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인, 그녀의 두번째 기회
유인은 호화로운 호텔 스위트를 둘러 보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억누를수 없었다. 뉴욕, 맨하
탄. 어릴적 부터 꿈에 그리던 도시였다. 지금 그 맨하탄의 번화가 중심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
스위트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도 스카웃 제의를 한 회사로 부터 당당히 초대를 받아 말이다.
이런 기회를 잡기 위해 그동안 피땀 흘리며 24시간이 모자를 정도로 열심히 살아왔지 않은
가? 불안함을 느낄일이 아니라 가슴 벅찬 희열을 느껴야 마땅할 일이였다. 그런데 이 정체불
명의 사람 질리게 만드는 불안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유인은 깔끔하게 손질된 손톱을 질겅
질겅 씹다 화들짝 놀라 손을 내리고 이해할수 없는 초조함을 가라앉히기 위해 먼저 스위트 곳
곳을 살펴보기로 했다. 침실에서 나와 조바심 나는 눈으로 호사스럽게 꾸며진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다 벽에 걸린 금으로 장식된 거울에 시선을 멈추었다. 물론 이 스위트룸에 놓여진 다른
모든 물건들도 아름다웠지만 특히 이 거울은 박물관에 전시해도 손색 없을 정도로 진귀해 보
였다. 화려할뿐 아니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그냥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값비싸리라는걸
짐작할수 있었다. 이런 거울 하나만 팔아도 우리 식구들이 발 뻗고 편히 쉴 집한채는 사겠네.
유인은 한국에 두고온 가족들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거울
속에 비친 주눅든 모습이 못마땅한듯 인상을 구기고 시선을 돌렸다. 유인은 의식적으로 경쾌
하게 걸음을 옮겨 통유리로 된 창가 앞에 서 발 밑에 놓여진 맨하탄을 내려다 보았다. 하늘 높
은줄 모르고 솟아있는 고층 빌딩들. 도로를 가득 메운 눈에 번쩍 띄이는 옐로우 캡들. 길가를
바쁘게 누비는 냉정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뉴욕커들. 모든게 사진에서 혹은 영화속에서 본 그
대로 였다. 아니 그 이상으로 멋지고 웅대했다. 이건 꿈이 아닌 현실 이였으니까. 불안해 할거
없어. 신유인. 넌 드디어 해낸거야.
'유인아. 우리 뉴욕으로 가자. 넌,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재즈 발레를 배우고 난 패션을
공부하고. 그리고 우리 최고가 되는 거야. 음...벌써 설레인다. 내가 디자인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내게로 걸어오는 네모습. 아마 사람들이 입을 모아 최고의 찬사를 보낼껄? 세상에서 가
장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신부라고.'
'지금 지훈씨가 디자인한 드레스 때문에 내가 예뻐 보일거란 얘기지?'
'당근이지.'
'피......떡 줄 사람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 부터 마시기는? 누가 지훈씨가 결혼하자고 하면
한데? 난 지훈씨 가난해서 싫어. 지훈씨도 가난하고 나도 가난한데. 가난한 두사람이 합쳐
봐야 더 가난해지기 밖에 더 하겠어? 싫어, 난 그렇게 구질 구질 하게 사는거. 이렇게 힘들게
사는거 이젠 지쳤다구.'
참으로 요망하다. 인간의 기억이라는건. 송두리체 흔적도 없이 사라진듯 잠잠하다 가장 대책
없이 무방비 상태일때 불쑥 수면으로 떠올라 얼굴이 따끔 거릴 정도로 난감하게 만든다. 쇠덩
이 주렁 주렁 매달아 기억의 밑바닥으로 침몰 시키고 또 침몰 시켜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 또렸하게 그 실체를 드러낼뿐 이다. 유인은 떨리는 손으로 재빨리
가방에서 담배 한개피를 꺼내 물었다. 초조한 마음과 같이 떨리는 손때문에 불을 붙이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하얀 연기가 몽롱하게 유인의 시야를 흐려 놓았다. 그때도, 이별을 고했을때
도 지훈의 좁은 자취방에 가득했던 담배연기 때문에 눈앞에 흐렸었다. 차라리 다행이였다. 죽
은듯 묵묵히 담배연기만 간간이 뱉어내는 지훈의 얼굴을 볼수 없어서. 그의 얼굴을 보게 되면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사랑같은 어리섞은 감정에 이끌려 그대로 주저앉게 되
버릴지도 모르니까. 다행이였다. 정말 다행이였다.
