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산[千房山] 479m 충남 서천
산줄기 : 금북기맥(봉림산)
들머리 : 문산면 신농리 천방골마을
위치 충남 서천군 판교면/문산면/시초면
높이 479m
천방산은 서천군 판교면, 문산면, 시초면등 3개면에 걸칠만큼 산자락이 넓고 큰 서천 제일의 산이다.
산이 험하거나 거칠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천방산은 동서남 방향으로 7개의 봉우리가
둘러쳐져있고 동남북방향이 훤히 트여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영산(靈山)이다.
좌청룡 우백호인 듯 천방산 정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서 있는 봉우리들은 남으로 가면서 5개의 봉우리를 더하며
마치 병풍인 듯 둘러쳐진 모습이 있어 아늑한 감이 있는 천방산은 서북에서 동북방향(또는 그 반대 방향)으로
펼쳐진 시원한 풍광이 함께하고 있어 좋은 곳이다.
발치에 잡히는 낮은 산과 그 아래 와 너머로 펼쳐지는 논밭과 아득한 마을의 풍경이 저수지와 함께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정상에 올라 보는이로 하여금 마음마져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천방산은 산이름과 관련한 전설
천방산의 전설은 백제말기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기벌포(현재의 서천군 장항읍)에 진입하면서 시작되는
데 멀쩡했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소정방은 풍랑이 자기를 기다렸으나 풍랑은 좀처
럼 그칠줄을 몰랐다. 그 때 그들의 앞을 어느 도승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정방은 너무 답답하던 참이라 그를
붙들고 그곳의 지세를 물어보았다.
"도승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우리들이 이곳에 오자마자 이렇게 풍랑이 심하오?" 도승은 소정방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길이 험한 곳이오.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니오. 더구나 멀리서 원정군로서는 이곳을 통과하기가 어려
우니 이 산에 하룻저녁에 천 칸의 집을 짓고 천일제를 지내어 산신의 보호를 받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개선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소." , "그렇다면 우리 군사가 무사하겠소?" , "그렇소이다." 도승의 확답을 듣고
소정방은 군사들을 시켜 단번에 천 칸의 방이 있는 큰집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군사들은 정신없이 소정방의 말에 따라 집을 지었다.
소정방은 그날 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고 군대가 무사히 부여에 입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 후 삼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튿날 날씨가 씻은 듯이 개이고 풍랑도 가라 앉았다. 소정방은 군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진격하여 백제군을 꺾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소정방이 지은 천칸의 집은 절이 되어 천방사라고 하였으며 산 이름도 이 때부터 천방산이 되었
다고 한다.
천방사
소정방이 남겨 놓은 천방사는 사찰로서 조선시대까지 내려오다 1664년에 승려들의 반란으로 불타버린다.
그때도 천방산은 검은 연기로 뒤덮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천방사(千房寺)는 궁가(宮家)의 원당(願堂)이었다. 궁가(宮家)란 왕족이 사는 궁전으로 대군, 왕자,
공주, 옹주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원당(願堂)은 대군, 왕자, 공주, 옹주들 중에 한 가족의 소원을 빌기 위해
그들이 세운 사찰이다.
따라서 천방사(千房寺)는 중앙의 권력과 밀착된 사찰이었다. [효종실록] 효종 3년 12월 7일 조에 서천군수
이무가 왕의 분부에 의해 상소한 것을 살펴보면,
「고을 경내에 천방사(千房寺)가 있는데 이제 또한 궁가의 원당(願堂)이 되었으므로 중들이 기세를 부려 사람
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청명(淸明)한 세상에서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천방사(千房寺)라는 것은 어느 궁가에 속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고을의 사세가 매우 절박한 듯하니 그
고을에 도로 붙이게 하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천방사(千房寺)는 기세를 부려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중앙 권력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현종 5년(1664년)12월 13일 조에는 충청도 천방사(千房寺) 승려가 관아의 영을 따르지 않자 감사 이익한
(李翊漢)이 겸임 한산군수 신숭구(申嵩耉)로 하여금 그 우두머리 승려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러자 절의 승려
수백 명이 조총을 갖거나 활을 지니고서 험지에 웅거하여 저항하였다. 그 뒤 화약으로 그 절을 불사르고 또 침노
한 벼슬아치의 집을 불질러 그 분을 풀었다라고 하여 천방사(千房寺) 승려의 사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후 송준길의 알현으로 천방사(千房寺)의 승려의 변고는 일단락을 짓고
천방사(千房寺)는 다시 중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의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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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트 : 천방산 [서천군]
- 산 벗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