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전을 떠나시는 하나님의 영광
겔 10:9-22
9 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 모양은 황옥 같으며
10 그 모양은 넷이 꼭 같은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1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사방으로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나아가되 몸을 돌리지 아니하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나아가며
12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13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부르며
14 그룹들에게는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째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15 그룹들이 올라가니 그들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생물이라
16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바퀴도 그 곁에서 나아가고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땅에서 올라가려 할 때에도 바퀴가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17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올라가면 이들도 함께 올라가니 이는 생물의 영이 바퀴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19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눈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20 그것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래에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인 줄을 내가 아니라
21 각기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으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형상이 있으니
22 그 얼굴의 형상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얼굴이며 그 모양과 그 몸도 그러하며 각기 곧게 앞으로 가더라
겔 10:9-22 / 또 내가 보니 네 개의 바퀴가 그룹의 곁에 하나씩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크기가 같고, 감람석처럼 광채를 냈다. 그런데 바퀴마다 다른 바퀴 하나가 십자형으로 내부에 부착되어 있어서 11) 방향을 바꿀 때에는 미리 돌지 않고서도 사방으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룹들이 어느 방향으로든지 전진하게 될 때에는 모든 바퀴가 그 뒤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12-13) 그 바퀴들은 내가 첫 환상에서 본 것들이었다. 그 네 바퀴에는 온 둘레에 눈이 가득 차 있었고, 그룹들의 팔과 날개와 온몸에도 눈이 가득히 박혀 있었다. 나는 그 바퀴들을 ㄱ) 길갈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ㄱ. 수레바퀴의 소리가 `길갈'이라고 들리는 데에서 연유한 것 같다) 14) 그룹들은 각기 얼굴이 넷이었다. 첫번째는 그룹의 얼굴이고, 두번째는 사람의 얼굴이며, 세번째는 사자의 얼굴이고, 네번째는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15) 그룹들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바로 그 생물들이었다. 16-17) 그룹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움직였다. 또 그룹들이 땅에서 떠오르려고 날개를 펼칠 때에는 그 바퀴들도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그룹들에 딸려 함께 떠올랐다. 그룹들이 서 있으면 바퀴들도 서 있었다. 그 생물의 영이 바퀴들 속에도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든지 바퀴들은 그룹들의 조종을 받았다. 18) 이번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의 문지방을 떠나 다시 그룹들 위에 좌정하시는 것이 보였다. 19) 그러자 그룹들이 날개를 펼치고 내가 보는 앞에서 땅 위로 조금 떠올랐다. 그들이 떠오를 때에 바퀴들도 함께 떠올랐다. 그런 다음에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들의 보좌를 타고 성전의 동문을 통과하여 성전 구역에서 떠나가셨다. 20) 나는 그 힘센 네 생물을 똑똑히 다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그발 강가에서도 내가 보는 앞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보좌를 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21) 그들은 각기 얼굴과 날개가 넷씩이었으며 그들의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같은 것이 있었다. 22) 그들의 얼굴도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바로 그 얼굴들이었다.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그들의 네 얼굴들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똑바로 앞을 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룹의 이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룹들은 각기 네 면에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그룹들은 전에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것들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들 위에 머물고 그룹들이 움직일 때 하나님의 영광도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바퀴 가운데 있는 생물의 영(9-17) 본문에는 그룹들이 나옵니다. 이들의 모양은 각기 다릅니다(14). 그룹들 곁에는 네 바퀴가 있습니다. 바뀌는 모두 네 개입니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습니다.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같다고 했습니다(10). 이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자동차의 휠과 같이 보는 견해입니다. 큰 바퀴의 외부면 한 복판에 작은 바퀴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3차원적 공간개념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두 바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둘째 견해로 본다면 이 세상 역사는 그 스스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어떤 힘에 의해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룹들이 나아갈 때에는 바퀴도 그 곁에서 나아가고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땅에서 올라가려 할 때에도 그 바퀴가 그 곁을 떠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16). 그룹이 움직이는 대로 바퀴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생물의 영이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고 했습니다(17). 바퀴 속에 있는 생물의 영의 지시에 따라 그룹과 바퀴가 서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룹들과 바퀴들이 복수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영은 단수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임을 나타냅니다. 네 그룹의 모양이 각각 다르지만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다(18-22)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그룹 위로 오른 후 성전 동문으로 이동했습니다(18-19). 이것은 11장 22-24절의 내용대로 머지않아 여호와께서 성전 자체를 완전히 떠나실 것의 전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눈여겨 볼 것은 18절에서 ‘떠나서’라고 번역된 ‘와이예체’는 내부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즉 지성소에서 출발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을 거쳐 바깥뜰의 동문을 향하였고 결국 성전과 예루살렘을 완전히 떠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이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성이 해발 700미터의 고지대에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군사력이 막강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곳을 돌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성전은 다만 한 건물에 불과합니다. 더 이상 성전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임박한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적용: 우리의 삶에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는 것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는 것입니다. 다윗도 이것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시 51:11).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기 위해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아버지가 집을 사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전세로 살고 있습니다. 그 집이 내 것이라는 것과 그 집에서 사는 것을 누리는 것은 다릅니다. 그 사람을 내보내고 내가 살면서 누려야 합니다. 이것은 내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니 믿지 않고는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구원은 내가 믿고 찾을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의 일상은 날마다 믿음의 싸움입니다.