'그 사람 아버지 부자래. 인천에 공장도 있고 강남에 빌딩도 있데. 나 같은건 지훈씨 같은건
꿈도 못꿀 정도로 부자래. 내가 좋데. 날 사랑한데. 아무것도 가진거 없는 날. 아무 볼품 없는
날. 무슨 생각인진 모르지만 그런 날 사랑한데. 나랑 결혼하고 싶데. 나 이사람 정신차리고 도
망가기전에 결혼할 꺼야. 나 이 사람 잡을꺼야. 나에겐 두번다시 없을 기회야. 이런 사람 내가
또 어디가서 만나. 하나님이 주신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태어나서 지금껏 죽도록 고생만
한 내가 불쌍해서 드디어 크게 선심 한번 쓰시는 거라고. 나 이 기회 잡아야해. 나 이 사람 잡
아야해. 그러니까 우리 끝내.'
'후회...할꺼야.'
'아니. 나 행복할꺼야.'
'내가 너 후회하게 만들꺼야.'
'마음대로.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상관 않해.'
'우리...끝나지 않았어.'
'아니. 우리 끝났어. 내가 끝냈어. 우연이라도 다신 우리 만나지 말자. 죽어서라도 나 다시 지
훈씨 보고 싶은맘 없어.'
'내가 네 뜻대로 되어줄거 같아? 이대로 내가 물러서 줄거 같아? 살아서도 죽어서도 난 널 놓
지 않아.'
유인은 있는 힘을 긁어 모아 태연한척 일어섰다. 최대한 냉정하고 침착한 모습을 연출해
야 했다. 그래서 지훈이 미련따윈 갖지 않게 걸레처럼 너덜 너덜해진 마음따윈 들키지 않
게. 일부러 천천히 방을 나와 마당에서 신발을 신었다. 작년 크리스마스때 선물한 지훈의
단벌 구두가 어느새 많이 낡아 가슴을 무너뜨렸지만 눈 질끈 감고 모르는척 돌아섰다.
'신유인. 거기서. 신유인 당장 거기 서지 못해. 날 죽이고 가. 차라리 날 죽이고 가라고. 신유
인! 그렇게 가려거든 날......차라리 날 죽여! 날 죽이라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유인은 급하게 일어서다 아슬 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담배재
를 몽땅 치마위로 떨어뜨렸다. 유인은 인상을 찌푸리고 보다 일단 수화기로 팔을 뻗었다.
"헬로."
"미스 신?"
"네. 맞는데요."
"미스터 포드씨가 8시에 저녁식사 예약 하셨는데요. 그 시간 괜찮으신지요?"
"네."
"그럼 7시 30분쯤 로비로 내려오시면 약속장소까지 모셔다 드릴 리무진을 대기하고 있겠습니
다."
"그렇게 하죠. 고마워요."
"그럼."
미스터 포드. 이번이 두번째 만남이 였다. 대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사람 좋아 보이는 백인
의 중년 신사. 처음 HR사가 유인에게 아시아 지역 마케팅 부서의 팀장으로써 스카웃 제의를
해 왔을때 유인은 누군가의 짓궃은 장난일거라 단정짓고 두번 생각하지도 않았다. 미스터
포드가 한국으로 유인을 찾아 직접 방문하기 전까진 말이다. 미국의 거대 유통업체에서 왜 이
토록 유인을 원하는지는 아직도 납득 가지 않는 일이였지만 HR사가 내세운 고용조건은 모
든 의심을 잠식 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후했다.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은후 유인은 민접하게 시
간을 체크했다. 저녁식사까진 아직 두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정신없이 거실을 왔다갔다 하
던 유인은 긴장을 풀기위해 거품목욕을 하기로 했다.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비누방울들과
욕실 구석에 놓여있는 난초의 은은한 향이 유인의 엉킨 신경들을 조금씩 녹여 주었다.
