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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본문의 중심 주제는 우선 기독론과 관련된다. 예수는 거지 바디매오를 직면하고, 절규에 찬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간단한 말로 그를 고쳤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이 본문은 예수의 치유의 능력을 선포한다. 이 세상의
신체적 결함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복음을 갖고 오는 연민에 찬 예수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을 단순히 또 하나의 치유 이야기로 여기면 안 된다. 바디매오 이야기는 "눈멂"이라는 주제 아래 전개되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8:22-26절에서 예수는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을 고치셨다. 9장과 10장에서는 다른 종류의 눈멂 (철저하고 전복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함)이 나온다. 예수는 인자가 고난, 버림, 죽음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베드로는 이런 예수를 꾸짖었다.(8:31-33) 예수가 배반당하여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제자들은 헷갈려서 예수에게 더 묻기를 두려워했다.(9:30-32)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지 논쟁을 했고(9:33-34),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좌우편의 자리를 달라고 부탁을 했고(10:35-40), 다른 제자들은 그에 대해 분개했다.(10:41) 바디매오 이야기는 이와 같은 일련의 이야기들을 절정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예수는 바디매오의 육체적 눈멂 뿐 아니라 더 심각한 영적인 눈멂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바디매오의 치유 이야기는 우선적으로는 그의 개인적인 요구를 들어주는 의미가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면서 그의 제자들의 영적인 눈멂을 치유하기 원했던 예수의 노력을 환유적으로(metonym)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가 목도하는 영적인 눈멂과 시력을 회복시키는 예수의 능력의 상호 연결을 통해 기독론적인 중요한 주장이 만들어진다: 측근들의 눈멂도 예수가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지연시킬 수 없다.
기독론적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에 담긴 두 가지의 역설적 사실에 주목할 필요하 있다. 우선 바디매오는 예수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호칭했다.(10:47) 이는 마가가 자주 사용하는 사람의 아들(인자)과 유사한 것이다. 예수를 다윗의 아들이라 칭함으로 그는 메시아가 다윗의 왕조를 정치적으로 회복할 분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에 동의한다. 이 기대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때 군중들이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11:10)라고 외친 것과 상통한다. 바디매오는 눈이 멀었지만 예수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바디매오의 "다윗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바디매오가 사용했던 호칭은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거부할 호칭이었다. 성전에서의 설교에서 예수는 "어찌하여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다.(12:35) 따라서 바디매오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메시아인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방식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 번째 역설적 사실은, 다른 대부분의 치유 이야기와 다르게(1:44; 5:19,37,43; 7:36; 8:26), 그가 치유를 받고 예수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눈을 뜨게 되면서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는 바디매오를 본다. 눈을 뜨게 된 후 그렇게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준 메시아를 따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바디매오가 따라가는 예수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고난과 배척을 받는 길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목자 없는 양처럼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14:27) 예수는 죽고, 예수를 진실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패배감 속에 갈릴리로 돌아갈 것이다.
마가복음은 하얀 옷을 입은 젊은이가 여인들에게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면서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16:7)라고 당부하는 것으로 맺는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한다. 예수의 부활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한다.
주석적 관점
▶ 오늘 본문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과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을 연결짓는 짧은 여행 이야기의 결론이다. 전 본문에서 예수가 받아야 할 세례로서 고난을 특징짓고 있는데 이 전망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의 예루살렘으로의 승리의 입성을 예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는 바디매오라는 거지소경을 만나고 그의 시력을 회복해준다.
▶이 본문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치유를 기술하고 있는데 무화과 나무 저주와는 다른 마지막 능력있는 사역이었다. 이 본문은 8:22-26의 소경 치유기사를 생각나게 하는데, 6:30-44과 8:1-10의 대단히 유사한 급식사건 기사와는 달리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
앞선 치유에서는 눈에 침을 뱉고 손을 얹고 말씀하셨는데, 이 본문에서는 그냥 고치신다. 앞에서는 군중들이 소경을 데려왔는데 여기에서 군중들은 바디매오가 예수께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벳새다 치유는 예수의 주도에 의해 가능했고, 바디매오의 치유는 그의
믿음 때문에 가능 했다. 벳새다 소경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바디매오는 예수를 따랐는데 마가복음에서는 드문 경우이다. 이 치유기사들은 마가가 되풀이하며 설명하는 고난예고들(제자들은 아무튼 이해하지 못한)에 놓여져있다. 이 단서들은 마가가 치유기사들을 예수의 참된 정체성을 보는 국외자와 보지 못하는 내부자들을 비교하려고 배치한 듯 보인다.
