다.
난 사진 찍는 일에도, 사진 찍히는 일에도 관심이 없어 카메라 없이 여행 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폰도 구닥다리 투지폰이라 카메라 없이 사진 찍는 건 상상도 못한다.
난 내 눈으로 순간의 장면들을 스캔하고 그 감동을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여행 다녀와서 글로 쓰며 추억을 되새긴다.
그런데 굉장한 장면이 기대되는 곳에 가면 이렇게 카메라를 꺼내 드는데 사진 찍는데 구도가 잘 안 맞아 늘 남편에게 구박을 당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카메라를 내밀며 사진을 찍어달라면 은근슬쩍 걱정부터 앞선다.
월하천 가기 전 공터에서 준비해간 음식들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월하천으로 향했다.
사막과 오아시스, 그리고 월하천.
그 조화가 참으로 아름답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곳에 이런 멋진 누각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월하천을 천천히 둘러보며 그 주변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일몰 시각이 다가왔다.
사막.
내 어린 시절 어린 왕자를 읽으며 상사병을 앓기 시작하던 사막.
생텍쥐페리가 사랑했던 사막.
‘나는 오늘도 사막을 꿈꾼다.’의 저자 김효정이 걷고 달렸던 사막.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아름다운 여체처럼 황홀하게 나를 유혹하던 사막.
그 사막에 내가 왔다.
8시 30분쯤 명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10여분쯤 걸어 오르니 사람들이 일몰을 보기 위해 모여선 정상이 나온다.
일행들이 서서히 올라오는 것이 보여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하나 하나 찍어 주었다.
정상에 나란히 앉아 있으니 일몰이 시작된다.
내가 그렇게 기대하였던 사막에서의 일몰을 보는 순간이다.
정상에서 보니 명사산은 끊임없이 능선을 이어 갔고 그 풍경이 실로 아름다웠다.
낙타를 타고 갈때는 명사산에 대해 실망했었는데 정상에서 보니 황홀하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하여 9시 3분 쯤 완전히 모습을 숨겼고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늘 일몰 직후의 하늘을 사랑했다.
그 짙은 다크불루에 심취하여 혼을 뺏긴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늘은 그렇게 짙푸르게 변해가고 어느새 별이 하나 둘 뜨기 시작했다.
숙소 옆 주류 판매점에서 사온 와인 두병을 나누어 마시고 드러누워 사막의 별을 바라보았다.
맨발에 느껴지는 모래의 감촉과 알맞게 식어 따뜻한 모래에 온 몸을 맡긴 채 누워 있으니 마치 엄마의 자궁처럼 편안했다.
어느새 별이 총총히 떠올라 사막의 실루엣에 둘러싸여 하나의 우주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천체 관측소에서 본 별자리 모형이 내 눈 위에 떠 있다.
나는 그렇게 사막의 별에 취해 있고 내가 좋아하는 지인들이 나란히 내 곁에 드러누워 이 공간, 이 시간, 이 감동을 함께 나누고 있다.
눈물이 쏟아졌다.
삭막별인 내 닉네임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두시간을 드러누워 있었다.
사막에 취해, 별에 취해, 와인에 취해 노래도 불렀다.
함께 한 지인들이 후렴구를 따라 불렀다.
이 순간, 이 영원 같은 순간들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냥 잠들고 싶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그냥 여기서 자고 내일 내려가자.“
내 마음 역시 그랬다.
멀리 도시의 불빛이 보인다.
환상과 현실이 함께 공존한다.
어느새 11시가 훌쩍 넘어버려 아름다운 환상의 시간을 뒤로 한 채 현실을 찾아 명사산을 내려온다.
맨발로 내려오니 그 감촉이 참 좋다.
자꾸 뒤를 돌아본다.
일행들도 계속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 아름다운 매혹의 세계가 있다.
그 아름다운 세상을 뒤로 한 채 발길을 돌리려니 아쉬운 마음에 자꾸 발걸음이 느려진다.
그 날 이후로 명사산의 밤을 생각하니 몽롱한 것이 도무지 현실 속에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 나 자신을 계속 학대했다.
‘미쳤지. 어쩌자고 못 마시는 와인을 마셔서 혼미한 상태로만 그 환상적인 시간들을 기억하나! 내가 아무래도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 못해내는 게 틀림없어. 아구구! 아까워라. 엉 엉 ㅠ ㅠ ’
근데 나중에 들어보니 일행 모두 명사산의 밤은 현실이 아닌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하게만 느껴졌다니, 결론은 나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었고 사막별에 취한 것이었다.
출구에 나가보니 택시가 여러 대 기다리고 있어 우리는 숙소까지 편안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밤이었다.
7월 29일 (6일째)
양관과 둔황 박물관, 그리고 투루판까지의 야간 기차 여헹
원래 계획은 양관과 지질공원을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질공원이 왕복 6시간이 넘게 걸리는데다 오후에 투루판 가는 기차를 타러가야 하기에 양관만을 가기로 했다.
지리과 출신으로 지질학에 관심이 많은 김동권 선생님이 무척 실망을 하셨다.
양관.
한 무제 원정 연간에 쌓은 것으로 이곳을 나가면 실크로드 남쪽과 이어져 많은 국가와 통하였는데 양관을 시작하여 타클라마칸 사막에 발을 디디면 바로 서역으로 간다.
타클라마칸. 이 말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이다.
타클라마칸...
몇 년이 될지도 모를 길을 가족을 두고 떠난 사나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사막에서 백골이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양관에 오니 실크로드에 왔다는 느낌이 가장 확실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잠시 옛사람이 되어 그 시절을 재현해본다.
“여보! 부디 몸 조심 하시고 살아서 돌아오세요. 흑흑”
“부인! 나 돌아올 때 까지 부모님 잘 모시고 아이들 잘 건사해주길 바라오.”
비장한 연기였으나 주변엔 웃음보가 터진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바라보며 내가 실크로드에 왔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꼈다.
실크로드를 가장 절절하게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양관이 아닌가싶다.
양관을 떠나 우리가 간 곳은 둔황 박물관.
공짜였으나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더운 박물관을 둘러보다 지쳐서 기념품 가게에서 퍼질러 앉았다.
탁자에 준비된 차를 일행 전체가 20위안에 마음껏 부어 마시며 체력 회복에 나섰다.
투루판을 가기 위해 우리는 둔황역이 아닌 버스로 두시간 걸리는 유원역으로 향했다.
유원역 가는 길의 풍경이 참으로 이채롭다.
검은산.
계속되는 검은 산과 노란 사막과 군데군데 풀들이 나 있는 풍경이 참 특이하다.
2시간 넘는 동안 풀 몇 포기 빼 놓곤 생명체를 도무지 발견할 수 없다.
드디어 유원역 근처에 와서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 한마디, “ 사람이다!!!”
바글 바글, 인간이 경상도 말로 천지삐까리인 중국 땅에서 두시간만에 처음으로 사람을 발견하고 나도 몰래 나온 말이었으니, 그만큼 사람의 존재가 반가웠다.
유원역에 도착하여 밤기차를 기다리며 옥수수와 컵라면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대신하였다.
이번엔 밤 10시 41분 출발 기차를 타서 새벽 5시 35분에 내려야 하니 그야말로 잠만 자는 기차다.
기차를 타니 이미 소등이 되어 있었고 승객들은 잠자리에 들어 우리는 씻지도 못하고 자기 침대를 찾아 잠을 청했다.
이번에도 역시 3층이다.
내가 산을 잘 타는 걸 어찌 알았는지 항상 높은 곳이다.
잠에 빠져 우루무치까지 가게 될까봐 몇 번이나 눈을 떴다.
7월 30일 (7일째)
화염산, 고창고성, 천불동계곡 트래킹, 베제클리크 천불동, 교하고성 그리고 카레즈
새벽 5시에 일행을 깨우고 나니 바로 역무원이 우리가 내릴 곳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온다.
부스스한 상태로 어둠을 뚫고 투루판 역에 내렸다.
다른 기차를 타고 오는 또 다른 일행들을 기다리며 역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더울 줄 알았는데 새벽의 투루판은 선선하다.
이제 신장지역이다.
신장지역을 여행하며 유전과 태양광 발전, 풍력 발전 등이 눈길을 끌었는데 특히 유전은 중국이 신장을 내 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얼마 후 도착한 다른 일행들을 만나 미리 예약된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여 인간다움을 회복한 후 우리는 1일 투루판 투어에 나섰다.
화염산이 보인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도 보인다.
포도를 말리기 위한 흙집도 나란히 늘어 서 있다.
서유기에서 현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이 이곳의 불길에 막혀 도저히 나아가지 못하다가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겨우 불길을 껐다는 바로 그 화염산이다.
붉은 산이 마치 초벌구이 한 테라코타 같은 색을 지닌 채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제일 처음 우리가 간 곳은 고창고성.
현장법사가 서역에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들러 한달간 불법을 설파하던 곳.
고창고성 주변이 온통 화염산이라 이곳이 서유기의 무대가 되었다.
고창왕이 자기 나라에 머물면서 불법을 전파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현장법사는 돌아오는 길에 꼭 들르겠다고 약속을 하고 다시 서역으로 먼 길을 떠난다.
그러나 현장법사와 고창왕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다.
17년만에 현장법사가 약속을 지키러 왔을 땐 이미 고창국은 패망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고창고성에 도착하니 갑자기 비가 내린다.
더위를 각오하고 온 투루판에 소나기가 오니 더위가 다 가셔버렸다.
