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저편에는
하리야 헌처크
3. Why
믿음이란, 내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또한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소망하는 일이, 내가 바라고 소망한 대로 그렇게 이루어 질 것이란 것을 당연하게 인정하고 기다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곧 볼 수 있게 될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중략)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들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일흔 다섯 살이 되었을 적에 신께서는 그에게 <네가 자녀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신의 약속을 터무니 없다고 무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믿었을 때에 신은 그의 믿음을 비로소 <믿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왜 신께서는 그의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셨을까요? 믿음이란 정녕 무엇일까요?
[성서. 제 3 서신서. 11장 1~2절; 8~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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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중기 시대의 거대한 석조물로 미루어 볼 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대륙공용어는 오래전부터 모든 대륙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사용되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이야기가 우리 플로레 영지에 전해져 내려오는 바, 대륙공용어의 유래는 중기 시대 동방의 강국이었던 최대 해운 조선국이었던 <조선(造船)>의 한 왕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무엇보다도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 국왕의 당연한 도리였고, 특히 나라를 평화롭고 부강하게 다스린 국왕에게는 <군>이라는 칭호를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옵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왕으로 <연상군>과 <방해군>이 있었다고 하지요.]
지루한 여행길이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할 만큼 말이 많은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다. 플로레 영지로부터 <특별히> 파견되어서 플로레 영지의 경계까지 우리를 안내하게 된 플로레 영지의 공무원인 그의 이름은 <지키루 A. 하이두>였다. 자신을 <안내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사람은, 영주관을 떠나는 우리 일행과 함께 마차를 끄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더니, 자신의 마차를 빈 마차로 버려두고는 슬그머니 우리 일행의 마차로 끼어들었다. 그렇잖아도 비좁았던 자리를 더 비좁게 만들어버린 그는, 그러나, 우리 일행의 입을 단숨에 닥치게 만들었다. 어쨌든 그는 우리가 투덜거릴 틈도 없이 끊임없이 말해댔던 것이다.
[그거 아세요, 만다르크 님? 연상군이 연상의 여인을 사랑했는데, 조선이라는 왕국의 법은 <왕이 연상과는 절대로 혼례할 수 없다>는 법 때문에, 결국 사약(思藥)의 힘을 빌어서 - 아시죠? 사약이 정신활동을 돕는 약이었던 것 말이죠 - 그 법조문의 모순을 지적하고는 사랑을 쟁취했던 것 말입니다. 방해군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대륙의 강국이었던 <병(病)>국과 <신(神)>국이 연합해서 조선국을 넘어서 바다로 진출하려던 것을 온 생애를 걸고 방해해서 결국 두 나라의 명운이 다했다는 그 이야기는... 캬아! 그래서 지금도 속담하나가 전해내려오죠. 병과 신이 합쳐서 병신짓을 했다라는 유명한 속담이죠. 하하하.]
끊임없이 말해대는 지키루 씨의 말이 얼마나 청각공해가 되었는지는 투탕카 군만 모른다. 학교 다닐 때에는 역사에 대해서 콧털만큼의 관심도 없어서, 잇몸을 사각사각 갈아대면서 - 이는 이미 다 갈아서 더이상 갈 것이 없었다 - 증오하고 저주했던 역사라는 것에 대해서 이처럼 큰 호의와 관심을 보일지 아무도 누구도 어떤 사람도 알 수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오호, 그랬군요! 연상군의 사랑이야기를 더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드디어 만다르크 씨는 부조리한 세상과 모순으로 점철된 인생에 항복을 선언하는 몸짓을 하면서 조용히 뒤쪽에 따라오는 (지키루 씨에 의해서) 버려진 마차로 거처를 옮겼고 - [끄으응. 몸이 피곤해서, 이만 가서 자야겠습니다. 끄으으응. 해도 지고 했으니 안전운전하세요, 투탕카 씨...] - 메이지 양은 퉁명스럽게 몸을 일으켜서 아무런 말 없이 투탕카 군의 뒤통수를 어루만지고는 - 잠시 투탕카 군이 기절하는 사소한 사건이 있었다 - 뒤편 마차로 옮겨갔다. 나 또한 가련하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앉아있는 레디클 군을 애써 외면한 채 살며서 자리를 옮겼다.
