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06
10월10일[연중 제2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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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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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Kgi3Dt9CzBM
[서울대교구 장세훈 임마누엘(상계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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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성령입니다!>
기도! 하면 대체로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청원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리고 습관적으로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네. 기도해 드릴게요.’ 같은 대화를 자주 나눕니다.
물론 오늘 주님 가르침에 따라, 간절한 원이 하나 있다면, 정말 절박하다면, 마음과 정신, 목숨과 영혼을 다해 아버지께 청할 필요도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9)
사실 내가 건강해야 복음 선포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가 합격해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몫을 당당히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평화롭고 가화만사성해야, 그를 바탕으로 이웃 사랑의 실천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도의 전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기도는 청하는 것,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현존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려는 노력입니다.
기도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기쁘고 충만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일입니다. 기도는 나도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일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국 성령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며 힘차게 활동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 인생 여정을 항상 인도하실 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기적을 기꺼이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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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aAK2PUFo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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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기도를 빨리 안 들어주시는 이유>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해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할 때 꾸준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바로 줍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빨리 얻어내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밤에 손님을 맞은 친구는 먼저 자는 친구를 깨웁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그러나 계속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다 줍니다.
그 친구는 속으로 ‘이 친구가 이렇게 나를 괴롭히니 들어줘야지. 아니면 또 찾아와서 괴롭힐 거 아니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친구는 빵을 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의 친밀감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계속 청해도 된다고 믿는 관계는 깊은 관계입니다. 아내만이 남편에게 계속 청할 수 있고 아이만이 엄마에게 계속 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청하는 것을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 청을 거부한다는 말은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는 내가 청하고 받고 또 상대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조앤 롤링의 ‘해피 포터’ 시리즈 출판 여정은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원고는 최종적으로 승인되기 전에 12개의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믿고 그 출판을 맡아준 출판사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일단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 사람의 인격을 믿고 함께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게 점원이라면 가장 두려워할 것이 무엇일까요? 손님이 떠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진열장에 꼭 입고 싶은 옷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비쌀까 봐 문을 열고 머리만 집어넣고 점원에게 묻습니다. “이 옷 얼마예요?”점원은 “100만 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그 사람이 그 옷을 살 확률이 높을까요? 아마 “당신은 저 옷을 살 돈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없죠. 가격만 빨리 알고 그냥 가던 길 가세요!”라고 느낄 것입니다. “뭐? 나를 무시해?”라며 보란 듯이 옷을 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에게 옷을 사서 기쁨을 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직원은 어떻게 말할까요?“아, 예! 잠깐 들어와서 앉으세요. 제가 가격을 알아보는 동안 차 한 잔 드시면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다?”
일단 가게에 들어온 사람은 그 친절함에 점점 보답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원은 눈썰미로 이미 그 사람의 치수를 알아서 맞는 옷을 가져와 입어보라고 합니다. 입어보니 딱 맞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150만 원이라고 해도 그 옷을 살 것입니다.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청하는 우리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청을 들어주면 다시 필요한 게 있을 때까지 오지 않을까 봐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잡아놓고 싶어서 지금 청하는 것을 당장은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쳐서 외삼촌 라반의 동네로 피신하였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레아와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은 동생 라헬을 더 좋아하였고 라반에게 청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축복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7년을 일해주면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이 7년을 일하고 눈을 떠보니 레아가 누워있었습니다. 라반은 라헬과 결혼시켜 주면 금방 자신을 떠날 것을 알고 7년만 더 일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래서 7년을 더 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라반의 마음과 같으실 것입니다. 무언가를 들어주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떠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평생 죽기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청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이 시대에 그리고 이후에도 이해하기 힘든 구원의 원리를 쉽게 정립하여 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지게 하시겠다고. 그러나 그 약속은 이사악 하나 낳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청은 그냥 들어주십니다. 당신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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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는 아직 말을 못 해서 자신의 의사 표시를 울음으로 합니다. 엄마는 아이의 울음을 듣고 아이가 원하는 걸 해결해 줍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하고, 젖병을 물려 주기도 하고, 옷을 갈아입혀 주기도 합니다. 이제 나이를 먹어서 학생이 되면 울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말로 합니다. 이제 무조건 울기만 해서는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학생이 되면 이제 엄마와 밀고 당길 줄도 압니다. 설거지를 도와 주기도 하고,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걸 합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면 성당에 가고,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좋은 성적이면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엄마는 자녀가 원하는 걸 기꺼이 들어 주게 됩니다. 이제 학생이 어른이 되면 엄마가 원하는 걸 해 드리려고 합니다. 보일러를 바꿔 드리기도 하고, 해외여행을 보내드리기도 하고, 엄마와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우는 아이에서, 엄마와 밀고 당기기를 하는 학생에서, 엄마가 원하는 걸 해 드리는 어른이 되는 겁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울기만 한다면 엄마의 마음이 아플 겁니다.
