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 시인을 찾아서
일시: 2010년 11월 6일 오후 5시
장소: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길조 한정식
사회 및 대화록 정리: 양복이 한시문 부회장
참석자: 현종숙 시인, 이현숙 시인
회견 주무 : 양은영 사무국장
<이하석 시인 연보>
1948년 경북 고령군 출생.
1969년 경북대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입학(이후 3년중퇴).
1971년 월간 (현대사회)에 전봉건선생의 시추천으로 문단등단.
1975년 이동순과 2인 시집<백자도 > (예문관)출간.
1978년 영남일보 입사 문화부 기자로 활동.
1980년 첫시집<투명한 속>(문학과 지성사) 출간.
1984년 시집<김씨의 옆얼굴 >(문학과 지성사)출간.
1987년 시선집<유리 속의 폭풍> (문학과 지성사)출간.
1988년 시집 <김씨의 옆얼굴>로 대구문학상 수상.
1989년 시집<우리 낮선 사람들> 세계사 출간.
1990년 시집<우리 낮선 사람들>로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1년 시선집 <비밀> (미래사)출간.도천문학상 수상.
1992녀 시집 <측백나무 울타리>(문학과 지성사) 출간.
1993년 김달진 문학상 수상.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94년 대구 민족문학회 회장.
1995년 <삼국유사의 현장기행. (문예산책) 출간.
1996년 시집<금요일엔 먼데를 본다. (문학과 지성사)출간.
한국민족 예술인 총연합 (민예총) 대구지회장.
1998년 영남일보 논설위원. 어른을 위한 동화 <꽃의 이름을 묻다.>(문학동네)
2000년 시집 <녹> (세계사)출간.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장.
2002년 시집<고령을 그리다> (만인사) 출간
대구시 문학상(문학부문) 수상.
2003년 문학의 날 공로상(문화관광부 장관상)수상
2004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대구시인협회장.
2005년 기행산문집<늪을 헤매는 거대한 수레>. (세계사)출간
2006년 시집<것들> (문학과지성사)출간.정년퇴임후 논설고문으로 계속 사설과 컬럼 집필.
1.선생님의 문학입문에 관하여.
언젠가 한 잡지에서 제 특집을 할 때 했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문학입문 시기의 이유가 어렴풋이 드러나고, 등단 후 첫 시집을 낼 때까지의 저의 시에 대한 생각들이 약간은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하석:문학을 하면서 살아가리라는 생각은 어릴 적부터 했던 것 같습니다. 중학생 시절, 어머니가 내게 “너는 장차 뭘 할래?”라고 물으셨을 때 저는 “글을 쓰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어머니는 한참 저를 보시더니 혼잣말로 “돈을 벌면 좋을 걸”이라고 하셨지요.(웃음) 고등학생 때는 《학원》 등의 잡지를 통해 시를 발표하고 상도 받기도 했지요. 등단은 대학시절에 했는데, 지역에서 문단 소식에 깜깜했던 터라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잘 몰라, 신춘문예는 싫고 잡지 추천이 좋을 듯하여 《현대시학》에 시 두 편을 응모하듯 보냈지요. 그게 몇 달 뒤인가 초회 추천이 된 걸 한 친구가 서점에서 보고는 연락을 해줍디다. 서점에 가서 《현대시학》을 펼쳐보니 전봉건 선생의 추천이었습니다. 그후 반년 정도의 주기로 작품들을 보냈고, 그리하여 2년만에 3회 추천을 완료했지요. 그 때까지 전봉건 선생께는 연락도 못 드렸고, 추천완료 소감을 써 보내라는 편지를 받고 그것만 달랑 보냈을 정도로 숫기가 없었지요. 전봉건 선생과의 만남은 그후 한참을 지나 볼일이 있어서 상경했을 때 현대시학사로 찾아가 인사를 드린 게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등단했지만, 첫 시집 《투명한 속》은 그후 10년 가까이 흐른 1980년에 나옵니다. 그 전에 <자유시> 동인 활동을 했고, 이동순과 2인 시집 《백자도(百子圖)》를 70년대 중반 무렵에 내기도 합니다만, 첫시집 이전의 시들은 사실상 대부분 버린 것이나 다름없지요. 애초 첫 시집 원고를 등단이후 작품들에서 골라 문학과지성사에 보냈는데, 시집 출간에 들어갈 무렵 김현 선생을 만나 원고에 대한 논의를 하던 중 갑자기 저는 시집 출간을 미루겠다고, 몇 편만 가감해서 출간하자는 김현 선생의 권유를 뿌리치고, 다시 원고를 정리해서 보내드리겠다며, 원고를 되돌려받아 내려와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정리했던 원고들을 대폭 버리고, 1년동안 보강한 작품들을 모아 다시 보내어서 출간된 것이지요. 첫시집이라 욕심을 냈던지 그랬겠지요. 거기다 제 작품에 대한 불만내지는 미흡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아마도 그런 과정을 통해 문학은 현실의 소산이라는 자각을 하게 됐고, 당시 제가 현실적으로 맞닥뜨리고 대항했던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언어화하려는 야심을 갖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다소 억지스러울 만큼 집요하게 작업을 했고, 그 결과가 첫시집 《투명한 속》의 작품들인 셈입니다. 첫 시집에 실은 시들의 단초들은 70년대 말의 문명비판적 관점을 드러낸 작품들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 작품들도 대부분 새롭게 작업한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묶으면서 버렸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저는 김현 선생을 상당히 의식했었던 듯 합니다. 그 분과의 대화가 제게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고 지금도 여기고 있습니다.
