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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이판으로 간다면, 지금 까지 쌓아놓은 커리어가 허사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와 시작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사이판으로 가게 된다 해도 뭐든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사이판에 가면 어떻게든 윤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숨긴다고 해도 얼마나 숨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반대로 같이 있을 수 없게 된다면......? 혹은 보통의 연인들처럼, 사랑하다 싸우다 그렇게 헤어져버리게 된다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은재의 말에 윤호는 알았다고 순하게 대답해주었다. 혼자 침대에 누운 은재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내내 뒤척이고 있었다. 윤호는 그 큰 몸을 구기고 거실 소파에 자고 있었다. 차라리 예전 같은 사이였다면 옆에서 자도 괜찮았을 텐데. 이런 사이가 되고 나니 되레 한 침대를 쓴다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새삼스러웠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자주 한 침대에서 자기도 했고, 속옷 한 장만 걸치고 잔 덕분에 아침나절 적나라한 몸의 변화를 보며 짓궂게 놀리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하아…….”
밤새 한 숨이 터져 누구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50.
“다녀올게.”
생긋 웃으며 인사를 하는 시현을 연정은 애써 미소를 지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곧 시현이 문을 열고 닫기 직전 다시 한 번 연정을 보며 웃어주는데,
“시현아!”
“......?”
다급히 시현을 부른 연정이 맨발로 달려 나가 시현의 목에 두 팔을 감아 안고 매달린다. 시현은 당황했지만, 곧 제 품에 안긴 연정의 작은 몸뚱이를 꼭 안아주었다. 연정에게서는 나는 샴푸향이 좋아서 정수리에 사랑스럽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맨발인 연정이 혹여나 발이 시릴까 허리를 안아 들어 연정의 두 발을 제 구두 위에 올려 둔다. 연정은 그런 시현을 더욱 꼭 끌어 안으며 말했다.
“운전 조심해.”
“알았어.”
“뭐든 꼭 다 조심해. 알았지?”
“응. 알았어.”
시현은 연정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며 대답했다. 시현의 손길에 안정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오늘은 야자 감독 없지?”
“응.”
“저녁 해 놓고 기다릴게.”
이 말이 너무 좋아서, 시현은 연정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세상에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아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는 거야? 이게 현실일 수 있어?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현실이 아닌 것처럼 행복했다. 그래서 불안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곧 천천히 시현의 품에서 떨어져 선 연정은 예쁜 미소로 시현의 얼굴을 마주했다. 웃고 있는 연정의 얼굴을 보며 시현도 미소를 지었고, 연정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사랑스럽게 부빗거렸다.
“사랑해.”
말보다 더 달콤한 그 목소리 그리고 그보다 더 달콤한 그 마음에 온통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힘겹게 아침 배웅 인사를 하고 연정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아침 설거지를 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섰다. 차분하게 설거지를 하려 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자꾸만 그릇이 손에서 미끄러져 나간다.
지잉.
그때 연정의 핸드폰이 울리자, 연정은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화들짝 놀라서는 급하게 고무장갑을 빼고 테이블 위에 둔 핸드폰을 집어 든다. 발신자를 확인한 연정이 다급히 전화를 받는다.
“윤아!”
[Good Morning.]
느리고 느긋한 어투는 결코 능글맞지 않고 늘 사람을 안심 시켜주는 여유가 있다.
[한국은 아침 맞지?]
“응. 뉴욕은 지금 저녁이지? 저녁 먹었어?”
[그럼, 병원에 있으면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윤의 농담에 연정이 옅게 웃으며 말한다.
“넌 병원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럼. 때 되면 밥 줘. 아프면 약 줘. 그리고 여기 있으면 다들 나랑 같으니까 친구가 될 수 있잖아.]
윤의 말에 연정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어린다.
“그래도 나는 니가 꼭 병원에서 나왔으면 좋겠어. 나처럼.”
