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k's Letter(211) 2019. 4. 19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부부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0-12)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안부를 전합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 마치 죽은 양 움추려 있던 만물들이 소생하는 4월입니다. 개나리, 벚꽃, 진달래 등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활의 계절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적처럼 찾아오는 부활의 소망은 모두에게 큰 격려와 기쁨을 가져다주곤 합니다.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따라가 보는 한 주간입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 입성 후에,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시며, 마리아의 <헌신>을 통하여 장사를 준비하시고, 이 땅에서 마지막 생애를 <굴복의 기도>로 정리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의 놀라운 생애를 찬양하며, 감사를 드리며, 함께 부활의 기쁨과 은총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모두 함께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시다. 주님의 부활이 그토록 위대한 것은 모든 고난의 과정을 통과한 후에 마침내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던 죄와 사망의 권세를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소망과 은혜를 가져다 주셨기에 모두가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오는 주일(21일)에 함께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며 은혜에 동참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4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어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열린 제83회 마스터스 골프대회에서 <타이거 우즈>가 11만에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였습니다.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 그를 극찬하는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다름 아닌 골프 황제 <우즈의 부활>을 기뻐하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는 지난 20년간 수많은 스캔들(혼외정사, 도박, 이혼, 추문)과 부상과 약물복용으로 경창에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4번의 허리수술 등으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하여 세계랭킹 1위에서 1199위까지 떨어지는 수모를 경험하였습니다. 모두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골프인생은 “끝났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새롭게 부활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광하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모두에게 도전의식과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향하여 “당신은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찬사를 보냈고, 민간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훈장 <자유의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모든 부침을 겪은 뒤 돌아와 마스터스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탁월함과 투지, 결정력의 증거”라고 칭찬하였습니다. 프로농구 스타 스테픈 커리는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귀”라고 경의를 표했습니다. 테니스 여제 윌리엄스도 “말 그대로 울었다. 백만 번 축하한다.”고 감격했습니다. 타이거 우즈는 골프 경기에서 장애물이 되는 Rough를 헤치고(파경), Hazard에서 벗어나고(도박과 약물중독), Bunker(부상)에서 탈출하여 다시금 황제의 <인생샷>을 날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그의 부활을 기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찬사 속에 우즈는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인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1997년 마스터스에서 역대 최연소와 최소타 등 여러 가지 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우즈가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버지, 얼 우즈에게 안겨 포옹하던 모습과 이번에는 우승 직후 자신의 아들 찰리(10살)을 꼭 껴안고 기뻐하는 한 장의 사진이 대조되어 너무나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구나 침체와 실패와 실의와 좌절과 낙심과 고난과 고통의 긴 터널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은 끝내 좌절하지 않고, 무한한 도전정신으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지난날의 모든 아픔과 고통은 영광스러운 승리로 장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부활의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을 견디시고, 우리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생활하는 한 일동 형제 가정에 기쁨과 소망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20여간 영주권을 받지 못하여 불법체류자의 처지로 온갖 어려움을 경험하며 인내한 한 일동형제 가정에 영주권 취득을 위한 최종 서류가 접수되었다고 합니다. 기도에 끝까지 함께 한 형제자매들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받는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도는 응답될 때까지 무한한 인내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아버지 되심을 더욱 확신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오며 찬양을 드립시다!!!
빌립보서를 마지막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삶과 사역에 유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며, 박 남 규 부부 서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헌신
바울의 일생은 자신에게 주어진 푯대(Goal)를 향하여 달려가는 전형적인 목표 중심적인 삶이었다. 그는 무엇을 위해 달려갔는가?
1.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정(Passion to know Christ)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정으로 삶을 불태웠다. 다매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의 가치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3:7-9)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었다. 마치 국제 Navigator의 모토와 같다.
<To know Christ and to make Him known>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알게 하라”는 이 모토는 우리 네비게이토의 정체성이다. 네비게이토 사역의 Core values의 첫 번째도 바로 이것이다. <The passion to know, love, and become like Jesus Christ>이다.