▶ 마태는 처음부터 (그리고 자주)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말하고, 누가도 1:27,32,69,2:4 등에서 반복하고 있지만, 마가는 지금까지는 이에 대한 힌트도 없었다. 그런데 바디매오 이야기에서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명확히 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의 군중들의 함성을 이해하도록 준비시킨다. 미태는 치유기사에서 “ 다윗의 자손” 이라고 여러번 말하지만(9:27;12:23;15:22;20:30-31), 마가는 오직 여기와 12:35-37에서 율법학자들에게 가르치면서 그렇게 말한다. 사실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확신하지 못했기에, “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소상 다윗의 나라여!” (11:10)이라고 외쳤을 뿐이다(마태는 21:9에서 “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라고 말한다). 이 본문에서 바디매오의 말을 통해 군중들이 분명히 말하지 않은 예수가 그들이 말하는 왕권을 구현할 것이라는 것을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예수는 여러 번 사람들이 위대함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주의시켰지만, 여기에서는 바디매오의 고백에 대해 주저없이 받아들이신다. 마가의 이야기 맥락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을 보면 마가는 “ 다윗의 자손” 이란 것을 예수의 왕조 전승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군중들이 다윗의 왕국의 수도에서 그를 수행했으며, 예수 자신도 12:35-37에서 다윗의 아들로서 기름부음 자 즉 그리스도로 여겼다고 말한다.
▶ 바디매오는 예수께 “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라고 청원한다. 그는 예수가 친절하게 그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예수께 그를 대신하여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랐다. 바디매오는 예수에게 “ 도와주세요” 라고 말한 것이다. 벳새다 치유에서는 두
번이나 예수의 기적적 타액행위가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바디매오의 청원을 막으려는 군중들이 치유를 방해했다. 예수가 소경 바디매오를 불러오자 그들은 “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라고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한다.
▶ 예수가 “ 다윗의 자손” 과 기름부은 자를 연결시켜 받아들인 것을 “ 정치적” 메시야와 “ 영적” 메시야가 결합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12:35-37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카테고리에 국한되지 않는 해방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지막 절에서 바디매오의 믿음이 그를 치유하고 구원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헬라어 sozo는 육체적, 영적 구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역할을 순회하는 치유자에서 왕의 아들로 전환시키고 있다. 바디매오와 예수의 서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이러한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디매오는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분이 다윗의 자손임을 분명히 말한다. 이를 통해 마가는 점잖게 예수의 정체성을 기름부은 자로 확증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예수님의 제자임을 명백하게 확신하는 야고보와 요한이 했던 그 질문을 지금 예수는 전형적인 외부인에게 하고 있다: “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신자라고 하는 사람이 한 대답은 처음부터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를 애원하면서 하는 간청은 그와는 대비되는 청원으로, 그 자체가 신앙고백 같다. “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51절) 첫 번째 대답은 확립된 종교의 월계관을 믿는 것이다. 두 번째 청원은 어둠과 의심에서 나온다; 첫 번째 요청은 고난을 비껴가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실, 배제, 의지할 데 없음으로부터 차근차근 걸어 나오는 것이다; 전자는 의로움에 대한 배타적인 요구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고, 후자는 홀로 의로우신 아들 앞에서 고난 때문에 허리 숙여 절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부인과 외부인 모두에 대한 우리의 목회의 본질에 관한 것을 보여준다.
처음에 예수는 선택된 사람들과 내부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여리고를 신속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예수와 동일시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가는 그들이 병고침을 받거나 가르침을 받으려고 예수의 옆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동료라고 말하고 있다. 자주 그들은 예수가 자기들에게 무엇을 해주기 바라는지를 잊어버리면서도, 신자에 속하기를 원한다. 한번 “ 내부” 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은 계속 “ 외부” 에 남아있게 하려는 기이한 행동을 되풀이했다. 예수가 지금 막 처음 된 자가 나중된다는 말씀을 마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디메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엄격하게 명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목소리가 없었다고 마가는 보고한다(48절). 다만 예수 자신이 무리들에게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을 때, 무리들이 경건하게 환대하는 척하면서 말하기를 “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라고 말했다(49절).