[그러려면 나도 너처럼 제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한 뭔가가 필요하겠지.]
“그렇게 될 거야.”
진심을 담아 말하는 연정에 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연정도 그 잠시의 침묵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알아봤는데 말이야.]
“응…….”
대답하는 목소리처럼 연정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미행이 있긴 있더라고. 그런데 일단은 니 신상에 대한 감시 정도인 것 같아. 그러니까 너무 예민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래?”
[응. 그렇지만 사람이라는 건, 언제 어떻게 돌아버릴 지 모르는 거니까.]
“…….”
윤의 말에 조금 풀어졌던 연정의 얼굴이 다시 굳어진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정신병원에 오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잖아?]
“나야 그렇지만……. 넌 정말 아픈 게 아니잖아.”
연정의 말에 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무튼, 결국 그 쪽에서 니가 필요한 이유는 지분이잖아? 그 말인 즉, 너한테 지분이 없다면. 그들이 널 노릴 이유도 없겠지.]
“그렇겠지…….”
[지분을 처분해버려.]
“하아, 말이 쉽지. 내꺼라는 대도 나는 대체 그게 뭔지. 뭘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라.”
아버지의 유언으로 받은 지분은 연정의 것이지만, 온전히 연정의 것은 아니다. 제 것이라면서 마음대로 양도조차 할 수 없다. 아버지는 어째서 제게 이런 큰 짐을 두고 가신 것인지. 이제는 조금 원망스러워진다.
아버지는 정말 나를 사랑하셨을까?
한때는 분명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자꾸만 의구심이 들고 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 사람 하나 죽이는 거야 일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 생각엔 그 사람은 건들지 않을 것 같아.]
“정말?”
창백한 연정의 얼굴에 이제야 화색이 돈다.
[죽여야 한다면, 그 사람보다는. 너겠지.]
“…….”
윤의 말에 연정은 초연한 얼굴로 가만히 한 숨을 쉰다. 그리 놀라거나 절망한 얼굴은 아니었다. 되레 덤덤하고 어쩌면 예측하고 있었던 일이었던 듯 했다. 자신이 당하게 될 99%의 일보다 혹여나 시현이 당할지도 모를 1%가 더 크게 걱정되었다.
“이제는 말이지……. 정말로 죽고 싶지 않은데…….”
연정이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살고 싶어졌거든. 그 애와 함께…….”
연정의 말에 수화기 너머 윤의 깊은 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있지. 김지후에게 도움을 청해보는 건 어때?]
“글쎄…….”
연정이 탐탐치 않은 듯 웃는데 윤이 말한다.
[어차피 김지후가 원하는 건 결국 회사고,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증오 때문에 아버지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내려 하지만. 그래도 결국 회사는 지키려고 하잖아? 그 인간들 생명줄인데.]
“그렇긴 한데. 어떻게 얘기해?”
[솔직히 다 말해. 너는 사실 아버지 유언을 따를 뿐, 지분이니 뭐니 관심도 없다. 그저 10년 전 첫사랑을 다시 만나 그와 함께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풋. 너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니?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솔메이트잖아.]
윤의 말에 연정이 웃는다.
“생각해볼게. 고마워.”
[응. 아참.]
“응?”
[너 떠나고 한 동안 내가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적적했는데, 최근 우리 병원에 입원한 사람 중에 너처럼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했어.]