< 설 교 >
이동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겔 10:18-19 / 피영민 목사
서론
에스겔서는 환상, 신비, 상징, 비전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예언서를 읽어도 잘 모르는 이유는 첫째로 안 읽어서입니다. 둘째는 공부하지 않아서입니다. 읽기만 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는 깊이 연구를 하지 않아서입니다. 어려운 말씀은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중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에스겔은 4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둘로 정확히 나누어져 있습니다. 앞의 24장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이고, 뒤의 24장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은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앞과 뒤가 역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B.C 589년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5년 뒤인 B.C 593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심으로 예언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에스겔 8-11장은 에스겔이 예언을 시작한지 1년 후에 본 이상입니다. 에스겔의 몸은 바벨론에 있지만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의 영혼을 들어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에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보게 하신 것입니다. 장로와 제사장들이 우상 숭배하고 여인들이 담부스를 위하여 애곡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어떻게 옮겨가는 가를 보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10장과 11장의 중요한 주제는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서 바벨론에 포로 되어 온 사람들에게 옮겨 왔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심판을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다’는 말로, 축복은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10장과 11장은 여호와의 영광이 어떻게 떠났고 그 결과는 무엇이며, 바벨론 포로에게는 여호와의 영광이 어떻게 임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Ⅰ. 성전을 떠나는 여호와의 영광
에스겔 10장과 11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1. 네 생물은 그룹 천사들이다
네 생물은 에스겔 1장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 강가에 있을 때에 보았던 네 생물과 동일합니다. 에스겔 10장 20절에 보면 에스겔이 그 생물들은 그룹(Cherub)인줄 알았습니다. 그룹은 천사의 계급입니다. 천사는 스랍 천사(Seraph)와 그룹 천사와 가브리엘, 미가엘 천사가 있습니다. 그룹 천사는 천사의 서열로 볼 때에 상당히 높은 지위의 천사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룹 천사의 기능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처음 그룹 천사가 나오는 본문은 창세기 3장 2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의 실과가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악을 저지르고 영생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룹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룹 천사의 사명은 에덴동산을 보호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요한계시록 4장 8~9절을 보면 천상에서 그룹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그 주위에는 눈이 많습니다. 눈이 하나만 더 있어도 얼마나 지혜롭겠습니까? 눈이 여러 개인 그룹 천사들은 얼마나 지혜로운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룹 천사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밤낮 쉬지 않고 예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룹 천사들은 예배의 모범(model of worship and adoration)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감사, 영광, 찬양, 존귀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예배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경배와 찬양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는지, 실물 교육을 보여주는 사명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과 동행하는 기능입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움직입니다. 그룹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언제나 동행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움직일 때에 비서실장이 항상 함께 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옮기면 그룹 천사가 언제나 따라 다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수행원의 기능을 행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22절에 보면 일 년에 대제사장이 한 번 들어가는 성전 지성소 안에 두 그룹이 있고 두 그룹 사이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지성소에 계셔야 마땅합니다. 제사를 드려 피를 뿌릴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광채가 나기 때문에 전등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성소에 계셔야 마땅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것입니다. 떠나는데 언제나 그룹 천사가 동행하며 떠나갔다는 내용이 에스겔 10,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8편 10절에 보면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은 그룹 천사와 함께 다니는 것입니다. 그룹 천사를 마차로 삼아서 타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겠습니까?
