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광스님의 사모곡 -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별빛같은 나의 사랑아”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낮에는 은행을 다니고 밤에는 야간 대학을 다녔습니다.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며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눈 뜨보니 어느 산 속 절에서 머리를 깎고 있더라구요. 전혀 계획한 일이,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가슴이 뿡 뚫린 것 같은 허전함이 있었기에 책을 덮고 입산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제 손을 잡고, 중간에 포기할 것 같으면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어머님의 가르침은 절집 생활에 회의가 들 때마다 저를 바로 잡아 주었습니다.
수행자로 살면서 제가 가장 행복했던 것은 어머님을 십년 넘게 모신 일입니다.
어머님은 저를 산에 보내고 고향 대구에 사셨습니다.
오랜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고향에 갔을 때 일입니다. 발인 염불을 해주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4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늦은 밤이었지만 저는 어머님을 뵈러 가고 싶었습니다.
한밤중에 아들을 보고 깜짝 놀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잠시 쉬려는데 잠든 어머님의 숨소리가 이상하더라구요. 어머님은 아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계셨습니다. 놀라서 119를 불렀습니다. 어머님은 일년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하셨는데 일년만에 그 병이 재발한 것입니다.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이 위험한 상황에서 119 대원들의 응급 조치에 또한번 기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가 어머님을 뵈러 가지 않았다면... 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아마도 돌아가신 친구 어머님이 저의 어머님을 살려주셨구나 싶었습니다.
그 후 어머님은 산에서 저와 함께 사셨습니다. 절집에서 행복의 척도가 뭐겠습니까. 어머님 덕분에 흐트러짐 없이 바르게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살아있는 부처였습니다.
한번은 절 행사가 열려 떠밀려 노래를 했는데 어머님이 저를 가만히 보시더니 몸을 흔드시며 좋아하시는 겁니다. 그러시고는 “법문이 따로 없습니다. 상대가 즐겁고 행복하면 그게 법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정신이 버쩍 들었습니다.
그 후 저는 법무부 교정위원으로, 서울 구치소 등 여러 곳에서 노래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길어야 2년이라 했지만, 어머니는 무려 십년을 넘게 행복하게 사시다가 좌탈입망(앉아서 열반에 드는 것)하셨습니다.
요즘 저는 어머니 말씀대로 노래가 곧 부처님 뜻을 펼치는 일이라 믿고 열심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불러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YCz9a1Lop4
첫댓글 스님들 노래자랑을 했군요.어머님의 사랑이 가득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저는 수행자는 이러해야 한다고 봅니다.
비록 출가 했다 하더라도 천륜 은 끊을수 없는 법. 비록 내 깨달음 내 道가 아무리 중요 하더라도 깨달음을 위해 내 道를 위해 인간의 근본 도리를 무시하고 부정 해서야 안된다고 생각 합니다.
불교에서 출가자들은 흔히 속가의 어머님을 '보살(여성 불자 신도를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로 부르시는 분들이 꽤 계세요.
어머니를 일반 불교 신도 대하듯 어머니! 하고 부르는 게 아니라 보살님! 하고 부르시는 겁니다. 이건, 대단히 잘못된 거라 저는 봅니다
왜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겁니까. 열반을 앞두신 어머님이 당신의 자식에게 듣고 싶은 말씀이, 어머니! 일까요 아니면 보살님! 일까요?
이 간단한 질문만 스스로에게 해봐도 대답은 자명할 것을!
내 깨달음 내 道가
어머니보다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