주님의 좋은 일꾼으로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분별해야 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우리가 빌립보서를 읽을 때마다 바울의 넘치는 주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과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그의 열정과 에너지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까지 영향력이 미치게 된다. 그 힘과 열정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울의 삶의 원동력(엔진)은 바울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하는 것이 그의 열정의 근원이었다. 빌립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한 책이다. 50%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한 이야기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충만하였다. 불타오르는 삶이었다. 그의 내적인 힘은 주님과 친밀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나왔다. 마지막으로, 종말로 하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그의 서신을 끝낼 때가 되었다.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빌3:1vs “주안에서 기뻐하라” 3vs “예수로 자랑하라”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의 기쁨은 그분께 기초를 두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가득하였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자랑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롬15:17)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랑해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밖에는 없다. 주님이 기쁨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1)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 방해되는 것들
-삼가야 할 3 가지(경계심을 가지고 관찰해야 할 3가지) 2vs
•개-불결, 비천, 비양심, 탐욕스러운 것을 표시한다. 수치를 모르는 남녀를 비유하기도 한다. 원래 이 말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대해 쓴 말이나(마15:27), 바울은 같은 말로서 유대인을 역습하고 있다.
• 행악하는 자는 악한 일꾼이란 뜻이다. 복음의 미명아래 사욕에 움직여 악을 행하는 자들을 말한다.
• 손할례당은 살을 베는 행위를 조장하는 파당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할례는 할례가 아니요, 살을 베는데 지나지 않는 것을 지적한다.
개들을 삼가라는 <할례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으로부터 돌아서도록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통해서 누리는 즐거움에 방해 되는 것이다. 교만하게 하고 자긍심을 주며 잘못된 신뢰(육체적 신뢰)를 조장하는 것이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짓된 신뢰를 주는 것, 민족적인 교만이 되고 자랑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보다 잘못된 신뢰를 주는 것이 할례사상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자랑하고자 하는 것, 교만하여 지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도 잘못된 확신이 바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 이외에 어떤 것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랑, 소망, 확신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자랑해야 한다. 모든 영광은 예수그리스도께 돌려야한다. 주님이외에는 어떤 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해야 하며, 자랑해야 한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래리 크랩은 인간의 3가지 욕구를 말하고 있다. ① 일상적 욕구(casual longing)-의,식,주와 관계된 욕구(좋은 차, 집, 물질적인 여유, 소망…등) ② 기본적 욕구(critical longing)-관계의 욕구(부부관계, 자녀문제, 직장동료 혹은 교회 안에서 관계…등) ③ 근본적 욕구(crucial longing)-영적인 욕구(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욕구). 일상적 욕구와 기본적 욕구가 채워질 때 종종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근본적인 욕구를 다루시기 위해 일상적 욕구와 기본적인 욕구를 때론 무너뜨리곤 하신다. 이때 하나님의 임재의 실재를 맛보게 된다.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선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근본적인 욕구도 채워지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선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될 때 가장 고상한 것이 되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상은 무엇인가? 노벨상이다. 왜냐면 가장 가치가 있고, 가장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8-9vs) 가치관의 문제이다. 가치관은 선택할 때 영향을 준다.
가치관에 따라 삶의 관점이 달라진다. 어떤 것이 손실이며 어떤 것이 이익이냐 하는 선택은 가치관의 차이에서 온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 지는 것과 비교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와 비교할 때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배설물로 여겼다. 무가치하게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게 될 때 어떤 축복들이 있는가?>
James Packer 『하나님을 아는 지식』 pp40-47
1) 하나님을 위한 엄청난 열정을 갖게 된다.
단11;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하나님께서 도전을 받거나 무시를 받는 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그들은 보지 못한다. 그들로 하여금 행동을 취하게 한다. 다니엘과 다니엘의 3친구,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의 용기있는 행동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다윗의 용기 있는 행동들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모두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믿음의 용사들에서 나왔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17:36)
2) 하나님을 잘 알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생각을 품게 된다.