미스터 포드와의 저녁식사 그리고......
허드슨강가에 자리한 레스토랑은 찬란한 맨하탄 야경을 감상하기에는 그만 이였다. 8시 정각
에 도착한 레스토랑 안에는 이미 미스터 포드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벽지와 검은 테
이블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넓은 홀엔 놀랍게도 미스터 포드외엔 아직 아무 손님도 없었다.
홀 정 중앙에 놓여진 창가 테이블에 미스터 포드가 앉아 있다 유인을 발견하고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오. 미스 신, 그간 잘 지냈어요? 오늘 정말 아름답군요."
"고맙습니다. 미스터 포드씨도 그새 더 멋있어 지셨는데요?"
"그래요? 미스 신 같은 미인한테 칭찬을 듣다니. 우리 부인이 들으면 질투 꽤나 하겠는걸요?
자...앉지요?"
"네."
자리에 앉자 미스터 포드가 미리 부탁해 놓았는지 와인과 에피타이저가 신속하게 테이블위
에 차려졌다.
"내가 단골인 집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미리 메뉴를 부탁해 놓았어요. 괜찮지요?"
"흠...미스터 포드씨가 워낙 미식가 이시라 그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흥분 되는데요. 오늘 저
녁은 정말 굉장하겠군요. 기대하겠습니다."
저녁식사는 기대이상으로 환상적이였다. 유인이 생각해 낼수 있는 7가지 코스의 퓨전 아메리
칸 요리를 표현할 마땅한 단어는 그것뿐이였다. 마치 예술품처럼 아름답게 장식되어 나왔던
요리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을 빼앗겨 버릴 정도로 매혹적이였고. 그 맛 또한 양식을 별로 좋
아하지 않는 유인도 감탄할 정도로 기가 막힌것이 나오는 요리들 마다 입에서 살살 녹았다.
유쾌하게 식사를 즐기는 동안 창밖엔 어느새 차가운 겨울비가 내려 강건너 보이는 황홀한 맨
하탄을 살며시 적셔놓고 있었다. 그때였다. 유인의 모든 신경이 굳어 버린것은. 너무도 자연
스럽게 레스토랑 분위기에 묻혀 그전까진 의식하지 못했던 피아노 연주가 유인의 의식속으로
파고 들어온 순간은 바로 빌리 조엘의 New York State Of Mind이 연주되고 있는때 였다. 지
훈이 유일하게 연주할줄 알던 곡. 뉴욕에 가면 맨하탄 야경을 등지고 손수 연주해 주겠다던
곡. 유인은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눈으로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 곳으로 눈길을 옮겼다. 바
(Bar)뒤에 자리하고 있는 피아노는 연주자를 가리고 있어 누가 연주를 하고 있는지 알아 볼수
가 없었다. 연주자를 확인하고자 초조해 하는 자신을 깨닫고 유인은 조소어린 눈길을 다시 창
밖으로 돌렸다. 무슨 생각 하는거야. 신유인. 정지훈이 여기 있을리가 없잖아. 아니 만에 하나
어디서건 마주친다 해도 넌 그 사람 마주할 자격 없어. 잊었어? 그 사람 네가 버렸잖아.
"출근은 일주일 뒤부터 하면 될거고 지낼곳은 회사에서 준비한 아파트가 따로 있으니 내일
모레쯤 호텔에서 나와 옮기면 될꺼예요."
미스터 포드의 힘있는 목소리가 유인을 다시 현실로 데려다 놓았다. 후식으로 나온 카푸치노
를 한모금 삼키고 유인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네."
