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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01.21 지정)
제121호 : 굴불사지석불상(掘佛寺址石佛像) 경주
이 사면불(四面佛)은 서쪽면은 서방(西方) 극락세계(極樂世界)의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동쪽면은 유리광세계(瑠璃光世界)의 약사여래(藥師如來), 남쪽면은 양각(陽刻)의 보살입상(菩薩立像)과 음각(陰刻)의 입불상(立佛像) 2구(軀), 북쪽면도 역시 입불상(立佛像) 2구(軀)를 양각(陽刻)으로 새겨 화엄세계(華嚴世界)를 나타낸 것이다.
불상조각(佛像彫刻)에 있어 입체(立體), 양각(陽刻), 음각(陰刻)의 입상(立像), 좌상(坐像) 등을 변화있게 배치하고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는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初期)의 특색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栢栗寺)에 거동할 때 땅 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오므로 파보게 하였더니 이 바위가 나왔다 한다. 바위에 사면불(四面佛)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掘佛寺)라 하였다 전하니 그 유적이 이곳이다.
제122호 : 경주두대리마애석불입상(慶州斗垈里磨崖石佛立像)
이 석불은 서쪽으로 향한 절벽의 바위면을 쪼아 삼존불입상(三尊佛立像)을 얕게 부조(浮彫)한 것으로 굴불사사면석불(掘佛寺四面石佛)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통일신라(統一新羅)의 대표적인 마애불상이다.
중앙본존불(中央本尊佛)은 얼굴보다 큼직한 머리, 풍만한 얼굴, 당당한 체구, 사실적인 신체, 얕고 장식적인 통견의(通肩衣) 등 굴불사 서아미타불입상(西阿彌陀佛立像)을 따른 전형적인 8세기 불상 양식이며, 좌우(左右) 보살상(菩薩像)은 우아하고 예쁜 얼굴, 사실적인 체구, 흐르는 듯한 곡선미 등 8세기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삼존상은 왼손을 가슴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과 왼쪽 보살상의 왼손에 든 보병(寶甁)의 표현으로 보아 당시 유행하던 아미타불과 관음(觀音), 세지보살(勢至菩薩)의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로 생각된다.
제123호 : 경주보문리당간지주(慶州普門里幢竿支柱)
이곳은 ‘보문(普門)’이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보문사터로 알려졌으며, 터에서 상당히 떨어진 북쪽에 이 당간지주가 서있다.
지주의 양 기둥이 62㎝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양쪽 기둥 가운데 북쪽 기둥은 윗부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남쪽만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마련한 구멍은 위·중간·아래 3곳에 있는데, 남쪽 기둥은 구멍이 완전히 뚫렸고, 북쪽 기둥은 반쯤 뚫려 있어 특이하다. 이 당간지주는 전체적인 형태가 가늘고 긴 모습이나 안정감이 있다. 다른 당간지주에 비해 비교적 작은 규모로, 매우 소박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제124호 : 경주남산리삼층석탑(慶州南山里三層石塔)
이 탑은 불국사< 佛國寺 >의 동서< 東西 > 쌍탑< 雙塔 >(석가탑< 釋迦塔 >과 다보탑< 多寶塔 >)처럼 형식< 形式 >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대립한 특이한 예의 탑이다. 동탑은 모전석탑< 模塼石塔 >의 일종으로서 광대한 이중< 二重 >의 지대석< 地臺石 > 위에 8개의 석괴< 石塊 >로써 입방체< 立方體 >의 단층기단< 單層基壇 >을 형성하고 탑신< 塔身 >과 옥신< 屋身 >, 옥개석< 屋蓋石 >이 각각 일석< 一石 >이며 표면< 表面 >에는 장식< 裝飾 >이 없다. 서탑은 일반형 석탑으로서 이중기단< 二重基壇 > 위의 삼층석탑< 三層石塔 >이다. 면석< 面石 >의 각면< 各面 >에 팔부신중상< 八部神衆像 >을 2구< 二軀 >씩 양각< 陽刻 >한 것이 특징이다. 이 두 탑의 건립연대는 탑 자체의 양식으로 보아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제125호 :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이수및귀부(鍪藏寺阿彌陀佛造像事蹟碑螭首및龜趺) 경주
제126호 : 무장사지삼층석탑(鍪藏寺址三層石塔)
무장사터는 경주시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깊은 산골에 있으며,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매장한 곳이라는 뜻으로 ‘무장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즉 병기가 필요없는 평화스러운 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결연한 의지가 이 절을 창건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또한 절 안에 3층석탑을 세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 2개를 새겼고, 윗층 기단은 동그란 안상(眼象)을 각 면에 2개씩 조각하였다.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조금 높은 편이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제127호 : 경주삼랑사지당간지주(慶州三郞寺址幢竿支柱)
삼랑사터에 남아 있는 이 당간지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세워져 있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만 원래의 자리에 남아있는 듯하다.
