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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일수 교수의 붓다와 뇌과학 45회 연재물을 발췌 정리
방황하는 마음은 불행…‘지금 여기’에 집중할 때 가장 행복
지금 행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두는 것, 즉 ‘지금 여기(here & now)’에 머무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는 것이다.
‘마음을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하라.’ 고따마 싯다르타는 이미 2500여년 전 마음은 여섯 가지 알음알이[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라고 하였고, 색·성·향·미·촉을 감각하는 오감뿐 아니라, ‘생각’을 지각하는 감각기관인 의근(意根)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의근을 관리하는 기능인 싸띠[sati, 염(念)]가 존재함을 간파하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싸띠힘(sati power)을 키우면 탐·진·치 3독의 번뇌를 소멸하여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알고, 그 수행방법까지 개발하였다.
현재에 집중해 망상으로 빠지는 마음 제어해야 한다.
망상·방황은 전전두엽에 기록된 과거 경험치의 회상 때문이다.마음이 망상에서 벗어나 현재에 집중하는 것은 수행이 답이다.
싸띠수행(알아차림 명상)은 마음근육 강화시켜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사람마다 불성(佛性) 차이 있는 건 전전두엽의 차이이다.
전전두엽이 발달되면 지혜로움 발달해 반야의 뇌로 발전한다.수행을 한다는 것은 명품 전전두엽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다.싸띠수행을 통해 전전두엽을 잘 계발해 번뇌의 불꽃 끄게 되면 ‘깨달은 자’이다.
뇌의 '기본작동신경망'(default mode network)이 활동하여 과거나 미래를 망상
인간의 뇌는 ‘생각’하는 뇌로 진화하였다. ‘생각 기능’은 과학을 발전시켜 사회를 진보하게 하였다. 문제는 ‘나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분별하고, 평가·판단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의 뇌는 그렇게 진화하고, 또한 삶이 그런 나를 만든다. ‘자아’의 형성과정이다. ‘이야기하는 자아(narrative ego)’는 망상하는 마음을 낳았다. 그것은 매우 강력하여 집중하여 일을 할 때도 30%의 시간은 망상에 빠지게 한다. 자동이다.
내인적 뇌불꽃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수시로 방황한다. 매우 집중하여 일을 할 때도 그런 시간의 30%는 망상에 빠진다. 16시간 깨어있다고 보면 하루에 6200여 가지 생각이 오간다. 평균 10초에 한 가지씩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만큼 내인적 뇌 활성(불꽃)은 강력하다. 과연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마음은 특별히 어떤 외부대상을 인식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by default)’ 망상모드에 빠진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흘러가는 작동방식을 기본작동이라 한다. 우리의 뇌도 그렇다. 정신을 차려 현재를 알아차림하지 않으면 뇌의 기본작동신경망(default mode network)이 활동하여 과거나 미래를 망상한다.
망상은 대부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왜 인간은 기본적으로 과거 생각에 빠질까? 모든 생명체는 살아남기에 최적합하도록 진화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생각하면, 과거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살아남는데 유리하였다는 뜻이다.
인간 뇌, 깨어있는 시간의 30% ‘딴생각’으로 배회한다.
딴생각은 의지와 관계없는 ‘기본모드 신경망’ 작동 때문에 발생한다.
전전두엽(前前頭葉)에 넓게 퍼져있는 거대한 뇌신경망인 인지조절신경망에 탐지한 오감을 알아차림하는 위층의 싸띠라는 기능이 있다
망상으로 지금·여기에 있지 못하는 마음이 ‘불행’ 원인이다.망상을 알아차리고 제어할 수 있는 역량이 바로 ‘싸띠’이다. 사람 뇌의 앞부분인 전전두엽(前前頭葉, prefrontal cortex)에 넓게 퍼져있는 거대한 뇌신경망인 인지조절신경망(cognitive control network)이 있음을 밝혀냈다. 이 신경망은 기능적으로 켜켜이 쌓인 층구조를 이룬다. 낮은 수준 층에서는 뇌로 들어온 오감을 탐지한다. 탐지한 오감을 알아차림하는 싸띠는 그 위층의 기능이다. 싸띠수행으로 싸띠힘을 키우면 마음은 실념(失念)하지 않고 지금·여기에 머문다[정념(正念)].
기본모드신경망(default mode network)이 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불행한 마음으로 이끄는 탐진치 삼독의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 붓다는 지금·여기에서 사념처(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를 분명히 알아차림[싸띠, sati] 하라고 가르쳤다.
인간의 마음은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그 마음은 뇌신경회로의 활성으로부터 홀연히 떠오르는 창발(創發 emergence) 현상이다. 그런데 뇌신경회로는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이 있어서 변화될 수 있다. 원하면 바꿀 수 있다는 뜻으로 매우 다행한 일이다.
동물의 사회행동신경망(SBN)은 본능적 습성[파충류뇌]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과 집착의 습성[변연계, 둘레계통]들을 만드는 마음신경회로이다.
