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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묵상글 (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자유롭고 조화로운. 등 )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6:55 , 추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아직 / 04:33,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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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06 03:30
- 자유롭고 조화로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을 뜯어보면 상반된 동작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파견하심과 우리의 머묾-떠남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기도 하고 파견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합니다.
이 동작들은 상반되기는 하지만 조화를 이뤄야 할 것이고,
하나만 있으면 불완전하고 둘 다 있어야만 완전한 것이며,
주님을 중심으로 이 동작들이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들입니다.
먼저 우리는 파견되기 전에 부르심을 받아야 하고,
부르실 때는 다가가고 파견하실 때는 떠나가야 합니다.
부르시는데도 꿈쩍 않고 파견하시는데도 꿈쩍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또 주님과 함께 머물 때가 있고 주님을 떠나 이웃에게 갈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과 함께 머물 때가 있으면 떠날 때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이고,
주님을 떠나있었다면 주님께로 돌아가 함께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주님께도 가고 이웃에게도 가는,
주님과도 있고 이웃과도 있는 두 행위가 같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웃에게 갔을 때도 두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곳에 머물 때가 있다면 떠날 때가 있어야 하고,
머묾과 떠남이 자유롭기도 하고 조화롭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은 행복하지만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은 불쌍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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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06 06:31
어느 책에서 변호사를 하며 한계를 느낀 경험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 한계를 재판에서 이겼지만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 때라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입니다.
교통사고로 인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되었습니다. 사고를 낸 차주는 돈을 물어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판에서 이겨 돈을 물어주게 했습니다. 그런데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판에서 이겼다고 다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없어진 다리 때문에 가고 싶은 곳에 마음껏 갈 수도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재판에 이겼어도 삶의 변화가 없다는 사실에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종종 돈으로 모두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봅니다. 억울한 희생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원하며 시위하는 유가족을 향해 돈 더 받으려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보상을 받는다 해도 목숨을 잃는 사람이 되돌아올까요? 그 사람이 만든 역사가 사라졌는데, 이를 돈으로 지울 수가 있을까요?
돈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도 ‘돈! 돈! 돈!’을 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돈이 필요할까요? 하느님 나라에 돈이 전혀 의미 없기에, 우리는 죽음 뒤에 10원짜리 동전 하나 가져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삶이 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물질적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여기에 조금 거리를 두면서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자기 삶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물질적인 것을 늘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실 때도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을 껴입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그만큼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자기 안의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세속적인 것들을 멀리하면서 오로지 주님의 뜻에 맞게 그래서 주님께 의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에 정답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나의 이웃들에게 다가가고, 사랑의 말과 행동으로 나의 이웃들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때 너무나도 부족한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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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빅터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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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십니다.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복음 선포의 길’이 본질적으로 ‘함께 가는 길이요 여정’(시노달리따스, sinodalitas)임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결국, ‘함께 가는 길’로의 초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견 받은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이며, 동시에 하느님과 함께 가는 길이며, 하느님께 함께 가는 길입니다. 복음으로 빛으로 함께 가는 길이며, 그분 영의 동행으로 함께 가는 길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들의 삶 자체, 그들이 살아가는 길 자체가 증거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가는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이는 오로지 당신께 의탁하고 당신께 신뢰를 두고 가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요?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1코린 1,23)로 말입니다.
또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처신에 따르게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가 할 일이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는”(6,12-13) 것이며, 그 일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능력으로 일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제자임과 동시에 파견 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 파견하신 그분께 매여 있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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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능력에만 의지하라
여행을 위해 짐을 챙길 때 이것, 저것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꾸려야 합니다. 잘 챙긴다고 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싸 들고 다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부터 ‘짐을 줄여야지’ 하고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 많이 소유해야 안심이 되는가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6,8-9). 고 이르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한눈팔지 말고 목적에 집중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인간적인 그럴듯한 수단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잔머리를 굴리지만,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도구요, 연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7,31). 고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면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최선을 다하고 하느님의 처분을 기다리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17). 하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힘을 비워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보이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외에도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여행을 처음 할 때는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여행을 자주 하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할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접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기쁨을 누리길 바랍니다. 사람에게서, 물질에서, 나 자신에게서 자유를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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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로라도에서 달라스 오는 길에 문자를 받았습니다. 며칠 전에 병자성사를 드린 형제님이 위독하다는 문자였습니다. 저는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환자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야 하고, 가족이 돌볼 수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하면 보험에서 비용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형제님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습니다. 가족이 돌 볼 수 있는 상황도 안 되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형제님은 의식은 없었지만,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기도하였고, 형제님을 위해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면서 기도했습니다. 형제님을 위해서 병자성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대전에는 단일 제과점으로 매출 100억 원이 넘는 제과점이 있습니다. 제과점 이름은 ‘성심당’입니다. 성심당은 대전의 작은 찐빵 가게로 시작해 현재는 지역을 대표하는 빵집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겨자씨의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안식처가 되듯, 적은 노력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큰 결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심당은 지역 사회와의 연대를 강조하며 나눔을 실천해 왔습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빵을 나누고,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섬김의 모범을 따라갔습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성심당은 한결같은 품질과 정직한 경영으로 신뢰를 얻었습니다. 정직함과 꾸준함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자세이며,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심당의 이야기는 일상의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를 하느님께 봉헌할 때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버렸고, 배를 버렸고, 가족들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능, 지혜, 기적,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돈이 없어도, 지팡이가 없어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병자들을 치유하였습니다. 마귀를 쫓아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살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면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직책과 직분은 거룩함의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교구 인사이동이 있습니다. 사제들이 새로운 곳으로 떠날 것입니다. 정들었던 곳을 떠나는 것은 아쉬움입니다.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것은 긴장과 설렘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제가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입니다. 사제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시대의 징표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영적으로 강해야 합니다. 영적인 힘은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사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겸손해야 합니다. 선포한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것을 충실하게 실행한다면 사제가 있는 자리는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물질 만능주의, 자본 만능주의, 개인 만능주의라는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모두가 그곳을 향해서 가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가난의 영성을 살아야 합니다. 2000년 교회를 이끌어 온 것은 화려한 성전과 법이 아닙니다. 가난을 실천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영성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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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기념하는 '바오로 미키' 성인은 일본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0대 소년이었을 때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교육 기관에 들어가 22세 되던 해(1585년)에 수사가 되었고, 이후 선교사를 도우며 오사카 인근을 무대로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1587년 일본의 실세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박해를 공식화했지만, 선교사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1596년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9명과 몇몇 교우들이 체포됩니다. 바오로 미키 수사 역시 이때 붙잡힙니다.