강수량이 거의 없는 지역에 비라니, 케이씨님이 투루판에서 비를 맞아보긴 처음이라 하니 우리 팀이 복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비오는 폐허의 고성을 걸으니 운치가 더 해져 괜히 마음이 울컥해진다.
비가 와서 인지 몽환적인데다 폐허가 주는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가슴이 젖어든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왔는데 고창고성은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흙과 짚 등을 섞어 건물을 지었는데 주변의 농부들이 퇴비로 쓰기위해 성을 허물어 가져갔다 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고창고성을 떠나 버스를 타고 가니 손오공 일행의 모습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너무 작위적이라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아 사진 찍을 기분도 안 생긴다.
케이씨님을 따라 천불동 근처 계곡을 트래킹했다.
주변이 온통 붉은 화염산인데 그 가운데로 강물이 흐르고 푸른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는 것이 환상적인 풍경이다.
마치 혹성과 인간의 세상을 동시에 보고 있는 느낌이다.
곳곳에 탄성을 지를만한 풍경이 나타나 우리는 계속해서 사진을 찍으며 걸었다.
다시 버스를 잠시 타서 내린 곳은 베제클리크 천불동 입구.
여기서 우리는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는데 정현룡님이 쏘신 달달한 수박이 실로 시원하고 맛있었다.(이후 우리는 수시로 수박 파티를 하게 된다.)
점심을 먹고 왼편에 있는 모래 언덕을 올라가는데 낙타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언덕 위에 올라가서 보는 풍경이 또 장관이라 하여 열심히 케이씨님을 뒤따라 모래 언덕을 올라갔다.
과연...
멀리 설산이 보이고 바로 앞에 천불동 계곡의 멋진 풍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그 풍경이 좋아 계속 머무르고 싶었으나 베제클리크 천불동을 봐야 하기에 급히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베제클리크.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곳이란 뜻인데 고창국 시대의 왕족 불교 사원으로 7~12세기에 만들어진 석굴사원이다.
특히 15호굴은 그 아름다운 서원도가 있었는데 열강의 강탈로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으며 지금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그 복원에 노력하고 있다.
막고굴에 비해 그 규모도 화려함도 보존상태도 말이 안되게 초라하나 나는 여기서 막고굴에서 느끼지 못한 고적하고 소박한 감동을 맛보았다.
몇 개의 굴만 개방해 놓았지만, 그냥 무방비 상태로 열어 놓았으니 나는 감시하거나 지키는 사람 없는 굴에 들어가 비록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복구되기 전 원래대로의 아름다운 벽화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문을 열어 놓으니 막고굴처럼 굳이 손전등을 비추지 않아도 충분히 그림을 식별한 정도였고 낡았으나 소박하고 아름다운 천년 세월 그대로의 색감에 황홀했다.
벽화를 감상하고 나오니 위구르 할아버지 한 분이 전통 복장을 한 채 문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현익이가 북을 치고 갑자기 신이 내린 심선생은 작두에 오른 무당처럼 신나게 춤을 추었다.
신명이란 이런 것이리라.
자신의 음악에 열렬하게 온 몸으로 반응한 팬에 감동하셨는지 할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잊을 수 없는 할아버지의 눈빛.
세상을 오래 오래 지혜롭게 살아 혜안을 가진 그윽한 눈빛.
나는 저런 눈빛에 가끔 숙연해진다.
마음에 우러난 팁을 듬뿍 드리고 시간에 쫓겨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우리가 간 곳은 교하고성.
박재동 화백이 감동했다던 바로 그 고성.
두 강 사이의 거대한 섬 위에 지어졌으며, 보통 건물은 벽돌을 쌓아 짓는데, 교하고성은 위에서 아래로 땅을 파서 지은 특별한 건축물이다.
그래서 고창고성보다 오래 견고하게 버틸 수 있었다 한다.
교하고성은 그 독창성과 아름다움이 인정되어 곧 유네스코에 등재될 예정이라 한다.
이곳에 옛날 고선지 장군의 집무실이 있었다 한다.
많은 전투에서 전승을 올리고도 세계 역사상 기리 남은 전투 인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하고 그 후 참수형을 당했던 고선지 장군.
파미르 고원을 넘던 그의 기개와 패배 후 그가 당했을 치욕의 시간이 동시에 떠올라 가슴이 저려왔다.
교하고성 사람들은 자신들이 패망하기 전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으로 살았음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자신들의 역사를 나무에 적어 우물 안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와서 인지 그들이 살던 골목을 걷는 내 마음이 아프다.
폐허가 된 고성과 내리쬐는 태양과 눈부신 푸른 하늘과 뭉게 뭉게 하얀 구름의 조화가 비 오는 고창고성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준다.
지하 도시로 내려가 보니 절터와 관청, 주거지 등이 제법 번듯하다.
아이들의 무덤터도 있다했는데 깜빡하여 찾지 못했다.
교하고성을 야르시티라고 한다.
야르는 땅이란 뜻이다.
교하고성은 땅의 도시?
땅의 도시인 교하고성은 이후 주인이 바뀌다가 13세기 몽골에 의해 완전히 멸망 한 후 사람들이 살지 않은 폐허로 남게 되었다.
교하 고성을 떠나 우리는 카레즈로 향했다.
진짜 빡센 투어다.
카레즈는 입장료가 아까울 정도로 실망스러운 곳이었지만 어떻게 강수량이 거의 없는 사막에 사람들이 살 수 있었는지 그 해답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나는 먼저 나와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후에야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난다.
그리고 쇼핑에 얽힌 무용담이 흘러나온다.
윤용 샘이 팔찌를 사고 있는데 1개에 10위안이라 해서 통 큰 남자답게 그냥 사려고 하는데 얼마 못가서 다른 상점에서 5개에 10위안에 팔고 있어 우리의 따거샘께서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 1초만 늦었어도 1개 10위안 주고 살 팔찌를 5개에 10위안 주고 샀단다,
언제나 점잖고 무게있는 따거샘이 바람을 가르며 뛰어 갔다니 상상만 해도 즐겁다.
영순샘은 팔찌를 여러 개 사서 우리 일행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신다.
모두 팔찌 하나씩을 끼고 행복한 모습들이다.
7월 31일 (8일째)
소공탑과 남산목장
어제 너무 빡센 일정을 보냈기에 오늘은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소공탑으로 향했다.
크게 볼거리는 없었지만 오전의 소공탑은 관광객이 거의 없어, 천천히 걸으며 조용하고 쓸쓸한 사원 주변을 도니 그 맛이 참 좋았다.
사원을 돌다 놀고 있는 어린 남매를 만났다.
먼지투성이인 두 아이는 옷이 누추하고 더러웠지만 참으로 예뻤다.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세 살 정도 보이는 남자 아이의 얼굴에 너무도 큰 생채기가 나 있었고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마침 아이들 아버지가 나타나 시안성벽 자전거 이후 내 엉덩이에 계속 바르던 후시딘을 꺼내 주었다.
할 수 있다면 더 한 것도 주어서 그 아이의 생채기가 상처 없이 깨끗하게 낫도록 해 주고 싶었다.
이후 후시딘이 없어 다른 사람들한테 빌려 쓰며 불편하기도 했지만 또 같은 상황이 된다면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후시딘이 먹는 건 줄 알고 입에 빨고 있기에 김동권쌤이 입에 있는 걸 빼서 아버지에게 얼굴에 발라주라고 몸짓 언어를 하는데 아이는 제 먹을 걸 빼앗는다고 죽을 듯이 운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소공탑을 빠져 나왔다.
숙소로 돌아가려니 택시가 안 잡힌다.
김해 권샘과 하샘은 한참의 흥정 끝에 툭툭을 잡아 타고 떠나고 우리는 곧바로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싣고 숙소로 향했다.
버스에 내려 숙소 가기 전 시장 구경 잠시 하다가 우리 숙소 호텔에서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피자와 스파게티, 김밥 등을 먹었다.
스파게티는 별로였는데 피자와 김밥은 제법 맛이 있었다.
특히 시장에서 사 온 투루판의 포도는 그 명성만큼 맛이 기가 막혔다.
오후 1시에 우리의 전용 버스를 타고 남산 목장으로 향했다.
이제 투루판을 떠나 남산목장으로 간다.
예상 시각을 훌쩍 넘어 남산 목장에 도착했고 덥다 덥다를 외치고 살던 우리는 바로 추위에 몸을 떨며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었다.
남산 목장은 아름다운 산과 하얗게 늘어선 파오와 초원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목장이다.
목장 감상도 잠시, 우리는 바로 저녁 준비에 들어갔다.
파를 다듬고 칼질을 하며 저녁 먹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우리의 통역과 총무를 맡은 주영샘이 칼질까지 잘 하여 김동권샘의 무한 칭찬을 받은 날이기도 하다.
어찌 어찌하여 케이씨표 찌개와 파김치가 완성되었는데 그 맛이 천하일품이어서 안 그래도 배가 고픈 우리는 정신없이 식량을 해 치웠다.
지금도 그 찌개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윤용샘은 우리를 위해 물을 몇 번이나 길어오고 행여 불이 꺼질까 끊임없이 석탄을 넣어주고...외모는 근사한 왕자님이신데 자진하여 머슴 역할을 도맡아 하시니 송구스럽고 고마웠다.
한 분의 희생 덕분에 나머지 일행은 깨끗하게 씻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몽골식 파오에서의 하룻밤,
파오 안을 둘어 보았다.