그럭저럭 벌써 빛의 달도 아흐레가 지나가 버렸다. 플로레 영도까지 이럭저럭 가서는, 우리에게 쫄아버린 감찰관의 주선과 함께 우리가 가진 <화려한> 명성으로 - 명성이지... 우리가 누구 아들인데. 하. 하. 하. 어이없다 - 우리는 직통으로 영주 대리 - 지금 포로로 잡혀있는 플로레 영주의 장남 - 를 만나서, 샤리프 영주가 얼마나 극악무도하며 안하무인하고 방약무인한지에 대한 성토를 장시간 청취한 뒤에,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외롭고 불안한지에 대한 일장의 하소연을 듣고는, 마침내 <반드시 국왕께, 기국경 아이스 경과 비내리는 호남검 투탕카 경의 이름으로> 탄원해 줄 것을 부탁받은 뒤에야 비로소 지옥 같은 연회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지키루 씨라는 새로운 지옥 아래서 하루를 마쳐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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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집을 떠난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겨우 한 달여가 되어간다.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일들을 많이 겪었지만, 와사비 영지에서 만난 그 이름 모를 사람과 지금 동행하면서 함께 여행하는 로젠트 영애와 무척이나 큰 대조를 이룬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의 어려움이, 한 사람에게는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원망이나 노여움으로써가 아닌 - 물론 자신의 삶에 대한 체념의 마음이 가득하지만 - 우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을 온 힘을 다해서 도우려고 하는 마음으로 나타나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그의 풍족하고 넘쳐나는 환경속에서도 더 큰 만족과 소유를 얻으려고하는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내게는 커다란 역설로써 인식된다는 사실.
조금 전에 또 하루를 <소일>하면서 지나보내고는, 조용한 밤, 홀로 방에 올라와 앉아있으면서, 내가 모르던 세상은 왠지 그런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듯 하다. 사실 로젠트 영애에 대해서 더 보고 느낄 것은 없겠지만, 단순하고 확고한 그녀의 성격을 지켜보면서 내일의 여정 또한 오늘과 같은 푸념과 한탄의 연속이겠지만,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의 모습이 혹시라도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그녀와 조금 더 다녀 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마차 안에는 작은 화구(火球)가 매달려 있었다. 대륙의 북쪽에서 발견되는 발광석(發光石)을 잘 다듬어서 밤에 불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 돌이 워낙 귀한 것이라서 부유한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 귀하디 귀한 것을, <아버지>를 잘 둔 덕에 지금 이렇게 늦은 밤 시간에 노멀 양의 일기를 읽는데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앞의 푹신거리는 의자는 메이지 양이 차지하고 누워서 코를 살짝 골면서 잠들어 있었고, [아직 안즈르!] ... 잠들려고 하고 있었고 - 코는 왜 골았지? - 내 옆쪽으로는 만다르크 씨가 얼마 안되는 몸길이 만큼의 공간을 차지하고서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만다르크 씨의 머리 윗공간을 차지하고 앉아서 일기를 주욱 읽어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그만 화구를 덮으면 안되겠느르? 잠을 잘 수가 없는드르...]
[조금만 기다려봐. 기왕에 큰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돈값은 해야지. 그리고 너는 돈 한 푼도 없이 떠나왔다면서? 그러니까 잠자코 있으라고.]
메이지 양은 가볍게 으르르 거리다가, 역시 마음 속에 가득차 있는 무전취식에의 강렬한 의지를 발동하여 자신의 수면 욕구를 조용히 잠재운 후에, 거체를 회전시켜 - 돌아누워 - 잠을 청하기 시작하였다. [크르르르~] ... 청할 것 까지도 없었다. <잠>이란 녀석, 이미 문전에서 기다리고 있었군. 나는 다시 노멀 양의 일기로 눈을 돌렸다. 짐... 짐... 짐이라...