화, 공격성, 번식, 자식보살핌[부모행동], 소속감[유대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인식[사회인지], 스트레스 반응 등을 사회행동이라 한다. 이러한 사회행동을 조절하는 뇌신경망은 물고기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척추동물 전반에 걸쳐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신경망을 사회행동신경망(social behavior network, SBN)이라 한다. SBN은 뇌줄기와 둘레계통의 뇌부위들에 펼쳐져 있다. SBN은 본능적 습성[파충류뇌]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과 집착의 습성[변연계, 둘레계통]들을 만드는 마음신경회로이다. 그런데 개, 고양이, 뱀, 악어를 길들이기 힘들 듯이 SBN은 길들이기 힘들다. 탐진치 번뇌가 여기에 물들어 있다. 수행을 하여 번뇌의 불꽃이 꺼진 뇌를 만들고 싶지만 SBN은 도무지 고집불통이다. 뼈를 깎는 수행정진이 필요한 이유이다.
불변하는 자아는 있는가
정말 ‘나’는 없는가? 세속의 눈으로 보자. 그것은 자아(自我 ego)의 문제이다. 우리의 기억은 어렸던 어느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기억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파노라마이다. 누구에게나 그 파노라마는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에 대한 서사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자아’라 한다. 그 자아의 내용[서사시]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그런데 마치 피부 세포가 매달 새롭게 만들어져도 그것은 나의 피부라고 여기듯 자아의 내용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데도 ‘바뀐 자아’를 ‘과거의 자아’와 동일시하며 그것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왜 그럴까?
‘바뀐다’는 말에 함정이 있어서 그렇다. 우리 몸의 세포는 ‘온전히’ 바뀐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마음을 만드는 뇌신경세포의 대부분은 나와 일생을 같이 한다. 마음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고 했다. 신경세포가 변하지 않는데 왜 마음이 변할까? 신경세포들은 그대로인데, 그들의 연결인 신경회로가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상상을 초월하게 복잡한 신경회로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일부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살면서 경험하고 학습하는 모든 것은 나의 뇌에 새로운 신경회로로 쌓인다. 기억이다. 쌓였던 신경회로는 허물어지기도 한다. 망각이다. 대부분의 기억은 희미해져 흔적만 남긴다. 그런 것들이 모여 무의식이 되고 나의 ‘마음성향’을 결정하는 밑그림을 그린다.
결국 뇌과학으로 보아도 고정불변하는 자아는 없다. 새로운 기억이 첨가되기도 하고 쌓였던 기억이 허물어지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자아가 있을 따름이다. 그런 자아가 나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나의 이야기, 나의 서사시를 만든다. 그 서사시는 시간이 흘러도 일관되게 ‘나’의 이야기를 연속시키기 때문에 나는 나의 정체성을 느낀다. 자아의 이런 측면을 서사적 자아(narrative ego)라 한다. 그 서사시가 있는 곳이 기본모드신경망이다. 또한 자아는 현 시점, 지점에서 ‘나’라는 개체가 세상의 어디에 있는지 자각한다. 나를 ‘나’ 밖의 세상과 분리된 하나의 개체로서의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개체화된 자아(embodied ego)이다. 나는 너와 분리된 개체로 여기 이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로 오라고 하면 목표지점을 찾아갈 수 있다. 이것은 주변에서 현저히 돌출되는 대상을 탐지하여 나의 좌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돌출탐지망(salience network)의 기능이다.
감각기관이 변환한 상이 뇌활성을 감지하는 의근에 포섭되면 그 맺힌 상이 곧 의식이 된다.
다섯 가지 감각기능은 자신의 영역만 경험할까? 감각기관[눈, 귀, 코, 혀, 피부]은 각각의 인식대상[형태, 소리, 냄새, 맛, 촉감]을 수용하여 대뇌로 보낸다. 보내는 신호는 활동전위(Action Potential)라고 하는 100mV(밀리볼트)짜리 전기이다. 감각기관은 인식대상을 수용하여 전기로 바꾸는 변환기(Transducer)이다. 변환된 활동전위는 초당 ~100미터의 속도로 대뇌로 전달된다. 너무 느리지 않는가. 신경세포가 전기를 만들고, 전달하는 방식이 일반 전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간, 감각기관으로부터 처음으로 이 신호를 받는 대뇌 부위들을 일차 감각피질(Primary Sensory Cortex)이라 한다. ‘일차’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보면 ‘2차, 3차…’로 이어짐을 암시한다. 일차 감각피질에서 어느 정도 분석이 될 뿐 분석과정은 더 나아간다. 예로서, 시각신호 처리의 경우 망막 → 시상 → 1차시각피질 → 2차, 3차 … 시각피질 → → → 해마로 흐르면서 형태분석이 완성되고, 종국에는 전전두엽으로 흘러간다.