주교님은 사제들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려고 합니다. 주교님은 인사이동을 통해서 사제의 능력과 적성에 맞는 임무를 맡겨 주려고 합니다. 주교님은 어떤 사제를 마음에 들어 할까요? 우는 사제가 있습니다. 능력도 안 되는데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공동체를 어렵게 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갈라놓기도 하고, 교우들이 떠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꼭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런 경우 주교님은 무척 난처할 겁니다. 밀고 당기기를 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사목하고 싶다고 하면서 미리 일본어 어학 시험에 합격합니다. 주교님은 큰 고민 없이 일본으로 보내 줍니다. 일본 교구에서 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2년 전에 영주권을 얻었습니다. 주교님께 교포 사목을 청했습니다. 주교님은 큰 고민 없이 저를 교포 사목 사제로 파견하였습니다. 능력과 사목의 역량이 검증된 사제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가는 곳마다 신자가 늘어나고, 공동체가 활기를 되찾고, 적절한 장소를 찾아서 본당을 분가시킵니다. 이런 사제를 ‘해결사’라고도 합니다. 이런 사제가 많으면 주교님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주교님이 원하는 걸 알아서 해 주는 사제가 있습니다. 타 교구에서 공소 사목 사제를 원할 때입니다. 기꺼이 손을 들어 공소 사목을 신청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인사 적체로 본당 신부의 자리가 부족할 때입니다. 후배 사제를 위해서 기꺼이 특수 사목을 신청하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고속 터미널 성당에도 지원하고, 시장 성당에도 지원합니다. 6년 전입니다. 저는 특수 사목을 5년 했기에 본당 신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교님께 본당 신부로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잘 결정했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님은 저를 미주가톨릭 평화신문 지사장으로 파견하였습니다. 팬데믹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신문을 홍보하고 만드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이곳 달라스를 마치면 주교님이 원하는 걸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도 남의 밑에 있지만 제 부하들에게 명령하면 부하들은 제 말을 듣습니다. 그러니 직접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아픈 부하가 곧 나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우는 아이의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밀고 당기는 신앙을 넘어서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걸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드려야 하는 것은,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구하여야 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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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5-13: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떠나게 한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히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안에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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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도록 신자들을 호린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그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가 편지를 쓸 때 문제가 된 것은, 유다교를 배경으로 하면서 유다인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한 이들이었습니다. 본래 유다인이었던 이들과 달리 이교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경우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 규정들을 따르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말하자면 유다교를 거쳐 그리스도교로 가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 이들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할 뿐이라고 힘껏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염려한 것은 “율법에 따른 행위”(갈라 3,2)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업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쟁자는 나 자신이고, 내가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서간들의 뒷부분에서 주로 볼 수 있듯이 구원된 이의 삶은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때의 삶과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에 뒤따르는 결과이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이교인과 똑같이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산다면 오히려 그가 정말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이 구원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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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1)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청하면 주실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청해서 받아라.”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ㄴ)라는 산상설교의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이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 자동적으로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청해서’ 받아야만 ‘나에게’ 옵니다. 만일에 청하지 않는다면, 또는 안 받으려고 하면, 아버지께서 아무리 많은 것을(좋은 것을) 주셔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도당해서 초주검이 된 그 사람은,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이고, 또 누구든지 아무나 지나가다가 도와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 지나가는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에게 제발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도와준 것은, 그의 요청에 응답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살기를 포기하고, 그래서 기도하지도 않고, 사마리아인의 도움도 거절한다면?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또 만일에, 자기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동족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나는 사마리아인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 라고 도움을 거절하거나,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니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면서 도움을 거절했다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가 아닙니다. 물론 도움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통해서 받든지 간에 내가 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했던 그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시기와 방법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3)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도 ‘같은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이미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을 찾아서 들어가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문이 이미 열려 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문은 닫혀 있는 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고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고, ‘내가’ 그 문을 열어 드려야 하는 상황은 복음 말씀과는 반대의 상황인데, 그래도 어떻든 ‘능동적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그래서 문을 열어 드리지 않는다면,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4) 문을 두드린다는 상황에서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이 상황은 ‘최후의 심판’이 끝난 뒤의 상황입니다.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이미 들어갔고, 그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 쫓겨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고 애원해도, 닫힌 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이 끝나면 모든 상황이 끝나고, 주님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을 두드리는 일은, 또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문을 열어 놓고서 기다리시는 때이고, 문이 닫히는 ‘그날’은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때입니다.