연정은 윤이 기본적으로 가여운 사람을 그냥 두지 못하는 성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윤 역시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그랬기에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고, 그래서 사랑해버렸다고. 그는 그의 아버지와 같은 여자를 사랑했다. 그녀는 윤보다 고작 5살 연상으로 아르헨티나 출신이었다. 칠흑처럼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과 밀로의 비너스의 환상이라 할 만큼 풍만하고 아름다움 몸을 가지고 있고 있었다. 윤의 아버지에게 그녀는 파티나 행사에 참석할 때 자신의 남성성을 돋보이게 해 줄 악세서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윤의 아버지를 떠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홀로 미국에 건너와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그녀가 안쓰러워서, 처음에는 그래서 관심을 가져 주었고 곧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윤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아버지에게 찾아가 그녀를 달라고 부탁했지만, 얼마 후 그녀는 자택에서 복부에 칼을 맞은 자인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범인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다 아버지와 한통속이었다. 윤의 아버지는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 동부의 경제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CRC(Corporate Restructuring Company : 기업 구조조정 전문회사)의 CEO였기에 뉴욕에서 그의 아버지는 모든 글로벌 기업들조차 고개를 조아리기 하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윤 역시 원래대로 라면 하버드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회사를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대신 아버지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나름의 팀을 구성해 아버지의 목에 칼을 겨눴지만, 결과는 정신병원 행이었다.
“정말? 어떤 사람인데?”
[불쌍한 사람.]
윤의 대답에 연정은 그저 웃고 만다.
“항상 어디에 있든 니가 행복하길 바래.”
[니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거야. 우린 솔메이트니까.]
“알아. 그러니까 나도 행복해질 거야.”
[May God’s grace always be with you.]
(신의 은총이 언제나 너와 함께 하길.)
통화를 마친 연정은 조금은 홀가분해진 얼굴로 가볍게 숨을 내쉬어 본다. 그리고는 설거지를 마저 끝내고는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꺼내어 코드를 연결한 후 창문을 열어본다. 불어오는 바람이 확연히 시리고 차가웠다. 겨울이 오고 있다.
+
“어.”
[나와. 술 한 잔 하자.]
그렇게 끈긴 전화에 윤호는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널브러져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옷을 챙겨 입었다. 집 앞으로 나가니 단지 내 놀이터에 홀로 그네를 타고 있는 은재가 보인다. 슈트 차림에 내일 모레 서른이 될 남자가 그네를 타고 있는 게 어색하고 이상해야 하는데, 윤호는 그런 은재의 모습에서 추억을 보았다. 그러자 입고 있는 슈트가 마치 교복으로 보였다. 바람에 정신없이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그 속에 얼핏 얼핏 비추는 티 없이 순진한 얼굴.
“왔어?”
윤호를 발견한 은재가 그네에서 내려 윤호의 앞으로 가다왔다. 윤호는 눈을 내려 제 앞에 선 은재를 가만히 바라봤다. 자꾸만 10년 전의 모습과 겹쳐보여서 묘하게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같이 포장마차로 가면서 늘 그렇듯 윤호는 말이 없고 은재는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린다. 윤호가 별 다른 반응이나 대꾸가 없어도 은재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가 반응하지 않아도 제 말을 잘 들어주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포장마차 오랜만이다! 우리 대학 때 와보고는 안 와본 것 같은데. 일단 한 잔 마실까?”
조금 들떠 보이는 은재가 귀여워서 윤호는 그저 피식 웃으며 잔을 든다. 곧 은재가 윤호의 잔에 제 잔을 부딪치고는 한 입에 소주를 털어 놓는데,
“크으!!!”
잔뜩 인상을 쓰며 구겨진 얼굴도 이모티콘 처럼 귀여워 보였다. 윤호가 그 앞에 국수를 들이밀며 말한다.
“먹어라.”
“야. 나는 드라마 같은 거 보면 사람들이 포장마차 가면 꼭 우동이나 국수랑 소주 먹잖아. 그게 이해가 안됐거든? 와. 이제 딱 알겠다. 진짜 딱이네, 딱이야!”
은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의 국물을 한 번 더 마시고는 제 잔과 윤호의 잔을 다시 채운다. 그러더니 다시 잔을 들어 윤호의 잔에 부딪치고는 바로 한 입에 털어 넣는다.
“크으으으! 진짜 국물을 부르는 맛이로구나!”