마주 보는 면의 바깥 면에 세로줄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꼭대기는 바깥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둥글게 내려가다가 한 단의 굴곡을 이루어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앙부분만 파여져 전체적으로 가늘어져 있다. 지주 안쪽 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홈을 아래위 두 군데에 파놓았다. 각 변의 길이가 적당하고, 높이와도 잘 조화되어 통일신라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으면서도 중앙부분의 두께를 얇게 하는 등 장식에 신경을 쓰고 있다.
제128호 : 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가야면(伽倻面) 야천리(倻川里) 반야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61년 해인사(海印寺) 경내의 현 위치로 옮겼다.
고려(高麗) 인종(仁宗) 3년(1125)에 건립하였는데 김부일(金富佾)이 글을 짓고 이원부(李元符)가 우세남(虞世男)의 서체로 글씨를 썼다.
원경왕사(1045∼1114)의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이름은 낙진(落眞)으로 숙종(肅宗) 때 승통(僧統)이 되었으며, 예종(睿宗) 때 왕사(王師)가 되었다. 세수(世壽) 70세, 법랍(法臘) 62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제129호 : 월광사지삼층석탑(月光寺址三層石塔) 합천군
동(東)과 서(西)에 서 있는 이 쌍탑(雙塔)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조성된 탑이다.
두 탑 모두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3층으로 조성되었는데, 탑신에는 양우주(兩隅柱)를 조각하였고, 옥개석에는 5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통일신라 정형탑(定型塔)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옥개석의 살짝 든 네 귀의 추녀선과 탑신의 비례(比例)가 알맞아 경쾌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두 탑의 높이는 각각 5.5m인데, 탑 꼭대기의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고 동탑(東塔)에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다.
제131호 :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光州 證心寺 鐵造毘盧舍那佛坐像) 광주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이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에서 볼 때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통일된 균형미를 보이는 점이 우수하게 평가되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등과 함께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132호 : 화엄사동오층석탑(華嚴寺東五層石塔)
사정(寺庭)에 동서로 같은 규모의 쌍탑(雙塔)이 서 있다.
동탑(東塔)은 조각과 장식이 장엄한 서탑(西塔)에 비하면 아무 조식(彫飾)이 없다. 또한 서탑은 이중기단(二重基壇)인 데 대하여 동탑(東塔)은 단층기단(單層基壇)인 것이 다르다. 탑신부(塔身部)는 옥개석(屋蓋石)과 탑신(塔身)이 각각 1석으로 되었으며 각층마다 우주형(隅柱形)만이 모각(模刻)되었을 뿐 다른 조각이나 장식을 보이지 않는다. 특히 1층탑신은 높이에 비하여 넓은 관계로 중후한 느낌을 준다.
옥개석은 매우 평평하고 얇으며 받침은 각층 4단씩이고 추녀밑은 수평이다. 또한 옥개석(屋蓋石)의 체감률(遞減率)도 탑신을 따라 큰 편이며 제1층과 제2층의 감축은 한층 크다.
상륜부(相輪部)에는 2층 단이 있는 노반(露盤)과 반구형(半球形)의 복발(覆鉢)과 보주형(寶珠形) 석재가 높은 간주(竿柱) 위에 있다.
