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4. 몬 1:1-21 자신이 빚진 것 무엇인지 아는 사람
1900년대 초는 지금부터 120년 전입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 최의덕 선교사가 전라도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김제 쪽에 교회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지금의 금산 지역입니다. 마침 그 지역에 갑부를 만나 그 집 사랑채에 잠을 자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 갑부가 복음을 받아들여 그곳을 교회당으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 갑부가 머슴을 전도하여 둘이 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영수가 되었습니다. 1907년에 장로 피택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부인 주인은 피택에 떨어지고 그 집 머슴은 장로에 피택되었습니다. 선거가 끝나자 마자 피택에서 떨어진 조덕삼 영수는 교회당 앞으로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우리 금산 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내었습니댜.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교회를 더욱 잘 섬기겠습니다.” 그 다음에 2년 후에 그가 장로로 피택되었을 때에 먼저 된 이자익 장로를 평양 신학교에 추천 입학시켰으며 전액장학금과 생활비를 교회가 지원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자익 장로가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를 그가 장로로 섬기는 금산 교회의 담임 목사로 초빙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지방에서 최고 부자요 명예도 있고 교회 안에서 재정의 대부분의 헌금으로 담당한 그가 피택선거에 떨어지고 그 집에 머슴이 장로가 되었을 때 그가 자존심을 어떻게 다스렸는가? 그가 예수를 믿은 이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례 받을 시 고백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신분이 된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주인이지만 저 자가 머슴이지만 하나님을 주님을 모신 이후 새로운 신분으로 된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당시에 승동 교회와 연동 교회에 양반과 백정 사이에 갈등으로 교회가 갈라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양반과 백정 간에 갈등으로 교회를 갈라서는 상황에서 비추어 볼 때에 조덕삼 장로는 당시에 큰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재산을 바쳐서 교회를 이룬 사람이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세운 빌레몬입니다. 그는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이 강론할 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많은 종을 거느릴 만큼 부자였습니다. 당시에 종은 인격이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종의 목숨이 주인의 말에 달려 있었습니다.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밑에 종의 한 사람이 물건을 훔쳐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 붙잡혀서 감옥에 갔는데 먼저 있었던 사도 바울의 방에 들어간 것입니다. 감방에서 먼저 죄수로 있었던 바울이 새로 들어온 죄수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골로새에서 왔고 빌레몬의 종으로 있었던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오네시모가 복음을 듣고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심복이라고 하였는데 그 심복이란 말의 본래적 의미는 창자(bowel)입니다. 사람에게서 창자가 없이 살 수 없듯이 오네시모 없이는 바울의 감옥에서 영적 활동이 어려울 정도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오네시모를 신뢰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 오네시모를 다른 일로는 만날 일이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입니다.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울이 볼 때에 오네시모는 제자요 빌레몬도 제자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 쓰는 목적은 오네시모를 받아주되 노예로 받지 말고 대등한 인격체인 사람으로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예수믿는 양심을 가지고서 그나마 오네시모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이 노예로 받지 말고 대등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받아달라는 것은 무리한 부탁입니다. 빌레몬의 집에는 수 십 명의 노예가 있기 때문에 형평성 때문에 오네시모만 특별 대우 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쓸모없는 자를 쓸모있는 자라고 바울이 하였을 때에 빌레몬은 바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부탁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바울에게 무슨 빚을 졌는가?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진 빚이 있으면 바울 앞으로 계산하라고 할 뿐만 아니라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부자인 빌레몬이 바울에게 빚질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레몬이 그에게 빚졌다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인 빚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에게 “예, 제가 빚졌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과 부로 해결 받지 못한 죄 문제를 그리스도로부터 해결 받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1900년대 초에 조덕삼 장로도 그같은 정신에 입각하여 자신의 부를 자신의 자존심의 도구로 여기지 않고 복음의 질서를 더 존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더욱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가 주님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성경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지위와 신분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노회에 가보면, 연령이 질서요, 상회비를 많이 내는 사람이 높은 지위입니다. 동창회가면 그것은 이해가 됩니다. 노회요 교회인데 대형교회 목사, 곧 상회비를 많이 내는 교회 목사는 순서의 앞자리에 있게 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대우를 받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신학교 입학순서, 안수 순서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물질과 연령에 의해서 뒤바뀌는 것을 봅니다.
성경에 나타난 빌레몬과 바울과 관계 바울과 오네시모 관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가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구원자로서 우리가 믿어야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에 의하면 사회는 그럴지라도 빌레몬의 모델은 우리가 가야할 방향으로서 하나님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빌레몬도 오늘날 세상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권한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잘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시스템을 육적인 시스템보다 더 우월한 가치관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였습니다. 빌레몬과의 관계 속에서 오네시모를 노예를 보지 말고 하나의 사람으로 보라는 것은 당시의 노예 제도에 타격을 준 것입니다. 역사에 노예 많았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이 유럽과 미국으로 많이 팔려갔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나라들이 다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노예 제도가 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미국같은 나라도 농장에 노예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노예제를 폐지하면 누가 손해보는가?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노예인 당사자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비정규직 강사들이 인권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를 호봉제를 폐지하고 비정규직도 호봉이 한없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학교에서는 호봉많은 자를 처음부터 뽑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는 비정규직에게 더 어려운 현실이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사도 바울은 노예제를 폐지한 것은 아닙니다. 노예를 인간으로 대우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 일을 실천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같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데 자부심을 가질 수 있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같은 사람에게 노예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부탁을 하는 것처럼 바울같은 사람 빌레몬 같은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장님들이 바울같은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지위를 귀하게 여기고 내가 복음에 빚진 것을 알고 행동하는 빌레몬처럼 될 수 있다면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