사실 ‘청하고 찾는’ 일도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은’ 특별히 청할 일이 없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오만함과 자만심을 버리지 않으면, 정말로 간절하게 청해야 할 일이 갑자기 닥쳤을 때, 청하지도 못하고 허둥대기만 할 것입니다.
기도는 평소에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잘하게 되는 법입니다. 어떤 아쉬운 상황이 되어야만 기도를 하려고 하고 평소에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의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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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 청하였으나 받지 못한 경험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 탓을 돌리다가 ‘그럼 나는 주님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며 청하였던가?’ 하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오늘 복음은 청하는 자와 청을 들어주는 자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한밤중에 빵 세 개가 필요하였던 사람은 아무나 무턱대고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것을 꾸어 줄 만한 친분이 있는 벗에게 찾아갑니다. 바라는 것을 얻어 내고자 영리한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자고 있던 그 벗은 귀찮기도 하고 이미 잠든 식구들을 깨우기가 곤란하다며 거절하지만, 친구의 청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계속 졸라 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친구 사이였고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줄곧 졸라 대다’로 번역된 그리스 말 ‘아나이데이아’는 ‘뻔뻔스러움’ 또는 ‘부끄러운 줄 모름’을 뜻합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친구끼리라면 조금 염치없이 뻔뻔하게 굴어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서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누구에게 청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신뢰 관계는 친구 사이보다 어쩌면 부모 자식 사이에 더 끈끈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벗이 부탁하는 청도 거절하기 힘든데, 자녀들이 청하는 것을 아버지가 거절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자비를 신뢰합니다. 세상 어떤 아버지보다도 선하신 분,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사소한 청 하나도 허투루 흘려들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 여정에 꼭 필요한 선물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우리의 영적 여정에 필요한 선물은 결국 성령의 은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그 좋은 것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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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정대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음 깊은 곳의 갈망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면 하느님을 만난다. 부제서품을 앞두고 나는 호주 사막 한가운데서 8일 피정을 했다. 멜버른에서 사막까지는 기차로 꼬박 29시간이 걸렸다. 아침 여명이 밝아오면서 드러나는 벌건 사막엔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바싹 말라 있었다.
나는 사막이 주는 위압감에 눌렸고 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원주민들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도 편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피정을 지도해 주실 수녀님께 멜버른을 떠나 이 사막에 오기까지의 여정과 내 마음의 움직임을 이야기하였더니 수녀님은 간단히 “두려움이군요. 피정 동안 이 사막의 환경에 자신을 열어보는 연습을 하세요”라고 하셨다.
피정 첫날, 나는 피곤해서 낮잠을 잤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찾아가듯 나는 소리나는 곳을 찾아갔다. 그 소리가 나는 곳은 마을회관이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혹시 나를 거부하면 어쩌나 싶어 망설이다 내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내 이야기를 들은 수녀님은 나에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수녀님은 위축되어 있는 나에게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세요.그러면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주셨다.
내가 그 회관에 편안히 들어가는데는 약 4일이 걸렸다. 첫째 날은 문에서 1미터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날은 주변 의자에 앉아서 10여 분을 있었다. 그 다음날 갔더니 어린아이들이 먼저 와서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놀았다. 경계의 대상이었던 원주민들에게 환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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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11,9~10)
때론 주간 복음을 이해하고 심화하기 위해서 그 주일 복음과 연결해서 바라보고 살아가는 영성적인 습관이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번 주일 복음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아이들을 받아들임, 월요일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 는 말씀에 담긴 사랑으로 살아감, 그리고 화요일엔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주님 앞에 멈춤과 들음, 수요일은 참 기도에 대한 가르침, 오늘 복음에선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의 삶과 기도 생활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 영성 생활의 바탕이며 초석입니다. 기도와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며 이는 곧 예수님의 존재였고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믿고 따르려는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이런 영성의 단련이 필요합니다. 비록 작지만 작지 않은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사랑의 실행이 나오고 그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의 답이며 열쇠인 주님과 인격적이며 사랑의 관계인 기도가 그 원천이며 바탕이라는 점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에 우리를 참여하도록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당신과 함께 아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끌고,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고 그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영적 양식 포함)을 주시며 아버지의 자녀로서 서로 용서하며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아버지의 자녀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아시고 계신 아빠 하느님은 우리의 청함을 즐겨하시고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 까닭은 바로 우리의 청함은 단지 어떤 그 무엇을 청하는 것만이 아닌 바로 아빠 하느님을 아빠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빠 하느님의 마음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11,9.1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우리의 청함과 찾음과 두드림을 기다리시는 아빠 하느님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11,5~8)를 통해서 간절하게, 끈질기게 귀찮을 정도로 집요하게 기도하는 이에게 아빠 하느님은 참지 못하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는 표현에 이미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아빠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며 이런 확신에서 우리가 아빠 하느님께 기도하기를 바라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고마운 말씀입니까?