이 그룹 천사는 거룩한 것을 보호하고 경배와 찬양의 모범을 보이며 여호와의 영광과 언제나 동행하는 사명을 행한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이 이동하는 경로
두 번째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원래 지성소에 계셔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계시지 않고 이동했습니다. 10장과 1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동한 네 가지 경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에스겔 10장 3~4절입니다.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우편에 섰고 구름은 안 뜰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집안도 여호와의 영광이 임한 집안은 환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집안은 어둡습니다. 그 집안의 영적인 분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빛이 있는 가정은 화목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여호와의 영광이 항상 임하여 빛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뜰에 비추었다고 했습니다. 지성소에 계셔야 하는데 왜 뜰에 비추는 것입니까? 왜 북쪽에 가지 않고 남쪽으로 옮겨간 것입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우편으로 왔습니다. 성전 우편은 남쪽입니다. 북쪽에 하나님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투기의 우상의 서 있기 때문입니다. 가증스러운 물건이 북쪽에 서 있으니 여호와의 영광이 그곳에서 멀어져 남쪽으로 간 것입니다. 우상이 있는 곳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르지 않습니다. 집안에 우상이 있으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2장 8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우상과 같은 자리에 앉아 영광을 나누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전 북편이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레위기 1장 11절에 보면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제단 사면에 뿌리는 곳이 성전 북편입니다. 성전 북편은 피가 있는 곳인데 그 곳에 투기의 우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죄 용서 받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믿어 그 피로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죄 사함을 받는 다는 것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언제 떠나는 것입니까? 우상이 있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고, 복음이 변질되기 때문에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 본문 10장 19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출입문인 동문으로 이동하셨습니다. 나가려고 오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나가시더니 어디 가셨습니까? 에스겔 11장 22~23절입니다.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여호와의 영광이 산으로 가셨습니다. 성전에 계셔야 하는데 등산 가셨습니다. 성전에서 완전히 나오신 것입니다.
넷째, 이 영광이 결국 바벨론의 그발 강가로 가셨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된 사람들에게로 가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와 바벨론 포로들에게 가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이동한다는 사실은 광야 40년의 방황 기간 중에도 우리가 충분히 보았던 진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해 주었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이 옮기면 백성과 성막이 따라서 옮겨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여호와의 영광이 이동했다는 진리는 쉽게 확증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있던 소아시아가 지금의 터키입니다. 일곱 교회가 있었는데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영광이 떠나버리니 모두 지진으로 인해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지진은 횡파가 있고 종파가 있는데 이곳은 종파로 일어났습니다. 종파로 일어나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있었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빌립보 교회로부터 시작된 유럽 교회도 더 나은 모습이 아닙니다. 유럽 교회를 가보면 모두 관광지입니다. 유럽에 가면 한국사람 찾기 쉽습니다. 양산 들고 다니며 손에 흰 장갑 끼고 사진 찍습니다. 10년 전에 양산 들고 다닌 사람은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3년 뒤에 양산 들고 다니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 미국으로 건너 간 것입니다. 그 후 1907년에 여호와의 영광이 대한민국으로도 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나라에 머물러 있는 시대가 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나라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유주의 신학과 이단 사설들이 왕성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게 됩니다. 특히 신학교들에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게 하면 안 됩니다.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복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과 세상, 그리고 우상을 높이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잘못된 신학을 버리고 순수한 복음을 좇아 산다면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보호하시고 선교 강국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Ⅱ. 예루살렘에 임한 부정적인 결과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 바벨론 포로들에게 옮기자 예루살렘은 망했고, 바벨론 포로들은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의 떠났다는 것은 멸망을 의미하고, 임하였다는 것은 축복을 의미합니다.
1. 성전은 불로 파괴되었다
에스겔 10장 1~8절의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은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룹 사이에 들어가서 불을 취합니다. 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붓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불로 망하게 된 것입니다. B.C 587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와서 예루살렘에 불을 질렀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면 불이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에 남은 악한 지도자들에게 심판이 임했다
에스겔 11:1에는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그 문에 이십 오인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방백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십 오인은 에스겔 8장에 동방 태양을 경배하던 제사장과 다른 사람들인 정치가들 입니다. 11:2에 보면 정치가들은 불의를 품고 악한 꾀를 베푸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우리는 무쇠가마 속에 고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즉 3절에 그들은 여호와의 전이 있으니 절대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지도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읍은 너희 가마가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그 가운데 고기가 되지 아니할찌라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 변경에서 국문하리니” 예루살렘 성읍이 놋쇠 가마가 무너질 것이며 그 안에서 복 받은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끄집어내어 변방에서 국문하겠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블라댜가 죽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꾀를 취하는 정치가들이 죽어 버렸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면 두 가지 결과가 오게 됩니다. 그것은 불이 오며 악한 지도자들이 죽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악한 지도자들이 살아 있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공격하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믿고, 그 은혜로 그들이 삽니다.