이듬해 정월, 그들은 죄수의 몸이 되어 나가사키까지 끌려갑니다. 혹한 속에서 한 달 가까이 걸어야 하는 혹독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골목에는 사람들이 나와 구경하도록 했는데, 기독교를 신봉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나가사키의 바닷가 언덕에서 장렬하게 순교합니다. 1597년 2월 6일이었습니다.
바오로 미키 순교자의 말 중에 늘 기억하려 노력하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이 이렇게 들립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 간직하여라. 주님께서 걸으신 길이 구원의 길이며 하늘로 나아가는 길임을 늘 기억하여라.’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신앙을 다시 한번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들이 걸었던 그리스도인의 길을 우리도 걷고 있음을 주님께 보여줍시다.
⭐아이스 코리아노
다방…. 커피숍…. 카페….
명칭은 변화했지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중년의 부부가 카페로 들어섰고
신사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기요. 나는 냉커피 한 잔 주시고요. 이 사람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라고….
저는 각기 다른 두 메뉴 주문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카페 점원은 도통 이해하지를 못한 것 같았습니다.
얼음이 되어 서 있더라고요….^^
냉커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차이를 아시나요?
냉커피는 한국식입니다. 커피 프림 설탕.. 아이스 코리아노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미국식입니다. 원두 시럽.. 아이스 아메리카노
오늘은 아이스 코리아노 한 잔 해야겠습니다.
둘, 둘, 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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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기본적 자질
“희망과 사랑, 이탈의 자유와 섬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우리 믿는 이들의 신원은 분명합니다. 당시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이자 사명입니다. 이런 정체성이 또렷해야 방황하지 않습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우리의 신원확립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의심의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결국 의심하는 나 자신이다. 의심하는 나를 극복하지 못하면 평생을 의심 속에 살아야 한다.”<다산>
“도끼를 잃어버리니 이웃집 아이가 의심스러웠다. 도끼를 찾은 다음 이웃집 아이를 보니 도끼를 훔친 아이 같지 않아 보였다.”<열자>
사람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로서의 정체성이 또렷해 질수록 방황하지 않고, 참나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는 자아초월(自我超越)로 겸손하고 온유하며 지혜로운 주님을 닮아감으로 참나가 되는 길뿐이겠습니다.
어제 읽은 내용도 믿는 이들의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의 9까지 습관입니다. 1000명이 넘는 암말기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어느 호스피스 전문의가 가르쳐준 삶의 지혜입니다.
1.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하라.
2.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
3.집착하지 마라.
4.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5.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라.
6.가까이 있는 사람을 소중히 하라.
7.삶과 죽음에 의연하라.
8.삶의 의미를 찾아라.
9.거짓 희망을 버리고 진짜 꿈을 꾸어라.
이 모두를 일거에 해결해 주는 주님의 제자로서, 사도로서의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며, 우리 삶의 희망이자 꿈입니다. 이런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 저절로 이탈의 자유요 진정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미키(1564-1597)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하에서 선교하다 체포된 사람들은 작은형제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 일본인 신자 15명으로 24명에 후에 자진하여 체포된 2명의 일본인 신자 2명, 도합 26분입니다.
체포된 이들은 1597년 1월3일 교토를 출발하여 처형지인 나가사키 근처 해안까지 걸어 이동했습니다. 미키 성인도 이들과 함께 겨울추위가 절정인 1월 내내 걷고 또 걸어 2월6일 바로 오늘 나가사키의 골고타’라고 불리는 나가사키 해안 근처 니시자카(西板) 언덕에서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합니다. 33살 일본 청년 미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감동입니다.
“나는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지만, 단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죽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며,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저를 박해한 이들을 용서합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박해하는 이들을 가엾게 여기십니다.”
미키 성인은 사제품을 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순교할 수 있음을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동료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중의 한명으로 시성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의 사랑과 믿음이 이런 이탈의 자유와 기쁨속에 순교를 가능하게 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무소유의 복음 선포가 가능했던 것도 순전히 주님 사랑에 기인한 초연한 이탈의 자유에 있음을 봅니다. 물론 이들의 파견활동이 가능했음은 도처에서 믿는 이들의 ‘환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음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 향한 이탈의 사랑이 ‘소유가 아닌 존재’인 주님이자 스승인 예수님만을 따르게 했고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써 본질적 사명 수행에 충실하게 했음을 봅니다. 제자들이자 사도로써 자유는 전적으로 섬김의 자유임이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
참으로 파견받은 사도로써 주님을 닮아 본질적 섬김의 사명 수행에 전력을 다했던 주님의 제자들이었고 바로 우리의 본질적 사명 역시 섬김의 사랑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지칠줄 모르는 선교열정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바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궁극의 희망이자 꿈을 상징하는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시며, 그분께서 뿌리신 피, 곧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한 것을 말하는 그분의 피가 있습니다.”