2월 1일
오늘은 영애가 마을 이장의 초청을 받아서 연회에 가는 날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머리를 손질한다, 옷을 깨끗하고 좋은 것으로 마련한다, 그러면서 분주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 덕택에 점심 이후로는 홀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풍만하고 여유로운 여름의 더위가 새침스러운 가을 기후의 기세에 점차 눌려가는 늦여름의 호텔, 옥상에는 느긋한 오후가 있었다. 그 여유로움의 한켠에 문득 낮익은 사람이 눈 안으로 들어온 것은 찰나였다. 그는 영애의 호위무사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함께 여행을 하면서 훤칠한 키에 근육질로 다져진 모습에서 듬직함과 멋스러움을 느끼곤 했었는데, 이런 늦여름의 그에게서는 일견 단단함이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함께 하는 호위무사들 중에서도 유달리 말이 없던 그였다는 것을 문득 느낄 수 있었다. 호텔로 들어오는 그에게로 조용히 내려갔다. 마침 그도 옥상으로 올라오던 중이어서, 수직인간운송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의 앞에서 열린 문 뒤로 서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누구를 지킨다는 일, 힘들지 않으세요?
조용한 오후, 뜨겁지는 않은 찻잔을 손에 쥐고서, 나는 혹여라도 그의 고요를 침범한다는 조심스러움으로 물었다.
아니오.
원래 말이 없으신 편이신가봐요? 다른 분들과 얘기하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 듯 하네요.
네. 그런 편입니다.
그는 정말 말이 없는 편이었다. 그는 줄곧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찻잔 속에 벌레라도 들어있지 않은지 살피고 또 살필수 밖에 없었다.
영애와 함께 나가지 않으셨나봐요?
그 곳은 저희가 호위해드리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바람이 살짝 그의 머리를 날렸다. 그는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먼 저편의 뒤, 그 뒤편의 꿈 속을 느끼겠다는 몽환적인 눈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찻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에게로 고개를 향했다. 어느새 그는 조용함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을 알게되어 평생 그 사람만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나는, 아가씨가 있어서 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싶기에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아가씨를 바라봅니다.
이윽고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 너머를 보았다. 그는 먼 뒤편의 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자신의 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호~ 혹여 이것은 말로만 듣던 애절한 순애보의 한 장면인가? 한 사람을 끝간데없이 바라보는 이 시선이란... 부럽다... 처음부터 사랑할 수 있는 그 사랑, 그 사랑이라면 절대로 변하지 않고 한결같을까? 그렇게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혹시... 노멀 양은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심한 압박감을 받고 있는게 아닐까? 흐음. 상당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이 되는걸.
...
무슨 얼어죽을 가능성이냣! 쳇! 노멀 양은 어떤 짐에 눌려 허덕이고 있길래, 이런 일기장 하나 띡 던져주고는 뭐 어쩌라고...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으로 나의 <사람>에 대한 무능력을 더더욱 확실시시키고 있는 내가 정말 한심스럽다. 도대체! 노멀 양의 짐은 무엇일까에 대한 꼬투리가 전혀 안 집혀들고 있다. 뭘까? 뭘까? 뭘까? 뭘까? ... 뭘까? 뭘까? 뭘까? ... 뭐까? 뭐가? 머가...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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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느르으?]
[우우웅. 지금 노멀 양의 일기를 읽고 있는 중이야. 생각보다 읽기 힘드네에.]
[일기장 같은 소리 하느르! 깨워도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마차에서 퍼질러 자는 널 그냥 놔둘려다가 억지로 짊어지고 왔구만, 무슨 영혼 벼나락 까먹는 소릴 하는 것으르! 그렇게 정신 없는 녀석이 무슨 탐자 일을 한다구르르... 보쌈 김치에 담궈서 먹어도 모르겠드르.]