이렇게 우리가 말(=청함)과 몸(=찾음)과 그리고 가슴(=두드림)으로 아빠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할 때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고, 이 변화가 우리로 하여금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아빠 하느님께 간구해 주심’을”(로8,27참조)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아빠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1,13)하고 예수님께서는 아빠의 참 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아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세상적인 어떤 그 무엇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좋은 것”(마태7,11)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실 성령은 바로 예수님의 강생에서 부활의 여정 가운데서 함께 하셨던 영이며, 그 영은 바로 아버지의 영이며, 그 영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영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아빠이시며, 그 영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참으로 알게 되어 예수님을 주님이시다, 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 하느님, 저희에게 사라지고 마는 세상적인 어떤 그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주시길 바라시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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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꿈’이 무엇인지 발표하게 하셨습니다. 다양한 꿈이 나왔는데(당시 한 반에 70명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던 꿈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친구는 자신있게 ‘교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의 말에 다들 크게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기에 이 친구는 전혀 교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수업 시간에도 항상 딴짓만 했습니다. 당연히 늘 반에서 꼴찌는 이 친구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교수님이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지? 오늘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분명히 훌륭한 교수님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친구는 커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교수님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친구는 끝까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목표(꿈)을 향한 과정 안에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꿈이 크면 클수록 여기에 들어갈 노력의 크기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노력 없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빵을 꾸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친구에게 빵을 내어주는 것은 혈연이나 학연, 인맥과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청하는 사람의 간절함과 진실함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기억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절로 얻고자 한다면 큰 욕심입니다. 간절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것만을 좇으면서 풍요와 안락을 달라는 것은 더 큰 욕심입니다. 그런 욕심으로는 절대로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고, 또 실제로 그렇게 좋은 것만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지요.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기에 주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께 간절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분명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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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믿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 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 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 1,15-16)
기도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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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몸소>
루카 11,5-13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몸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몸소 이루십니다
보잘것없는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내 눈길을 통하여
몸소 보살피십니다
외로운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내 발길을 통하여
몸소 찾아가십니다
쓰러진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내 손길을 통하여
몸소 일으키십니다
벗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몸소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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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여기에서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청하라’는 것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이요, 희망을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와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찾아라.’는 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고, 믿는 바를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사 65,24;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게 우리를 찾으시니, 우리 또한 그렇게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두드려라”는 것은 사랑의 가슴으로 “두드려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희망하는 바를 ‘말’로 청하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찾으며, 사랑하는 바를 ‘마음’으로 두드리며 전인격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곧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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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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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계속됩니다.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청을 들어주지 않던 친구라도 그가 끈질기게 간청하면 결국 들어준다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결론에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확신이 넘치는 말마디가 꼭 앞에 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염치와 체면불구하고 간절하고 절실해야하며 항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낮은 자세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겸손한 기도의 자세는 그대로 믿음의 자세요, 정말 주님을 믿는다면 이처럼 항구하고 끈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감동을 줍니다. 제 주변에도 이렇게 믿음으로 절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종종 봅니다. 여기 수도자들이 대부분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어지는 기도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더욱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정말 이렇게 믿어 기도하는 자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좌절함이 없이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쳐야 합니다. 불퇴전의 자세로, 칠전팔기, 백절불굴의 자세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께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래야 참으로 탄력좋은 기도요 믿음이요 삶입니다. 기도의 탄력, 믿음의 탄력, 삶의 탄력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봅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한결같이 참 많이 강조해온 것이 ‘주님의 전사’에게 탄력좋은 믿음입니다. 새 용수철처럼 누르면 즉시 튀어나오는 탄력이 영성생활에도 절실함을 강조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과 함께 가는 영적탄력의 삶이요, 이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우선해야 합니다. 언제든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노력에 항구할 때 영적탄력도 보존됩니다. 영적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영적탄력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늘 푸르른 믿음, 푸르른 희망, 푸르른 사랑의 사람이라면 영원한 청춘입니다.