그렇게 부르르르 몸을 떨면서 국수의 국물을 들이킨다. 윤호는 그런 은재를 보다가 잔을 한 입에 털어 넣어 비웠다. 그리고 다음 잔은 은재가 아까 하다 말았던 회사 얘기를 마저 하면서 조금씩 비웠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한 병을 다 비우고 두 번째 병도 거의 다 비워져가고 있었다.
“넌 아직 안취했지? 난 살짝 취기가 오른다.”
은재의 말에 윤호는 그저 가만히 웃을 뿐이다.
“기분 좋게 알딸딸하네. 조금 더 먹으면 용기가 날 것도 같은데…….”
은재의 이 말도 윤호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그건 내가 너무 겁쟁이고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딱. 이 정도에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
은재는 가만히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은재도 윤호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고 각자의 앞에 놓진 빈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
“…….”
“너도 알겠지만, 난 어릴 때부터 꿈이 없었어.”
은재는 초연한 얼굴로 덤덤히 자신의 얘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 비관적으로 사는 애는 아니었지만, 그냥 철딱서니가 없었달까?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뭐라도 하겠지. 막연히 무한 긍정적이었거든.”
윤호도 알 것 같아서, 자꾸만 떠오르는 그 시절의 은재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처럼 귀엽고,
여름처럼 강렬했던,
나의,
첫,
사랑.
“그런데 딱 너네 둘이 대학가고 나 혼자 떨어졌을 때. 니네한테 내색은 안했지만 되게 충격 받았었다.”
“......?”
내내 초연한 얼굴로 평온한 듯 아련한 얼굴이었던 윤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얼굴로 은재를 본다. 은재는 그런 윤호를 향해 생긋 한 번 웃어주고는 다시 시선을 내린 채 차분한 얼굴로 말한다.
“우린 늘 같았잖아.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은 걸 배웠고, 같은 걸 알고 있고. 그런데 나만 달라진 거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에 가서, 다시 우리 셋이 같은 걸 얘기하고 싶었는데……. 근데 나 워낙 공부 못했으니까. 암만해도 내 실력으로 서울에서 대학가는 거 무리였지.”
은재는 머쓱한 듯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런 은재를 보는 윤호의 얼굴은 웃음기 없이 진지했다.
“그래도 우리 비슷한 시기에 군대 갔잖아. 그래서 또 다시 같아 진 거야. 그런데 제대하고 나니까 또 그런 거야. 아니, 스무 살 때보다 더 멀어져 있는 거야. 너네는 점점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난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호주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도 딱히 꿈은 없었어. 결국 돌아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이쪽 일을 알게 되고 혹시나 하고 지원해봤는데, 된 거지. 솔직히 처음에는 잘 몰랐어. 이 일이라는 거. 어떻게 하는 건지. 그냥 열심히 하고 월급 받고, 어디 명함 내밀만 한 직업이 있고.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하다보니까. 이 일이 되게 좋아졌어.”
은재의 말에 윤호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아직 일 년도 안 된 초보지만. 아니, 완전 초짜지만. 나 근데 이 일에 되게 보람 느껴. 스트레스도 많지만 그만큼 나중에 느끼는 성취감도 커. 좀 더 이 일을…….”
“…….”
“하고 싶어.”
“…….”
“잘.”
“…….”
“하고 싶어.”
은재는 여전히 윤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불안한지 괜히 소주잔을 제 입가에 가져다 대고는 그 안에 입술을 가두어 입술을 쭉 내밀어 보인다. 잔을 통해 비친 붉은 입술이 마치 병속에 담긴 알 열매처럼 탐스러워보였다. 윤호는 그런 은재를 바라보다가 평소 같은 어투로 편하게 말했다.
“그래. 잘 해봐. 너한테 잘 맞는 일인 거 같다. 파토 낸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일할 때 보니까 너 진짜 프로답고 멋있더라.”
탁.
