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臨淸閣) / 독립운동가의 집안 고성 이씨 종택
1519년 건립. 보물 제182호 / 경북 안동시 법흥동 (2011.3.5)
안동 법흥동 낙동강가에 길게 자리잡은 고택 임청각은 고성 이씨(固城 李氏) 종택이다. 고성 이씨
시조는 당나라에서 난을 피하여 왔었는데, 고려 때 토족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경남 고성 땅에 가서
살게되어 '고성 이씨' 관향을 받았다. 조선 세조 때 현감을 지낸 분(이증)이 안동 땅에 와서 터를
잡게 되어 입향조가 되었다. 그 뒤로도 사화 때마다 절개를 지켜 명문의 기틀을 다지고, 나라가
풍전등화 일 때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지금의 국가원수)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등
아홉분의 독립운동가가 이 집안에서 나왔다. 이는 이 집안의 자랑이요, 고장의 자랑이요, 국가의
자랑이다.
석주선생 아들은 자결 순국하였고, 손자는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후손은 집이 없어 남의 집을 전전하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집도 일제 호적을 거부하여 다른 여러
이름으로 하였다가, 재판 끝에 70년만인 최근에야 문중으로 돌아왔으니 그 고초는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영남산 지기가 우물에 맺혀 이곳 안방에서 재상 세명이 난다 하였는데, 나라를 찾기 위해
가족이 풍비박산이 된 이 집안에 마지막 한명의 재상이 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다시 임청각을 찾아갔다. 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는 어구에서 '임(臨)'과 청(淸)'을 따왔다고 한다. 배를 타고 집
어귀에 닿았던 집인데, 일제 때 독립운동가 집을 허물기 위해 집 앞으로 중앙선 철길을 놓아 99칸
중 반 가까이 허물고 건물도 많이 상하여 다시 손 보아야 할 것이 많은데, 이제 주변을 조금 회복
시켜 놓았다.
사랑채, 안채와 행랑채가 뚜렷하여 위계가 있고 위용이 있다. 정(丁)자 건물 군자정 (君子亭)은
사랑채로 임청각 중심건물이다. 군자의 집이듯 군자정 현판이 뚜렷하다. 툇마루를 놓고 난간을
둘렀는데 낙동강을 바라보는 위치에 서있어 호방하다. 양반 집안은 손님맞이를 후하게 하는데,
임청각은 늘 문을 열어둔다. 대문에 붙여둔 입춘첩에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이요, 사방무일사
(四方無一事)라 썼는데 그 뜻 역시 호방하다.
※ 교통편
(1)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안동으로 가는 버스는 30분 마다 있으며 (2시간 50분 걸림), 안동시 송현동에
있는 안동버스터미널에서 용산동 가는 1번 시내버스를 타고 법흥동삼거리에서 내려서 (30분 걸림),
고가도로 아래 임청각길로 걸어 들어가면 된다 (걷는 시간 5분)
(2) 기차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갈 수 있다. 오른쪽 안동댐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임청각길로 가면 된다
(걷는 시간 15분)
임청각 군자정
군자정 안에는 퇴계 이황,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석주 이상룡 등이 쓴 현판이 있다
임청각 바로 앞에 가로로 지나가는 철도와 도로와 낙동강이 있다
임청각 사랑채 '군자정(君子亭)' 현판
안채에서 사랑채 가는 문
행랑채
임청각이 낳은 독립운동가
안채
임청각 원경
첫댓글 수 년 안에 철길을 옮기고 임청각을 복원한다고 하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마들다리(법흥교)를 자건거로 넘어 다녔던 지난 날이 꿈결 같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강물처럼 남아 흐른다.
철길을 옮기면 임청각 앞 풍경이 훤해지겠지. 맨 뒤 사진은 법흥교에서 찍었는데, 그런 좁은 다리에
차 두대가 어떻게 교행했는지... 자전거 통학할 때 차만 가까이 오면 조마조마 했었지.
반가운 일이네 철길을 옮기고 임청각을 복원한다니! 안동의 자랑이요 국가의 자랑이 아니던가1
임청각은 국가에 기증하였다 하는데 관리가 더 낫겠지. 최근에 새로 정비한 모습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