일차 감각피질에서 각각의 대상을 경험한다고 보자. 경험한다는 것은 전달받은 신호들에 대한 해석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뇌과학적 용어로 신호처리(Signal Processing)라 한다.. 그 안이비설신의 뇌활성을 마노(의근)가 감지한다. 이렇게 보면, 마노가 감성 물질을 감각한다는 말은, 마노가 대뇌피질의 뇌활성[활동전위]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의근(意根)의 감각대상[Mano-object, Mind-object]이 법경이니, 뇌활성이 곧 법경이라는 의미이다.뇌활성 감지하는 의근에 포섭되면 그 맺힌 상이 곧 의식이 된다.
눈에서, 귀에서, 코에서, 혀에서, 피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하여 마음거울에 상을 맺고, 그 상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전전두엽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의근은 한 찰나에 하나씩만 포섭한다. 붓다는 의근에 포섭되면 그 상은 의식이 된다고 했다. 또한, 의근은 싸띠(sati)에 의지한다고 했다. 싸띠가 의근신경세포들을 관리한다는 뜻이다.
붓다는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역으로, 대상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안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인식을 하거나 하지 않는 과정을 반복한다. 인식하지 않을 때의 마음을 바왕가(bhavaṅga)라 한다. 단지 존재를 지속시켜주는 수동적 마음인 존재지속심(存在持續心)이다. 바왕가의 마음으로 있다가 인식대상이 나타나면 바왕가에서 깨어나 인식과정을 거치고 다시 바왕가로 돌아간다.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나의 마음이 결정된다. 그만큼 인식은 마음의 괴로움, 즐거움, 평온함을 결정하는데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인식은 감각기관을 통한다. 다섯 가지 외부감각[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을 받아들이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피부)]이 있다. 이 감각기관들을 다섯 가지 근[五根] 혹은 문[五門]이라 한다. 다섯 가지 감각 이외에도 붓다는 ‘떠오르는 생각’도 감각된다고 보았다. ‘떠오르는 생각’은 과거의 기억과 같은 추상적인 것이다. 붓다는 외부감각과 관계가 없는 이런 추상적인 생각을 감각하는 감각기관을 의근(意根)이라고 설정하였다.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외부대상은 오문(五門), 내적 마음에서 생성되는 내부대상은 의문(意門)을 통해 인식된다. 각각 오문인식(五門認識) 및 의문인식(意門認識)이라 한다.
대상 인식은 토막난 17심찰나의 반복된 과정
스크린에 비친 동영상은 초당 24개 사진 프레임의 연속 움직임
뇌는 망막에 맺힌 상을 1차 시각피질 거쳐 연속 동작으로 인식
단순세포, 초당 60회 활동으로 대상 인식…1심찰나 시간과 유사
아비달마구사론의 설명에 따라 1찰나(1/75초)를 아비담마의 1심찰나와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매우 큰 감각대상’을 인식하는 17개의 마음들이 인식통로를 지나가는데 0.23초(1/75초·찰나 x 17찰나) 걸린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 번의 인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인식 과정 동안에 대상에 대한 이미지(상, 像)를 마음 공간에 받아들이고, 그것이 해로운 것인지 유익한 것인지 판단·결정하고, 해로우면 해로운 마음으로, 유익하면 유익한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업(業)을 짓는다. ‘17찰나’는 0.23초…0.23초 안 되면 다음 대상을 인식하지 못한다.
삶의 기억들이 신경회로로 체화되어 뇌에 쌓인다고 하였다. 체화된 신경망은 유식학자의 언어로는 훈습(薰習)된 종자(種子)이다. 훈습된 종자는 무시로 폭류 같이 흐른다고 하였다. 현대 뇌과학적 언어로 표현하면 체화된 신경회로들은 조용히 있지 않고 항상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조용히 웅얼거리기 때문에 의식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그러다가 특정 신경회로의 활성이 커지면 그 기억이 의식에 들어온다. 어떤 생각이 문득 떠올라 일어나는 것은 이런 경우이다.
첫번째 화살을 알아차려 두번째 화살로 가지 못하게 하는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대부분은 특정하지 못한 단서(자극)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 자극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분명한 단서가 계기가 된다. 첫 번째 화살이 이런 경우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나에 대한 험담을 하였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면 순간 화가 난다.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이다. 이러한 첫 번째 화살들은 우리의 삶에서 인연에 따라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우리의 생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인간이 나를 욕한다고?’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보통은 두 번째 화살에서도 끝내지 못하고 세 번째, 네 번째 화살을 연이어 맞기도 한다. 부처님은 이는 어리석은 마음이며 두 번째 화살 및 이어지는 화살을 맞지 말라고 이르신다.
왜 이어지는 화살을 맞을까? 마음은 왜 꼬리를 물고 이어질까? 과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왜 체화된 신경망은 연이어 활성화될까? 생각이 떠오를 때, 서로 관련 없는 내용이 무작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연관된 정보들이 이어지며 떠오른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서로 연관된 정보들은 서로 연결되어 저장된다. 연관신경망(associative neural network)이다
그러기에 하나의 마음이 떠오르면 연관신경망을 타고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이것이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 마음의 흐름)의 신경 근거이다. 어떤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뿐인가? 그 사람의 목소리, 행동, 나와 관련되었던 일화들이 구슬에 꿰이듯 떠오른다. 두 번째 화살을 맞는 뇌신경 근거는 연관신경망이다.