바로 거룩한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오늘 지금 여기가 시온 산이요 천상 예루살렘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천상 예루살렘의 꿈과 희망을 앞당겨 살 때 지칠줄 모르는 열정에 샘솟는 섬김의 선교활동입니다. 결코 속화되어 오염되거나 부패 변질됨이 없이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써 본질적 사명 수행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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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알아갑니다>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의 당신은
내 안의 당신을
고스란히 품고 있되
늘 한없이 너머 있습니다
내 안의 당신은
내 밖의 당신을
늘 아주 조금밖에는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당신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내 밖의 당신은
마치 당신이 아닌 듯
내게 낯설게 다가옵니다
모르는 내 밖의 당신은
당신이 아니요
아는 내 안의 당신만이
오로지 당신이라며
당신 담은 나를 닫으면
내 밖의 당신을
오롯이 담아야만
비로소 있을 수 있는
내 안의 당신마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내가 없어도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가 있으니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는 내 안에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밖의 당신을 모십니다
나는 당신을
늘 그렇게 조금씩
몰랐었지만 알아갑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기에
당신을 송두리째 알 수 없지만
나는 당신이 아님에도
당신을 늘 그렇게 알아갑니다
마침내 내가 당신이 되면
참으로 당신을 알 수 있으리니
열린 마음으로 느린 걸음으로나마
당신을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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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누구에게 하신 명령인가?
여벌 옷도 지니지 말고, 음식을 담은 식량 자루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지금 신은 신발에 지팡이만 지니라는 계명 (참조 마태 10,9; 마르 6,8)은 모든 이에게 해당합니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 을 따르라는 계명(마태 19,21 참조)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이는 완전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계명입니다 …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모든 계명을 지켰노라 자랑하던 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주님께서는 청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거운 과제를 주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습니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그러한 가난에는 한계가 없다. 혹자는 우리 영의 소용돌이, 곧 버리고 무로 나아가는 우리의 능력이 무한히 깊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흑자는 버림의 한계는 무밖에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하느님이 그 한계일 것이다. 엑카르트는 본 설교에서 두 차례나 “하느님, 내게서 하느님을 없애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만큼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철저히 버리라고 밸}고 있는 것이다. 왜 엑카르트는 “하느님, 내게서 하느님을 없애 주십시오”라고 말하는가? 내가 “하느님, 내게서 하느님을 없애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피초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의 본질적인 존재야말로 하느님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그는 자신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성도 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우리가 만든 하느님상, 우리가 그린 창조주상,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상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328)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흘로 죽다
히야친따의 양친도 이미 단념하고 히야친따 자신도 그 어떠한 방법을 다 쓴다 해도 쓸데없는 일이라고 우겼건만 드 몬태로 자작마져 박사를 거들어 친절히 말하므로 그들도 할 수 없이 입원시키기로 양보하였다.
알와젤 남작도 마찬가지로 입원시킬 것을 주장했고 경비까지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리스본 시의 유복한 한 가정에서 어린 병자를 위해 방 한 칸을 흔쾌히 내 주어서 치료 기간 동안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히야친따가 제일 두려워하는 이별의 때는 기어이 오고 말았다. 가엾은 히야친따는 온 가족과 특별히 사랑하는 루치아와의 작별을 슬퍼하며 몸부림쳤다.
“나는 이제 너도 엄마도 아빠도 오빠들도 만날 수 없어 ...... 이제 아무도 아무도 ...... 그리고 나는 혼자 죽는다 ..... .
“얘 그만 해 . 그런 생각 좀 하지 마"
“생각하게 내버려 둬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통은 점점 더해지니 예수님께 바치는 희생이 커지잖아 ! 그밖의 것은 아무렴 어때 . 성모님께서 나를 데리러 천국에서 오실 테니까"
루치아는 히야친따에게 물었다.
“넌 천국에서 무얼 하겠니 ?"
“나 말이야, 예수님과 티없으신 동정 마리아를 많이많이 사랑할 거야.
그리고 너를 위해, 죄인들, 교황님, 아빠, 엄마, 오빠들, 언니들, 그리고
기도를 부탁한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할 거야"
그리고 소녀는 사뭇 감격한듯 주님과 성모님께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
“나는 예수님, 성모님을 흐뭇하게 해 드리기 위해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해 .
두 분께서는 내가 죄인들을 위해 고통받는 것을 퍽이냐 좋아하셔 "
하고 열렬한 마음을 드러냈다.
드디어 작별의 쓰라림을 달래느라 꼭 껴안았던 루치아를 놓아 주면서
그래도 슬픔에 가슴이 미어진 히야친따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 . 내가 천국에 갈 때까지 날 위해 기도 많이 해줘 . 천국에 가서 너를 위해 많이 기도할께 ..... .
그 비밀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돼 ...... 어떤 일이 있더라도 ......
예수님과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을 사랑하고 죄인들을 위해 많은 희생을 바쳐줘, 응 ?"