이 탑은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된 특이한 형태이며 기단부 수법이 약식화한 점 등으로 볼 때 조성년대가 서탑과 비슷한 9세기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제133호 : 화엄사서오층석탑(華嚴寺西五層石塔)
동탑(東塔)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는 데 비하여 서탑(西塔)에는 조각과 장식이 가득찬 장엄한 탑으로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세워진 5층방형탑(五層方形塔)이다. 특히 하대석(下臺石)과 중대석(中臺石)은 한돌로 붙여서 만들고 각면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방향에 따라 우수한 솜씨로 조각하였다. 또한 상층기단 중석의 각면에도 귀기둥(隅柱)과 탱주(撑柱)로 구분한 다음 각 구분된 면내에 8부신장(八部神將) 입상(立像) 1구(一軀)씩을 조각배치하였다. 그리고 옥개석(屋蓋石)은 각층마다 5단의 받침을 갖추고 추녀밑은 수평이 되게 했다.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경쾌하고 체감률(遞減率)도 우수하다. 상륜부(相輪部)에는 2층단이 있는 노반(露盤)에 보주(寶珠)를 얹고 있다. 특히 기단부에서 탑신에 이르기까지 12지신상을 배치한 예는 흔하지 않다. 조법이 우수하며 여러 신상의 배치법은 신중하다.
각부의 비율이 어울리며 경쾌한 멋을 풍긴다. 조성년대는 9세기경인 신라(新羅) 하대(下代)로 본다.
제134호 : 경질(經帙) (송광사)
두루마리로 나온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불교 공예품이다.
가느다란 대나무 조각을 색실로 엮어서 직사각형 모양으로 만들고, 끝단에는 삼각형의 비단 베를 붙여 끈을 달아 경전을 말아 두게 하였다. 대쪽은 색실로 엮어 꽃무늬를 넣었고, 둘레는 비단을 두르고 그 안에 종이를 발랐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한 편이지만 여러 가지 색실로 나타낸 문양은 아직도 정교하며 잘 남아 있다.
비록 낡아서 그 형체만 남아 있지만, 국내에서 유일하게 전하는 유물로 그 가치가 높다.
제135호 : 석조부도(石造浮屠) 경북대학교,
고려시대(高麗時代)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부도는 그 조형으로 보아 신라(新羅) 이래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양식을 따르면서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난 걸작 중의 하나이다.
방형(方形)의 하대석(下臺石)과 중대석(中臺石)에서 고려시대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특히 중대석에 양각된 용과 구름은 웅혼(雄渾)한 수법을 보여준다. 탑신이나 옥개에 비해 기단부가 광대(廣大)하여 경쾌한 감은 적으나 오히려 안정되고 장엄한 느낌을 준다.
이 부도의 방형 지대석은 후에 보충된 것이며 대구시내 개인집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인데, 원소재지와 부도의 주인공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재료는 화강암이며, 높이는 2.74m, 지대석의 폭은 1.57m이다.
제136호 : 경주남산미륵곡석불좌상(慶州南山彌勒谷石佛坐像)
신라시대의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내면적인 웃음이 번지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힘없이 축 늘어진 느낌이며, 군데군데 평행한 옷주름을 새겨 넣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다소 연약해 보인다. 불상과는 별도로 마련해 놓은 광배(光背)는 매우 장식적인데, 광배 안에는 작은 부처와 보상화·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광배 뒷면에는 모든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불을 가느다란 선으로 새겨 놓았는데, 이러한 형식은 밀양 무봉사나 경북대 광배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예이다.
제137호 :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
이 탑은 봉암사를 창건(創建)한 지증대사의 부도(浮屠)로서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 8년(882)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을 기본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여러 장의 판석(板石)으로 짜여진 방형(方形)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각부의 장식조각(裝飾彫刻)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된 당시 신라부도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탑의 높이는 3.41m, 지대석 너미 2.28m의 당당한 탑이다.
지증대사(824∼882)는 경주김씨(慶州金氏)로 17세에 부석사(浮石寺)의 경의율사(瓊儀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말년에 봉암사를 창건하고 헌강왕 7년(881)에 왕사(王師)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동왕 8년(882)에 입적(入寂)하였다. 왕은 시호(諡號)를 지증(智證), 탑호(塔號)를 적조(寂照)라 내렸다.
제138호 : 결번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 국보승격 제315호(2010,1.4)
제139호 : 월정사석조보살좌상(月精寺石造菩薩坐像)
월정사 경내의 8각 9층탑을 향해서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다리를 세워 탑에 대해 공양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높이 1.8m의 보살상이다.