이불, 그릇장, 티비, 오디오, 전기밥솥, 난로, 벽에 걸려 있는 옷가지 몇 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의 물건들만 가지고도 이렇게 잘 살아갈 수 있는데, 우리가, 내가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을 가져 생태 발자국을 길게 남기는 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되었다.
밖을 나와 하늘을 보니 별이 그야말로 쏟아진다.
별똥별이 떨어진다.
어린 시절 늘 별똥별을 바라보며 저 너머 세상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했는데.
너무 추운데다 풀이 젖어 앉을 수 가 없어 선채로 별을 보다 피곤하여 파오로 들어왔다.
명사산에서는 따뜻한 모래에 누워 한참을 별과 교감했지만, 남산목장의 별은 차갑게 빛날 뿐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진 못했다.
우리 일행 중 현익이와 여자분들 도합 10명이 나란히 누워 자게 되었는데 자기 전에 윤용샘이 손수 빚은 오미자주를 기울이면서 여행 소감을 나누는 특별한 시간도 가졌다.
나에게 힘을 주는 말들...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행복하고 따뜻한 시간들.
우리가 가져 온 침낭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할 시간.
뽀송뽀송한 침낭에 들어가 그 위에 이불을 하나 더 덮고 포근한 밤을 보냈다.
불이 꺼질까 세시쯤 석탄을 더 넣으라고 신신당부한 윤용샘의 말씀에 순애샘, 영순샘이 세시에 일어나 석탄을 넣었고 네시쯤 따거가 일어나 또 넣고 다섯시 안되어 내가 또 추가로 넣었으니...우리 40대 이하 어린이들은 불 꺼질 걱정없이 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8월 1일 (9일째)
남산트래킹
새벽에 잠시 밖을 나가보니 희미하게 여명이 밝아오고 별이 희미하게 떠 있다.
Dawn Light Blue.
새벽녂의 짙푸른 하늘빛.
추위에 다시 또 들어온다.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동생들이 깨어날 때를 조용히 기다린다.
난로의 석탄 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날이 밝아 영순 샘과 밖을 나가보니 푸른 풀밭이 밤새 일을 본 흔적으로 하얀 티슈가 나뒹굴고 있다.
영순샘과 둘이서 열심히 풀밭위에 흩어져 있는 휴지를 주어 흔적을 없앴다.
아침은 8시 30분에 죽과 계란으로 간단히 하고 9시에 말 트래킹을 시작할 거란다.
죽을 먹은 후 나오는데 달걀이 완성되어 우리 파오에 들고 가 까 먹고 화장실 줄 서서 일보고 하다 보니 시간이 지체되었다.
12명이 움직여도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시간 지키는 걸 철칙으로 여겼는데 이날은 미안하게도 좀 늦고 말았다.
말 트래킹이 시작되었다.
계곡을 따라 폭포까지 이어진 길인데 그 경치가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답던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폭포 입구에서 말에서 내려 멋진 폭포까지 걸어가서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사진도 여러장 찍었다.
윤용샘은 전생에 위구르족 내지 카자흐족 이었는지 혼자 말을 타서 거의 360도로 몸을 회전하며 우리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남산 목장엔 위구르, 카자흐, 한족이 함께 사는데 말 소유주는 대부분 한족이고 고용인은 위구르와 카자흐족이라고 한다.
중국에서의 소수 민족의 위치가 어떤지...참 아프게 다가왔다.
거의 한시간 반 이상 말 트래킹을 한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이렇게 오랜 시간 말을 탄 건 처음인데, 100위안 밖에 안 하니 남산목장의 말 트래킹은 가격 대비 최고의 상품인 것 같다.
말 트래킹 후 버스에 짐을 실어두고 간단한 점심 먹거리와 물을 챙겨 남산 목장 트래킹에 나섰다.
아름다운 설산과 쭉쭉 뻗은 자작나무와 드넓은 초원과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와 말과 양떼들이 연출하는 목가적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길을 걷다 몇 번이나 멈추고 주변을 들러보았다.
사방팔방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스위스와 캐나다의 멋진 풍경을 합쳐 놓은 듯한 비경에 우리는 참으로 행복했다.
완만한 능선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평소 잘 못 걷던 사람들도 수월하게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말 트래킹이 가격 대비 최고의 상품이라면 남산목장 트래킹은 노력 대비 최고의 코스인 것 같다.
경치 좋은 곳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 준비해 온 음식으로 소박한 점심을 나누어 먹었다.
남산 목장을 떠나 우루무치로 향했다.
우루무치 가는 길에 검문을 받았다.
독립의 염원이 뜨거운 지역이고 한달 전 폭탄테러가 난 도시니만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살벌하다.
우루무치 진입하는 고속도로가 제법 막힌다.
그리고 보았다.
나라 잃은 사람들의 처량한 모습을.
차에서 내린 위구르 인들이 검문검색을 받고 줄지어 가는 모습.
우리도 독립하지 못하고 일본에 식민지로 있었다면 저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아닌가!
우루무치의 첫 인상.
황량, 가난, 폐허, 몰락, 비포장, 덜컹거리며 요동치는 버스.
중국을 여행하면서 이런 도시는 처음이다.
남산 목장에서의 평화롭고 충만했던 기억이 사라지고 또 다시 세상의 문제로 머리가 아파지는 순간이다.
강한자와 약한자. 그 사이에 벌어지는 문제들.
한참을 꼬질꼬질한 동네를 지나 시내로 진입하니 제법 번듯한 모양새를 한 도시가 나타난다.
현대적으로 잘 갖추어진 신시가지엔 한족들이 살고 폐허 같은 동네는 위구르족이 산다고 한다.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카르푸에 갔다.
검색대를 통과하였는데 여기는 한족들이 주로 이용하는 카르푸란다.
한국산 제품이 제법 보이고 전지현, 김수현 등이 광고 모델로 도시를 장식하는 것을 보니 한류 열풍을 실감한다.
8월 2일 (10일째)
천지 트래킹
아침에 일곱명이 숙소 주변에 있는 음식점에서 죽과 만두로 아침을 먹었는데 영순샘이 쏘셨다.
일곱명이 충분히 먹고도 30위안 밖에 안 나왔는데 어제 내가 카르푸에서 현익이에게 사준 아이스크림이 30위안이었으니...
중국은 인민들이 굶어 죽지 않고 일할 수 있게 최소한의 먹거리는 싸게 공급하고 생존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은 무지 비싼 듯 했다.
오늘 하루는 천산 천지 투어이다.
190위안이라는 거금을 주고 천지에 내려 트래킹을 시작했다.
올라가는 길이 온통 계단인데다 보도 블럭 같은 것이 깔려 있어 입장료 20위안인 남산 목장 트래킹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반에 반에 반도 못 미쳤다.
거기다 우리를 감동시킬 특별한 경치도 없어 더욱 실망스러웠다.
정상에 도착하여 바라 본 호수와 웅장한 설산의 모습이 아주 멋졌으나 가격 대비, 시간 투자 대비 무척 아쉬운 곳이었다.(이것은 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관점일 수도 있다.)
호수 주변을 잠시 트래킹 한 후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배를 탔다.
위구르족 연인인지 젊은 부부인지 모르지만 어여쁜 커플이 우리 일행이 신기하던지 말을 건다.
한국인인지 알아보고 반가워하더니 내가 “당신 예쁘다.” 라고 하니 “너도 예쁘다”라고 대답해 준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말에 귀가 제법 익숙해진 눈치다.
서로를 신기해하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버스 타기 전 휴게소에서 라면을 두 개 시켰다.
그런데 어제 남산 목장 말 트래킹 할 때 조금 지체된 것이 마음에 걸려 시간을 지키려 재촉을 한 탓인지 급하게 라면을 먹던 현익이가 심하게 체해 버렸다.
그날 저녁 현익이는 맛있는 요리 앞에서 한입도 먹지 못하고 숙소에 먼저가 피를 보고야 말았는데(내가 준비해 간 자동 침으로 손가락을 땄다.) 그게 두고두고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한 후 내일 갈 곳인 홍산 공원과 신장 박물관 가는 법을 미리 알아 두었다.(더운 날씨에 일행을 거리에서 헤매게 할 수 없는데다 유능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
홍산 가는 길은 차경호님이 자세하고 친절하게 알려 주셨고, 신장 박물관은 투루판에서 우리와 내내 버스를 타고 동행한 중국인 안내인이 지도까지 펼쳐 놓고 설명해 주었다.
이분은 부모님과 아들을 동행하여 투루판에서부터 함께 했는데, 가족 여행을 하는 모습이 참 따뜻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우리의 버스 기사도 아내와 아들을 동행하여 가족 여행을 했으니... 이름하여 ‘꿩 먹고 알 먹고 여행’이다.(돈도 벌고 가족 여행도 즐기고 ㅋ)
우리가 저녁을 먹으러 간 곳은 훠거집.
대만에서도 훠거집에서 신싱한 해물을 실컷 맛있게 먹은 적이 있는데 우루무치에도 훠거집이 있다.
대만에 비해 재료의 질이나 맛은 떨어졌으나 가격에 비하면 꽤 괜찮은 식당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를 비롯한 몇사람이 발 맛사지를 받으러 나섰다.
김해에서 오신 권선생님(우루무치의 백고무신)도 동행하셨다.
우루무치의 뒷골목을 거닐다 발마사지 집을 하나 골라 들어갔는데 시설이 무척 후져 보였다.
138위안짜리 발맛사지를 받았고, 발은 괜찮게 하는 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따거를 제외한 일행들은 아주 형편없는 서비스를 받은 모양이었다.