우리는 무리에 대한 예수의 반응을 어떻게 생각하고, 치유와 구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예수 옆에 있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목회하고 있는가? 우선, 예수가 무리에 대해 무심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무리에게 외부인을 예수 옆으로 오게 하라고 명령한 것 말고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예수는 무리가 사람들의 곤경에 무지하다고 나무라지 않았고, 그들의 신실함에 의혹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 그를 불러 오라” 고 명령해서, 거기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제자가 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복종하지 않고는 제자가 될 수 없었다. 만약 예수님 때문에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고, 지체장애인이 걷게 되고, 한센병 환자가 깨끗하게 된다면, 단지 예수에게 가까이 있기 원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예수의 사랑으로 예수의 동료로 계속 머물게 될 것이다.
오늘 목사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도자로 이 공동체에 속한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가 교회되기를 명령한다! 예수를 따를 때, 예수가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을 꾸짖거나, 그들의 신실함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공동체가 다른 사람들의 탄식에 긍휼한 마음으로 참여하도록 요청한다. 다른 사람이 다르푸르만큼 멀거나 혹은 옷장만큼 가깝거나,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 사람의 생명을 사람으로 만들고 유지하시는” (Paul Lehmann, Ethics in a Christian Context (New York: Harper & Row, 1963), 101; 심일섭역, 기독교
사회윤리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일을 하시는 곳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일에 순종해야 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바돌로매의 외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당했지만, 그 외침은 평상시에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되었다.
그것은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기적은 사람들을 어둠에서 나와서 빛으로 들어가게 하는 사건이다. 기적은 삶과 죽음에서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지에 집중하게 한다. 능력이 있어야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러나 기적은 알려지기로 결정한 권능자를 보여준다. 기적은 우리 앞에 있는 사람 너머에 있는 분,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신 분을 가리킨다. 루돌프 불트만은 “ 기적, 그 자체가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한다” 라고 썼다.(Rudolf Bultmann, Jesus and the Word (New York: Charles Scribner’ s Sons, 1962), 177.)
두 번째로, 이 이야기는 우리의 목회가 외부인, 즉 제도적인 견해에 의해 침묵당한 목소리와, 우리를 우리의 궤도에 서 있게 하는 이른 바 불량배의 외침을 귀 기울여 듣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우리의 목회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멀리하고, 교인들의 관리 가능한 요청들을 들어주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특별히 일 년 중 이맘때에! 청지기직에 관한 메시지도 설교해야 하고, 교인들을 일어나서 뛰게 만드는 프로그램도 해야 하고, 건물도 게속 수리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외투를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큰 기대를 가지고, 경계심을 풀고서 예수에게 오는 사람이 있다. “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는 간청하였다. 믿음이 사회적인 관습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인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목회가 보기를 원하는 시각장애인, 걷기 원하는 지체장애인, 깨끗해지기 원하는 한센병 환자의 만남이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목회가 예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만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새롭게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세례를 준 어떤 84세 여성은 “ 나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썼다. 그녀는 어느 대림절에 찾아와서는, 우리의 홍보부서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한번은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 내가 히틀러 시대에 독일에서 살았다면 나는 전등갓이 되었을 거야.” 군중들은 종종 그녀가 조용히 하면서 자기를 귀찮게 하지 않기를 원했다. 나는 내 멋대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교회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통찰력있는 교인으로, 바르트, 펠리칸, 라인홀드 니버를 읽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예수가 자기를 위해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종종 나는 사람들과 유난히 어려울 때, 예수에 관해 생각한다. 나는 예수가 방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해한다. 예수는 무시당하고 오해받는 고대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예수가 하려는 말도 알고 있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는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살아가기 위하여 내가 대단한 열정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들을 모두 이해하신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은 설교자나 회중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행진하며 사람들을 따르도록 부르고 치유하고 자비를 베푸는 모습에서 보이는 그의 사역과 인성에(work and person) 대해 생각하고 응답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초대는 예수께서 길 위에서 제자들에게 했던 질문 “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8:27)에 대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는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 중 하나도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이다. 예수의 이름이나 타이틀은 그의 사역과 인성을 반영해야만 한다.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오늘 우리관심은 앞을 못보는 거지에게로 향한다. 예수께서 이 시각장애인을 도울 것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 이유는 그 전에 벳새다에서 어느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셨기 때문이다 (막 8:22-26). 하지만 예수께서 치유한 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오늘 본문의 시각장애인은 아람어 이름인 바디매오(Bartimaeus)로 기억되는데 이 말은 “ 디매오의 아들” (son of Timaeus) 혹은 “ 명예로운 아들” (son of honor)을 의미한다.
