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심해
원제 : Devil and the Deep
1932년 미국영화
감독 : 마리온 괴링
출연 : 게리 쿠퍼, 탈룰라 뱅크헤드, 찰스 로톤
캐리 그랜트
게리 쿠퍼, 캐리 그랜트, 찰스 로톤, 이름만 들어도 귀가 솔깃한 명배우들입니다. 이들 배우가 꽤 젊었을 때 함께 공연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1932년 작품 '악마와 심해'라는 영화입니다. 찰스 로톤은 영국 출신의 연기파 배우로 1930년대~50년대에 맹활약하며 많은 작품에서 주연, 또는 조연으로 등장하였고, 악역 연기도 돋보였는데 30년대에 좋은 영화들이 많습니다. '헨리 8세의 사생활' '바운티호의 반란' '레미제라블' '거리의 악사' '노틀담의 꼽추' 이런 30년대 경력을 보면 '악마와 심해'는 그의 경력에서 좀 가볍게 넘길 영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상당히 인상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찰스 로톤이 개성있는 연기파 배우라면 허우대가 아주 멀쩡한 훤칠한 미남 배우 두 명. 게리 쿠퍼와 캐리 그랜트는 1930년대부터 50년대에 맹활약을 하면서 아주 높은 인기를 구사했던 당시 가장 '잘난 남자배우' 입니다.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이 세 명의 인기와 레벨은 당시 할리우드 최고였지요. 더구나 캐리 그랜트는 영국 출신이면서도 할리우드에서 오랜 기간 정상의 자리를 지킨 보기 드문 배우입니다. 로렌스 올리비에, 제임스 메이슨, 데이비드 린, 트레버 하워드, 알렉 기네스 등 영국 일급 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어떤 배우를 받았는지를 감안하면(조연이 많았습니다.) 캐리 그랜트는 리처드 버튼과 함께 할리우드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은 영국배우였습니다.
캐리 그랜트(왼쪽)와 찰스 로톤
20대 후반 시절의 캐리 그랜트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찰스 (찰스 로톤) 함장
30대 초반에도 중후한 멋이 있는 게리 쿠퍼
두 잘난 남자와 뚱뚱한 연기파 배우가 결합하면 어떤 내용이 펼쳐질까요? 이 영화는 잘생긴 두 남자의 외모와 많이 관련된 내용입니다. 상대적으로 못생긴 배우에 속하는 찰스 로톤이 꽤 외모 때문에 설움을 받는 역할이라고 할까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지나친 의처증이 나은 비극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은근 찰스 로톤의 외모가 비하되는 듯한 느낌이 납니다. 즉 못생기면 악당이고 잘 생기면 의인이라도 되는 양. 연기하면서도 찰스 로톤이 실제로 서글펐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자기 외모에 대해서 자책하는 장면도 있고.
북아프리카에 상주하는 미국 해군의 이야기입니다. 잠수함 함장인 찰스는 부관인 재켈 중위(캐리 그랜트)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너무 잘생겨서. 관능적인 아내를 둔 못생긴 남자로서 그가 잘 생긴 남자에게 갇는 열등감과 의심은 무척 큽니다. 주변에서 찰스의 아내 다이아나(탈룰라 뱅크헤드)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고 찰스에 대한 동정여론이 강합니다. 재켈의 전출을 알게 된 다이아나는 남편에게 결백을 호소하지만 찰스는 아내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결국 재켈이 떠나고 셈터 중위(게리 쿠퍼)가 새로 오는데, 그는 이미 다이아나와는 구면이었고, 더구나 재켈 중위에 뒤지지 않게 잘생겼습니다. 왜 하필 새로 부임하는 부관마다 이렇게 잘생긴 것일까요? 결국 찰스는 셈터 중위가 부임하여 첫 잠수를 하는 날 무서운 계획을 세웁니다. 다이아나는 그 사실을 직감하고 셈터 중위에게 알리러 가지만 이미 잠수가 진행되어 다이아나까지 함께 배에 갇히게 됩니다. 과연 찰스는 어떤 일을 꾸밀까요?