"일은 너무 걱정할꺼 없어요. 아시아 시장 진출은 이번해 HR사의 가장 중대한 목표고 물론 그
에 따른 회사에서 미스 신에게 거는 기대가 크겠지만 한 두달 정도는 시간을 줄테니 그동안
회사 분위기도 익히고 업무파악도 하면 될꺼예요. 그리고 나도 힘 닿는데까지 도와 줄꺼고.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는 모르지만. 하하하."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안정시키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였다. 미스터 포드는. 유인은 뉴
욕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마음 편히 웃으며 미스터 포드를 마주 보았다.
"감사드려요. HR사에서 일하게 된 기회도 그렇고 이렇게 기억에 길이 남을 뉴욕의 첫날밤을
만들어 주신것두요. 모두 감사드려요. 미스터 포드씨."
"아...나도 감사를 받고 싶지만 미스 신이 고마움을 전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걸요. 우리회사 동
부지역 부사장님 이시죠."
"......?"
"아......저기 오시는 군요. 저분이 바로 미스 신을 추천한 분이랍니다."
미스터 포드의 눈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유인은 손에 쥐고 있던 카푸치노 잔을 놓치고 말았
다.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난 커피잔 처럼 유인의 이성도 산산이 부서져 조각만 남아 버
렸다. 웨이터들이 달려와 깨진 잔의 잔재들을 치우고 냅킨으로 곳곳을 닦으며 괜찮으냐고 유
인에게 연달아 물었지만 유인에겐 한남자외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유인의
눈은 정면에 서 있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에 박혀 있었다. 유인의 얼굴 표정, 작은 움직임 하
나도 놓치지 않고 숨죽이고 보고 있는 무표정한 남자. 그 남자에게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듯
서로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닿은 순간 그렇게 묶여 버렸다. 유인은 남자의 생소 하지만 익숙
한 아름다운 얼굴에서 눈을 뗄수 없었다. 기억속에 모습 그대로 아니 휠씬 더 세련되어지
고 예전보다 휠씬 더 강하고 단단해 보이는 남자가 유인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
서 지금 유인에겐 언제나 그래왔듯 그 남자 밖에는 세상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숨막히는 긴
장감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낄쯤 남자가 움직였다. 슬로우 모션으로 시간이 되돌아 가는 착
각을 불러 일으키며 한걸음 한걸음씩 위험하게 유인에게 다가왔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빤히 내려다보며 유인의 알몸이라도 꿰뚫어볼듯 서 있던 남자는 웨이터가 유인에게로 내
민 테이블 냅킨을 대신 받아 유인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짧은 순간 스친 손길은 눈빛만
큼 차가웠다. 그 차가움에 유인은 몸속 세포 하나 하나까지 얼어 붙는것만 같았다. 미스터 포
드는 남자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유인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사라졌
다.
"곤란할텐데?"
테이블 건너편에 긴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앉아있는 지훈이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얼룩 말이야. 꽤 비싸 보이는 드레스 같은데 더 늦기전에 닦지 그래?"
유인은 떨리는 손을 주체 못하고 그만 줘고 있던 냅킨을 놓쳐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테이블
냅킨을 확인하고 지훈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아! 내가 그만 깜빡 했군. 이제 준재벌집 며느리 신데 말이야. 그정도 드레스는 아무것도 아
니겠군. 그렇지?"
"......"
"부군...이름이 어떻게 되시더라? 최, 최....경?"
"최경석."
"맞다. 태진그룹에 최경석 실장. 이제야 생각 나는군. 10년 남짓된 일이다 보니 가물 가물 해
서 말이야."
"8년.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건 정확히 8년 전 일이야."
미친듯이 뛰어대는 심장과는 무관하게 고맙게도 유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차분한 유
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지훈은 뚫어져라 유인을 쏘아 보며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몰아쳤다.