왜 연관된 정보는 서로 연결되어 체화(저장)되는가? 기억 신경회로(체화된 마음)는 유사한 것끼리 서로 연결되어 저장된다. 예로써, 사과끼리는 가장 가깝게 연결되고, 조금 떨어진 곳에 배에 대한 신경회로가 연결될 것이다. 보다 상이한 바나나에 대한 기억 신경회로는 더 멀리 떨어져 생성된다. 이는 마치 도서관에 책을 보관할 때 서로 관련된 분야의 책들은 인접한 장소에 보관하는 것과 유사하다. 새로운 정보는 기존의 연관된 정보 옆에 두는 것이 서로 관련지어 생각하기 용이하다. 책장에 새로 구입한 책을 꽂아 둘 때 우리는 이미 보관된 책들과 가장 관련이 깊은 자리를 선택한다. 그래야 찾기 쉽기 때문이다. 뇌도 마찬가지다.
유사한 모양새들이 서로 연결되어 저장될 뿐 아니라, 관련된 내용 또한 서로 연결된다.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허브를 통하여 연결될 수 있다.
연관신경망이라고 하여 교집합 같이 동그라미 두 개가 서로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뇌신경망은 11차원의 공간에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복잡한 공간에서 서로 얽힘이 있다는 것이다.
뇌의 각성 상태가 의식의 내용 수준을 결정
거미가 거미줄로 먹잇감 알듯 전전두엽 신경망이 의근 역할
현대 뇌과학서 전전두엽 주의신경망에 VEN 신경세포 발견
VEN 신경세포 많고 적음 따라 논리적 사고·기억력 결정돼
의식(意識)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는 현대 뇌과학도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이다. 하지만 2500여년 전 붓다는 ‘마노[意]와 법[法]들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의식]가 일어난다’고 간결하게 설했다[‘맛지마니까야 148’ 여섯씩 여섯 경(Chachakka Sutta, M148)].
붓다는 우리에게 여섯 가지 감각이 있다고 보았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눈, 귀, 코, 혀, 피부; 전오근이라 함]에 더하여 마노[意根]라는 여섯 번째 감각기관을 설정하고, 그것의 감각 대상을 법경(法鏡)으로 대응시켰다. 그리고 감각기관인 마노가 법경을 감지하면 마노의 알음알이, 즉 의식이 된다고 하였다.
현대 뇌과학은 의식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본다. 의식의 수준과 의식의 내용이다. 의식에는 반드시 의식의 내용이 있다. 예로서 사과, 자동차, 건물 등 물체를 의식하고, 감정, 망상, 생각 등도 의식한다. 내용이 없는 의식은 없다. 붓다가 ‘마노[意]와 법[法]들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고 설한 것은 의식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즉, 의근[마노]에 감각된 인식대상[法鏡]이 의식의 내용물이 된다.
의근이 감지하는 대상은 법경(法鏡), 즉 법이라는 감각대상(dhammāramma
ṇa)이다. 이는 눈, 귀, 코, 혀, 피부[전오근이라 함]가 결코 감각하지 못하며, 오로지 마노만이 감각할 수 있다. 지난 연재에서 법경은 추상적인 것이며, 그것이 무엇이든 뇌신경회로의 활성이라고 설명했다. 그 뇌활성들은 뇌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눈, 귀 등 전오근은 결코 법경을 감지할 수 없고, 오직 마노[意根]만이 법경을 감각한다.
이제 의식의 수준을 살펴보자. 언뜻 내용이 없는 의식은 없어 보인다. 내용이 있는 의식, 예로서 꽃을 의식하든가 생각을 의식하는 등은 모두 ‘완전한 의식’ 상태이다. 불완전한 의식 상태도 있다는 의미이다. 의식의 수준에 따라 수면, 식물인간 상태, 최소 의식 상태, 최면 상태, 완전 의식 상태 등 의식의 상태는 다양하다. 의식의 수준에 따라 ‘의식의 내용물’이 담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내용을 담았더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의식의 수준은 뇌의 전반적인 각성 수준이다.
뇌의 각성 수준이 견실해야 의식의 내용을 담을 수 있다. 식물인간 상태, 마취 상태, 수면 상태는 의식 수준이 매우 낮아서 감각이나 생각 등 의식의 내용물을 담을 수 없다. 그리고 최소 의식 상태에서는 의식의 내용물을 담을 수는 있지만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상태를 ‘의식이 몸에 갇힌 상태’라 한다. 마취에서 깨어나기 직전 흔히 이런 의식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병실이라면 이때는 의료진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의식할 수는 있지만, 반응은 하지 못한다.