특히 영순샘과 윤용샘은 거의 협박에 가까운 팁 요구를 받았으며, 결국 윤용샘은 50위안을 팁으로 주고 나올 수 있었다 한다.
8월 3일 (11일째)
홍산공원과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 그리고 알타이로
오늘 아침은 순애샘이 쏘신 죽과 만두를 먹고 홍산공원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걸어 얼마 안 되는 곳에 홍산 공원이 있다.
12일 코스로 오신 김동권선생님과 강찬대님이 돌아가는 날이라 두 분은 쇼핑을 하러 대바자르로 가셨는데 나중에 신장 박물관에서 만나게 된다.
홍산 공원에 도착해 10위안을 주고 전동차를 탔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전동차에서 내리니 눈에 익은 분들이 많이 보인다.
정현룡님, 문선이님 부부를 비롯해 여러분이 홍산 공원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계셨다.
우루무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홍산공원은 푸른 신록과 잘 가꾸어진 화단으로 제법 멋있게 꾸며진 공원이다.
이 공원 역시 들어 올 때 검색을 받는다.
공원에 동상이 있는데 임칙서의 동상이다.
현익이가 임칙서를 보자 바로 아편전쟁이라고 말한다.
내가 기차에서 프랑스 여행 중 들른 지베르니와 모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바로 “끌로드 모네요?”라고 말하던 신통방통한 녀석.
독서량도 놀랍지만 읽은 걸 기억하는 것이 더 놀랍다.(나는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를 까먹어 추운 겨울날 슬리퍼 신고 음식 쓰레기 버리러 갔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벌벌 떨며 아둔한 내 머리를 욕하며 치욕스런 시간을 보낸 아픈 기억이 있다.)
전동차 승차권을 보니 야외 카페 쿠폰이 있어 커피를 시키고 앉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커피 맛도 좋고 분위기도 멋지다.
특히 주인이 만들어 둔 작은 공간이 눈에 띄어 들어가 보니 예술적 감각이 넘친다.
점심을 먹고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으로 택시를 타고 향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
공짜인데다 시원한 에어컨까지 나와 쾌적한 상태에서 관람을 할 수 있는 고마운 박물관이다.
우리가 처음 들어간 곳은 미이라관.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에서 보고 기대했던 아름다운 누란의 미녀를 볼 수 없었으나 또 다른 누란의 미녀를 비롯한 여러구의 미이라를 볼 수 있었다.
건조한 사막기후가 만들어 낸 미이라들이다.
어떤 분은 미이라를 보며 죽어서도 남의 구경거리가 되는게 너무 슬프다하셨고, 또 다른 분은 아이들에게 학습 자료가 된다면 죽어 미이라가 되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 하시니...두 분 말씀이 다 맞는 것 같고, 이렇게 다양한 생각들을 포용할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이라관을 나와 신장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들의 민속관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들이 남긴 유물들을 보며 감동했고 공감했다.
천여년 전보다 IT 기술 등의 물질 물명이 발달하였지만, 그때의 의복과 장신구 등의 미적 수준은 지금보다 더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얼마나 아름답고 정교했던지, 감탄하고 감동하며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불렀다.
“이것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금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들도 아마 이런 유물을 보면서 영감을 얻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울컥하게 한 것은 그곳에 있는 유물이 고구려 벽화나 신라왕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알타이어계 사람인 우리.
결국 이곳의 문화도 실크로드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고, 내 조상 누군가도 이곳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남긴 사람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단한 문화를 가진 조상을 둔 후손이라면 당연히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 독립운동을 할 수 밖에 없을거란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거리에서 본 살벌한 분위기와 독립에의 염원이 이곳 박물관에 와 보니 충분이 이해가 갔다.
중국내에 있는 55개의 소수민족 대부분이 중국 사람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유독 티벳과 위구르만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유를 확실하게 알 것 같다.
조선족만 하더라도 중국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중국 편을 든다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한국을 모국이라 하고 중국을 조국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한다.
항상 박물관에 가면 급격하게 체력이 저하되어 세시간 이상 못 있는 내가 이상하게 여기서는 도대체 지치지가 않는다.
알타이 가는 비행기 시각에 맞추려 아쉬운 걸음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여기서 우리는 12일 팀과 아쉬운 작별을 했는데 이분들은 상해에서 1박을 하고 내일 귀국한다.
빵차를 나눠 타고 알타이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밟았는데 검색을 무려 세번이나 철저하고 빡세게 받았다.
꼼꼼하게 몸을 더듬더니 발바닥까지 기구로 쓸어 주신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바로 사막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내가 상상했던 사막이 끝없이 펼쳐지다가 알타이 근처에 오니 노란 해바라기 밭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 호수가 보인다.
알타이 공항은 우리 작은 시골역 마냥 작고 소박하다.
노포동 버스 터미널보다 훨씬 작은 공항이라 몇 발자국 걸으니 바로 밖에 우리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비행기로 온 길을 버스 기사가 12시간 넘게 운전하여 온 것이라 한다.
숙소 도착 후 우리는 알타이 음식점에 갔는데 음식들이 모두 우리 입맛에 꼭 맞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빨래를 했는데 여행 내내 빨래가 얼마나 잘 마르던지 그날 세탁한 양말과 속옷을 다음날 바로 입어 가지고 온 양말을 다 신어보지도 못했다.
8월 4일 (12일째)
알타이 시내 투어, 부얼진 지나 카나스로
아침에 일어나 알타이 시내 버스 투어를 하기로 했다.
1위안을 내고 버스를 탔는데 특별하게 눈길을 끌만한 도시 풍경은 없었지만 버스 안 풍경이 푸근하고 정다웠다.
버스를 탄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대충 이런 대화인 것 같다.
“시집 간 너거 딸은 잘 살고 있나?”
“우리 딸 이번에 아들 낳았다. 상해에 돈 벌러 간 너거 아들은 용돈 좀 보내주나?”
버스는 중국어와 위구르어인지 카자흐어인지 모를 언어로 두 번씩 안내를 해 준다.
버스에 탄 사람들 외모가 참 다양하다.
위구르족, 카자흐족, 몽골족, 한족 등이 각 각 얼굴에 민족적 특색을 나타낸 채 버스에 오르내린다.
알타이에만 26개의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니 실로 인간전시장인 샘이다.
그들의 다양한 조화와 공존이 아름다워 보인다.
어제 저녁을 먹은 식당을 찾아가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가니 우리가 첫손님이다.
어제 먹어 본 음식 중 맛있던 걸 주문하여 빙글 빙글 식탁을 돌려가며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요리를 여러개 시켜 먹고도 1인당 우리 돈 3천 5백원 정도 들었으니, 우리나라 같으면 짜장면도 못 시켜 먹을 돈이라 무지 무지 만족스러웠다.
열심히 우리 옆에서 서비스를 해 준 아가씨가 하도 고마워 내가 팁을 주려고 하니 한사코 안 받는다.
맛사지 가게에서 팁을 강요하던 사람들과 참 대조적인 아가씨다.
1시에 숙소를 출발하여 부얼진으로 향했다.
부얼진 가는 길에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밭이 아름다웠다.
그렇게 바깥 풍경에 빠져 있는데 문주샘이 다가와 여권 받았느냐고 묻는다.
내 입에서 급히 튀어 나온 말 “케이씨님! 여권 안 받았는데요.!!”
호텔에서 깜빡하고 우리들의 여권을 챙겨오지 못한 케이씨님을 태운 버스는 다시 알타이로 돌아가고 덕분에 우리는 한가로이 해바라기밭을 거닐며 원없이 즐기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밭과 쭉쭉 뻗은 싱그런 나무와 눈부신 파란하늘과 하얀 뭉게 구름.
마치 사진이나 그림 속에 내가 잠시 풍덩 빠진 기분이다.
누군가가 불러 가보니 해바라기 꿀을 파는 곳이다.
25위안에 생수통 한병의 꿀을 구입했는데 난 거스름 돈이 없다기에 30위안에 꿀 한통을 샀다.(중국 오니 나도 통이 큰 여자. ㅋ)
꿀을 다 샀을 무렵 절묘한 타이밍에 버스가 와서 우리를 태웠다.
부얼진에 도착하니 파스텔톤의 건물이 참 예뻤다.
중국이 아닌 무슨 유럽의 도시에 온 것 같다.
시장 근처에 우리를 내려 주었는데 구둣가게 이름이 선명하게 한글로 “장미여인‘이다.
머난 먼 이국 땅, 그것도 중국의 오지에서 우리 한글로 된 간판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여러 사람이 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시장 구경을 간단히 하고 우리는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 갔다.
거기서 우리는 빵과 커피를 시켜 먹었는데 빵은 맛있었지만 커피 맛은 별로였다.
중국은 차 문화지 커피 문화가 아니라서 대도시가 아닌 곳에서 맛있는 커피 먹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작년에 간 윈난은 커피 생산지라 수시로 길을 걷다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었는데.
그리하여 작년엔 남아돌던 커피가 이번 여행 막바지엔 동이 나 버려 카페인 결핍에 여러 사람이 힘들어 했다.
다시 버스에 올라 기나긴 버스 여행을 했다.
자가용 광고에서나 나올 법한 S자로 휘어진 산길을 참 오랫동안 달렸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이 멋있었지만 점점 지쳐갔고 빨리 내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거의 아홉시가 다 되어 카나스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는데 케이씨님 특명으로 김밥 재료를 만들기 위해 손만 씻고 주영, 문주, 현익이랑 넷이서 케이씨님 방으로 갔다.