우우웅. 여긴 어딘가... 분명히 어두침침한 마차 속, 희미한 화구 불 밑에서 일기장을 읽고 있었는데... 일기장을 읽다가 그냥 잠이 들었었나보군. 흔들림이 없는 것을 보니, 누가 나를 마차에서 여기로 옮겨온 모양인데... 그럼 여긴 여관인가보군. 메이지 양이 인상을 저리도 쓰는 것을 보니, 역시 내 덩치를 짊어지고 들어올 사람은 메이지 양 밖에 없으니, 그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인가? 하핫. 뭘 그리 분노하기는... 가만... 일기장은 어디에... 머리 맡에 있는 것 같고. 흠. 왜 이렇게 배게 위가 축축한 거지? 이런... 구강 분비물 탓인가? 피곤하면 구강 분비물을 대책 없이 분비한다던데, 마차 여행은 내 여린 몸에 벅찬 모양이야. 음하하. 하하. 하... 그런데... 어... 흐... 흠... 이... 배... 밑의 이 축축한 느낌은 도대체... 뭐지? 뭐... 지...? 으... 응...? ... 으아아악!
[잠시! 메이지 양!]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내 일생 일대 최대의 위기다! 그래,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러나 목소리는 평상시보다 조금 강세를 두고. [미안하지만, 메이지 양, 지금 내가 속옷을 안 입고 있거든. 알다시피 넌 여자고 난 남자잖겠어?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위해서라도...]
다행히 겉이불을 차내어 버리지는 않았군. 이불을 차내지 않고 잘 덮고 자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습관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바람직한 습관이야.
[옷 입고 금방 나갈테니까, 먼저 나가 있어주면 안될까?] 가슴이 떨린다. 아... 사실이 밝혀진다면, 나는 이 사회에서 영원히 매장당하게 될거야... 으윽!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지만, 나를 비웃을 투탕카 군의 모습만은... 안돼! 이 상황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아...! 다행히 메이지 양이 얌전하게 돌아섰다. 역시 나의 뛰어난 임기웅변! 이제 메이지 양이 나가면 재빨리 속옷을 벗은 다음 몸을 재빨리 씻고 나서, 속옷을 물로 잘 행군 후에 적당히 부피가 있는 쓰레기 뭉치와 함께 슬며시 바깥의 큰 쓰레기통에 버리면... 아차! 시트는, 밥을 먹고 올라올 때 물을 한 주전자 가지고 올라와서 모조리 침대에 부어버리고 <실수로 쏟았지 뭐야>라고 하면... 음하핫! 완전 범죄가 가능하다! 다행히 이 험악한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일만은 일어나지 않겠군. 스스로에 대한 수치와 모멸은 당분간 기억속에 남아 나를 괴롭히게 되겠지만, 사람은 망각하기 위해서 기억하니까. 자, 이제 메이지 양, 나가라!
딸깍. 끼이익. 좋아! 메이지 양이 문을 열고 나가고 있다. [좋으르르. 네 완전 범죄를 지켜줄끄르르... 흐르르르... 르르르...]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니다. 내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다.
그렇다. 잠시 망각하고 있었지만, 메이지 양은 마음을 읽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읽혔다.
망했다.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미 우리 일행은 식사를 마쳐가고 있었다. 애써 메이지 양의 시선 방향을 피해서 - 창피해서 그녀를 바라볼 수조차 없다. 아. 쪽팔려 - 자리를 잡고는 - 결국 투탕카 군은 투덜거리면서 메이지 양의 정면 쪽 자리로 옮겨 앉았다 - 얼굴을 음식 차림표에 묻었다.