이제 절친한 사람들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어린 히야친따의 마음을 조이는 것이었다.
머나먼 병원 한 구석에서 고독함을 탄식하면서 임종 때도 부모 형제의 간호도 받지 못하고 둘도 없이 친한 벗 루치아도 못본 채 쓸쓸히 죽어가다니..... 이 어떠한 고뇌인가?-...... 이보다 더 가혹한 희생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겠는가?
“아! 예수님, 주께서는 많은 죄인을 희두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희생은 무척 큰 것이니까요"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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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오늘 독서를 묵상하며 : 공염불도 불공으로써 불공이 과연 될 수 있을까?
강만연 [fisherpeter] 250206. 01:59 ㅣNo.179857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그때 ‘신앙’이라는 말에 있어서 ‘신앙’은 과연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 하는 묵상을 오랜 시간 동안 해봤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고민을 수도 없이 했었습니다. 오늘은 이 고민에 대한 답을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고 그걸 그대로 천주교 신앙에 대입을 하면 아주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아 그렇게 한번 묵상을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한 불자가 열심히 부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불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한번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야겠다고 결심을 했었습니다. 또한 그 결심을 잘 지키기 위해서 나름 자신이 부처님께 귀의하려고 하는 원의를 계속 부처님께 향하기 위해서 불공을 드린다고 생각해 불공을 드리는 법을 익히고 해서 불공을 열심히 처음에는 외웠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정도 암기력은 좋아서 불경의 뜻을 이론적으로 학문적으로 공부를 해서 일단 그 불경 속에 담긴 이론적인 배경을 충분히 익힌 단계에서 이제는 그걸 소리를 내서 기도로 가는 방법이 되기 위해서 입으로 불공을 드리는 법을 어떤 고승으로부터 배워 어느 정도 숙련이 됐다고 하는 판단이 서는 지점에서는 이제 “스님, 이 정도 하면 그만 기본적인 단계는 된다고 판단해 이제는 제 스스로 혼자 독송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드리고 혼자서 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도정진에 열심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는 별 문제점이 없었습니다. 만약 화엄경을 바탕으로 해서 했다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학습능력이 뛰어나 그렇게 화엄경을 독송을 하긴 하는데 만약 실제 그 화엄경이 어떤 경전이고 또 그 화엄경이 다른 경전 예를 들면 천수경과 같은 경전과는 어떤 점이 다르고 하는 그 경전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의미를 완전히 꿰뚫고 있어야 즉, 다시 말해서 화엄경 전체를 관통하는 맥을 알고 있어야 그 맥 안에서 지금 자신이 염불을 하고 있는 어떤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서는 어떤 의미인지 머릿속에 그 의미가 상기되고 또 이해가 되어야 그때 자신이 부처님께 올리는 그 염불이 제대로 된 불공이 돼 불공으로 공덕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최소한 이런 정도의 수준이 될 때 제대로 나름 불공을 부처님께 올렸다고 하는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게 되지 않고 어떻게 암기력이 좋아 외우긴 외웠는데 실제는 그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그냥 단순히 흘러나오는 대로 마치 불경을 입으로 불경 속에 있는 단순한 그 한자의 음만 외부로 나오게 하는 수준의 염불이 됐다고 가정한다면 그걸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일단 초반에 예시를 든 사례와 지금 사례를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올 것입니다. 만약 어떤 불자가 이 두 과정을 다 들었다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전자나 후자 둘 다 말입니다. 지금 장구하게 설명을 했지만 핵심적인 본질에서 본다면 어떤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내용을 알고 하는 것과 내용을 모르고 그냥 앵무새처럼 허공으로 버리는 염불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마치 염불이 아니라 공염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본다면 이건 불자가 됐든 불자가 아니든 어느 누가 봐도 공염불을 하며 염불을 한 사람에게 제대로 부처님께 공덕을 올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질문을 해도 이미 답은 다 나올 것입니다. 이건 일자무식과 같은 사람도 다 답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면 다 전자가 제대로 된 불공을 올렸다고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가지고 이제 천주교 신앙에 대입을 해보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된 신앙인지 아니면 공염불하는 신앙인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우리의 모든 신앙을 되돌아보면 자가진단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사실 이 이야기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독서의 한 부분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또 그곳에는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독서에서 이 부분만 한정해서 묵상을 했습니다. 당연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느님과 함께 있으려면 그냥 지금과 같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는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일단 하느님과 함께 있으려면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여기서 완전하게 된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았고 완전하게 된 의인이라고 한 점도 주목해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완전무결할 정도의 수준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완전하다의 의미의 ‘완전’이 어떤 의미의 ‘완전’일까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는 불완전의 반의어인 그 의미도 맞겠지만 단순히 그 의미보다도 다른 의미의 ‘완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보다는 그렇게 된 의인을 달리 표현하면 ‘맑은 영혼의 소유자’로 저는 표현하고 싶습니다. 완전한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맑은 영혼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도 학식도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거기에 인성까지 겸비하면 그때 그 사람을 바라보는 존경은 단순한 존경을 넘어 경외심마저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맨 처음에 언급한 신앙이라고 할 때의 그 신앙의 의미로서 신앙생활이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재차 해본다면 이제는 조금은 답이 보일 것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이런 한 단면은 단순히 그저 한 단면밖에는 되지 않겠지만 비록 한 부분이라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면을 잘 바라보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성찰하게 된다면 막연한 신앙생활이 조금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 이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맑은 영혼은 어떤 영혼이 맑은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묵상글에서 ‘맑은 영혼’은 어떤 영혼이 맑은 영혼인지 한번 그동안 묵상했던 것을 한번 공유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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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선교를 순교로 증언한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50205. 18:28 ㅣNo.179848
무사의 아들로 일본 최초의 순교자인 바오로 미키 성인은 일본 오사카 인근의 도쿠시마에서 로 태어나, 어려서 세례를 받고는 20살 무렵에 예수회 학교에 입학했다. 2년 뒤인 1585년에는 졸업과 동시에 예수회에 입회해 수련을 시작했지만, 얼마 후 아버지가 전사하는 슬픔을 겪었다. 그는 수사로서 첫 서원을 받고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전교활동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예수회 신부와 함께 활동한 미키는 사제품을 받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교리교사이자 설교자로 많은 불교 신자를 깨우치게 했다. 당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는 등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1590년 예수회 순찰사가 인도 부왕의 사절로 도요토미를 방문한 뒤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할 수 있었기에,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교토 지방 일대에서 성당과 수도원, 병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를 벌이다가 곳곳에서 반감을 받기도 하였다.