옛날 김익두 목사님이 목사되기 전에 깡패였습니다. 한 번은 산길을 가는데 산적이 김익두 목사님을 잡아 때렸습니다. 다 맞고서는 자기의 이름을 밝히자 형님이 여기 왜 나타나셨냐고 말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하는 말이 예수는 내가 믿고 은혜는 너희들이 받는다. 내가 예수 안 믿었으면 오늘부로 부고장 썼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면 예루살렘에 불이 임하고, 악한 지도자들이 죽는 심판이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Ⅲ. 바벨론 포로에게 임한 긍정적인 결과
1. 하나님의 영광이 바벨론 포로들과 함께 하시게 되었다
지도자들이 죽자 에스겔이 기도합니다. 11장 13절 후반절 입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하니라”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을 남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이 남은 자를 멸절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남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남은 자였던 것입니다. 에스겔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24장에 보면 비유가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악한 무화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극히 좋은 무화과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좋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자 그들이 가지고 있던 땅과 집을 차지하고, 여기 성전이 있다고 해서 가마 속의 고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남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남은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로소 에스겔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신의 이스라엘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만이 영적인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남은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연단하고 정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장소를 옮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바벨론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된 택한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2. 하나님은 남은 자들 가운데 성령을 두셔서 변화시킨다고 하였다
11장 16~20절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바벨론으로 옮겨 가증스러운 물건을 모두 제거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향해서 굳은 마음과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여 그들의 굳은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가 다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면 멸망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성소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고 우상을 버리는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어 신약 시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여 우상을 버리게 되고 복이 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가리켜 새 언약(New Covenant)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31장 31~34절과 요엘 2장 28~32절에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언약은 결국 바벨론 포로 때부터 시작이 되었고, 마침내 신약시대의 예수 믿는 우리에게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론
에스겔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은 극히 악한 무화과 같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웃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우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큰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복이 있습니까?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까? 성경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난하면 도와줄 분이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관점으로만 자신, 교회, 세상을 봐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영안이 열려서 여호와의 관점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환영하고 칭찬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찡그리시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싫어하고 핍박해도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면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조지 트루엣(George Truett)은 달라스 제일침례교회의 목사였습니다. 트루엣 목사를 석유 장사로 부자 된 자가 집으로 식사를 초청했습니다. 식사 후 집주인은 주위 환경을 잘 볼 수 있는 꼭대기로 목사님을 안내했습니다. 부자는 목사님에게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목사님, 저 지평선이 보이십니까? 거기까지 모두 제 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서쪽을 바라보면서 "저것도 다 제 것입니다" 하고 뽐내었습니다. 다음은 남쪽에 있는 유전[油田]과 기계를 가리키면서 "저것도 역시 모두 저의 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북쪽으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목사에게서 자신의 성공에 대한 칭찬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트루엣은 하늘을 가리키며 "당신은 재물을 저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저축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자가 하는 말이 “위에는 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 부자에게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사방으로 내 것이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위를 보았을 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30, 40대에 전셋집 살고 50, 60대에 노숙자가 될지라도 위로 하늘에 쌓인 것이 많으면 그 사람은 진실로 복된 사람입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집에 있는 우상을 모두 버리시고, 복음을 변질시키지 말고, 말씀 중심과 신앙 중심의 생활을 하고 복음을 지켜 나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알몸의 도망자
겔 10:18-19 / 윤창용 목사
학생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가면 마지막 날 저녁 시간에 '천로역정'이라는 프로그램을 합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는 장소를 돌면서 끝에 가서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하자면 천국 시뮬레이션 게임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하면 항상 마지막쯤에서 으쓱한 곳에 땅을 파고 관을 파묻은 그 곳에 학생들을 들어가게 한 다음 회개 기도를 시킵니다. 예수 안에서 철저히 자신을 죽이라는 뜻입니다. 밖에서 못을 박는 소리를 내면 열이면 열, 학생들은 울면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또 혹은 관 안에 거울을 두고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라하고 관 두껑을 열면 자기 얼굴이 보이게 되고, 그러면 학생들은 크게 깨달음을 얻습니다.