[아아~ 이 시대 최고의 탐자 가문, 아이스 가문의 잭슨빌 님! 역사 이래로 가장 뛰어난 추리력과 판단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도 기만할 수 있는 팔색 변화의 능력을 이미 드러낸 적이 있는 아이스 가문의 그 타고난 힘은, 마음을 읽는 마인드 리더 앞에서도 들키지 않고 완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죠?<팔색조 도난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섯 명의 마인드 리더들과 추리 대결을 벌일 때, 자신만만하게 공언하셨다는 부친의 그 대담함이 문득 머릿 속에서 다시 추억됩니다. 하하핫.] 뭐래... 갑자기 얼토당토 않는 얘기를 꺼내는거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쩍 메이지 양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퉁명스럽게 웃는 가운데 입모양으로 말했다. <넌 아마도 안될끄르? 으흐르르...> 아아아... 왜 저 지키루 양반은 시의부적절한 말을 때맞춰 하냐고. 쩝.
[잭슨비르르. 몸에 수분이 부족할텐데, 물 한 주전자 갖다줄끄르?] [아아악! 그마안~~!]
... 나는 아무 말 없이 식사에만 관심을 오로지했다. 다행히, 세상에서 가장 다행스럽게도 메이지 양이 나의 일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안했는지, 나의 일행은 고개를 죽그릇에 쳐박고 식사하는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식후 입가심으로 <개나리 죽>을 후르륵 마시면서 자기들끼리 한참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봐야, 메이지 양에게 단단히 발목이 잡혔으니, 당분간, 아니... 평생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웅...
[킁. 제가 잭슨빌 영지에서 한 3년 동안 파견 근무를 겪어보니까, 영지민들의 몸에 배어서 풍기는 고요의 미덕이 뭔지 알 것 같더이다. 크킁. 과묵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전해내려오는 잭슨빌 장군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영지 내의 분위기는 정말 조용하고 고즈넉한 것이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고 안정되게 해주더군요.]
저 만다르크 씨의 말은, 어제 하루동안 지키루 씨에게 충분히 질린 자의, <이 정도로 돌려서 얘기하면 제발 알아듣고 좀 닥쳐라>는 의도가 가득 담긴 하소연임에 분명하다.
[아하핫! 그렇습니다.]
지키루 씨의 목소리는 약간 갈라지는 고음의 그것이다. 듣기에 더욱 거북하게 느껴지는. 게다가 뱉어내는 말의 양도, 마치 거대한 홍수가 나를 집어 삼킬듯이 밀려들어오는 기세와 같이.
[잭슨빌 경은 정말 조용하고 과묵한 분이었다죠? 그것은 그가 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분할 줄 아는, 분명한 자기 관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저처럼 말입니다.] 우웅...
[하하핫. 무릇 사람은 자신의 머릿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과정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그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인간에게는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행위 중에 하나이고, 혹자는 글로써 아니면 몸짓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또한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에서, 내 생각을 말하고, 확인하며 강조하는 것은 의미 없는 무가치한 행동일 뿐이죠. 잭슨빌 경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무가치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데 있습니다. 분명히 나와 타인이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고 같은 것을 행동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인간이란 작자들은 정말 대단한 것이, 자신의 권위와 지식을 뽐내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꼭 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 말입니다. 잭슨빌 경은 그럴 수 있는 자격과 위치, 또한 그렇게 할지라도 존경받고 고개숙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중기 시대에 경처럼 자신의 한계를 알았던 인물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카니발>이라고 하는 유명한 <꽤아푸리다> 대륙의 맘모스 부대 지휘관이었죠. 그는 당시 제일 가장 거대했던 <이노마제국>의 강대함을 인정하면서 신비한 설원의 산맥 <맥도나르도> 산맥을 넘어 제국 황제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감으로써, 그러한 자신의 인간됨을 온 몸으로 인식함을 보였고, 그로 인해 세계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 자신을 불사르는 희생의 미덕을 보여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비프스테이크 마르크>라는 열혈재상은...]