"그래. 내가 이해를 못하겠는건 그 8년 전에 이미 대단한 집안의 며느리가 되신 신유인씨 께서
지금 이 머나먼 타국에서 무얼하고 계신가 하는거야? 지금쯤 토끼같은 아이들 키우며 시부모
님 사랑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남편이랑 오손도손 살고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유인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애써 냉정한 표정으로 숨을 몰아 쉬었다.
"말을 해. 어떻게 된건지. 알아야 겠어. 날 죽인 댓가로 뭘 얻었는지 말을 하라고."
휘청거리는 다리로 일어서 지훈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유인은 안간힘을 다해 돌아섰다.
전신이 바늘로 찔린듯 따끔 거렸다. 그렇지만 쓰라린 가슴이 주는 고통에 비할바는 아니였다.
"그래. 좋아. 앞으로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우리 천천히 서로를 다시 알아가도록 하자
고."
5월의 햇살은 아름다웠다
유인은 무사히 호텔에 도착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하얗게 깨끗이 텅빈 머리속을 생각한
다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였다. 경석으로부터 선물받은 아끼던 블랙 샤넬 드레스를 대강 벗어
던지고 침대로 향했다. 아무생각 없이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천장만 벌뚱이 바라보다 일어나
니 시계가 새벽 3시 42분을 가르치고 있었다. 멍한 머리에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지만 그렇
다고 잠은 오지 않았다. 술. 술이 필요했다. 거실 한구석에 놓여있는 바에서 제일 먼저 눈
에 들어온 병을 잡았다. 신경질적으로 병마개를 열고 있는대로 입안으로 들어 부었다. 알콜은
불에 데인듯 뜨거워진 식도를 빠르게 지나 몸안으로 스며들며 그 역활을 신속하고도 충실히
이행해 내고 있었다. 빙글 빙글 돌던 바닥은 어느새 유인을 10년 전으로 돌려 놓았다. 5월 이
였다. 대학 새네기. 다른 여대생들 처럼 싱그럽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던 유인에게 미팅이란 먼
나라 다른 세상 이야기 였다. 과외에 아르바이트에 숨쉴 틈조차 없는 유인의 처지를 알고 있
던 동기생들도 여간해선 유인을 미팅이나 모임에 초대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 따라 세
라는 이상하게 끈질겼다.
'너 언제까지 이팔 청춘일꺼 같니? 젊음 한때야. 좀 즐기자고. 소녀가장 신유인도 미팅한번 정
도는 해봐야 이 짧은 인생 억울하지 않지 않겠어? 네 미모가 아깝지도 않아? 남자친구를 사귀
라는게 아니라 그냥 오늘하루 기분 전환 할꼄 즐기라고. 서일대 킹카들만 나온다니까? 너 오
늘 않오면 후회 할껄?'
학교앞 카페에 남녀 대학생들이 5 : 5 마주 보고 앉았다. 불편 했다. 난생 처음 하는 미팅이란
것도 어색 했지만 카페에 들어서자 마자 숨 막히게 쫓는 한남학생의 시선이 유인을 여간 부담
스럽게 하는게 아니였다. 한동안 모른척 피하다 그 정도가 지나치다 싶어 그만두라는 의미로
마주보고 똑바로 쳐다봐 주었는데도 무안해서 눈길을 피하기는 커녕 이제 그 남자는 여유로
운 미소까지 지은체 대담하게 유인을 쏘아보고 있었다. 강렬한 눈빛과 초라한 옷차림에 어울
리지 않는 건방진 태도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눈에 띄는 외모까지 유인이 싫어하는 전형적인
타입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칠수 없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두근거리
는 가슴은 그의 묘한 매력에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였고 유인은 그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도
망치고 싶었다. 그 위험한 눈빛 한번 잡히면 영원히 빠져 나올수가 없을것만 같아 겁이 났다.