이미 서너 분이 방에서 김밥 재료를 썰고 있었고, 우리도 급하게 달걀 지단을 부치고 소시지를 자르고 하면서 김밥 재료 만들기에 안간힘을 썼다.
식당 입장이 10시까지라 번개의 속도로 재료를 만든 우리는 비닐봉지에 담기가 무섭게 식당을 향해 돌진했다.
평소 김밥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현익이까지 김밥을 맛있게 먹을 정도로 그날의 김밥 맛은 특별했다.
원래 여행 계획대로라면 허무에서 1박을 할 예정이었으나 버스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허무가 아닌 카나스에서 2박을 하기로 했다.
내일 카나스 호수에 가는데 허무를 갈 경우 1일권을 사야하고 아니면 2일권을 구입해야한단다.
허무의 경우 지프를 대절해야 하는데 길이 험해 왕복 여섯 시간은 걸릴 거란 말에 안 그래도 오늘 버스를 지겹도록 타고 온 일행이 고민에 빠진 눈치다.
나와 따거는 허무를 가겠다는 결심이 너무도 확고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는데 다른 분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수결로 결정지을 내용도 아닌데다 카나스와 허무 중 각자 원하는대로 가면 될 일이기에 내일 자고 난 뒤 결정하기로 하고 별을 보러 나섰다.
피곤이 엄습했지만 언제 또 이렇게 많은 별을 보겠냐는 생각에 나왔는데 호텔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그리 빛나는 별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호숫가의 소박하고 아담한 산장을 상상하며 왔는데 경쟁하듯이 즐비하게 늘어선 최신식 호텔들이 실망스러웠다.
불편하더라도 호숫가 산장에서 조용하고 소박한 평화를 맛보고 싶었다.
그렇게 카나스에 자본이 물 밀 듯 흘러들어 와서 순수함을 파괴하고 국적불명의 땅을 만들고 있었다.
8월 5일 (13일째)
카나스호수 트래킹
숙소 식당에서 죽과 꽃빵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카나스 호수 트래킹에 나섰다.
입장료가 230위안인데 관어정 올라가는 버스비가 또 120 위안이란다.
카나스 호수에 가면 반드시 관어정에 올라가야 한다는데 버스비가 120위안이라니, 이건 진짜 날강도가 따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버스 티켓을 사고, 케이씨님을 비롯하여 곽상수님, 김미애님 부부, 최대식님, 정의주님 부부, 캡틴박님, 윤용샘, 대엽샘, 그리고 나까지 도합 9명이 도보 트래킹에 나섰다.
호수까지 가는 무료 버스를 탄 후 래프팅 하는 곳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정처럼 맑은 계곡과 시원하게 하늘로 뻗은 자작나무가 얼마나 멋진지 가다가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계곡을 따라 트래킹을 할 수 있게 데크로 길을 잘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워 잠자고 있다.
저 여유가 좋다. 나도 저렇게 한숨 자고 싶다.
버스나 말을 타고 올라갈 길을 우리는 등산 모드로 올라갔다.
그런데 온 세상이 들꽃이다.
둘꽃의 종류도 얼마나 많은지 처음엔 헤아려보다가 나중에 포기해버렸다.
고도에 따라 피어 있는 꽃도 다르다.
나 태어나서 그렇게 많고 다양한 종류의 꽃을 한꺼번에 본 건 처음이다.
그 꽃밭을 내가 걷고 있다.
작년 윈난 갔을 때 꽃을 보며 걸었지 꽃밭 속을 헤집고 걸은 적은 없었다.
소녀시절, 꽃밭길을 걷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현되었다.
고개를 숙이면 온통 꽃이고, 고개를 들면 시원하고 멋진 카나스 호수의 장관이 펼쳐져 있으니, 내 눈이 호강하는 날이로다.
완만한 길을 힘든 줄 모르고 올라갔다.
그러다가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며 점심을 먹었다.
모네의 그림 ‘풀밭위의 점심 식사’가 연상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점심을 먹고 올라가니 휴게실 근처에 버스를 타고 올라 간 우리 일행들이 반겨준다.
관어정까지 올라갔다 이제 버스를 타고 내려갈 거란다.
관어정까지 올라가는 길은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내려다 보는 카나스 호수의 비경이 아름다워 모두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올라갔다.
그런데 나는 내 카메라에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담아내지 못했다.
‘메모리 부족’
작년 윈난 여행간 후 한번도 카메라를 꺼낸 적이 없었는데 그때 사진도 안 지우고 그냥 들고 온 때문이다.
때문에 남들보다 먼저 관어정에 올라가 눈으로 풍경을 스캔할 수 밖에 없었다.
카나스는 천지의 10배로 중국,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의 국경으로 그 물이 북극해까지 이른다한다.
난 개인적으로 카나스 호수의 풍경이 스위스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예전 스위스 루체른에서 본 풍경과 카나스의 풍경이 무척 닮아 있지만 여기가 나는 훨씬 좋다.
스위스가 아름답게 느껴졌던건 자연도 아름다웠지만 그림같이 예쁘게 지어진 집들 때문이었다.
일행이 다 올라오고 사진을 좀 찍다가 다시 하산길에 들어섰는데, 이때.케이씨님은 우리를 특공대원으로 만들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지 않고 최단거리라고 생각하는 길로 들어섰는데, 급경사에 길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심지어 없는 길도 만들어 내며 강행군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탈북난민이 되어 목숨을 걸고 험한 산길을 뚫고 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좋았다.
내려오면서 본 풍경이,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수많은 꽃들이 끊임없이 나를 반겨주었기 때문이다.
“이것보세요. 이런 꽃 처음 보죠? 빨리 사진 찍으세요!”
윤용샘은 자칫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기 십상인 가파른 길 걸으랴, 나의 외침에 사진 찍으랴 참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얼마나 힘들고 험한 길이었으면 나중에 큰 길에 도착했을 때 만세를 불렀겠는가.
계곡 큰 다리 근처에서 족탕을 하며 화끈거리는 발바닥을 식혔다.
남자분들은 알탕을 하면 좋았겠지만 계곡물이 완전 얼음 물이라 발을 담그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때였다.
눈에 익은 누군가가 나타나 보니 주영샘이다.
이유를 물어 보니 한참을 난감해하다 고백한다.
“저 내려가서 보니 배낭을 관어정 매점에 두고 왔어요. 흑흑”
그래서 사정해서 다시 버스로 올라갔다가 배낭을 찾아 혼자 걸어서 내려오는 중이었단다.
그래도 걸어 내려오며 본 풍경이 너무 좋아 위로가 되었다니 다행이다.
우리팀의 브레인인 똑똑한 아가씨가 통역에 총무까지 맡다보니 업무 과다로 이번 여행에선 잃어버리기 선수가 되어버렸다.
카메라부터 깜빡하고 두고 온 게 얼마나 많았으면(물론 결국 다 찾았지만) 현익이가 주영샘 별명을 ‘잃어버리기의 신’이라고 만들어주었겠는가!
작년 윈난 여행 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윈난 때는 20대 꽃처녀 현정샘이 총무를 해서 통역만 하다 이번에 두 가지를 다 하니 몹시 힘이 들었나보다.
거기다 문주 공주의 무수리까지 해야 하니.(결국 다음 여행엔 문주샘이 총무를 하기로 자청했다.)
케이씨님을 비롯한 다른분들은 바로 내려가시고, 대엽샘, 윤용샘, 주영, 나는 호수 트래킹에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버스를 타고는 와룡만에 잠시 내려 경치를 감상하며 사진을 찍었다.
이제부터 또 걸어야 한다.
저녁 식사 시각인 9시까지는 도착해야 하는데 케이씨님이 목장길을 질러가면 20분정도 밖에 안 걸린다니 충분할 것 같다.
내일 허무에서 먹을 점심 장을 봐서 손에 들고 네 명이 목장길 따라 숙소로 향했다.
근데 20분이면 될 줄 알았는데 40분은 족히 걸리고 말았으니, 목장의 철책을 뚫고 지나갈 수가 없는데다 실제로 걸어보니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목장길 따라 밤길 걸으며 고운 님 함께 집에 오는데~”
온데 소똥 천지고 먼데서 본 것처럼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지만, 힘든 걸 참고 기분을 업 시키기 위해 억지로 내 어릴 적 부르던 동요가 현실로 이루어졌노라고 자위하며 걸었다.
한참을 걷는데 목장에서 한 청년이 다가와 자기를 따라 오라한다.
작은 섬처럼 동글 동글한 잔디 뭉치 위로 폴짝 폴짝 그가 발을 디딘 그대로 우리도 따라 딛는다.
‘저 사람에게 고맙다고 사례라도 해야겠어.’
근데 이 사람, 독심술이 있는지 우리가 말도 꺼내기 전에 손을 크로스하며 10위안을 내라고 한다.
10위안을 주고 숙소로 가니 9시하고도 10분이 넘게 지났다.
우리 일행은 이미 샤워도 하고 뽀송뽀송한 상태로 저녁을 먹고 있겠지.
근데 아무도 전화를 안 받는다.
지쳐서 서성대고 있는데 아는 얼굴을 만났고, 어찌하여 파오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 우리 일행을 만났다.
근데 나머지 6명도 한 20분 전에 도착을 했단다.
그분들도 엄청 걸었고 우리와 같이 목장길을 가로질렀으며, 한 청년을 만나 폴짝 폴짝 뛰고 10위안을 냈단다.
근데 우리가 폴짝대며 디디던 잔디 뭉치가 사실은 똥 뭉치였음을 그때 알았다.