우걱우걱우걱. 나는 잠자코 식사만 했다. 저 대화 사이에 끼어들어봐야... 별 이득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미 메이지 양은 반쯤 돈 상태에 빠져서 허우적 거렸고 - 생각해보라! 말도 정신 없는데, 메이지 양은 저 지키루 씨의 마음도 환히 <들릴 것> 아닌가 - 만다르크 씨는 <내가 왜 괜한 말을 꺼내어 이 곤란을 겪는가!>라는 자책과 회한의 태도로 그릇을 씹어대고 있었다. 레디클 군은... 흥미로운 얼굴로 저 <괴담>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뭐, 예비유학생이니까, 당연하겠지. 그리고... 당연히 투탕카 군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은 굳게 다물고... 허리는 꼿꼿이 펴고... 저게 미쳤나? 어떻게 저렇게 진지하고 열성적인 자세로 저 지루하고 딱딱한 말들을 소화할 수가 있는거지? 아니지, 소화 할 리가 없으니 그냥 무지막지하게 삼켜대는거 아냐?
..
[그렇다면 지키루 님은] 레디클 군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고 영양가 없던 <일장연설>에서 잠시 내 영과 혼을 단속하였던 나는, 시작되는 <대화>에 영혼을 집중시켰다. [말씀하시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까, 역사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계신 듯 해요.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지키루 씨는 - 일장연설로부터 잠시 외출하였었기에, 지키루 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지는 모르지만 - 잠시 입을 앙다물고 하늘을 두어번 추어 보더니 개나리 죽그릇을 만지작만지작 거리면서 진지한 눈매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레디클 군은 소년다운 눈으로 그러한 지키루 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헛헛.] 지키루 씨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뒤편에서 만다르크 씨는 무표정하게 눈의 초점을 풀어 헤친채 어딘지 모를 앞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레디클, 그 질문이 나에게는 썩 감당하기 힘든 물음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어주길 바란다. 상당히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지다니.]
소년은 잠시 당황했다.
[그렇다면 너는 역사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고 되물어봐도 괜찮겠니?]
소년은 얼굴 가득 당황스러움을 내비쳤다.
[어... 전, 잘 모르겠어요. 그런 주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요... 전 아직 어리니까요. 다만, 회당에서 <교회의 역사>와 <대륙사>를 배웠기 때문에, 지키루 님 같은 분의 생각이라면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 뿐만의 역사를 조금 더 제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도우시지 않을까해서요... 그러고 보니... 저를 가르치셨던 감독님께서 과거를 익혀야 현재를 알 수 있고, 그래야 미래를 살아간다고 종종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긴해요.]
그 펑퍼짐한 할아버지?
[오호. 회당에서 배웠다는 말이군요. 회당에서 배웠다고...]
소년답지 않은 질문에 어른답지 않은 대답인걸? 지키루 씨는 소년의 물음보다는 소년의 학습장소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내가 그에게 설명했다.
[저... 레디클 군은 회당에서 살았었습니다. 고아거든요. 그는 부모님이 안계시죠.]
[고아... 요? 저 아이는 영지에서 함께 출발하신 일행이 아니었습니까?] 고음영역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갈라졌다. 내가 말을 무엇인가 좀 어긋나게 했는지, 지키루 씨는 조금 전과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습느르르.] 메이지 양이 퉁명스레 끼어들었다. [플로레 영지를 지나쳐 오던 중에 잠시 도움을 받았던 회당에서, 회당의 감독님의 부탁을 받아서 함께 수도까지 동행하는 중이즈르르.]
메이지 양은 퉁명스러움을 하나 가득 담아 한 마디 쏘아붙였다. [고아란 것이 좀 의아스러우시고 낮선 느낌을 받으신가본데, 레디클은 부모님께서 안 계신 고아 소년이기 이전에 우리와 함께 하는 우리의 일행이니, 그렇게 알고 우리처럼 대해 주시기를 바랍느르르.]