머리에는 높다란 관(冠)을 쓰고 있으며 갸름하면서도 복스러운 얼굴에는 만면에 미소가 어려 있다. 머리칼은 옆으로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고 있고, 목에는 아주 뚜렷한 3줄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목걸이는 매우 섬세하고 곱게 조각하여 가슴에까지 늘어지게 장식하였다. 보살이 입고 있는 옷은 얇고 가벼워 몸에 밀착되어 있고 옷주름은 모두 희미하다. 오른쪽 팔꿈치는 동자상을 받침으로 고이고 있으며 동자상의 머리에 팔꿈치를 올려 놓아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석조 보살좌상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같은 형식이지만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하여 조형상 다소 불균형스런 모습이다. 그러나 개태사와 신복사지 탑 공양상과 더불어 고려시대 화엄종 계통사원에서 만든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며, 당대 불교사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제141호 : 서울문묘(서울文廟<大成殿,明倫堂,東廡,西廡,三門>)
조선(朝鮮) 태조(太祖)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제2대 정종(定宗) 2년(1400)에 불타 없어졌다.
제3대 태종(太宗)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병화로 또 타버렸다. 그러나 성균관의 유생들이 전국적으로 자금을 모아 선조(宣祖) 34∼35년(1601∼1602)에 대성전(大成殿)을 중건하고, 36∼37년(1603∼1604)에 동무(東무)·서무(西무)·신문(神門)·중문(中門)을, 39년(1606)에는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를 중건 확충하였다. 인조(仁祖) 4년(1626)에 정록청(正錄廳), 존경각(尊敬閣), 양현고(養賢庫) 등을 재건하였으며, 고종(高宗) 6년(1869)에 보수하였다. 문묘(文廟)의 동·서 양재(兩齋)를 일명 성균관(成均館)이라고도 한다.
문묘는 공자(孔子) 즉 문선왕(文宣王)의 묘당(廟堂)으로서, 대성전(大成殿)은 공자를 주로 하여 증자(曾子), 맹자(孟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등 4성(四聖) 을 배향하고 다시 10철(哲)과 6현(賢)을 종향(從享)하였다. 동서 양무에는 10철을 제외한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하여 한(漢)·당(唐)·송(宋)·원대(元代)의 현인(賢人)과 우리나라의 18명현 등 112명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제142호 : 서울동묘(서울東廟)
동묘는 중국(中國) 촉한(蜀漢)의 명장(名將) 관우(關羽)를 제사하는 묘로서 본명은 동관왕묘(東關王廟)라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군(朝鮮軍)과 명군(明軍)이 왜군을 물리침에 있어서, 성장(聖將)으로 추앙받는 관우(關羽)의 신령(神靈)이 여러 번 나타나서 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여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비용(費用)과 친필(親筆)로 쓴 현액(懸額)을 보내오고, 조선왕조에서도 협조하여 선조(宣祖) 32년(1599)에 착공하여 2년 뒤(1601)에 완공한 것이다.
본전의 평면이 앞뒤로 장방형(長方形)을 이룬 것이라든가 측면과 후면의 벽체를 전석(塼石)으로 쌓은 점, 내부가구(內部架構)에 있어 대량(大樑)과 중량(中樑) 사이에는 화반첨차(花盤첨遮)를 받쳐 호화롭게 장식한 것 등은 중국식 건축의 취향을 나타낸 것이다.
본전 내부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이 권속(眷屬)인 관평(關平) 주창(主唱) 등의 조상(彫像)이 배향(配享)되어 있다.
제143호 : 개심사대웅전(開心寺大雄殿)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진덕여왕 5년(651)과 의자왕 14년(654)은 다른 해에 해당한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1941년 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가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제145호 : 용문사대장전(龍門寺大藏殿) 예천군
용문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두운선사가 세운 절이다.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대장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전하는 기록에 조선 현종 11년(1670)에 고쳤다고 하며, 그 후에도 여러차례 수리되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오리와 같은 조각을 해 놓았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삼존불 뒤의 나무로 조각한 벽체는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불단 양쪽 옆으로 불경을 보관하는 회전식 윤장대(輪藏臺)를 만들어 놓았다.
작은 규모의 건물로 뛰어난 조각 솜씨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146호 : 관룡사약사전(觀龍寺藥師殿)
주심포(柱心包)집 계통에 속하는 맞배지붕의 특색을 지닌 단칸(單間)의 소불당(小佛堂)이다.
