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의 마지막 주에 개봉된 [품행제로]는 매우 상징적인 영화다. 분명히, 지난 해부터 불고 있는 조폭 영화의 변주에 해당되지만 지금까지의 조폭 영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새로운 물줄기를 제시하고 있다. 또 [친구] 이후 [해적, 디스코 왕 되다][몽정기]로 이어지는 80년대 풍의 복고적 정서를 녹아내고 있으면서도 영화가 개봉되는 2002년 당대의 주류적 감성과 맞닿아 있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거기에 청춘남녀들의 사랑이 양념처럼 잘 뿌려져 있으며 정체성 찾기까지 시도하고 있는 청소년 영화, 일종의 성장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왜 80년대일까? 일반적으로 복고적 정서는 20년을 주기로 반복되며 역시 20년 전을 배경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그 당시 10대나 20대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회의 주류로 흡수되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자신의 청소년기 혹은 청춘시절을 사로잡았던 정서를 다시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지금의 주 관객층인 10대나 20대는 사실 80년대 정서를 잘 모르지 않을까? 그런데 왜 우리 영화의 주관객들이 잘 모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잇달아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품행제로] 역시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최근의 다른 영화들처럼 80년대의 특수한 사건에 매달리는 영화는 아니다. 비록 영화 속의 시간적 배경이 80년대이고 달동네나 롤라장처럼 특수한 공간적 배경이 등장하지만, 지금 이곳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따뜻함이다. 복고적 정서라는 것은 삶이 처음 잉태되던, 혹은 자아가 막 성숙되어 가던 그 시기의 어떤 근원적인 것을 찾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일어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곳의 삶이 고달프고 삭막하기 때문에 그것을 치유해 줄 수 있는 힘을 자신의 따뜻했던 과거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시인 랭보의 말처럼,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지나간 삶의 흔적들은 시간의 힘으로 상처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마모되고,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정서만 남아 따뜻한 온기를 발산한다. [품행제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낯익은 것이다. 한 명의 남자와 두 여자 사이의 삼각관계, 우등생 애인에게 반해 도서관을 들락거리는 불량학생, 학교 내 최고의 쌈장 자리를 놓고 운명적 결투를 벌이는 라이벌,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이 맛깔스럽게 조화를 이루면서 결코 조폭 영화의 아류에 머물지 않는 새로운 감성을 선보이고 있다.
자, 이처럼 [품행제로]는 2002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동시에 2003년 우리 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예고하고 있다. 신인 조근식 감독은 정공법적 연출로 칼날같은 감성과 따뜻한 정서라는 양날의 칼을 무리없이 반죽해서 대중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품행제로]의 주인공들은 10대 후반의 고등학교 청소년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지금까지의 하이틴 영화와는 다르다. 첫 장면은 [신라의 달밤]이 그랬던 것처럼, 그 학교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버린 문덕고 최고의 쌈장 박중필에 관해 화려한 전설의 한 토막을 늘어놓는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박중필이라는 캐릭터는 매우 복합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는 다른 학생들보다 한 살 많으며, 음란만화나 보여주고 학생들에게서 소위 삥을 뜯는 양아치이다. 그가 학교 최고의 쌈장이라고 소문이 나 있지만 실제 격투하는 씬은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에 한 번 등장할 뿐이다. 그의 무공은 소문 속에 가려져 있고 관객들에게도 역시 실재인지 아닌지 마지막까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친구]나 [네발가락]의 주인공들처럼 고교 시절에 폭력을 휘두르지만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는 살벌함이나 처절함은 보이지 않는다.
또 박중필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양아치들의 주변부 문화에서 모범생들의 주류 문화로 근접하게 하는 노력 때문이다. 건들거리지만 혐오스럽지 않고 폭력에 의지해서 힘을 행사하지만 타락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전설과 신화로 포장해도 그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 중의 하나로 만드는 친근감이 있다. 즉 색다르지만 관객들의 심리적 거리감 혹은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는 데 박중필의 매력이 있다.
박중필을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끌어 당기는 힘은 사랑이다. 그를 오래전부터 짝사랑하는 정란여고 오공주파의 캡짱 나영과 팽팽한 삼각관계를 형성하면서 박중필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은 모범생 최민희다. 모범생이라고 해서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캐릭터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 공부만 하고 순진한 그런 모범생은 아니다. 민희는 민희대로 내면의 힘이 있다. 전학온 첫날 수도가에서 나영과 만나 조금도 밀리지 않고 팽팽한 시선의 대결을 펼친 나영의 아우라는 클래식 기타, 도서관 등 고전적 이미지와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박중필-최민희-나영으로 형성되는 삼각관계와, 문덕고 쌈장 자리를 놓고 최후의 대결을 펼치는 중필-상만의 힘의 축은 [품행제로]의 내러티브가 정석대로 혹은 공식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품행제로]의 미덕은 도덕적 설교나 위장적 제스처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큰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청소년들의 삶의 현장에 영화가 내려와 있다는 것, 그 힘으로 중필과 유도부원들의 결투 등이 만화적으로 과장되게 처리 되어 있어도 [품행제로]의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세포 속으로 스며든다.
[품행제로]는 류승범의 A부터 Z까지, 그가 가진 재능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류승범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캐릭터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새로운 캐릭터다. 밉살스럽지 않으면서도 불량기 있는 양아치 청소년의 모습을 그려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류승범은 오직 그 자신의 연기력의 힘으로 기존의 관습에서 일탈하여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있다.
[성냥팡이 소녀의 재림]에서 라이터를 팔기 위해 추운 거리를 헤메던 임은경은 [품행제로]의 모범생 민희로 부활했다. 그녀가 갖고 있는 잠재력이 상당하다는 것은 민희라는 캐릭터는 보여준다. 당당하면서도 정서적 흡인력 있고 백치미와 은밀한 섹시함의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는 민희는 임은경을 배우로 만들어 주고 있다.
공효진은 올해 [긴급조치 19호][철.파.태] 등 수많은 여오하에 출연하고 잇지만 다작임에도 불구하고 개성적인 연기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좋은 배우들과 기초가 튼튼한 감독이 만든 성장영화 [품행제로]는 우리들 모두가 지나쳐 온 바로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끝없이 불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