[하... 하하...] 지키루 씨는 민망스레 웃었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레디클 군의 눈자위와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 올라 어디에 시선을 둬야할 지 모르는 듯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엇그젠 그리도 당당하게 말하던 소년이었지만, 아직은 어린 소년, 그것도 부모 없는 소넌이기에. [무슨 말씀을요. 제게는 다섯 분 일행 모두가 예의바르게 모셔야 할 분들입니다. 저희 영주님께 그만큼 중요한 손님들이시니까요. 뭐 꺼림직해한다느니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하... 핫.] 아무래도 속마음이 들킨 듯 하지? 메이지 양... 나날이 잘 읽어들이는걸?
[아! 그렇지, 그렇지. 역사에 대해서 물어봤었지?] 지키루 씨는 어물쩍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메이지 양은 그런 지키루 씨를 바라보면서 퉁명스레 웃고 있었다. 비웃고 있었다.
[역사, 역사라...] 지키루 씨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흠. 얘야. 나 또한 네가 말한대로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연결선상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생각이라는데에는 동의한다. 그리고 사실 역사란 것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쉽고 또 편하기도 하단다. 어찌보면 이치에 맞는 듯도 싶고. 그러나, 역사는 연대표만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야. 몇 년에 누가 낳고 어떤 일을 해서 언제 죽었는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란다. 다른 분들도 거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으시죠?]
마지막 말은 우리 모두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투탕카 군은, 안타깝게도, 열렬히 고개를 세로젓고 있었다. 지가 뭘 아는가? 메이지 양이 퉁명스레 웃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역사는 일반론만 있는게 아니니까요. 아까 레디클이 잠시 언급했지만,] <레디클>이라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 조금 다른 어감으로 들린다. 어제 오늘은 한껏 친근감을 담아서 그 이름을 불렀다면, 지금은 애정보다는 객관적인 거리감이 느껴진다. [<교회의 역사>라는 특수한 한 집단의 역사도 있겠고, 또한 <지키루의 일생>과 같은 개인의 역사도 있죠. 조금 방향을 달리하면, <책의 변천사>와 같은 것이 있기도 하고, <생활사>와 같은 큰 규모의 고찰도 있습죠. 일반적인 <역사>는 다양한 범주와 분류 속에서 여러가지 시선으로 바라보고 또 고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호, 그러고 보니 학교 <대륙사> 시간에 <중기 시대의 사회> <후기 시대 초반기의 예술과 문화> 이런 식의 공부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것을 다 묶어서 <역사>라고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과연 나는 그런 <역사>라는 것을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역사를 분류하는 주체인 <나>에게서 초점을 배제시킨채로 역사를 생각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죠. 역사는 과거를 돌아보아 미래를 살핀다... 라는 것은 결국 그 주체가 <나>는 아닌, 우리 모두가 되겠죠. 그래서 저는 우선 저의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일반론적인 이야기가 주체를 잃을 때, 그 이야기는 공허한 것일테니까요. 그래서 역사를 보는 제 관점은, 결국은 <나>를 중심으로 보아서, 역사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고 역사는 주체인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장대한 일대기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일반론적인 역사까지도 바로 나를 기준으로 돌아가게 되고 나를 중심으로 기술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말하면서 조금씩 언성이 높아져가던 지키루 씨를 따라 나의 마음도 조금씩 달아오르려하고 있었다.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방울을 보송보송 매단 채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열띤 목소리로 <부르짖고> 있었다.
[킁. 그런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그러나, 만다르크 씨의 한 마디는 함께 불타올라 한 줌의 재로 화할뻔했던 분위기에 찬물을 두 바가지 정도 끼얹는 듯한 효과를 가져왔다. 불타오르던 흥분은 냉정하게 가라앉혀졌고, 나는 다시 냉정을 회복하고 지키루 씨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내>가 역사의 주체라고?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내>가 역사의 주체다라는 말은 조금 추상적으로 들리는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Restart!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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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보다 분량 압박이 크군요. 그리고 여전히 대사에 매력이 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