물론 이런 행사 뒤에 교회에 돌아와서는 학생들이 예전의 학생들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죽음에 대한 상념과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미국의 작은 도시에 어느 교회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셔서 하셨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며칠 동안 목사님은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며 주일 예배에 꼭 나와 주길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예배 참석률도 저조하고 교인들이 새로워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지방 신문 광고란에 작은 광고를 하나 실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 이러한 교회가 문을 닫게 생겼으니 교회 문을 닫는 폐쇄 의식으로 교회 장례식을 치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주일이 되자 동네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고 몰려들었고 교회는 초만원이 되었습니다. 강대상 앞에는 관이 놓여 있었고 그 둘레에는 화환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절차에 따라 예문을 낭독한 다음 교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떠나는 교회에게 조의를 표하라고 했습니다. 신기한 의식을 처음 본 교인들은 관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차례를 따라 관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관속에는 큰 거울이 들어 있었고, 그 거울을 통해서 각자 자기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실상, 우리 한국 교회의 실상은 어떻게 비취겠습니까?
구약 본문의 말씀을 먼저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도성으로 성별된 처소인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 시대에는 범죄와 타락의 온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에스겔 선지는 이 도성을 심판하시기 전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이 도성을 심판하시겠다는 재앙을 환상으로 본 것입니다.
에스겔서 9장 3절과 10장 1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지성소를 떠나 성전 문지방에 머물렀고"라고 했고 10장 19절에서는 "성전 문지방을 떠나 성전 입구 동문에 머물렀고"라고했습니다. 세 번째로 11장 23절에서는 "동문을 떠나 성읍 동편 산에 머물렀다가"라고 하면서 아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합니다. 점층법을 쓰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지성소에서 성전 입구로, 성전 입구에서 동문으로 동문에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렀다가 아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성소가 더러운 죄악으로 가득하다면 주님은 아주 떠나갑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거룩한 도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떠나면 우리는 이미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교회, 우리 가정에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온통 부산이 부산 아시아 게임으로 떠들썩합니다. 부산이 이번 아시아 게임 때문에 많은 도약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부산이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산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시아 게임으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월드컵 경기로 우리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새로워지고, 나라가 새로워지려면 온 나라 백성들이 위정자를 위시해서 모두가 다 헌옷을 벗고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온 성도들 모두가 헌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낡은 것, 더러운 것, 죄된 것은 처리해야 합니다. 새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대했던 21세기입니다. 21세기가 되면 우리는 마치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살 것처럼 생각하고 흥분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로 살인의 소식은 그치지 않고 사고의 소식은 계속 들려오고, 물고 물리는 정가의 이야기도, 늘 혼탁했던 선거 이야기도 역시 그치지 않고 우리 귀에 들리고 있습니다.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하나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바뀐 것이 아니라 더 악하고 못된 사람들이 더 많이 진 것 같아 보입니다. 더 혼탁하고, 더 몰상식하고, 더 비윤리적인 세상이 되어갑니다. 종말을 재촉하는 긴박한 시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더러운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편리한 것만 구하면 생활이 나아지고, 우리가 나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이 우리 인생의 질을 높여주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맞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할 때 에스겔은 단계적으로 떠난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성소에 강림하는 환상을 에스겔서 43장에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더러운 것에서 떠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신약의 본문은 마가의 서명이라고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알몸에 가는 베 홑이불을 두른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붙들려고 하니 그는 베 홑이불을 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손가락이 잘려진 사람'으로 유명한 요한 마가의 전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최후의 만찬을 행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하셨습니다. 그 때 가룟 유다의 사주를 받은 로마 병사들이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마가의 다락방에 예수님이 아직도 계신 줄 알고 마가의 다락방을 급습했습니다. 그 때는 이미 예수님이 마가의 다락방을 떠나신 후로 가룟 유다를 선두로 해서 다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쫓아 추격을 합니다. 이를 알아차린 마가의 어머니는 잠든 아들 요한 마가를 흔들어 깨워 이 위급함을 예수님에게 알리도록 했습니다.