의식이 몸에 갇힌 것이다. 의식의 수준과 내용물은 거미줄과 거기에 걸린 먹잇감에 비유해볼 수 있다. 거미줄이 부실하면 먹잇감이 아예 걸리지 않거나, 걸려도 거미줄이 흔들리지 않아 거미가 먹잇감이 걸렸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거미줄[의식의 수준]이 튼튼해야 먹잇감[의식의 내용물]이 걸린 것을 거미가 알아차린다. 이렇게 보면 ‘의식의 수준’은 인식대상[먹잇감]에 대한 상(像, image)이 맺히는 마음거울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거울이 부실하면 상[의식의 내용]을 맺을 수 없다.
의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현대 뇌과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만, 의식은 전전두엽을 정점으로 하여 형성된다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의식 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내용물의 신호는 궁극적으로는 전전두엽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의근[mano]은 전전두엽의 길목에 있을 것이라고 지난 연재에서 제안하였다. 내용물의 신호가 들어오는 길목에 의근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 신호들을 탐지하고 포섭하여 의식을 생성하는 전전두엽 신경망으로 전달해주는 것이 의근의 역할이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17찰나 인식과정(vithi-citta)에서 의근을 ‘오문전향’과 ‘받아들이는 마음’에 배대시킨다. 마음을 인식대상으로 향하게 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의근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인식대상을 탐지하는 것이며, 뇌과학적으로 보면 인식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주의신경망(attention network)의 기능이다. 주의를 기울인 인식대상은 감마뇌파를 일으키며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이 과정을 붓다는 의근[mano, 주의신경망]이 법경[뇌활성]을 만나면[감각하면] 마노의 알음알이[의식]가 된다고 했다. 2500여년 전의 일이다.
뇌는 11차원으로 연결된 뇌신경망이기에 의근 신경세포들도 11차원의 공간에서 전전두엽의 길목에 흩어져 존재할 것이다. 그 길목에 버티고 앉아 흘러들어오는 뇌활성을 포섭하는 의근 신경세포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물론 아직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증명된 신경세포는 없다. 하지만 주의신경망에 VEN (von Economo Neuron) 신경세포라는 특이한 신경세포가 발견된다. VEN은 매우 큰 방추체 모양의 신경세포인데, 커다란 신경가지들을 이용하여 들어오는 신호를 잘 포착하여 재빠르게 먼 곳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특성은 의근으로 훌륭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증거다.
보통 20대 중반 이후부터 나이가 들면서 논리적 사고나, 기억력이 감퇴된다. 그러나 80대가 되어도 20~30대 젊은이에 비근한 인지능력을 보이는 ‘초-노인(super-ager)들이 있다.
사후 뇌검사를 통해 이들의 뇌에서 VEN이 월등히 많이 보존되어 있었음이 알려졌다. 반면에 알츠하이머 치매나 건망증에 걸린 사람들은 VEN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VEN 신경세포가 의근 및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고 보면 VEN 신경세포들이 이루고 있는 신경망이 의근 신경망일 것이다. 이 신경망이 견실하면 의식이 또렷하다. 마치 거미줄이 튼튼하면 거미가 먹잇감이 걸렸음을 잘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거미의 싸띠(sati, 알아차림)에 해당한다. 거미[sati]는 거미줄[의근 mano, 마음거울]을 관리한다. 이를 두고 붓다는 ‘마노[意]는 싸띠를 의지한다’고 하였다
대승기신론, (眞如心)과 생멸심(生滅心), 일심이문(一心二門)
기원후 2세기 인도의 마명[馬鳴, 아슈바고샤(Asvaghosa)] 보살은 그의 저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우리에게는 진여심(眞如心)과 생멸심(生滅心)이 있다고 했다. 진여심이란 맑고 청정하다고 해서 청정심, 부처님의 성품과 같다고 하여 불성, 여래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여래장이라 한다. 반면에 생멸심이란 파도와 같은 산란하고 혼탁한 마음, 번뇌 망상으로 가득 찬 마음이다.
진여심과 생멸심은 본래 하나의 마음[一心]이다. 일심이지만 두 가지로 표출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잠재적 마음이다. 어떤 마음을 내느냐 하는 것은 수행[마음공부]의 깊이에 달렸으며 이것은 각자의 몫이다. 마명 보살은 일심에 두 개의 방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진여문(眞如門)을 열고 진여심으로 들어가 번뇌와 무명에 오염되지 않고 괴로움을 여읜 해탈·청정한 마음을 낼 수도 있고, 생멸문(生滅門)을 열고 생멸심으로 들어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마음, 즉 번뇌 망상이 마치 죽 끓듯 생멸하는 마음[生滅心]을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마음[一心]에 두 개의 문[二門]이 있어 두 가지 다른 차원의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일심이문(一心二門)이다.
