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소소한 행복
며칠 사이 참 많이도 먹고, 많이도 웃는다.
5월 17일, 여든 해 지기 고향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 넷이 까치울역 근처에서 만났다. 손질한 민물장어 2.2kg를 구워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남아, 남은 장어는 도시락에 싸서 친구네 손에 들려 보냈다.
“ 술안주로 가져가세요.”라는 친구 부인의 말이 들렸지만, 못 들은 척 웃어넘겼다.
그리고 어제, 5월 19일 화요일 점심에는 친구 다섯이 오래 다니던 횟집에 모였다. 두어 달에 한 번씩 만나던 자리인데도, 만나기만 하면 늘 시간이 짧다. 소맥잔이 몇 번 오가고, 미처 다 못 나눈 이야기들이 이어지다 보니 세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나이가 들어도 친구들과 웃으며 보내는 시간은 참 귀하다. 아니, 어쩌면 젊을 때보다 더 귀한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아침부터 집안이 부산했다.
아내는 옷을 갈아입었다 벗었다 하고, 모자도 써 보았다 벗어 보았다 하며 들떠 있었다. 호수공원에서 친구 네 명을 만나기로 했단다. 누군가 준비해 온다는 찰밥 이야기에 마음이 먼저 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들려왔다. 전화 몇 통이 오가더니 결국 영등포 L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VIP룸에서 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카드를 가진 사모님격 친구가 있다 아내는 괜히 자랑하듯 이야기하고는 우산을 챙겨 나섰다.
하루 건너 술도 마셨고 몸도 약간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가만히 누워 쉬고만 싶지는 않았다.
창밖에는 비가 촉촉이 내리고, 집 안은 어둑하고 침침했다. 문득 창틀에 내려앉은 먼지가 눈에 거슬렸다. 앞베란다와 뒤 복도 창틀마다 도시 먼지가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래, 오늘 같은 날 싹 씻어내자.”
퐁퐁에 식초를 조금 붓고 베이킹소다 한 스푼을 넣어 묵은 때 닦는 세제를 만들었다. 딱딱한 솔로 창틀을 박박 문지르니 검은 땟국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베란다 바닥에는 얼룩이 번졌고, 긴 밀대로 밀어냈다. 이웃 두 집의 뒤창틀까지 말끔히 닦아냈다. 벽에 튄 얼룩도 지우고 바닥에 물을 부어 쓸어내니 속까지 시원했다.
거실과 방바닥까지 물걸레로 힘껏 밀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냉장고를 뒤져 파 한 뿌리, 배춧잎 두 장, 다시멸치 몇 마리를 꺼냈다. 멸치 똥을 따내고 간장을 조금 넣어 국물을 끓였다. 한쪽에서는 국수 삶을 물을 올리고, 오이채와 마늘도 다졌다.
삶은 국수를 찬물에 박박 씻어 냉면그릇에 담고, 뜨거운 멸치국물을 부은 뒤 오이채와 다진 마늘을 얹었다. 마지막으로 잘 익은 열무김치를 집게로 듬뿍 올리니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명품 잔치국수’다.
당뇨에는 밀가루가 좋지 않다지만, 왜 그리 국수는 사람 마음을 당기고 맛있는지 모르겠다.
500원짜리 동전보다 더 굵게 쥔 국수 한 움큼을 삶아 배불리 먹었다. 청소로 마음까지 개운해진 뒤 먹는 국수 한 그릇은 입도, 배도, 마음도 따뜻하게 했다. 순간만큼은 인생까지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식곤증이 밀려와 커피 한잔도 못 마시고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오후 네 시가 넘어 아내가 돌아왔다.
“갔다 왔어.”
나는 음식물쓰레기 봉지와 곰팡이 핀 쌀이 담긴 페트병 두 개를 들고 우산을 받쳐 들며 밖으로 나갔다. 비는 여전히 소리를 내며 내리고 있었다.
다녀오니 누워 있던 아내가 미안했던지 묻는다.
“밖에 아직 비 와?”
“응, 지금도 제법 소리내며내려.”
그러자 아내는 다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어디 가려고?”
“마트에서 앞다리살 세일한대. 영감이 요즘 말없이 이렇게 집안일 도와주는데, 고기라도 한번 삶아줘야지. 나중에 당신 떠나고 나면 못 해준 게 마음에 남을 것 같아서….”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괜히 밝고도 정겨웠다.
비 오는 하루였다.
창틀의 먼지도 씻겨 내려가고, 집 안 공기도 한결 맑아졌다. 친구들을 만나 웃고 돌아온 아내 얼굴에도 작은 행복이 묻어 있었다.
큰일은 없었다.
하지만 서로를 생각하며 움직인 마음들이 모여 하루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문득 깨닫는다.
가정의 행복은 거창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 말없이 창틀을 닦아주는 손길,
“고기라도 삶아줘야겠다”는 아내의 마음,
그런 사소한 정들이 모여 집을 집답게 만든다는 것을.
팔순이 된 오늘에서야,
나는 그 평범한 진리를 조금 알 것 같다.
비는 내일까지 내린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