다니엘서는 ㄴㅇ바벨론 제국의 힘과 장려함 그리고 또 다른 위대한 제국이 뒤따라 나타날 가능성, 곧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스라엘을 왜소하게 보기에 충분한 상황에 직면해서, 다니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이시며 주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다스리심”(단4:26)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세계역사와 각 인간의 운명에 대해 최후의 결정을 내리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결국에 가서 승리할 것이다. 이러한 깃들이 다니엘의 마음을 갇득 채우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었고, 이는 다니엘의 기도들이 입증해 준다.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단2:20-22)
William Carey는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생각을 품으라. 땅콩을 구하지 말고 대륙을 구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며 크신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생각을 품게 된다.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하나님을 잘 알았기에 위대한 꿈과 비전을 품었고, 또한 이루었다.
3)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담대함을 드러낸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위험을 자초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돌적인 무모함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았다.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했고, 닥칠 위험을 평가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간섭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로 간섭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것들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일단 자신들의 태도가 옳으며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는 그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자, 결과와 상관없이 기쁘게 그 일들을 행했다.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담대하였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고 바울은 고백했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다.
4)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을 얻는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자신들을 안다는 확신, 이러한 관계가 죽음을 넘어서 영원토록 삶 속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준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의 확신에서 우리는 커다란 만족을 느낀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2-13)
바울의 생애가 이렇게 위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열정을 품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생각을 품고, 하나님을 위하여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하였고,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을 누리며 일생을 살다가 주님께로 돌아갔다.
2.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0-12)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램9:24)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Knowing God)과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자 하는 것
(Experiencing God)이 바울의 열망이었다. 그는 주님을 경험하기를 원하였다. 단순한 지식에서 뛰어넘어 삶 가운데 주님을 경험하기를 원하였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는 두 가지 통로가 있다. 간접적인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직접적인 경험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삶의 간증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을 경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자랑하셨다. 이것이 그의 고난의 원인이 되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었다.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해본 적이 있는가? 또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 본 경험이 있는가? 욥은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엄청난 축복을 누렸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1,5)
야곱은 일생동안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북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요셉은 어떠한가?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을 통하여 연단된 후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그는 자기를 판 형제들에게 삶의 간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낼 수 있었다. 또 모세는 어떠한가?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경험을 오랜 세월동안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23편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경배하였다.
고난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도구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무의미한 고난은 없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본다. 요셉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을 준비하는 사건이었다. 대개 모든 고난이 지난 후에 알게 된다. 사도바울도 고후1:4-6에서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설명했다. 고난은 바울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넘치도록 경험하게 하였고, 그것은 성도들에게 위로의 수단이 되었다. 고난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는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서 쓰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다윗은 시34:8에서 사울에게 쫓기는 급박한 상황에서 이 말을 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은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환난당하는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에게 위로하는 말이 되었다. 고난은 사람을 낮추고 겸손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생각지 못하는 뜻밖의 일들을 행하신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믿어주시는 영광스러운 일이고 특권이며 영광이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며 경험하기를 원하는가? 그분과 친근하게 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계획을 아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어느 것이 중요한가? 주님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과 주님과 가까이 밀접하게 대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바울은 또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부활의 능력에 동참하기를 원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하였다. 부활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더욱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3가지 <고>를 즐겨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주님과의 <고독한 시간>을 통하여 주님을 깊이 알아가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즐기며, 주님의 사람으로서 <고상한 생각과 행동>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3.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삶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부르심의 상을 좇아가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
(1) 빌3:20vs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 빌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3)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4) 빌4: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과연 무엇을 위해 좇아가는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하늘나라의 상급이 우리의 앞에 놓여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노력한다. 아직도 얻지 못한 것들이 있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이미 완전하여 졌다. 이미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향하여 나아갈 영역이 남아 있다. 온전한 구원을 위해, 성화의 구원과 영화의 구원을 얻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 최종적인 결과에 우리의 눈을 고정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으며, 우리와 동역자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있으며,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장차 만나게 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이라고 끝을 맺는다.
우리는 바울처럼 장차 다가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상급을 향하여 달음질해야 한다. 우리의 최종 본향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끝-
Park-211 (빌립보서-3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헌신).h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