유식학자들은 여덟 가지의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전오식, 즉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과 여섯 번째 마음[六識]인 의식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층의 마음이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층의 마음으로 제7식 말나식(末那識, manas-vijñāna)과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 vijñāna)이 있다. 제7식과 8식은 무의식의 마음이다. 이처럼 유식학자들은 세 층의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가장 깊은 층에 심[心 아뢰야식], 중간에 의[意 말나식], 표층에 식[識 의식]이 있다. 유식학자 원효(元曉, 617~686) 대사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별기(別記)’를 통하여 제8식 아뢰야식을 진여심으로 보고, 그것이 말나식을 거쳐 의식, 전오식으로 표출된다고 하였다. 무의식에 있는 아뢰야식의 종자가 의식으로 나타나는 과정이다.
아뢰야식은 종자가 저장된 종자식이다. 삶의 경험과 행동, 마음이 훈습되어 생성된 종자 하나하나는 기억의 최소단위이다. 현대 뇌과학 용어로 기억의 실체인 엔그램(engram)에 배대된다. 종자[engram]는 삶의 과정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는 전오식이 의식 → 말나식을 통하여 아뢰야식에 저장된 마음의 씨앗이다. 5감뿐 아니라 마음속에 일어난 생각도 마찬가지 과정으로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된다. 반대로 저장된 종자가 의식으로 떠오를 때는 아뢰야식[종자] → 말나식 → 의식의 과정을 거치고, 의식은 전오식을 통하여 현상세계에 펼쳐진다. 펼쳐진 현상세계의 마음은 다시 역순의 과정을 거쳐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된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은 새로운 정보[5감]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마음을 내면서 종자를 축적한다. 현대 뇌과학적 용어로 마음을 뇌신경회로[種子]로 체화(體化)시킨다고 한다. 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이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대상은 외적인 색성향미촉일 수도 있고, 내적인 법일 수도 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알면 진여심[청정심, 불성, 여래장]이고, 탐진치 삼독의 편견으로 알면 번뇌 가득 찬 생멸심이다. 진여심은 번뇌에 물들기 전 우리 본래의 마음이다. 깨달은 성자는 불성의 청정심, 진여심을 내고, 중생들은 번뇌로 물든 생멸심을 낸다.
어떻게 하나의 마음에 두 개의 문이 있어 진여심 혹은 생멸심을 낼까? 원효대사에 따르면 진여심은 아뢰야식이다. 지난 연재에서 아뢰야식은 종자식이며, 종자식이 마음거울에 맺힌 상분을 보는 견분이라고 설명하였다. 세상만사[萬法]는 마음거울에 상(像 image)으로 맺히고 그것은 ‘보이는 자 상분(相分)’이 된다. 이 상분을 ‘보는 자 견분[見分 종자식]’이 보면 마음[인식(想), 앎]이 생긴다. 그런데 견분이 상분을 보는 과정에 말나식이 개입한다.
유식사분설-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
유식학자들은 말나식이 아뢰야식[종자식, 見分]을 집착하여 상분을 안다고 한다. 말이 어렵다. 종자식 자체가 독립적으로 상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종자식[見分]이 상분을 볼 때 말나식이 개입하여 주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지난 연재에서 견분이 상분을 본다는 것은 기억이미지[見分]와 상분을 대조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기억이미지가 번뇌로 오염되어 있지 않는 한 견분이 상분을 직접 보면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 진여심이다. 하지만 기억 이미지가 오염되어 있고, 편견을 가진 말나식이 왜곡하기에 범부의 마음은 생멸심이다.
진여심은 오염되지 않은 불성이요 청정심이다. 범부들의 진여심은 탐진치 번뇌로 오염되어 있다. 따라서 오염되지 않은 원래의 진여심을 아마라식(阿摩羅識, 제9식)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이는 범부들도 오염되지 않은 불성, 즉 여래의 씨앗인 여래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오염이 되어 불성이 감추어져 있을 뿐. 마음오염[煩惱]을 걷어내어 불성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마치 거울에 때가 끼어있으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비추지 못하듯 종자들이 불성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번뇌로 오염된 생멸심으로 드러나게 된다. 아뢰야식[종자식]을 깨끗이 맑혀 진여본성이 발현할 수 있게 하는 지혜가 대원경지(大圓鏡智)이다.
진여심은 원래 청정했는데 왜 오염이 되었을까? 아기들의 마음은 청정심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엄마 젖을 먹고자 하는 본능 외에는 마음이라 할만한 것이 없다. 세상과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이렇다 할 종자가 별로 없고, 있어도 오염되지 않은 맑은 종자들이다. 아기는 성장하면서 ‘내 것’ ‘세상과 분리된 나’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된다. ‘체화된 자아(embodied ego)’이다. 세상과 분리된 체화된 자아는 성장 과정의 경험치들을 훈습하여 종자로 저장한다. 종자들은 쌓여서 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하는 자아(narrative ego)’이다.
경험치들을 훈습하여 종자[아뢰야식]로 저장할 때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는다. 좋고 싫음으로 편견의 때[번뇌]를 묻혀 대상을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뢰야식은 번뇌로 오염된 채 체화된다. 범부들의 오염된 여래장이다. 종자라고 하여 씨앗 하나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아무리 간단한 기억의 종자라 하더라도 그것은 뇌 속에 11차원으로 펼쳐진 복잡하기 그지없는 뇌신경망이다. 수많은 종자들이 서로 얽혀 연관된 연결망을 형성하고 무시로 폭류같이 흐르며 의식으로 표출될 기회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범부의 여래장이 생멸문으로 나서는 과정을 상상해 본다.