그즈음 필리핀을 떠나 멕시코로 가던 스페인 펠리페호가 태풍으로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선원들이 일본 관리들과 대화 중 유럽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며 일본을 무시하는 말로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초래해 도요토미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자 1596년 12월 그는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면서 본격적 박해가 시작되었다.
바오로는 사제서품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596년 12월 9일 오사카에서 체포되었다. 이 때 붙잡힌 이들은 26명에 달했다. 혹한 속에 처형장까지 걸어가야 했던 그들은 2월 5일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라는 교우촌에 도착해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날 바오로 미키는 동료들과 함께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했다. 이때 바오로는 30대 초반이었다. 성인은 처형장으로 향하는 길에서뿐만 아니라 순교 직전까지도 당당한 얼굴로 일반인에게 가톨릭교회 교리를 설명하며 복음이 널리 전파되길 기도하였다.
바오로 성인은 십자가에서 “나는 일본인 예수회 수도자입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에 죽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내리신 큰 은총입니다. 왕을 포함 나를 사형에 처한 모든 이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고 외쳤다. 나가사키의 골고타로 불리는 그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처형된 미키와 동료들은 일본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곳은 지금도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고 있다.
‘그때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지만, 더러는 의심하였다. 그분께서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고 승천하셨다.
오늘은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이다. 일본 최초의 순교자인 그들은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늘까지도 선교 사명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겸손과 순명의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속의 유혹을 이겨 내고 천상에 이르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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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위하여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빵, 여행 보따리, 돈을 가져가지 말며,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날의 여행에서는 꼭 필요한 것들을 금지하시는 것은 은총의 섭리에 온전히 맡기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옷을 두 벌 껴입는 것이 이중적 처신을 뜻한다고 보아 예수님의 이 명령을 단순한 마음을 지니라는 요구로 풀이합니다.
허용된 단 두 가지는 길을 걷는 데 필요한 지팡이와 신발 뿐입니다.
최소한의 것으로 지내는 노력이 선교 사명에서 요구되지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엄격함은 무슨 의미일까요?
본질에 대한 집중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선교 사명에서 본질적인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살피기보다 파견하시는 분의 섭리에 믿고 내맡기며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행하는 일입니다.
비록 중요하고 필요하더라도 본질이 아닌 보조 수단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그때그때 주어지는 수단들을 활용하면서,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본질에 집중함으로써 제자들은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낫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상 기후로 말미암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기후 문제에 대응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단순함과 섭리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삶의 본질을 추구하고 집중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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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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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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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 7)
복음의 기쁨은
제자들의
파견으로 다시
뜨거워집니다.
파견의 체험은
성장하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파견으로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하는지를
깨닫습니다.
파견은 진리를
실천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파견은
둘씩 짝지어
보내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파견은 가장
직접적인
주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파견은 봉헌으로
이어집니다.
일상을 향하는
파견의 본질입니다.
파견은 날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파견의 소명에
충실한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파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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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떠오르는 해와 함께 일용할 양식도 들어올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그야말로 혜성같은 존재로 사람들 앞에 등장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신선한 예수님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들 앞에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그분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슴을 후벼파는 명쾌한 가르침에 박수를 치고 환호했습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말과 행동이 완벽히 일치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만만한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요구를 하시는지,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이 사목 실습을 떠나기 직전, 몇가지 주의사항을 말씀하시는데, 참으로 특별합니다.
적어도 일주일 남짓 되는 장거리 일정일텐데도 불구하고,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참으로 난감하고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구가 너무 지나쳤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문전걸식을 하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팡이는 왜 지닐 수 있게 하셨을까요?
산짐승이나 전갈, 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로서 지팡이와 신발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명씩 파견하지 않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혼자 가면 외롭고 쓸쓸하고, 얻어먹을 때도 부끄럽고 난감할 텐데, 둘이 함께 하면 용기도 생기고 의지도 되고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서로 지탱해주고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큰 선심을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당부하신 강조점은 단순하고 검소한 정신이었습니다.
복음 선포라는 엄중하고 중차대한 일을 행함에 있어 안락한 것에 대한 포기는 가장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오로지 복음 선포에 지니고있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게 하기 위한 포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한 순례자가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더니, 건장한 남자들이 묵직한 햄머 하나씩을 들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대체 무엇하는 사람들인가요?” “저희 수도원 수사들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 수사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지금 수도원을 허물고 있는 중이랍니다.”