현익이가 똥 뭉치 건너며 가장 많이 웃고 즐거워했다는데, 똥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 수준 알겠다.(우리 일행 중 똥 이야기로 여러 사람 배꼽 뺀 사람, 우린 알지요ㅋ)
9시간 이상을 걸어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숙소에 와서 쓰러져 잤다.
8월 6일 (14일째)
허무향에서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간
허무향으로 가는 지프차가 6시 30분에 오기로 해서 새벽에 일어나 숙소를 나섰다.
25명중 케이씨님을 비롯한 9명은 카나스 계곡 트래킹에 나서고 16명은 허무로 간다.
우리 일행 중 주영샘은 카나스로 가기로 했는데, 평소 느린 여행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 힘든 일을 맡아하다 보니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주영샘! 혼자 천천히 걸으며 명상도 하고 충만한 행복 느끼고 와요.
3대의 지프에 나누어 타고 허무로 향했는데 9월에 개통된다는 새 길을 따라 갔다.
포장과 비포장이 섞여 있었는데 비포장 길을 갈 때 몇분은 좀 힘드셨던 것 같다.
특별한 경치는 없었고 한 두 번 쉬면서 가다 보니 2시간도 안되어 내리라고 한다.
처음엔 우린 허무향인지 몰랐다.
분명 세시간 걸린다고 했는데 두시간도 안 되어 내리라고 하니...
근데 허무촌이라고 써 있다.
분위기 좋은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섰다.
이른 아침에 손님 16명이 들이닥치니 주인도 정신이 없었을거다.
근데 숙소가 참 운치있고 색감이 예쁘다.
점심으로 닭백숙을 해 먹자는 의견이 나와 가격을 협상해 보니 말도 안 되게 비싸 포기해 버렸다.
대신 차를 주문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차를 주지 않는다.
상해에서 혼자 여행 온 젊은 남자 작장인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 통역을 부탁하여 겨우 주인에게 차를 주문하여 마실 수 있었다.
근데 나중에 계산하려 하니 차 값을 안 받는다.
어리둥절하면서도 고맙다.
허무향의 첫인상은 좀 실망스럽다.
근데 천만의 말씀이다.
계곡의 다리를 건너 자작나무 숲을 지나 데크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는 순간... 그 황홀한 행복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울창한 자작나무 숲과 나무로 지은 하자크파오, 눈이 시리게 맑은 강, 평화롭게 노닐고 있는 소와 말들...
평화롭고 향기롭게 천천히 흐르는 아름다운 시간들.
이때 나는 사진을 찍다가 그만 카메라를 떨어뜨렸는데 줌 작동이 안 되고, AS센터에 가라는 메시지가 떠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했다.(나와 사진은 이래저래 인연이 없는 모양)
여행의 마무리로 허무향을 선택한 건 참으로 잘 한 일이다.
2시 반에 출발한다니 아직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
실크로드 와서 처음으로 가지는 한없이 여유로운 시간이다.
전망이 가장 좋은 벤치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며 준비해 간 향긋한 커피를 마셨다.
목가적인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충만한 행복을 느꼈다.
허무는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데 사진작가들이 이때 단풍으로 곱게 물든 허무를 찍기 위해 몰려온다.
데크를 따라 계속 걸어가니 몇분의 인부들이 계속 길을 만들고 있다.
언덕 아래는 마을이고 언덕 위는 저멀리 산이 보이는데, 언덕과 산 사이엔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자작나무 숲으로 내려가 자리를 펼쳤다.
자작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참 잘 생겼다.
점심을 먹은 후 우리의 본격적인 ‘따라하기’가 시작되었다.
평소 사진 동호회 회원으로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고,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하시는 순애샘, 영순샘의 멋진 포즈를 따라 그대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우리 따라쟁이들은 두분의 멋진 포즈를 흉내 냈고, 두분은 그런 우리를 참 열심히도 찍어주셨다.
혼자 즐기기가 아까워 남과 더불어 즐기는 것,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명사산의 사막별 이후 여행 후 가장 큰 행복을 맛 본 곳이 허무향이다.
카나스는 대단히 아름답고 멋있었지만 바라다보는 입장이었다면, 허무는 소박하지만 내가 오감으로 느끼고 친근하게 다가와 일체가 되는 기분이었다.
마을 구경에 나섰다.
9월 도로 개통을 앞두고 마을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허무향은 외부에 개장한지 얼만 안되는 10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인데, 서서히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하여 마을의 중심지는 게스트 하우스나 상점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허무향은 몽골,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경 마을이다.
지금까진 지프차 외엔 큰 차가 못 들어왔지만 도로가 개통되는 9월 이후엔 대형 버스도 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대규모로 쏟아지는 관광객을 흡수하기 위해 카나스처럼 호텔이 즐비하게 들어서리라.
허무가 변하기 전 마지막 모습을 보는 이가 우리일 것이다.
허무가 순수함을 잃기 전에 오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2시 30분이 되어 지프차를 탔다.
그리고 이때부터 실크로드 여행 중 가장 신나고 멋진 시간이 두시간 가까이 펼쳐진다.
아침에 온 도로가 아닌 기존의 비포장길을 따라 가는데 그 풍광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정현룡님이 호도협보다 낫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니...
계곡 위로 난 언덕길을 타고 가는데 그 주변이 온통 들꽃이 핀 광활한 초원이다.
울퉁불퉁한 자길 길을 달리고 예닐곱번 가량 개울물도 건넜다.
오프로드의 묘미가 이런 것이었구나.
제일 뒷자리에 앉은 문주샘이 멀미기가 있어 내가 앉았는데 몇 번이나 머리를 콩콩 차 천정에 부딪쳤다.
계곡을 따라 달리는데 아래를 내려다 보니 아찔한게 스릴이 넘쳤고 카나스의 물색깔과 똑같은 강물이 계속 따라 오고 있어 그 즐거움이 최고였다.
현익이는 거의 3분 간격으로 행복에 겨워 까르르 소리 내며 웃는다.
차안은 즐거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흥분의 도가니였다.
창문을 열어 놓아 흙먼지를 뒤집어 섰지만 그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차에는 윤용샘, 따거, 문주샘, 현익이, 나...이렇게 다섯명이 탔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 잠시 차를 멈췄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발견하신 정현룡님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든다.
이번 여행 중 최고라고 하시며.
창밖으로 배낭을 메고 트래킹을 하는 사람들을 몇몇 보았다.
허무에서 1박을 한다면 큰 짐을 숙소로 보내고 가벼운 짐만 진채 첫날은 천천히 카나스에서 허무까지 트래킹을 하고, 그 다음날은 신나게 지프투어를 하면 최고일 것 같다.
16명 모두 행복이 최고조로 달해 지프차를 배경으로 즐겁게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에 허무 입장 티켓 때문에 우리 운전기사와 허무 관리청 사람들 사이에 실랑이가 있었지만 허무 출발 두시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우리는 허무티켓과 차량비로 1인당 300위안을 내기로 되어 있었는데 운전기사들이 조금이라도 티켓 값을 깎아 자신들의 이익을 더 남기려 실랑이를 벌인 것 같다.)
아직 카나스에 간 분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케이씨님에게 전화를 거니 벌써 도착했냐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다.
잠시 후 버스가 왔고 우리는 부얼진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채탄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기절하여 내리 잠만 잤다.
언젠가 오채탄 사진을 본적이 있다.
그 후로 꼭 가보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 드디어 오게 되었다.
일몰 시각에 맞춰 도착했는데 오채탄 암석만 떼서 보면 큰 볼거리가 아닌지 몰라도 강과 자작나무 숲과 어울린 경치가 아름다웠다..
게다가 일몰 때가 아닌가!
석양에 물들어 가는 오채탄의 풍경이 가슴에 저리게 다가왔다.
이미 카메라가 고장 나 버린 나는 남들에 의해 사진 몇 장 찍히다가 멀리 다리가 보여 그곳으로 급히 갔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여기서는 접근할 수 없는 다리다.
일몰을 놓칠까봐 다시 급하게 자리를 옮겼다.
일몰이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일몰이다.
윤용샘은 열심히 일몰의 광경을 사진으로 닮고 있다.
일몰 시간이 아니었다면 오채탄은 그토록 아름답게 내 기억 속에 남지 못했을 것이다.
일몰을 보고 나니 벌써 10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숙소에 짐만 부려 놓고 부얼진 시장에 가서 생선 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민물고기였는데(내륙이라 바다가 없으니) 숯불에 구워서인지 참 담백하고 맛이 있었다.
우리는 케이씨님과 같이 짜파케티도 끓여 먹고 생선을 안주 삼아 맥주도 했는데, 그만 내가 취해 버렸다.
맥주 석잔에 정신줄이 나가 버린 나는 강가 산책을 포기하고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벌써 새벽 1시가 다 되어 간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여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으니...참 징한 하루다.
그 와중에 빨래도 하고 잤는데, 이것이 아줌마의 힘이다.
8월 7일 (15일째)
복해, 크크수리, 크크투오하이 숙소
오전에 부얼진 자유 시간을 가지기로 해서 나갔는데 햇빛이 작렬하는데다 멋진 카페도 발견하기 힘들어 숙소로 돌아와 영순샘이 하사하신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12시에 크크투오하이를 향해 출발했다.
크크투오하이는 처음 들어 보는 곳인데 오늘 밤 거기서 1박을 할 거란다.
처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복해(福海)
신장에서 가장 큰 호수로 마치 바다같다.
가보니 이건 완전 해변 분위기인데 수영복 입고 가족 단위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퀸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를 들으며 해변의 여인 컨셉으로 걸어보았다.
