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루쥬 루오(1871-1958)
조르주 루오(Georges-Henri Rouault, 1871년∼1958년)는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이다.
루오는 14세 때에 글라스 그림을 그리는 공방(工房)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의 복원 수법을 배웠으나 1890년에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을 그만두고 더 많은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1890년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콜데보자르, )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능을 인정받아 이듬해인 1901년부터는 파리 국립미술학교의 교수인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 – 1898)의 아틀리에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스승 모로는 루오를 잘 이해했고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루오 또한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잘 따랐습니다. 이때 같이 수학한 화가가 유명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 - 1954),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1875 - 1947) 등입니다.
루오는 1903년부터 스승인 모로가 국가에 기증한 아틀리에에 만들어진 구스타브 모로 국립 미술관(Musée national Gustave Moreau)의 관장으로 일하면서 스승의 조언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루오의 화풍은 이전의 그의 작품들은 주로 스승인 모로와 스승보다 더 존경했던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았던 경향에서 벗어나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도미에(Honoré Daumier)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와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및 폴 세잔(Paul Cézanne)과 로트레크(Lautrec)의 탐구하여 역동적인 선, 날카로우면서 강렬한 붓 터치가 특징인 자신의 미술 세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908년 마흔을 바라보는 루오(Georges-Henri Rouault)는 화가 앙리 르 시다내르(Henri Le Sidaner, 1862-1939)의 여동생인 마르트 르 시다내르(Marthe Le Sidaner)와 결혼을 하였고, 1910년에는 드루에 갤러리(Galerie Druet)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1911년에는 교외로 이사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를 고비로 40대의 루오의 그림들은 루오 특유의 암색조(暗色調)에서 밝은 화면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전원풍경을 그리면서 채색이 풍부한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 유화의 비중이 커집니다.
루오의 작품과 인생을 이야기하며 빼놓을 없는 사람이 화상(畵商)이자 출판업자인 볼라르(Amboise Vollard, 1865~1939)입니다. 볼라르는 19세기 말부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고 피카소나 마티스의 작품들을 초기부터 구입할 정도로 안목이 뛰어났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루오와 볼라르의 첫 만남은 1907년 경으로 알려졌습니다. 루오의 재능과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볼라르는 1913년에 “아뜰리에 전체구입”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습니다. 즉, 화가인 루오가 그림의 판매에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하게 위하여 화상인 볼레르가 당시 루오의 아뜰리에에 있던 작품과 제작중인 작품은 물론 앞으로 제작할 작품까지 모두 일정한 가격으로 사들인 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전속 계약이나 독점계약인 셈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창작을 위한 경제적인 조건을 만들기 위해 고생을 하는 예술가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그후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하여 루오는 자신의 작업 계획에 맞게 작업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볼라르의 제안을 승낙하였고, 1917년에 잔금이 치러짐으로써 계약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약으로 인해 루오는 편안한 조건에서 창작활동을 했다는 것을 제외하고 대중적인 접촉이 차단된 것과 마찬가지여서 시류와 멀어진 계기가 되었고 볼라르를 위해 수많은 판화를 제작하느라 유화에 힘쓰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루오는 볼라르 사후에 기나긴 소송을 해야 했습니다.
모로는 예술의 스승 이상으로 정신적인 선배이며 때로는 동지나 친구로서 마음의 지주가 되었다. 이것은 모로의 사후(死後)(1898)에 많은 제자 가운데서 뽑혀 루오가 '모로 미술관'의 관장이 되어 스승의 유작을 관리하는 지위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모로는 루오가 성장한 베르빌의 주민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어둡고 과묵한 종교예술의 애호자이다.' 이러한 지적은 루오의 장래를 멀리 예견하고 있었다. 모로의 사후 루오의 시야에는 포랭과 로트렉 및 도미에가 뚜렷하게 부각되었고, 모두가 사회 비판의 경향이 농후한 화가들이었다. 또한 가톨릭의 문필가 위스망스와 레온 블르와와의 교우는 루오의 종교적인 인생관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난하고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공감, 부자나 권력자를 향한 분노는 루오에 있어서의 깊은 종교적인 감정에서 유래한다. "가령 창부를 그리는 경우 루오는 이 죄많은 여인이 풍기는 전율할 향기에 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의 죄에 울고 그녀와 더불어 괴로와하는 것이다(美術史家 드리발)." 세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루오는 포비슴의 와중에 있지만 밝게 삶을 구가하는 그들과는 대극(對極)의 위치에 있었다. 루오의 신앙과 그에 입각한 예술관은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이다.
그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 그는 이처럼 비합리적 세계에서의 계시(啓示)를 어둔 밤 속에서는 빛나는 별을 인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예술적 탐구는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완성해 낼 수 없는 것의 극(極)을 다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예술은 열렬한 고백을 토로할 수 있는 까닭에 가치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암야(暗夜)의 절규이며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극점에 서서 루오는 단언하기를 '구세주로서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했다. 이 동안의 소식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것으로 판화집 <미세레레>(1948년 발표)가 있다. 1913년 루오는 화상(畵商) 볼라르에게 인정을 받아 아틀리에를 제공받음과 동시에 일정한 금액으로 전작품을 인수받게 되었다. 1917년에는 역시 볼라르와의 계약으로 한때 유채화를 중지하고 판화에만 전념하였으나, 이것이 일반 사람에게 공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것에서도 그가 시류(時流)에서 멀어져 가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930년경부터 루오의 작품들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등에서도 전시가 이루어지고 그 유명세를 더해 갑니다. 특히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양화가인 이중섭 선생과 김환기 선생이 1930년대 일본 유학시절부터 루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고 합니다. 그러나 마냥 순탄하지는 못했습니다. 정치적으로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하였고 이듬해인 1940년 6월 12일에는 프랑스가 독일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루오의 그림을 퇴폐로 규정하였고 전시가 금지되어 창작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도 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에 대해 독점적 소유권을 가졌던 볼라르(Amboise Vollard, 1865~1939)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입니다.
볼라르가 사망하자 그의 유족들은 루오의 그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작업실을 잠가버리고 그가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루오의 화실에는 그가 작업 중이던 819점의 작품이 있었는데, 볼라르의 유족들은 서명도 되어있지 않은 미완의 작품들을 내가 팔려고 했습니다. 모든 작품에 완벽을 기하려 했던 루오의 그림이 팔려나가는 것은 루오에겐 크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1847년까지 루오와 볼라르의 유족 간에는 긴 법정다툼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전쟁이 끝난 후에야 미완성의 작품들을 돌려받게 되었지만 그중에 119점은 이미 팔린 후였습니다.
루오가 그림을 돌려받은 후 사람들은 믿지 못할 광경을 봐야했습니다. 루오가 돌려받은 그림 중에 300 여점이나 되는 작품을 공개적으로 태워버린 것입니다. 1871년생인 루오는 이미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그 수많은 작품을 본인이 완성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였고, 그의 사후에 미완의 작품들이 세상에 나가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판화 때문에 중단된 유채화의 제작을 다시 시작한 때는 1929년이며, 이 때부터 그의 명성은 높아졌으나 이후 87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루오는 현대 화단에 초연한 성화상(聖畵像)의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검고 굵은 선을 즐겨 썼는데, 그것이 색채와 어울려서 종교적인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의 그림 소재는 거의 모두가 법관·창녀·어릿광대·기독교인 등의 인물과 도시의 뒷골목 풍경으로 한정되어 있다. 작품으로 <교외의 크리스트> <재판> <붉은 코의 어릿광대> <베로니카> 등이 있고, 판화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