제가 여기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36동안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것이 늘 거기 그 자리의 하늘과 불암산이며, 간혹 답답하고 암담할 때도 있었지만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은 없었음도 좋은 영적탄력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정주와 믿음의 표상인 산을 흠모하여 쓴 시들이 가장 많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의 관계는 주님과 나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무려 27년 고백시가 여전히 지금도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더불어 10월 한달 저를 내내 행복하게 하는 “산앞에 서면”이란 시입니다. 늘 고백해도 늘 좋고 새롭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9.>
영적탄력이 손상되어선 안됩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의 자포자기로 일어나 다시 시도하지 않는 것이 대죄라고 단언하곤 합니다. 한번 나태함으로 영적탄력 떨어지면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에게는 한결같은 기도의 훈련은 절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훈련, 믿음의 훈련, 삶의 훈련에 결코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다 죽어라”, “공부하다 죽어라”, “기도하다 죽어라” 삶의 치열성을 강조한, 영적전투에 최선을 다하는 어느 구도자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다음 복음 말씀도 단숨에 읽혀집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을 신뢰한다면 결코 끊임없이 한결같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에, 믿음에, 삶에 지치는 일이, 영적전의를 상실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새삼 청해야 할 최고, 최상의 선물은 성령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은혜 자체가 성령입니다. 정말 한결같이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늘의 아버지는 최상의 선물,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년의 삶은 말그대로 성령에 따른 자유롭고 초연한 사랑의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평생 영적전투에 성령의 도움은 절대적이며, 성령께서는 평생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사실 이렇게 항구히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 수 있음도 순전히 성령의 은총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제1독서 말씀이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성령의 사람, 복음의 사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성령에 따라 복음적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사도의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큰 깨우침이 됩니다.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정말 성령의 도움으로 복음적 삶을, 경청과 겸손, 섬김의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치지 않도록 더욱 영적 삶에 박차를 가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탄력 좋은 성령의 사람이 되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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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과연 누구든지 청하는 대로 받을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어제에 이어 주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즉시 누구든지? 할 것입니다. 정말 누구든지 청하면 주님께서 들어주십니까?
그리고 상당수 분이 나는 아닌 것 같은데 하실 것 같습니다. 저만해도 몇십 년째 제 기도 목록에 올라 있는 분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고 그래서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거짓이고,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이 뭔지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누구의 청이든 들어주신다는 말은 모든 청을 들어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청을 들어주시고 말고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의 청이든 들어주시지만 들어주시지 않을 청을 한 사람의 청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고 어떤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청이건 누구의 청이든 들어주시지만 아무 청이나 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청하되 들어주실 것을 청해야 하는 것이요 죄인이 청하되 들어주실 것을 청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 또는 악인이 청하겠습니까? 주님께 청한다면 그는 어쩌면 죄인이나 악인이 아닐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죄인은 주님께 청하지 않기에 죄인일 것입니다.
사실 죄인이나 악인이 청한다면 들어주실 것을 청하겠습니까? 만약 들어주실 것을 청한다면 이미 죄인이나 악인이 아닐 겁니다. 완전범죄가 되게 해달라고 하면 주님께서 그걸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들어주실 청은 뭣이고 안 들어주실 청은 뭣인지 그것이 관건인데 솔직히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완전한 선의에 달렸기에 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들어주시지 않는 것 분명하고, 악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분명한데 나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때에 주시는 것도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이고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성령을 주실 거라고 맨 마지막에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원하고 청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들어주실 것을 청하고 성령을 청하는 우리가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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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11,8ㄴ)
<끈질기게 매달리자!>
오늘 복음(루카 11,5-13)은 '끊임없이 간청하여라.'라는 말씀과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말씀입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벗이 끈질기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비유로 드시면서, 이처럼 믿는 이들도 하느님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끈질기게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끈질기게 매달리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루카 18,1-8)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곤경에 처한 인간의 간절한 청원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어제 복음은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여라."(루카11,2) 하면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일곱 개의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 '세 개의 청원'은 하느님 아버지와 관련된 청원이고, 후반부 '네 개의 청원'은 우리와 관련된 청원입니다.
'청하고, 찾고, 두드려라'는 표현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끊임없이 기도합시다! 입으로만 머리로만 기도하지 말고, 굳건한 믿음 안에서 행해지는 바른 삶으로도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통한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더 잘 들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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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언제나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은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기쁨이
아버지의 기쁨이며
우리의 행복이
아버지의 행복입니다.
자녀들인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사랑을
기도로 체험하게
되는 우리 뜨거운
일상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께
바칩니다.
기도와 일상사이
일상과 기도사이에
사랑의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진실로 믿습니다.
드디어 알게되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청하는 기도로
마침내 살아갈
힘을 얻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모든 여정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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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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