세라의 이제 파트너를 정하죠 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불편
한 상황을 벗어날 참이였다. 그러나 유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그 남자가 유인보다 조금
더 빨랐다. 남자는 재빨리 유인의 손목을 낚아채 카페를 빠져 나왔다. 등뒤에서 친구들의 야
유소리가 거세게 들렸지만 남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손목이 잡힌체 카페를 나와 골목
모퉁이를 돌았을쯤 유인이 멈추어 섰다.
'이봐요! 이 손 놓고 가죠.'
'정지훈. 서일대 법학과 일학년. 정지훈. 머리 좋은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아까 자
기소개 할때 뭘 들었니?'
'내 머리 좋은건 맞는데 난 내가 관심있는것만 기억하거든. 그러니까 이 손 좀 놓으라고.'
'내얼굴 빤히 보다 내이름을 제대로 못들었단 소리는...내 이름 보단...내 얼굴에 더 관심이 있
다? 그래. 뭐 이해가 영 안되는 소리는 아니네.'
'이봐. 그런 한가한 말장난은 시간 남아도는 부잣집 아가씨들이나 하고 나는 먹고 살기 바빠
서 이만 가봐야 겠으니 내손 놓으라고.'
'그말 어떻게 토씨하나 안틀리고 매번 써 먹냐? 너 그말 3년 전에도 똑같이 나한테 한거 기억
않나? 내가 사귀자고 했더니 너 그때도그랬잖아.'
'......?'
'아! 그리고 또 한말이 있었지. 넌 서일대 법대생 아니면 사귈생각 꿈에도 없다고. 대학교 들
어가서 보자고. 그래서 내가 재차 확인 했었지? 서일대 법대만 들어가면 정말로 사귈거냐고
그랬더니 네가 빙그레 웃으며 사귀기 뿐이야. 너한테 시...'
'집이라도......간.....다.'
'이제 서서히 기억이 나시나? 머리 좋은 아가씨?'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낮이 익은 얼굴이였다. 3년전 유인이 고등학교 일학년때 일이였다. 주
변 남자 고등학교의 쌈짱이라고 소문난 불량학생 한명이 유인을 찍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청
순하고 지적인 미모의 유인은 근교 남학생들 사이 꽤 인기가 있던 터라 이상할건 없었다. 그
리고 얼마뒤 그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교문 앞에서 유인은 그 남학생에게 잡혔었다. 이런일
또한 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유인은 침착하게 이미 몇번 써 먹은적이 있던 대사를 그 남학
생에게도 똑같이 해주었다. 끝에 시집이라도 간다는 말만 빼고. 몇번씩 재차 서일대 법학과만 가
면 정말 사귀는 거냐고 확인하듯 묻는게 귀찮아서 그건 그냥 덧붙인 말이였다. 이런 주먹질 밖
에 모르는 문제아가 우리나라 제일의 서일대 법학과를 갈일은 절대로 없을테니까. 하늘이 무너
지고 땅이 꺼진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유인은 믿을수가 없어 커다래진 눈으로 지훈을 보았
다.
'신유인. 인제 넌 내꺼다.'
5월의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처럼...세상을 다 가진듯 활짝 웃고
있는 이 남자...쳐다보는것 마저 허락되선 않될것 만큼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머리가 갈라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유인은 거실 바닥에서 일어났다. 커텐 사이로 비집고 들
어오는 한줄기 빛만이 어두컴컴한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카페트위에 여기 저기 뒹굴어져 있
는 병들이 참담했던 어젯밤의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정지훈, 예고도 없이 그가 다시 유인의
삶으로 걸어 들어왔다. 유인은 얼굴을 찡그린체 두손으로 머리를 잡고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
어갔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백만불 신부 [하나]
jeny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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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1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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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1등이네요^^* 담 야기가 궁금해요!! 빨리 담편~~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해요//
유니님 감사합니다. 꼬리말요. 담편 시간좀 걸릴지도 몰라요...그래도 기다려 주실꺼죠???
별소녀님. 우와...넘 기뻐요. 정말 흥미있어요??? 신난다.
2편 기대되네요^^*
징허니님 좀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열심히 쓰고 있답니다. 꼬리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