-이 이야기 안에 예수에 대한 호칭도 나타난다. 이 시각장애인은 몇가지 타이틀을 사용한다: 나사렛 예수 (1:24과 비교해보라), 다윗의 아들, 그리고 선생님(rabbouni). 길 위에서 이 행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 또한 예수를 그런 말로 환영하게 된다;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11:10). 그들은 예수를 다윗의 보좌에 붙여질 수 있는 존경심으로 예수를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최고의 영광이 예수에게 돌려져야 하는가에 관해 논쟁했던 초기교회를 그려볼 수 있다(12:35-37). 마가는 독자들에게 이 복음서가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1:1)에 관한 것임을 이미 보여주었다.
-회중들은 이 시각장애인이 예수에게 나아감에 있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예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종종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2:2).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도 단호하게 (10:13) 제지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와 함께있는 사람들의 꾸짖음에 설득당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외침이 알려지기까지 집요하게 계속한다. 그는 회복되려면 자신이 다윗의 아들로 존경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자비가 필요하다고 알고 있다. 바대매오는 자신의 환경에 제약되기를 거부한다. 바디매오는 그의 외침이 예수에게 들렸다고 확신한다.
-바디매오는 예수께 자비를 외친다. 예수는 그를 부른다. 예수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불러 예수에게 데려온다. 그가 자비를 외쳤을 때 나사렛 예수를 귀찮게하지 말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이제 달라져있다. 더 이상 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기뻐서 이렇게
말한다: 안심하고 일어나시오. 그가 당신을 부르십니다. 그들은 자비의 증인이요 통로가 된다.
-이 시각장애인은 기독교 제자도의 모델로 그려져있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예수께 나온다. 겉옷이 그가 소유한 가장 값비싼 것이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있다. 그 겉옷은 추운 밤에도 그를 따뜻하게 보호해주었다. 겉옷을 벗어던진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이전의 삶을 뒤로 하고 떠나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언제나 부와 명예, 풍요와 특권을 지니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이미지는 자기포기와 극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복음이 지닌 변화의 능력을 상기시킨다. 나아가 이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자비를 요청하는 온 세상의 가난한 자와 궁핍한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성찰하도록 도전을 주고 있다. 그들 대다수는 보호할 담요도 없고 따뜻하게 해 줄 코트도 없고 생활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없다. 그렇다면 절망 속에 살고있는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에게 자비의 말과 -복음서 저자는 기적적인 만남이 바디매오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주도적인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를 향해 외친다. 그는 예수께로 온다. 그는 눈을 뜨고 싶다는 바램을 분명히 설명한다. 예수는 이 과정을 그에게 한 질문을
함으로써 실현시킨다: “ 내가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예수께서는 친구들의 믿음을 통하여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고 치유했을 때도 (2:1-12), 또 회당에 손 마른 사람이 들어왔을 때도 (3:1-6) 이런 질문은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믿음(faith), 온전함(wholeness), 그리고 제자도 (discipleship)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 대화에서 바디매오는 선생님(rabbouni)이라는 용어를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로(title of honor) 사용한다. 아마도 그는 제자도가(제자가 되는 길이) 가르침(teaching), 배움(learning), 이해(understandign), 보기와 듣기(seeing and hearing)를 포함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대화에서 이러한 것이 모두 나타나므로] 만일 그렇다면 바디매오는 뛰어난 제자후보이다. 보기를 원한다는 그의 요청은 그에게 구원의 길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단지 육체적으로만 보게된 것이 아니다. 그는 구원의 길을 볼 수 있는 자비를 부여받게 된다. 그의 치유는 마가복음 8:22-26에 나오는 시각장애인의 치유와 대조를 이룬다. 거기서는 예수께서 단계적으로 먼저 눈에 침을 바르고 안수하고 그 다음에
손을 눈에 대고 2번째 안수를 하셨다. 이 사람과는 달리 바디매오는 마가복음에서 흔히 나오는 형태로 치유를 받고 즉시 길에서 예수를 따른다.
-마지막으로 바디매오는 믿음의 사람으로 (10:52) 제자도의 모델을 보여준다. 그가 보고 이해하는 능력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해보였던 혹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해보였던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8:14-21),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바디매오의 믿음에 관심을 기울인다 (2:5을 참조하라). 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과 온전함(wholeness), 믿음과 구원(salvation)의 관계를 성찰하도록 초대되었다. 이런 요소들은 우리가 자비의 말씀을 듣고 응답할 때 강하게 결합된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건강하게 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치유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하였다(Go, your faith has made you well. Go, your faith has healed you. Go, your faith has made you w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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