“아니, 멋진 수도원인데, 대체 왜요?”
“저 건물을 허물면 새벽에 동이 트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더 큰 포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쉽지만 낡은 나를 허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 새로운 시야가 활짝 열립니다.
아깝지만 어제의 나를 포기하면 새로운 세상, 새 아침이 밝아옵니다.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그대는 길을 떠날 때 전대도 지니지 말고, 여벌 옷을 생각하며 걷지도 마십시오.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떠오르는 해와 함께 일용할 양식도 들어올 것입니다.
어떤 새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하느님 섭리로 먹이를 얻으리라 근심없이 희망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합니까?”(프루텐티우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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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7-13: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배를 채울 양식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마르9,37).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복된 삶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복된 삶이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말씀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나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태어나시도록 하는 삶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주님께 의탁하며 순간을 살아내며, 이웃을 통하여 우리의 본 모습인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해가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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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욕구에 사로잡히면 상대의 욕구가 안 보인다
제가 군대에서 읽었던 책 중에 ‘유태인의 상술’이란 책이 있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여성의 주머니를 노려라, 현금을 가지고 있어라, 장기적인 투자가 이긴다 등의 소제목이 기억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빵을 좋아하면 빵장사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빵을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당연히 그것을 좋아할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사가 안 되면 ‘내가 먹으면 이렇게 맛있는데 사람들은 왜 안 사지?’ 라고 생각하며 개선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빵을 싫어하는 사람이 빵장사를 하면 빵을 싫어하는 입장에서 자신이 파는 것을 바라보기에 이렇게 저렇게 개선하려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팔아야 더욱 사려고 하는 사람의 욕구를 더 잘 알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내 욕구에 집중하면 상대의 욕구에 무관심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얻으려면 내 욕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하려면 내 욕구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신학생들에게 신자들이 가장 원하는 사제상에 대해 물었더니, “강론 잘 하는 신부”,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사제들에게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1위가 ‘겸손한 신부’, 2위가 ‘기도하는 신부’였습니다.
신학생들조차도 자신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 잘 모르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혼자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둘이 하면 더 큰 힘이 발휘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둘이 함께 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저는 외국에 있으면서 둘이 여행 나와서 싸우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사실 마르코와 사이가 좋아지지 않아 복음을 전하다가 헤어지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둘이 서로 의지가 되라는 뜻도 있겠지만 관계를 잘 맺는 모범을 보여주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본당 주임신부와 보좌신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아무래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제의 강론의 힘이 떨어질 것입니다.
본당 사제와 본당 수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들이 보기에 우선 서로 관계를 잘 맺는 사목자들이 되고 그 이후에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발도, 옷도, 전대에 돈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에 대한 욕구, 미래에 대한 걱정 등은 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욕구들에 사로잡혀 있다면 내 욕구가 눈을 가려 신자들의 욕구를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미래에 대한 걱정, 돈에 대한 걱정, 명예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남의 진맥을 보려면 먼저 자신의 진맥부터 가라앉혀야 합니다.
잔잔한 물이 되어야 상대의 모습이 비춰져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들에게 신자들이 보기에 세상 재물에 애착이 없는 복음전파자가 되라는 뜻 같습니다.
또한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고 받아주는 집에 계속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이 좋아서 이 사람과 친하다가 또 저 사람이 좋으니 저 사람과 친해지는 사람은 선교를 위함이 아닌 자신과 어울릴 사람을 얻기 위한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욕구도 선교를 하는데 매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의 애정이나 인정을 바라는 사람들 역시 복음을 순수하게 전해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본당의 신자들이 갈라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애정에서도 자유로운 복음전파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무언가 부족하여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구에 사로잡힌다면 이는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명목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자신 안에 복음이신 하느님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시는 사람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기름을 바르면 병이 치유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전해주는 것에서 충분한 기쁨을 누려야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편안해하는 아기 얼굴을 보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과 같습니다.
내 욕구에 가장 덜 집중하는 사람이 복음전파를 위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주님의 도구가 됩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이라야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전파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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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물질적으로는 ‘빈손’,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1)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실 때,
물질적으로는 ‘빈손’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바로 그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적인 복을 얻으려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으려고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빈손’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세상에 오실 때의 당신의 그 모습 그대로 사람들에게 가라는 명령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들 자신들의 ‘삶’으로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2) ‘빈손’으로 가라는 명령은,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는 ‘복음만’ 가지고 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면서 가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3)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따라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빵도 없었을 것이고, 여행 보따리도 없었을 것이고, 돈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껴입을 여벌옷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대 같은 것은 아예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것들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셨을까?
예수님의 명령은,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또 그런 것들을 구하려고 하지 말라는, 즉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4) 복음을 전해 듣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은 ‘복음만’ 청해서 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것만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가지고 있는 것만 사람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또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 ‘구원과 생명만’ 청해서 얻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것들이나 세속적인 것들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청하면, 아무리 간절하게 청해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기복신앙이고, 미신입니다.
5) 사도행전에 있는 다음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사도 3,1-8).”
여기서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라는 말은, 사도들이 물질적으로는 ‘빈손’으로 생활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파견되었을 때만 ‘빈손’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그렇게 생활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능과 권한,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 받은 ‘치유의 능력’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자선을 청하는 이에게 줄 돈은 없었지만, 그들은 ‘돈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바로 그것을 장애자에게 주었습니다.