잘생긴 부관을 쫓아냈더니 새로 부임한 부관도
역시 잘생긴 인물이라니.....더구나 아내와는 구면
30대 초반에도 M자 머리의 기미가 보이는 게리 쿠퍼
의처증 많은 남편이 결국 큰 사고를 치는 내용인데,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갑니다. 다이아나의 처신도 사실 문제가 많았고. 그럼에도 영화는 잘생기고 멋진 게리 쿠퍼에게 멋진 역할을 부여하고 찰스 로톤에게는 찌질한 연기를 주문하고 있고, 결국 후반부에는 그를 악역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게리 쿠퍼의 활약을 만들어냅니다. 영화가 제법 재미는 있는데 그런 부분때문에 조금 씁쓰레합니다. 결국 미남배우가 정의이고 선이라니. 이유가 미남이고 멋있어서. 그래서 해피엔딩의 탈을 쓴 비극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나 찰스 로톤은 매우 불쌍한 역할입니다. 아마도 찰스 로톤은 평생 연기생활을 하면서 멋진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 한 번쯤 되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뻣뻣한 연기의 표본이랄 수 있는 게리 쿠퍼와 캐리 그랜트 두 명과 함께 출연한 영화였는데 결국 악당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미국 해군의 이야기인데 엉뚱하게도 영국배우 찰스 로톤이 함장을 맡고 있습니다. 캐리 그랜트와 게리 쿠퍼는 원래 좀 아저씨 분위기가 나는 중후한 미남배우인데,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는 매우 젊고 더 잘생겼습니다. 당시 게리 쿠퍼가 31세, 캐리 그랜트는 불과 28세였습니다. 찰스 로론은 외모가 딸리면서도 키도 훨씬 작으니.... 아쉽게도 게리 쿠퍼와 캐리 그랜트는 한 화면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게리 쿠퍼는 주인공급의 비중이지만 캐리 그랜트는 비중이 꽤 약한 조연이라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두 배우가 같이 연기를 펼치는 장면이 보고 싶었는데 등장하지 않네요.
게리 쿠퍼는 당시에 이미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었고, 주연급 스타로 올라선 시기였는데 '모로코' 같은 수작을 벌써 남겼고, '악마와 심해'가 만들어진 1932년에 '무기여 잘 있거라'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자리를 잡은 시기였죠 캐리 그랜트는 아직 확고한 주연급 배우는 아니었습니다. 같은 해 마를레네 디트리히 주연의 '금발의 비너스'에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했고, 훗날 캐서린 헵번과 콤비를 이루며 이름을 높이기 전이었습니다. 그래도 비중이 너무 작았습니다. 반면 게리 쿠퍼는 온갖 멋있는 척은 다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멋지지요. 다이아나가 거리에서 방황할 때 흑기사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특히 위기에 빠진 잠수함에서 침착하고 냉정한 판단력으로 헤쳐나가는 장면은 굉장히 멋집니다. 30-50년대는 전형적인 영웅적 주인공과 권선징악적 영화가 많아서 딱 게리 쿠퍼 같은 타입의 배우가 활약하기 좋은 시기였습니다. 키가 훤칠한 미남이면서 중후함도 갖추고 있고 신뢰감까지 있는 외모이니.
자신의 외모를 자책하는 찰스
그는 자신이 못생겨서 아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후반부에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게리 쿠퍼
'케인호의 반란'이 많이 연상되는 작품입니다. 그 영화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보여준 연기가 매우 일품이었는데, 찰스 로톤도 '악마와 심해'라는 제목에 걸맞게 광적인 행동을 하며 대원들을 진퇴양난의 위기에 몰아넣습니다. 악마와 심해라는 용어는 오딧세우스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데 바다에서 괴물과 풍랑을 같이 만난 진퇴양난의 상황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출연 비중은 찰스 로톤과 탈룰라 뱅크헤드가 좀 더 많지만 게리 쿠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영웅같은 멋진 역입니다. 게리 쿠퍼를 확 띄워주는 영화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마리온 괴링이 연출했는데 독특하게도 그는 30년대에만 영화를 만들고 일찍 은퇴하다시피 했습니다.
이 영화는 1932년 작품인데 놀랍게도 1933년 2월에 우리나라에 단성사 극장에서 개봉했습니다. 거의 미국과 크게 시차가 없이 개봉된 것인데, 일제 강점기 시절인 30년대에 많은 서구 영화들이 개봉을 했기 때문에 서구의 문화를 누릴 기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1940년대에 재개봉이 되기도 했는데, 이후 오랜기간 잊혀져버린 작품입니다. 즉 전설적 유명 남자배우 3명이 공연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영화가 된 셈입니다. 외모 지상주의 같은 내용이 좀 아쉽지만 재미는 상당히 있는 영화입니다.
ps1 : 게리 쿠퍼와 캐리 그랜트는 이듬해인 1933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도 다시 같이 출연합니다. 그 영화에서 같이 등장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특성상 따로 나왔을 것 같네요.
ps2 : 1940년대 재개봉한 광고에서도 게리 쿠퍼와 캐리 그랜트의 이름만 있네요. 엄연히 주인공인 찰스 로톤의 이름은 없고. 이래저래 안팍으로 푸대접이네요.
ps3 : 찰스 로톤이 '바운티호의 반란'에 출연하게 된 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영향이 많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ps4 : 1933년 동아일보에 실린 '악마와 심해'의 단성사 극장 개봉 소개기사입니다. 이 당시에도 이렇게 서구영화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실렸다는게 놀랍습니다.
[출처] 악마와 심해(Devil and the Deep 32년) 게리 쿠퍼, 캐리 그랜트, 찰스 로톤 등장|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