이 위급한 상황을 잠결에 들은 요한 마가는 급한 마음에 베 홑이불을 두른 채로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달렸습니다. 이 동산에 무리들 보다 앞서 숨어든 요한 마가는 감람나무 그늘 밑에 몸을 숨기고 "아버지! 아버지께서 모든 일이 가능하십니다. 이 잔을 거두어 주옵소서"라고 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다 듣고 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조는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다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전후 사정을 낱낱이 보고 있었기에 마가 복음은 생생한 기록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관찰을 하던 마가는 그만 발각되어 "너는 누구냐?"라는 소리치며 휘두르는 로마 병사의 칼날을 피해 베 홑이불을 던져 버리고 비극 중에 코메디를 연출하며 벗은 몸으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때 로마 병사의 칼날을 피하려다가 손가락 하나가 잘렸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년의 시간이 지난 후 요한 마가의 집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방문을 합니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안디옥 교회에서 거둔 연보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여기서 마가는 바울의 세계 선교에 대한 계획을 진지하게 경청합니다. 마침내 바울의 웅변은 마가의 열정으로 바뀌어 마가는 바울과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때에 마가의 마음은 세계 선교에 대한 희망으로 불타 올랐고 패기는 그야말로 만만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마가만 가진 마음은 아닙니다. 그 마음에 불이 붙기만 하며 청년들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열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패기만만하게 전도 여행을 떠난 마가는 구브로와 바보를 거쳐 밤빌리아에 도착했을 때 마가는 도저히 더 이상 전도 여행을 따라 갈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마가는 밤빌리아에서 바울과 결별하고 헤어지게 됩니다. 왜 결별했는지 성경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사실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마가는 고향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돌아와 다시 2차 전도 여행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요한 마가는 자신이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당시 경솔하게 한 행동을 후회하고 다시 2차 전도 여행에 동참 시켜 줄 것을 바울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1차 전도 여행때 아무런 이유 없이 고향으로 돌아간 마가를 전도여행팀에 합류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고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다투게 됩니다. 그 일로 인해서 방루은 실라를 데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 여행을 두 팀으로 나누어 떠나게 됩니다. 이 결별 이후 바울은 그가 쓴 신약성서에서 바나바의 이름을 몇 차례 기록해 놓고 있지만 바나바의 그 일 이후의 소식은 성경에 전혀 기록이 나타나 있질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년에 디모데를 로마로 초청할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을 하면서 마가는 내게 요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바나바의 친척 마가도 문안하라고 하고 마가가 가거든 잘 영접하라는 지시를 여러분들이 받았는 줄 알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요한 마가를 용서하고 그를 영접하여 나중에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 마가는 훌륭한 전도자가 되어 바울과 베드로의 비서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순교 직전의 어려울 때 바울의 수종을 들면서 충성을 다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을 저술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 아주 중대한 일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자유와 욕구의 시대라고 합니다. 젊은이들은 무례하고 새것만 내세우고 일만 저지르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나이 드신 어른들은 완고한 분들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젊기 때문에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실패는 하나의 산 경험이 됩니다.
젊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의 신의주 특구의 개발을 책임지는 사람이 양빈이라는 39살의 젊은 나이의 사업가였는데 그저께 중국 당국에 의해서 세금 탈루로 인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신문들의 해석은 북한이 중국과 긴밀한 협조 하에서 개발을 하지 않은 까닭에 중국 당국의 노여움을 사서 이런 일이 자초되었다고 합니다.
잠언 14장 4절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실패를 두려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문제는 없으려니와 그러나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패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실패한 이들은 다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성경은 죄를 지은 사람은 용납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새벽시간에 열왕기하서에 있는 말씀을 살피고 있는데 이스라엘 역사의 말기에 왕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득죄한 왕이었습니다. 다윗도 그런 왕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실패는 그 이후 철저한 회개와 함께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젊다고 하는 것은 나이가 젊어서 젊다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20대라도 실패를 두려워하고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하면 그 청년은 이미 청년이 아니라 노인입니다. 나이가 70이라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향해 다시 도전할 용기가 있다면 그 분은 청년입니다.
우리 교회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나이가 젊은 청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길 원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젊은 신앙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비록 실패해 알몸으로 도망을 했으나, 겁이 나고 두려운 마음으로 전도 여행에서 이탈을 했으나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마가복음으로 예수의 생애를 생생하게 기록하며 바울의 노년에 가장 큰 힘이 되었던 마가와 같은 알몸의 도망자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