만일에 그 장애자가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면,
또 예수님의 사도들을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몇 푼의 돈’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을 청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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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6,7-13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게 복음선포의 사명을 맡겨 파견하시면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를 누려야만 그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재물을 포함한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탐욕을 지니고 있으면 자꾸 그것들에 연연하느라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없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집착하면 그들 눈치를 보고 그들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느라 정작 ‘하느님의 일’에 소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신발, 그리고 지팡이처럼 필수적인 것들 말고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자기에게 더 잘해주는 이들을 찾아다니지도, 자기 말을 잘 안들어주는 이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말라고 하시지요. 오늘은 그 중 인간관계의 문제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첫째,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 하나로 나를 기꺼이 받아들여주고 환대해주는 이가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호의를 받아들여 그 집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머무르는 동안 혹여 불편하거나 힘든 부분이 있다고 해서 금방 그 집에서 나오거나, 여건이나 대우가 더 좋은 다른 집을 찾아다닌다면, 그건 내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런 나 때문에 나에게 호의를 베푼 그 은인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될 것입니다. 둘째, 내가 주님 뜻에 맞는 일을 하는데도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고, 내 말을 무시하며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더라도 야고보나 요한이 그랬듯 그들을 원망하거나 분노를 쏟아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스승이신 예수님도 냉대와 배척을 받으셨는데 내가 뭐라고 무조건 인정받고 내 뜻이 수용되기를 바라는지요? 정작 나 자신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지 않으면서 왜 다른 사람들이 내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화를 내는지요? 그런 마음에 휘둘리면 내 뜻만 신경쓰느라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되니 그러지 않도록 항상 겸손과 순명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과 반대의 모습으로 사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나를 받아들여줘야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인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하다는 핑계로 무조건 나를 받아들여주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는 제 기분과 기호에 따라 이것 저것 요구하며 상대방에게 민폐를 끼치지요. 그런 나의 무례함과 경우없음에 상대방이 지치고 힘들어 나를 밀어내면,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며 오히려 그를 원망하고 모든 것을 그의 탓으로 돌립니다. 내가 그런 모습으로 사는데 다른 이들이 나를 통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요? ‘천주교 신자라는 사람이 왜 저래?’라는 실망감으로 인해 오히려 그분과 멀어지게 되지 않겠는지요? 그러면 나는 스스로가 하느님 뜻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대한 책임과 그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책임 모두와 관련하여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니 사람에 한 눈 팔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내 이웃 형제 자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내고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가 되질하는 그 되로 고스란히 돌려받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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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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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난한 순례자로서 걸어가자 ♣
오늘의 제1독서는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니라 시온 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입니다.”(히브 12,18-22)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시나이 계약 때의 장면과 종말에 나타날 시온 산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큰 소명과 은총을 받았음을 알린다. 우리가 받은 이 소명은 하느님의 자비와 선, 해방과 자유, 곧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태도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하는지 가르치신다. 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셨는가? 그 으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과 함께 있도록 불림 받았다. 우리가 어떤 목적에서든 무엇을 하는 것 이전에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차적인 존재이유이다. 왜냐하면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은 채 하느님 나라는 선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 있느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어떤 상황에서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해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내 뜻을 앞세우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복음화에 앞서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3,14-15)과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다(6,7). 제자들은 회개를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었다(6,12-13). 말하자면 제자들의 소명은 하느님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각자의 처지에서 삶의 증거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기쁜소식을 선포하고 고백하도록 불렸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철저한 가난을 요구하신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6,8-9)고 하신다.
지팡이는 야수와 강도들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신발은 팔레스티나에 돌이 많고, 사막이나 광야를 횡단할 때 뜨거운 지열(地熱)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모나 아마포로 된 속옷을 두 벌 껴입는 것은 부유한 이들이 하는 것이었기에 금하셨다. 이처럼 가난이야말로 복음선포의 신빙성을 보장해주는 살아있는 표지이다.
따라서 파견된 이들은 현세적인 것들에 의지하지 말고, 인정받기를 바라거나 성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하며 거절당하더라도 거기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6,11). 또한 가난한 자로서 내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하며’(6,12) 감화를 주는 것, 그리고 따뜻한 말을 통하여 생기를 주는 자체가 생생한 복음선포이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한 복음화의 일꾼이요 천상 본향을 향한 지상의 순례자로서 회개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한 자로서 삶과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증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이러한 이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인 소명을 깊이 깨달아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예루살렘을 향한 복음화의 순례길을 떠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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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요한 1,39)며 직접 부르신 제자들을 양성하시어, 이제 당신이 하시는 일을 제자들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십니다."(마르 6,7)
그러면서 여러 당부를 하시지요. 일단 홀가분하게 가라고 하십니다. 먹고 입고 자는 문제일랑 하느님께 맡기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먼저 가난 가운데 자신을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할 줄 알아야 만나게 될 이들에게도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하느님 섭리에 대한 믿음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행을 떠날 때 짐을 한 보따리 꾸려야 안심하는 우리들을 미리 내다보시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소임 파견받아 떠나는 수도자들의 작은 짐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그리고 나자렛 회당에서 체험했듯이 제자들도 배척과 거부를 당할 수 있다는 걸 솔직히 말씀하시면서, 그럴 땐 어떻게 대응하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주기까지 하십니다. "떠날 때에 ...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11)
발밑의 먼지를 터는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 결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부당한 고을,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지 않은 곳에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하네요. 발밑의 먼지를 턴다는 것, 그건 얼핏 보기에 '너희 고장에서 묻은 먼지조차도 지니지 않겠다'는 분노의 표시같지만, 가만히 머물러 보니 다른 의미가 다가옵니다.