프레디 머큐리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힌다.
‘Love of my life you hurt me, You broken my heart and now you leave me’
크다 뿐이지 특별할 곳이 아닌 이곳이 이 감미로운 선율과 애틋한 가사 때문에 나에겐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혼자서 천천히 해변(?)을 거닐다가 나중에 아예 햇살이 작렬하는 모래위에 드러누웠다.
뜨거웠지만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다시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다 내린 곳은 크크수리.
갈대밭이 운치 있는 강가이다.
여기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한참을 달려 숙소에 도착했는데...허걱! 뭥미?
이건 완전 귀곡산장 분위기다.
자세히 보니 폐교를 호텔로 개조한 것 같은데, 주변이 온통 신축 호텔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또 새로운 반전.
막상 안에 들어가니 숙소 내부는 그런대로 지낼만하게 꾸며져 있다.
물론 우리 방은 욕실문도 안 닫히고 하수구 냄새에 돌 지경이었지만 바깥에서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아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원래 강가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여의치 않아 숙소 뒤 넓은 공터에서 하기로 했다.
저녁 재료 준비에 돌입하여 우리는 씻고 자르고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이건 뭐 ‘아빠 어디가?’ 촬영장 분위기다.
“현익아! 니가 윤후해라!!”
그리고 얼만 후 케이씨표 삽겹삼 양념 구이가 완성되었는데 그 맛이 참 환상적이었다.
도대체 케이씨 이 양반은 직업이 뭐야? 여행 인솔자야? 요리사야?
우리를 위해 열심히 고기를 구워 날라 주신 윤용샘 덕분에 우리는 자리에서 편안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달밤의 야외 식사다.
삼겹살을 배터지게 먹고 난 후 비빔 라면을 먹었는데, 또 미역을 넣고 끓인 특별 요리를 먹으란다.(미역 라면은 처음 먹어보는데 그 맛이 별미다.)
먹고, 먹고, 또 먹고.
자리를 치우고 숙소로 들어갔다 부른 배를 어찌해 볼 요량으로 뒤뜰에 나가보니 몇 분이 마지막 뒷정리를 하고 있어 나도 함께 했다.
맥주병을 나르고 뒤뜰을 몇 바퀴 돌다 하늘을 보며 내가 본 것은...달무리.
나 어릴 적 보고 수십년만에 처음 보는 달무리다.
또 언제 보나 싶어 한참을 바라보다 방에 들어와 빨래와 샤워를 한 후 잠이 들었다.
8월 8일 (16일째)
크크투오하이, 그리고 우루무치로
숙소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크크투오하이로 갔다.
A가 다섯 개인 풍경구이니만큼 아름다운 곳이리라.
크크투오하이는 원래 우리 여행 계획에 없었던 곳인데 허무향에서의 1박이 취소되는 바람에 급히 변경된 장소이다.
크크투오하이는 화산의 폭발로 이루어진 멋진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바위의 규모나 생김새가 과히 A가 다섯 개인 풍경구가 될 만했다.
그런데, 그런데...나에겐 그렇게 큰 감흥이 없었다.
그동안 너무 쌘 걸 본 때문인 것 같다.
계속해서 너무 멋진 풍광만 보다보니 어지간한 풍경에도 감동을 하지 않으니...이건 약물과다 후유증이 아니라 심각한 풍경과다 후유증이다.
내가 오늘 네이버에 크크투오하이를 검색해보니 단 하나의 자료도 없어서 크크투하이, 크크토하이 등으로 검색을 해 보니 이 역시도 없다.
한국인 중 우리가 최초로 여기에 온 걸로 믿어 버리자.
우리가 만약 첫 여행지로 여길 왔다면 멋진 곳이라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알타이 지역을 여행하며 느낀건데 외국인 여행자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한국인은 우리 외에 눈을 씻고 봐도 볼 수 없었다.
중국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를 우리가 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을 처음 본다면서 우리를 신기해하며 구경하는 사람을 수시로 만나곤 했다.
카메라가 고장 나서 촬영도 못하는 나, 그냥 눈으로 스캔이나하자 생각하며 사진을 찍는 일행에 앞서 혼자 조용히 걸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준비해간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명상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20위안이란 저렴한 가격에(카나스 버스비 120위안 때문인지 무지 싸게 느껴졌다.) 전동차를 탔는데 올라갈 땐 몰랐는데 내리막길을 달리니 스릴도 있어 재미있었다.
내려오기 전 파오 앞에서 양꼬지를 기다리는 정현룡님과 몇분을 보았기에 그분들을 기다리며 휴게실에서 라면을 먹기로 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라 평소 입에 대지 않던 컵라면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1시 30분에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어느새 2시가 다 되었다.
근데 버스로 내려가 보니...아뿔사!!!
정현룡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니 양꼬지를 포기하고 그냥 내려왔는데 우리가 기다리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을 지나 버스에 오신 거란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좀 늦게 가야지 양꼬지 드신 분들이 덜 미안할 거라고 생각했으니...
아무튼 출발 시각보다 좀 지체되어 우루무치로 향했다.
이때부터 거의 8시간을 버스를 탔는데 가도 가도 광활한 사막이었다.
나중에 지도로 보니 우리가 버스로 이동한 곳은 신장 북부 지역 일부였는데, 신장만 우리나라의 6배에 이르는 넓은 땅이란 게 실감이 났다.
이성으로는 사막화를 걱정하면서도 감성으로는 한없이 빠져드는 사막의 마력.
공허하고 적막한 아름다움.
그리고 보았다
떼 지어 있는 낙타의 무리를.
난 그 녀석들이 야생 낙타라고 믿고 싶다.(한참을 달리는 동안 그 주변에 인가도, 사람도 없었다.)
사람에 길들여지지 않은 원시의 생명들!
너희 삶을 살아가라.
그 녀석들을 야생 낙타라 철석같이 믿으며 내 마음대로 감동한다.
그 와중에도 자다가 깨다를 되풀이 했다.
‘주리가 틀린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이로구나.
우리는 흙먼지 날리는 황량하고 퇴락한 휴게실 마을에서 온 몸에 먼지를 뒤 집어 쓰면서도 버스에 들어가지 않고 본인 개성대로의 스트레칭을 했다.
창밖으로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보았다.
광활한 사막과 광야와 초원.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장면들.
우루무치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12시가 다 되었는데 밥 주는 데가 있냐고?
있다.!
우리 숙소 옆 우루무치 온 첫날 밥을 먹었던 식당이 아직 영업 중이란다.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맥주잔을 기울이며 여행의 소감을 한 마디씩 했다.
그리고 윤용샘이 ‘광야에서’를 불렀다.
자진해서 머슴활동을 하여 여행 초기의 왕자님 같은 풍모는 어디가고 피곤에 찌들인 모습이었는데 목소리까지 쉬었지만 그 노래는 내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눈을 감고 ‘광야에서’를 음미했다.
좁은 땅덩어리에 살면서 아옹다옹 경쟁하며 살아왔는데 광활한 광야와 초원과 사막이 우리 정신에 시원하고 맑은 바람을 일으켜 더 넓고 큰 사람들이 되어 돌아가리라.
1시가 훨씬 넘어 숙소로 돌아가 고달픈 하루를 마감했다.
8월 9일 (17일째)
우루무치를 떠나며...
오늘은 우루무치에서의 마지막 날.
오늘 아침은 내가 샀다.
크게 쏠려고 했는데 6명이서 21위안 어치 밖에 못 먹었다.
우리는 오늘도 부추 만두를 먹으러 왔는데 벌써 세 번째 들리는 곳이다.
택시를 나누어 타고 대바자르로 갔다.
이슬람 풍의 건물이 멋있었지만 시장은 너무 초라했다.
카르푸에 가서 건과일을 사기로 했다.
내가 태어나 그렇게 초라한 카루푸는 처음이다.
위구르인이 주로 이용하는 카루프인데 천정은 마무리를 하지 않고 속을 다 드러내놓고 있어 을씨년스러웠고 화장실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유통업체인 카루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더러웠다.
얼마 전 시내에 있는 중국인이 이용하는 카루프는 이렇지 않았는데.
건포도와 건무화과, 건방울토마토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4시 30분에 공항 출발이라 발 맛사지를 받으러 나섰다.
김해 이경상님과 함께 선인장이란 곳에 갔는데 여기서 우리는 가격 대비 만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시설도 무지 좋았고 가격도 80분에 100위안으로 아주 저렴했는데, 가장 좋았던 건 그들의 맛사지 솜씨가 지난 번 뒷골목에서 받은 맛사지와 비교도 안 될만큼 만족스러웠다는 것이다.
발 뿐 아니라 머리, 등, 어깨 등을 열심히 맛사지 해 주었는데, 노곤하면서도 시원하였다.
그들의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자장가 역할을 하여 잠시 잠도 들었던 것 같다.
마치고 나오니 일행 모두 아주 흡족한 표정이다.
이경상님이 팁을 주니 그것도 안 받더란다.
지난 번 뒷골목에서 138원하는 걸 팁 준다 생각하고 150위안에 받았는데 그곳보다 10배는 더 좋은 곳이다.
우루무치에 온다면 선인장을 적극 추천한다.
빵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영순샘이 선물로 건과일을 많이 사서 그 무게가 대단하였는데 공항에서 내내 옮겨주신 대구 함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또 빡세게 검색대를 통과하고 의자에 앉아 보딩 시각을 기다리는데 비행기가 많이 연착할거란다.
결국 상해 호텔 숙박은 논의 끝에 취소하기로 했다.