관룡사는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이 건물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것으로서 비록 규모는 작지만 그 모습이 매우 균형이 잡혔고 안정감을 준다. 공포(공包)는 네 귀의 기둥 위에만 있을 뿐, 포벽(包壁)에 화반(花盤)조차 넣지 않았다. 기둥머리에 괴면서 내민 창방(昌枋) 끝을 그대로 첨차로 만들어 공포를 짜올린 솜씨는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독특한 수법이다.
그래서 좌우 측면의 박공(朴工)머리에 나온 첨차(첨遮)들은 모두 전형적인 주심포집 첨차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첨차들은 건물 안쪽에서 보면 다포(多包)집 계통에서와 같은 원호(圓弧) 곡선의 첨차로 변하고 있다. 즉 주심포집 건축에 후대의 다포집 양식을 적용시킨 예이다.
제147호 :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
누(樓)란 건물의 사방을 트고 마루를 높여 지은 집으로 일종에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터에 지은 누로, 절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 불렀다. 그 뒤 여러 차례 고치고 전쟁으로 불탄 것을 다시 세웠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 헌종 10년(1844) 밀양부사 이인재가 새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높이가 높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잡아 매우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건물 서쪽면에서 침류각으로 내려가는 지붕은 높이차를 조정하여 층을 이루고 있는데 그 구성이 특이하다. 또한 건물 안쪽 윗부분에서 용 조각으로 장식한 건축 부재를 볼 수 있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밀양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누각이다.
<한국3대누각 :영남루(밀양), 촉석루(진주), 부벽루(북한)>
제148호 : 공주중동석조(公州中洞石槽) 국립공주박물관.
이 석조는 원래 대통사지(大通寺址)의 금당지(金堂址)와 강당지 사이에 있었던 백제(百濟)의 유물이다.
석조대좌(石造臺座) 위에 원주형(圓柱形)으로 된 받침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놓인 둥글고 큰 이 석조는 한개의 화강암 내부를 파내어 만든 것이다. 받침기둥에는 전형적인 백제 수법으로 12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구연부에는 모두 한 줄의 띠를, 가운데 두 줄의 띠를 돌렸으며 8개의 연꽃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사방에 4개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이 연꽃무늬는 공주지방에서 나온 기와무늬와도 같은 모양이다.
중동 석조는 반죽동 석조(너비:155cm,길이:56cm,두께:16.5cm)보다 약간 작다. 대통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에 의하면 백제(百濟) 성왕(聖王) 7년(529)에 창건됐으므로 이 석조는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백제 유물이라 하겠다.
제149호 : 공주반죽동석조(公州班竹洞石槽) 국립공주박물관.
이 석조는 원래 대통사지(大通寺址)의 금당지(金堂址)와 강당지(講堂址) 사이에 있었던 백제의 유물이다.
석조대좌(石造臺座) 위에 원주형(圓柱形)으로 된 받침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놓여진 둥글고 큰 이 석조는 한 개의 화강암(花崗岩) 내부를 파내어 만든 것이다. 받침기둥에는 전형적인 백제 수법으로 12개의 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구연부에는 모두 한 줄의 띠를, 가운데 두 줄의 띠를 돌렸으며 8개의 연꽃잎을 가진 연꽃무늬를 사방에 4개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이 연꽃무늬는 공주지방에서 나온 기와무늬와도 같은 모양이다.
반죽동 석조는 너비 155cm, 길이 56cm, 두께 16.5cm의 크기이다. 대통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에 의하면 백제(百濟) 성왕(聖王) 7년(529)에 창건됐으므로 이 석조는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백제 유물이라 겠다.
제150호 : 공주반죽동당간지주(公州班竹洞幢竿支柱)
당간은 오래 전에 없어졌고 지금은 당간을 지탱하였던 석재 지주만이 남아 있다. 이 지주의 구조상의 특징은 방형(方形) 기단부(基壇部) 각면에 안상(眼象)이 조각 되어 있으며 지주의 내면에는 상하의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공(杆孔)이 있고 배면(背面)에는 일단의 돌기대(突起帶)를 양각하였을 뿐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수법으로 처리하였다.
현재 대통사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석조물로서 당시의 사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당간지주는 절의 문 앞에 세우는 것으로 양 지주 중간에 세우는 당(幢)은 불(佛)·보살(菩薩)의 공덕(功德)을 기리거나 괘불(掛佛) 등을 매달아 법회(法會) 등 행사를 행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