감각과 생각 등 삶의 경험은 뇌를 자극하고, 뇌는 그러한 자극들에 대한 신경회로를 만들어 흔적을 남긴다. 마음도 그렇게 뇌에 흔적을 남기며 체화된다. 마음이 물질로 축적되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훈습(薰習)된다고 했다. 흘러간 마음의 흔적이 뇌에 고스란히 쌓여 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은 곧 나의 이야기하는 자아(narrative ego)가 된다. 또한, 그 훈습된 흔적들은 마음의 씨앗[종자(種子)]이 된다.
경험하는 마음은 대상을 아는 인식이다. 인식 대상은 뇌의 마음거울에 상(image)을 맺고, 그 상을 뇌가 보아서 안다. 유식학자들은 마음거울에 맺힌 상을 상분(相分), 상분을 보는 자를 견분(見分)이라 했다. 견분이 상분을 보아 그 상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 일어난다. 이렇게 외부의 인식대상에 대한 상이 마음의 의식공간에 심상으로 떠오른다[현현(顯現)]. 외부 세상이 그 무엇이든 내가 인식하는 것은 나의 마음공간에 현현하는 심상이 전부인 것이다. 만법유식(萬法唯識).
인식 작용에서 상분과 견분의 두 가지 활동만으로도 충분할까? 견분이 상분을 잘못 보면 인식오류가 일어난다. 또한, 말나식이 개입하면 상분을 오염시켜 생멸심이 일어난다. 유식론자들은 자증분(自證分)을 설정한다. 견분이 상분을 착오 없이 잘 인식하는가를 감시하는 주관심이다. 어떤 논사들은 증자증분(證自證分)도 설정한다. 자증분이 견분의 활동을 잘 감시하는지를 감시하는 주관심이다. 이런 식으로 증자증분을 다시 감시하는 증증자증분(證證自證分), 증증증자증분(證證證自證分)을 설정할 수 있지만 이들은 모두 증자증분과 같은 역할이므로 모두 증자증분으로 묶었다. 이처럼 인식과정에는 상분, 견분, 자증분, 증자증분이 있다고 유식학자들은 설한다. 유식 4분설(唯識 四分說)이다.
유식 사분설은 인식과정의 계층구조(階層構造. hierarchy)를 나타낸다. 뇌는 신경세포들이 적어도 11차원으로 서로 연결된 계층신경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분도 이러한 11차원의 뇌공간에 펼쳐진 어떤 뇌신경망의 활성이다. 지금 활성화되고 있는 그 뇌신경망[相分]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11차원의 공간 속에 흩어져 저장된 ‘기억 신경회로망[種子]’들이 동원되어 상분과 비교하는 과정이 견분[種子]이 상분을 보는 과정이다. 그 대조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를 감시하는 신경망이 자증분이요, 이를 다시 감시하는 신경망이 증자증분이다. 11차원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사분은 인식과정에서 동시에 작용할 수 있다. 견분이 상분을 보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자증분이 검증하고, 자증분의 활동을 증자증분이 실시간으로 검증한다는 뜻이다. 견분이 상분을 보고 난 후에 자증분이 그 결과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견분이 상분을 보는 그 순간순간에 자증분과 증자증분이 동시에 그 현장에 함께 하는 것이다. 11차원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불교 인식논리학에서는 마음공간에 3가지 인식대상[성경(性境), 대질경(帶質境), 독영경(獨影境)]이 떠오를 수 있고, 그것들을 아는 양식에도 3가지(現量, 比量, 非量)가 있다고 본다. 각각 유식학의 삼류경설과 삼량이다. 현량은 현재 눈앞에 있는 어떤 대상을 틀림이 없이 인식하는 것이다. 토끼를 보고 토끼라 알고, 거북이를 보고 거북이라 알고, 연기를 보고 연기라고 아는 것이다. 마음공간에 떠오르는 이러한 올바른 인식대상을 성경(性境)이라 한다. 비량(比量)은 비교하고 추론해서 아는 것이다. 산 너머 시커먼 큰 연기가 솟아오르면 그곳에 산불이나 큰 화재가 있다고 안다. 이는 연기와 연관된 사실을 추측하여 아는 것이다. 뇌의 연관신경망(associated neural network)에 기인한다. 비량(比量)은 가끔 틀릴 수도 있다. 산길을 가다가 꼬인 새끼줄을 보고 살모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는가. 이처럼 비량(比量)은 ‘생각을 거친 간접적인 앎’이기에 틀릴 수 있다. 이때 마음공간에 잘못 떠오른 인식대상을 대질경(帶質境)이라 한다. 인식과정의 사분이 오류를 범한 것이다.