대구 정라오님이 사오신 달달한 청포도를 나눠 먹으며 지겨운 시간을 견뎌냈다.
우루무치에서 상해오는 비행기 속에서 계속 기절 상태였던 것 같다.
거의 정신을 잃고 있어서 방금 탔는데 벌써 착륙이란다.(서너시간을 순간처럼 느끼게 만드는 수면의 마력 ㅋ)
8월 10일 (18일째)
상해를 거쳐 집으로
홍차오 공항에서 밤을 새고 6시쯤 푸동 공항으로 갈 예정이다.
따거와 주영, 문주샘등은 이야기하며 날밤을 새기로 했는데 나는 아직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일행 몇분과 어둡고 한적한 장소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몸에 이상이 있는건지 잠은 쏟아지는데 온 몸이 뜨거워 의자에 누워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 침낭을 바닥에 깔고 누우니 찹찹한게 잠이 스르르 온다.
자다가 모기에게 몇방 물리고 새벽에 일어나 보니 내 주변에 일행들이 잠 들어 있다.
모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피가 터진다.
복수혈전.
경남샘에게 내 짐을 맡겨 놓고 화장실을 다녀오니 벌써 내 짐은 옮겨져 있고 바로 택시를 타고 떠날 기세다.
택시를 나누어 타고 푸동 공항으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얼마나 광란의 질주를 하는지 순간 긴장했지만 어느새 우리는 잠에 빠지고 말았다.
푸동까지의 택시비가 230위안이나 나왔다.
일행들의 얼굴을 보니 참 꽤재재하다.
아마 나는 그들보다 더 심하게 망가진 몰골일 것이다.
푸동에서 인천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나누어졌는데 우리 일행은 돌아오는 부산편 항공권이 부족해 다섯명은 부산으로, 다섯명은 인천으로 가야만 했다.
서로 안으며 이별을 아쉬워했는데 부산으로 가는 분들이 마음 아파하며 미안해 하셨다.
따거와 윤용샘, 경남샘, 주영샘, 그리고 나는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해에서 인천까지는 금방이다.
인천 공항에서 주영샘이 쏜 주스로 원기를 회복하고 우리는 리무진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비가 쏟아진다.
비에 젖은 조국의 푸른 산하가 싱그럽게 다가온다.
중국의 광활함도 좋지만 내 조국의 아기자기함도 참 좋다.
비 때문에 지체되어 부산에 도착하니 8시가 훨씬 넘었다.
노포동 역에 내리니 주영샘의 부모님이 “우리 딸!”을 외치시며 주영샘을 꼬옥 안아주신다.
주영샘도 집에서는 아이였구나.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오니 이미 밤 9시가 넘었다.
집 근처 음식점에서 가족들과 늦은 저녁을 먹고는 공간 이동만 한 하루를 끝냈다.
에필로그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바로 시댁에 제사 음식을 만들러 갔다.
전을 부치고 튀김을 하면서도 비몽사몽.
독하게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아마 부엌에서 전을 만들다 프라이팬에 얼굴을 쳐 박고 잠이 들었을 것이다.
놀다 온 며느리는 시댁 가서 피곤한 척도, 피곤하단 말도 못한다.
제사를 모시고 뒷설거지를 하고 난 뒤 집에 오니 이미 11시가 넘었다.
밤새 끙끙 앓으며 잠을 잤다.
다음날 일어나서 집을 풀어 빨래를 했다.
배낭 두 개, 18일 동안 거지꼴로 변한 등산화, 돗자리, 침낭...
저녁 무렵에 여행기를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피폐한 몰골로 컴 앞에 앉아 있다.
지금 쓰지 않으면 영원히 못 쓸 것 같아서.
예전 인도 다녀와서 목감기가 심해 글쓰기를 미루었는데 나중에 쓸려니 여운도 사라지고 기억도 안나 결국 여행기를 남기지 못한 뼈아픈 기억이 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내 기억을 짜 내며 18일 동안의 역사를 써 내려 갔다.
힘들고 행복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그 여행의 기억으로 글 쓰는 내내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세월이 흘러 언젠가 내 딸 아이가, 또는 내 손주 녀석이 실크로드에 간다면 내 여행기를 읽으며 남다른 감회에 빠지리라.
‘40년 전 내 할머니가 간 그 곳에 내가 있구나. 아! 할머니는 여기서 사막의 별을 보며 울었다 하셨지.’
여행 내내 나와 함께 한 사랑하는 사람들.
너무 편하고 친해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해서 상처를 준적이 있다면 용서해 주시길.
그리고 12명이 떼로 몰려 다녀 소란스러웠음에도 따뜻한 배려와 친절함으로 보듬어 주신 함께 했던 모든 분들에게 일행의 대표로 감사드린다.
여행으로 맺어진 고마운 인연이 또 다른 여행지에서 이어지길...
그래서 고마웠노라고, 함께 해서 행복했노라고 직접 전할 수 있기를...
첫댓글 역시 대~~~장!
해박한 지식, 섬세한 기억들, 뭐든 긍정으로 화하게 하는 선함, 함께 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 여행에 대한 확고한 방향성(때로는 다른 일행들을 당혹하게도 했으리라)과 성취... 거기다가 부지런함까지 포함하는 기행문 덕분에 17박 18일이 정리됩니다. 수고많으셨고 덕분에 무임승차해서 행복하고, 그 행복감이 문장들로 되살아납니다.
완전히 심빤짝 일기 잖아.
사진도 한장없이.....
손현익빼고 11명만 정독하겠네요.누가 요새 이런 긴 리포트를 읽겠어요.쯔쯔...순애샘 칭친, 찬사도 너무 길고...선생 습이 쉽게 버려 지겠나..
너무 심했나..ㅎㅎㅎ 저는 그래도 끝까지 열독했어요.요거로 마음 프시고 앞으로도 수고 해 주셔요.
촌장님! 촌장님! 우리 촌장님!
체력뿐 아니라 여행에 대한 열정도 젊은이 보다 더 대단하신 분!
함께 즐겨주시고 감동해 주시니 그 기쁨이 배가 되었지요.
윈난 때도 그랬는데 이번 여행에서도 우리 입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주머니를 여셨죠.
다음 여행지에서도 또 함께 할 수 있다면 영광일거예요
그 짝지! 심선생님의 추억 반이 저의 것으로 다가옵니다. 긴 여정 한 사람이 인솔해서 다니기에는 벅찬 인원이지만 어느 누구하나 불만없이(?) 너무나 씩씩하게 움직이는 모습 감동이었습니다. 체력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부족한 제가 팀의 골치거리가 될까봐 얼마나 초조했는지 모릅니다. 다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건강하고 주어진 일상을 소화하실 모습들을 떠올리니 살며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좋은 경험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아! 사모님이셨군요.
우리팀 모두 사모님께 반했다고, 꼭 전해달라고 촌장님께 문자 드렸는데 전해주시던가요?
부산 정모 때 꼭 뵈요.^^
내공이 느껴지는 재란샘의 후기 감사요~~
쫙~~ 정리가 되네요
읽다보니 여행하며 놓친 부분들이 보여 살짝 부끄러워 집니다.
다음여행은 준비를 더 많이하여 떠날께요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들이 보여
더불어 행복한 여행 이었어요~~^^
사막별이 비추는 그 빛의 끝은 어디인가요 .
전화 올리겠습니다.
오늘(9/3)에야 글쓰기 권한 확보~ 미련함인지~ 무관심이었던지~ㅋㅋ 요즘 부산엔 전어회가 한창~ 감미리(김동권)(^0^)
감동적인 후기 잘 읽었습니다...후기를 읽고 있노라면, 다시금 그 때의 여행 추억이 떠오르네요. 감사합니다.
재란 샘의 후기... 가슴 벅찬 감동입니다. 우리 모두 얼마나 이 여행을 사랑하고 행복해하였는지... 이 모든 것을 아우르게 한 재란 샘~ 고맙고 감사해요~ 18일동안 우리의 청일점이었던 윤용샘과 총무 주영샘, 꼬마 현익이를 비롯한 함께 한 샘들께 고마움~ 글구 촌장님과 사모님의 좋은 말씀들 감사 드려요... 힘든 상횡에서도 내색하지 않고 잘 이겨내신 두분의 내공에 많은 감동 받았습니다. 무거운 짐 들어 주신 함샘, 라오샘을 비롯한...함께 여행한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려요...글구 KC님!!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이 함께 하며 적재적소에 행복한 시간을 선물해 주셨네요. 고마워요~ 감사할 일이 많음에 행복합니다!!
5년 전에 패키지로 다녀왔는데, 다음에 다시 케이씨따라 가고 싶은 곳이네요...
사막별의 후기는 읽어보기 보다는 녹음하여 듣는 것이 효과적일 듯~ 눈감고 듣다보면 그 장면 속으로 빠져들겠지~ 감사~(^0^)
심선생님외 부산팀선생님, 정선생님은 운남여행에서, 양선생님은 내몽고여행에서 같이한 인연이 있었는데 이렇케 여행기에서 만나니 반갑습니다. 심선생님 여행기 정독하는 내내 설레고 행복했답니다. 마음이 넉넉한 한가위 보내시고 다음에 또 인연이 되어 여행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최선생님!
정말 반가워요. 그 동안 잘 계셨지요? 작년 윈난팀들 모두 정말 그립군요.
모두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분들이었지요.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의 글에 오늘 하루 무지 행복합니다.
내년 여름 동티벳 갈 예정인데 꼭 뵈었으면 좋겠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