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의 열대 밀림에 형형색색의 별빛이 쏟아진다. 앙코르 왕국의 영화인가,아니면 킬링필드의 원혼인가. 보석처럼 화려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별들이 하나 둘 스러지자 밀림 너머로 여명이 밝아온다. 그리고 거울처럼 맑은 해자(垓子)에 웅장한 고대도시가 실루엣으로 떠오른다. 마치 그날의 영광을 재현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15세기 캄보디아 밀림의 앙코르 왕국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9세기부터 600년간 화려한 영화를 자랑했던 인도차이나 반도의 앙코르 왕국은 어떻게 수세기동안 역사의 기억 저편으로 완벽하게 잊혀질 수 있었을까.
세계 7대 불가사의이자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앙코르 유적은 캄보디아 북서부의 도시 시엠레아프에서 6㎞ 떨어진 앙코르와트를 중심으로 대부분 차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적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은 앙코르와트와 앙코르톰.
수르야바르만 2세의 통치 시절인 12세기 초에 3만여 명의 장인들이 30여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앙코르와트는 폭 200m의 해자와 5.5㎞의 성벽에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사원으로 지금도 프랑스에 의해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밀림 속에 방치되어 있던 앙코르 유적이 햇빛을 본 것은 1861년. 프랑스의 박물학자인 앙리 무오가 동양의 미개국쯤으로 여겨졌던 캄보디아에서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보다 웅장한 앙코르 유적을 발견하자 유럽은 발칵 뒤집혔다.
어느 날 갑자기 역사 속으로 사라진 버린 앙코르 왕국의 멸망 원인을 싸고 학자들은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역사학자는 1431년 샴족의 침공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자는 노예들의 반란이나 전염병을 이유로 들기도 하나 그 어떤 설명도 앙코르의 미스터리를 명쾌하게 밝혀주지는 못한다.
앙코르와트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은 정문인 서문 입구의 좌우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연못쪽. 5개의 중앙탑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연못에 비친 회색빛 중앙탑의 잔영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해뜨기 직전 어둠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앙코르와트는 해질녘엔 화염에 휩싸인 듯 노을에 붉게 물든다.
1층과 2층 회랑의 벽면에 한 치의 여백도 없이 빽빽하게 새겨진 부조는 앙코르 예술의 극치. 민중의 영웅인 라마 왕자가 납치당한 아내를 찾는 무용담을 풀어낸 ‘라마야나 이야기’와 왕위를 둘러싸고 100명의 왕자와 5명의 종형제가 사투를 벌이는 ‘마하바라타 이야기’ 등이 두루마리 그림처럼 펼쳐진다. 조각이 워낙 정교한데다 빛의 방향과 보는 위치에 따라 주인공들의 표정이 바뀐다.
천상의 무용수인 압사라 조각은 이름 없는 장인들의 손재주가 예술가의 경지에 올라섰음을 증명한다. 회랑 벽면에 수천개가 조각됐음에도 불구하고 풍만한 가슴과 은은한 미소 등 어느 것 하나 같은 표정이 없다. 다만 가슴 아픈 것은 금방이라도 벽에서 튀어나와 뇌쇄적인 춤을 출 것 같은 압사라 상에 총탄 자국이 선명하다는 사실이다. 1970년부터 벌어진 20년간의 내전기간 중엔 폴 포트 정권의 어린 병사들이 장난으로 압사라 맞추기 게임을 한 탓이다.
앙코르와트는 사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 차곡차곡 쌓은 후 조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벽돌 틈새엔 면도날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건축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옛 장인들의 솜씨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모양이다. 보수공사를 맡은 프랑스는 무너져 내린 지붕 등을 보수한다며 마구 시멘트를 덧칠해 아름다운 석조 건축물은 만신창이가 됐다.
앙코르와트에서 1.5㎞ 떨어진 앙코르톰은 ‘위대한 도시’라는 뜻에 걸맞게 규모가 웅장하다. 1219년 40여 년의 공사 끝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완공된 앙코르톰은 한 변이 3㎞인 성벽에 둘러싸인 데다 성벽 바깥쪽은 폭 113m의 거대한 해자에 둘러싸여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동서남북의 대문 중 가장 웅장한 남문에서 울창한 밀림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앙코르톰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바이욘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이욘의 제1회랑은 다른 사원과 달리 크메르 군사들의 용맹스런 전투 장면 뿐 아니라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도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바이욘의 가장 인상적인 조각은 ‘크메르의 미소’로 불리는 석상.
앙코르톰의 바이욘은 앙코르와트와는 달리 일본인들이 복원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적 해체 때 돌에 번호를 매기는 등 기본적인 수칙을 지키지 않아 회랑엔 머리 부분이 실종된 물고기 조각도 발견된다. 주변의 공터엔 제자리를 찾지 못한 돌들이 수북이 쌓여 일본인들의 ‘만행’을 증거하고 있다.
13세기 원나라 쿠빌라이의 사신인 주달관의 기행문 ‘진랍풍토기’에 동탑으로 기록된 바푸온과 주춧돌만 남은 왕궁터,그리고 ‘천상의 궁전’으로 불렸던 피미야나카스도 앙코르톰의 볼거리.
벽면에 코끼리 부조가 새겨진 ‘코끼리 테라스’는 자야바르만 7세가 열병식을 할 때 사용됐던 대규모의 테라스. 테라스의 중앙에 서면 벽면에 새겨진 용맹스런 크메르 병사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행진을 할 것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열대 밀림에 거대한 석조도시를 건설했던 앙코르 왕국의 후예들은 ‘킬링필드’의 아픔과 가난을 숙명처럼 등에 짊어진 채 아직도 밀림 속에서 맨발로 살아가고 있다.
끈질기게 관광객을 따라다니며 ‘원 달러’를 외치는 어린아이들과 지뢰에 발목을 잃은 채 구걸을 하는 캄보디인들의 모습에서 앙코르 왕국의 옛 영화를 떠올리기에는 역부족이라고나 할까.
◇ 여행메모
한국에서 캄보디아로 가는 직항편은 아직 없다. 태국의 방콕이나 베트남의 호치민에서 캄보디아의 시엠레아프까지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가깝다. 비행시간은 모두 6시간. 캄보디아는 건기인 11∼2월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다.
앙코르와트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한 ‘르 메르디앙 앙코르(02-794-4011)’는 시엠레아프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5성급 호텔로 지난해 9월 오픈했다. 객실 223개의 호텔은 앙코르와트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본따 마치 고대도시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시엠레아프에는 이밖에도 많은 호텔과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형편에 맞게 숙박할 수 있다.
가야여행사(02-536-4200)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과 킬링필드 관광,태국 파타야의 산호섬 휴양 등을 포함한 3박5일 일정의 패키지 여행상품을 134만9000원에 내놨다. 시엠레아프의 르 메르디앙 앙코르에서 이틀간 숙박하고 북한 직영 식당에서 평양냉면도 맛본다. 둘째 날 저녁엔 압사라 민속공연도 관람한다. 손목과 발목을 들고 춤을 추는 무용수의 동작은 앙코르와트 벽면에 새겨진 압사라 조각이 살아 돌아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