거부 당하고 배척받은 것에 대해 다투거나 의기소침해 하지 말고 또다시 훌훌 홀가분하게 떠나라고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말도 듣지 않은"(마르 6,11) 그들에게 행여 품었을지도 모를 서운함과 미움, 슬픔, 아픔 등을 이 자리에서 다 내려놓고 털어내고 가겠다는 뜻으로도 다가옵니다. 사실, 우리의 소임지에서 우리는 늘 기쁨과 보람의 체험과 환대받는 체험만 겪지 않습니다. 때론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이나 이 마을 저 마을들에서 가끔 체험하였듯이 우리도 배척과 몰이해, 심지어 박해와 오해도 받기도 하지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선교 여행에서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 짝(둘씩)이 있다는 건 그래서 참 다행스런 일입니다. 선포와 치유로 보람과 행복을 느낄 때는 물론, 이처럼 어두움의 순간이 닥칠 때 얼마나 큰 힘이 될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능력을 자만하지 말고 늘 하느님께서 서로를 위한 협력자로 주시는 도반들을 고맙게 여기고 감사해야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나이 계약 현장의 분위기와 새 계약으로 이루어진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을 대비시켜 전합니다. 가까이 가기는커녕, 소리를 듣기조차 공포스러웠던 두려움 가득한 현장은, 이제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히브 12,24)과 "그분의 피"가 있는 곳으로, 그래서 자비와 사랑의 심판을 기대하는 곳으로 변모됩니다. 옛 계약의 그늘 아래서는 하느님 현존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그분 계명에 대한 거부가 '징벌과 죽음'으로 이해되었다면, 새 계명의 울타리 안에서는 '용서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전망으로 드러납니다.
발밑의 먼지를 터는 행위 역시, 정을 떼고 연을 끊고 내쳐버리는 결별의 의미에서, 마음이 불편한 어떤 티끌도 내려놓자는, 그래서 언젠가 다시 만날 때 무에서, 제로 포인트에서 새 희망으로 시작해 보자는 용서와 사랑의 제스춰로 의미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선교 여행의 모든 순간에는 실패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설령 거부와 배척으로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더라도, 가만히 바라보면 새 계약의 열매가 맺어지고 있을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파견하십니다. 겸손하게 주님의 섭리만 믿고 가십시오. 발길 닿는대로 살아있는 복음으로 걸어가십시오. 주님께서 그대를 위해 보내주시는 도반을 절대로 무시하거나 귀찮아 하지 말고 서로 의지하며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고 마음을 올바르게 고쳐먹고 사랑하라고 전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친히 파견하시니, 걱정하지 말로 힘차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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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6.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삶
<2025.2.6> 아침을 여는 묵상 (수 24:1~18절)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삶❞
❚ 하나님은 광대한 계획과 섭리로 인도하심을 깨달아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 어떤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억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13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으로 모으고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서도록 하였습니다. 세겜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제단을 세운 곳(창 12:6~7)이고, 야곱이 세겜 족속으로부터 일부의 땅을 산 후 제단을 쌓은(창 33:18~20) 곳입니다. 세겜에 사람들을 불러 모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합니다(1~4절). 즉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시대부터 하나님이 특별히 인도해 주셨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이스라엘은 430년의 세월을 힘든 노예 생활을 해야 했고,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5절). 홍해 앞에서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군사들은 바닷물로 덮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직접 목격하였음에도 가나안 땅 정탐 이후에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여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6~7절). 이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는 모든 과정 역시도 주관하셨습니다. 아모리 족속의 땅에서도, 모압 왕에게 사주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발람에게서도 이스라엘을 지키셨습니다(8~10절). 요단 동편의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몰아 낼 수 있었던 것도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왕벌을 보내셨기 때문이지, 그들이 칼과 활로써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12절). 마침내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이 수고하지 않은 땅과 그들이 건설하지 않은 성읍들을 주셔서 그들로 그곳에서 살게 하셨고,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게 하셨습니다(13절).
우리는 지난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도하셨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나 믿음의 선배들의 신앙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이적과 역사는 그저 놀라운 그 옛날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고 계신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에 빠져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통해 도움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아울러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평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때 하나님을 잊고 살아갈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와 평안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면 감사하는 마음도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신뢰하며, 출애굽의 역사를 주도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도 함께 하시며, 하나님은 자신과 동행하는 자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여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4~15절).
여호수아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길 것이요,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14절)을 명령합니다. 이처럼 여호와 경외를 강조한 여호수아는 만일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싶지 않다면, 조상들이 섬기던 신들이나 가나안 땅의 족속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서 섬길 자를 택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절)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다른 어떤 대상이 아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분이시므로 자기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때 매우 진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 생활에는 중간 지대가 없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 가는 대로, 개성대로 사는 것을 추구하는 시대이지만 성경은 하나님 또는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분명하게 선택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하나님께 신실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는 불신앙적 요소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기겠다는 결단을 통해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은혜로써 살아옴을 고백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6~18절).
여호수아의 도전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임을 굳게 약속합니다(16절).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 내셨...”(17~18절a)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18절b)...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마음을 다해 사랑하시고 신실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겉치레의 예배 형태나 믿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뿐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까지 지내 온 것은 오직 하나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적 결단과 다짐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음을 매 순간 감사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의 길을 걸으며 성공과 승리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24:1~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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