2.선생님의 정신세계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 책은 ?
역시 한 잡지에 실었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대학시절 남해 금산 보리암의 요사체 마루에서 시작해서 한동안, 너무 일찍 고인이 된 정주동 박사로부터 고등학생 때 한글로 번역한 걸 읽었던 금강경을 새로 배우던 일, 그리고 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찾아 읽던 때가 좋았다. 하늘은 맑은데, 흰 구름 그늘이 나를 덮고 있다는 느낌, 또는 외고집으로 닫힌 내 안팎이 열어젖혀지는 느낌이 있었지. 그래, 나도 뭔가 큰 걸 이루기 위해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그러나 지눌은 결사문에서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말을 서두에 들어보였다. 뭐든 자신의 탓이니, 제 바깥에서 구하지 말라고?
위의 인용문에서도 드러나듯 일찍 불교를 접한 게 제겐 가장 큰 경험이었고 그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때 출가를 준비한 적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제가 환경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불교적인 세계관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수영과 T.S. 엘리오트의 시집들, 일연의 『삼국유사』, 『산해경』등.
3.한국민의 정신문화정체성에 관하여
삼국유사를 자주 읽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을 알아보기 위함이기도 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풍류와 화쟁(和諍)이라는 게 참으로 귀하게 되새겨지고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소통과 무애, 그리고 화해와 두레정신, 평등이 그 말들이 가진 의미가 되겠지요.
4.한국문학과 서양(독, 프, 영, 러 등)문학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
어린 시절에 학교 부근 선교사집들이 있는 곳을 둘러친 담장을 넘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같은 반 동무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크리스마스 카드를 처음 보았지요. 아주 좋은 종이에 그려진 예쁜 그림에 금가루가 묻어서 반짝이던 게 얼마나 신기했던지. 그후 서양의 동화와 시와 소설들을 접하면서 나는 늘 그날 처음 본 그 크리스마스 카드를 떠올리곤 했지요.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닥치는 대로 문학작품들을 읽어갈 때 서양의 문학 작품들이 가장 많이 손에 쥐어졌지요. 그건 거의 일방적으로 내게 쏟아부어진 충격이라 할 수 있었지요. 삶에 대한 생각과 언어에 의한 표현이라는 건 동서고금이 비슷한 것이어서 거기서 문학의 의미와 그 방법들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삶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아름다운 게 아니라 훨씬 더 고통스러우며, 그것을 드러내어 새로운 출구를 열어보이는 게 문학이라는 생각도 차츰 들었어요.
시를 만들면서 서양문학을 의식하는 때가 잦았지요. 차츰 우리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으로 선회하면서 그런 게 없어졌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가 더 이상 신기한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건 요즘 애들 누구나 아는 일이지요. 우리 문학의 풍성함도 더해져서, 지금 문학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우리 문학에 대한 자부심도 클 것 같아요.
5.21세기 한국시민문학의 바람직한 형태에 관하여
시민문학이란 말이 어떤 문학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군요. 백낙청 선생이 전개한 ‘시민문학론’은 참여문학을 발전시킨 이론인데, 나중에 민족문학론에 흡수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문학은 그런 의미는 아닐 것 같군요. 어쨌든 문학의 대사회적 효용과 소통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참여문학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21세기에 그러한 문학의 전망은 솔직히 말해서 가늠이 잘 안됩니다. 일본문학이 20여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문학도 차츰 소통의 부재로 인한 이른바 ‘소수자를 위한 문학’으로 전락(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하는 게 아닌지 하는 불안이 문단의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때입니다. 특히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시인들의 활동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듭니다. 그렇게 되면 문학은 언어에 훨씬 더 민감해지면서 정교해지고, 치밀해질 것이지만, 일반과의 소통은 힘들어질 것입니다.
이런 문학에 대응하여 소통의 문학을 모색해야 하는데, 문학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달라지고, 문학 생산 환경과 그 수요의 변화가 극심해 현재로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심각성이 있는 듯 싶습니다. 더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6.한국문인 및 한국문학애호가에게 한 말씀.
문학은 언어로 하는 현실의 대응이자 그 표현입니다. 최근 들어 문학 현실이 더욱 넓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이 컴퓨터 세대를 장악하면서 가상현실과 새로운 막강한 정보들이 문학을 새롭게 감염 내지는 침입하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는 듯합니다. 가상의 현실조차 새로운 현실이 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세계 속에서 언어의 위상과 기능이 어떻게 전개될 지 두렵습니다. 이럴 때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을 하지만, 그 소리가 너무 미약하게 울리는 듯해서 불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