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희망 그리고 추억.... 노산분교에서 감자꽃스튜디오로
내 주소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이곡리 333. 옛날에는 노산분교라 불리웠던 산골의 한 폐교이다. 삼년 전 제발로 찾아들어와 주민등록도 옮기고 그동안 꿈꿔오던 이른바 자연친화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나는 전국의 교육청 인터넷을 샅샅이 뒤졌다. 서울에서 세 시간 이내, 임대료 연 오백만원 이내, 너무 번잡스럽지도않고 너무 외떨어져서 불편하지도 않으며 산으로 둘러싸여 있을 것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딱 만족시키는 공간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아서 지금의 보금자리를 찾는데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거의 일년을 보냈다.
찾아낸 폐교는 문 닫은지는 몇 년 안 되었지만 건물 자체가 무척 낡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낡아 있었다. 우선은 구석구석 깨끗이 먼지를 떨어내고 과학실로 쓰던 교실 한 간을 내가 기거할 방으로 정하고 최소한의 수리만 한 후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산골 생활,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다 생소하고 문제가 생기면 직접 해결해야 했다. 지인들은 내가 회사도 경영하고 강단에도 서니 붙임성이 좋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직업이 나를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것 뿐, 실제로는 내성적이고 낯을 가려서 넉살좋게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전형적인 강원도 사람들이라 속 정은 깊지만 무뚝뚝하고 살갑게 대하는 편은 아니어 서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 이전에 폐교를 활용하여 무언가 해보려던 사람들이 모두 안 좋게 하고 떠나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처음부터 곱지 않았다. 시골이 인구가 자꾸 줄어서 젊은 사람이 들어오면 다 금방 환영 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우리 마을에서는 만 서른여덟인 내가 최연소, 바로 윗줄이 오십의 이장님이다) 혼자서 커다란 학교를 임대해서 살려는 저의가 영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연수원이나 실버타운을 만들려는 거냐, 러브호텔 지으려는 것은 아니냐, 혹시 선생 김봉두의 서바이벌 사업자같은 속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추궁하며 당장 사업계획서를 내놔 보라고 난리였다. 다짜고짜 물부터 끊어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나는 개울가에서 물을 길어다가 세수도 하고 해야 했다. 음반제작이나 도서출판, 공연기획 등 내가 하는 일을 시골 노인분들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워 편의상 테이프도 만들고 책도 만드는 작은 회사를 운영한다고 둘러댔더니 다음날 온 동네에 내가 엉뚱하게도 인쇄공장을 한다고 소문이 돌아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이런 나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은 옆 마을의 작은 교회 목사님이었다. 크리스천인 나는 자연스레 출석할 교회를 찾던 중 목사님께서 먼저 심방을 오셨고 뜻밖에 나이가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젊은 분이었다. 교회에 나가니 서른 명 남짓한 교인 중 거의가 할머니들이어서 조금씩 마을 사람이 되어가는 지혜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사들고 논 한가운데로 가서 이앙기도 돌리고, 고추 농사도 돕고, 여름방학이 되면 아이들을 모아 서울의 우리 극장에서 공연도 보여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영월이 고향이고 폐교에서 같이 지내던 직원 한 명이 자신의 작품이 강원일보의 신춘문예 동화부분에 당선이 되었음을 알렸다. 나는 나의 공간이 누군가의 꿈을 이루는 데 쓰여졌다는 사실이 기뻐 교실 한 칸을 내어 마을 어린이들을 위한 공부방으로 쓰기로 했고 당선작 제목을 따서 <감자꽃 어린이도서관>을 만들기도 했다. 결국 이래저래 학교 담 밖을 나서 마을을 맘 편하게 드나들기 까지 꼬박 일 년은 걸린 것이다.
그렇게 한 이년 동안 조용히 살고 있던 중 작년 가을 나의 친구인 숭실대 장원재 교수가 진행하던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 김진선 지사께서 출연하셨고 친구는 나의 소식을 전했다. 99년 관광엑스포 때 일을 하나 맡아 했던 인연 이외에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었으나 지사님은 그 말씀을 들으시고는 한번 들르시겠다고 하셨다. 설마 그 바쁘신 분이 이 산골 마을까지 찾아오실까 반신반의 했는데 어느날 정말 나타나셨다. 당연히 군수님과 군청 직원들도 동행하셨고 나의 사는 형편을 보시고는 적극 지원을 약속하셨다. 군청에서는 교육청으로부터 학교를 매입하여 위탁 영영을 맡기는 형태로 바꾸고 도와 함께 개보수를 도와주었다.
건축가 이종호 선생은 기꺼이 설계를 맡아 주었고 후배 디자이너들은 공간을 꾸미는 일을 시작했다. 문화관광부의 생활친화적 문화공간 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기자재도 갖추었다. 마을단위 작은 박물관과 공부방 지원 사업에도 선정되어 황량했던 폐교는 멀티미디어 스튜디오와 옥수수 박물관, 그리고 어린이 도서관 등을 갖춘 멋진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곳을 지역 주민들과 청소년들의 문화예술교육을 위한 창작 스튜디오로 쓰기로 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말썽없이 지낼 것을 은근히 강요하던 마을 분들도 이제는 폐교 덕분에 마을이 활기를 띤다고 좋아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와서 할 일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고 기대하셨다. 폐교 덕분에 학교 인근으로 길도 넓어지고 평소 마을의 숙원사업이던 상수도가 설치되었다. 이 작은 마을의 뉴딜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분한 지원은 감사한 일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강원도와 관련한 각종 문화 정책 자문, 대관령국제음악제를 비롯한 지역축제 마케팅, 폐교의 문화공간 자원화, 그리고 서울에서의 각종 공공 프로젝트 끌어들이기 등등 내게 주어진 일들은 점점 많아져갔다. 나는 아예 현지에 운영단체를 구성하고 후배에게 책임을 맡겨 일을 조직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조그만 공부방 정도로 시작한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문화관광부의 지역문화 네트워크 활성화 시범사업으로 지정받아 지역 청소년들에게 국악등을 가르치는 본격적인 교육프로젝트로 발전시켰다. 일을 피해서 강원도 산골로 들어 갔는데 오히려 일 복이 터졌지만 같은 일도 자연속에서 할 수 있으니 즐거울 뿐이었다.
내가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직업적인 특성상 기획 마인드와 네트워킹 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남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는다. 적절한 관계의 설정과 눈높이 커뮤니케이션은 현지화의 필수 요소였다. 공무원들과 일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그들의 문화와 현실적인 여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주장하기 이전에 상대의 니즈가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피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과 함께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홍보에 적극적이되 미디어적인 과장이나 왜곡은 자제했고 항상 성과는 골고루 나누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경영학에 나오는 이런 테크닉들보다는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웃음과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활짝 웃는 얼굴에 항상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다 잘 되는 법이다. 학교는 그 곳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꿈의 공간”이고 뒷바라지 하는 부모들에게는 “희망의 공간”이다. 그리고 학교를 떠난 이들에게는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학교는 문을 닫으나 여나 영원히 마을의 중심이다. |
출처: 감자꽃스튜디오 원문보기 글쓴이: 분교의 진화
첫댓글 감자꽃 스튜디오 이선철 대표의 로하스적인 삶이 좋아서 자주 놀러갈까 합니다.
그림이 그려지네요... 저두 가보구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