대질경은 정상인의 마음공간에 흔히 떠오르는, 뇌 능력의 한계에서 오는 인지오류이다. 하지만 토끼에 사슴뿔을 덧대어 ‘뿔이 난 토끼’를 마음공간에 그리기도 하고, ‘털이 난 거북이’를 그리기도 한다. ‘토끼 기억신경망’과 ‘사슴뿔’ 신경망을 합하여 생성된 가상의 앎이다. 이러한 그릇된 앎을 비량(非量)이라 하고, 이때 마음공간에 떠오르는 인식대상을 독영경(獨影境)이라 한다. 이는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그려낸 허구적 이미지, 환각(幻覺)이요 환영(幻影)이다. 심하면 ‘내 음식에 누가 독약을 넣었을 거야’라고 음식과 독약까지도 연결한다. 손상된 마음, 정신병이다.
뇌는 시뮬레이션(simulation) 장치이다. 습득하여 체화시킨 종자를 가만히 두지 않고 이리저리 바꾸어본다. 약속한 시간이나 장소를 처음에는 정확히 기억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뇌의 시뮬레이션 작용으로 기억정보가 이리저리 변형된다. 종자 하나하나를 변형시키기도 하지만 종자에 엉뚱한 종자를 덧씌우기도 한다. 엉뚱한 종자끼리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나타나는 현상이 비량(非量)이다. 토끼에 뿔을 덧대고, 거북이에 털을 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뮬레이션은 창조의 기반이 된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엉뚱한 생각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것은 기존의 사고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뇌의 시뮬레이션 기능은 [참고그림]이 잘 보여준다. 없는 선을 그려 넣고, 길이나 크기를 왜곡시킨다. 꿈에서는 시뮬레이션 기능이 활개를 친다. 많은 경우 꿈에는 논리가 없는 이유이다. 뇌에 체화된 이런저런 종자들을 아무렇게나 연결시키는 것이 꿈이다. 그런 과정은 때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조한다.
연관신경망에 의하여 서로 관련이 있는 정보들끼리는 서로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서로 관계가 없는, 뇌에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엉뚱한’ 종자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될까? 신경망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신경망이 있고, 그 신경망들을 다시 서로 연결시키는 신경망들이 있다. 그 최정점에 일반지능신경망(general intelligence network, g-network)이 있다.
싸띠수행은 싸띠(알아차림)를 계속 반복하는 것
싸띠수행은 싸띠(알아차림)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들숨날숨 호흡수행’은 들숨과 날숨을 반복해서 알아차림하지 않는가. 길게 들이쉬면 길게 들이쉰다고 알고, 짧게 들이쉬면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림한다[맛지마니까야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 경(MN118 Ānāpānasati Sutta)]. 근육운동이 근육을 발달시키고, 에어로빅이 심폐기능을 발달시키듯 싸띠수행은 싸띠[알아차림] 기능을 발달시킨다. 뇌과학으로 보면 싸띠는 인지기능에 속하기에 싸띠수행은 인지조절신경망의 기능을 강화시킨다. 인지조절신경망이 강해져서 알아차림이 잘 되면 마음을 잘 조절할 수 있다. 예로서, 화가 일어남을 알아차림하면 화를 멈출 수 있다.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가 올라오는 것을 아는 순간 화는 멈춘다. 우울과 불안도 마찬가지다. 나의 마음이 우울함을 알면 ‘어, 내가 왜 우울해 하지?’ 하고 빠져나온다. 그렇지 못하면 우울의 넝쿨에 사로잡히고 만다.
싸띠수행은 싸띠(알아차림)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들숨날숨 호흡수행’은 들숨과 날숨을 반복해서 알아차림하지 않는가. 길게 들이쉬면 길게 들이쉰다고 알고, 짧게 들이쉬면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림한다[맛지마니까야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 경(MN118 Ānāpānasati Sutta)]. 근육운동이 근육을 발달시키고, 에어로빅이 심폐기능을 발달시키듯 싸띠수행은 싸띠[알아차림] 기능을 발달시킨다. 뇌과학으로 보면 싸띠는 인지기능에 속하기에 싸띠수행은 인지조절신경망의 기능을 강화시킨다. 인지조절신경망이 강해져서 알아차림이 잘 되면 마음을 잘 조절할 수 있다. 예로서, 화가 일어남을 알아차림하면 화를 멈출 수 있다.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가 올라오는 것을 아는 순간 화는 멈춘다. 우울과 불안도 마찬가지다. 나의 마음이 우울함을 알면 ‘어, 내가 왜 우울해 하지?’ 하고 빠져나온다. 그렇지 못하면 우울의 넝쿨에 사로잡히고 만다.
알아차림 힘이 약하면 마음이 대상에 끌려다닌다. 인식 대상이 만드는 표상에 휘둘리게 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살면서 괴로움을 주는 화살을 맞지 않을 수 없다. 혜능 스님을 깨닫게 하였다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다. 지금의 마음을 알아차림하면 마음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수행으로 싸띠 힘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다. 물론 궁극적 목표는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