윤호의 말에 잔을 내려놓은 은재는, 그제야 윤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
“너랑.”
“…….”
“사이판에.”
“…….”
“못가.”
은재는 윤호를 바라보고 있었고, 윤호는 시선을 내린 채 앞에 빈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주변은 술에 취해 인생에 대해 열별을 토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윤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스무 살 그 시절 은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같이 있을 때는 여전히 마냥 밝고 즐거운 아이였다.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윤호의 착각이었다.
흔히 가장 가까이 곁에 있는 사람을 ‘나와 잘 맞는 사람’,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에 따라 관계가 변하면 늘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잘 맞았던 사람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이 된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과 깊은 신뢰로 맺어진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모를 리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탓하기 보다는 그를 탓한다.
그가 변했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나도 나를 다 알 수 없는데 남이 나를 다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 안 될 일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를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자만이고 착각이다. ‘나와 잘 맞는 사람’은 어쩌면, ‘나를 잘 맞춰주는 사람’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 이해해.”
그 시절 은재가 윤호에게 맞춰주었다면, 이제는 윤호가 은재에게 맞춰줄 때라고 생각했다.
“나도 너한테 강요한 건 아니야. 혹시 어때 하고 니 생각 물어본 것뿐이야.”
윤호의 말에 은재는 어쩔 줄 모르겠는 얼굴을 한다. 윤호는 그런 은재의 눈을 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멀지 않아. 매주 올게. 대신 숙식은 제공해주라.”
윤호의 말에 은재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 했다. 윤호는 그런 은재를 보며 계속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한국에 있더라도 같이 살지 않는 한 매일 보긴 힘들잖아. 똑같아. 시차도 별로 없고. 전화도 내가 많이 할게. 국제전화니까.”
진심 끝에 농담을 섞어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했지만, 결국 은재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손이 꾸물꾸물 눈가로 간다.
“왜 우냐.”
“모르겠어……. 그냥……. 마음이 되게 복잡하다…….”
“복잡할 거 없어. 떨어져 있다고 변할 마음이면, 10년 동안 가지고 있지도 못했어. 안 그러냐?”
윤호는 진지하게 진심을 담아 은재에게 말한다. 그러자 곧 눈가를 정리한 은재가 고개를 들어 윤호를 보며 대답한다.
“그래. 맞다.”
윤호는 그런 은재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한다.
“좋다, 야.”
“뭐가?”
“니가 우니까.”
“뭐?”
“니가 나 때문에 우니까.”
“아니거든?”
그새 평소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발끈하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그럼 뭐 때문에 우는데?”
“나 때문에 운다!”
되도 않는 변명으로 우기는 것도 평소 같아서 마음이 좋았다.
“니가 보여주는 마음이.”
“…….”
“참 좋다.”
윤호의 말에 은재가 입을 다문다. 그러더니 또 머쓱함에 애꿎은 소주잔으로 입술만 괴롭힌다. 그런 은재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윤호가 말한다.
“키스하고 싶은데.”
“......?!”
안 그래도 큰 은재의 눈이 더 크게 떠진다. 그런 반응이 재밌어서 윤호는 웃으며 팔을 뻗어 은재의 잔을 뺏어든다.
“이런데 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니까. 대신 니가 마시던 잔으로 마셔야 겠다. 너 어차피 술 더 안 마실 거지?”
“어? 응…….”
“여기 사이다 하나 주세요.”
그리고는 은재의 잔에 소주를 따라 한 번에 들이키는 윤호에 은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괜히 턱을 괴는 척 손으로 입술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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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이 길고 아팠던 첫사랑앓이의 끝이 보이는 듯 하네요.^^
보아주셔서 감사해요~^^
다들아무일없는거겠죠ㅠ
긴 시간, 아프지만 소중하게 지켜왔던 마음들이
어떤 결말이 될지, 지켜보아주세요.'ㅂ'
보아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