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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놀이터에서 삶을 배운다
- 편해문 -
놀이터
, play보다 ground가 중요하다. 놀이터는 도시가 생겨나고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리면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놀이터는 어쩔 수 없는 근대의 발명품이다. 산업혁명의 발원지인 영국의 맨체스터에 1859년 공공놀이터가 처음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놀이터는 독어와 영어로 Spielplatz, Playgound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놀이터란 spiel(놀이, 유희) + platz(광장, 장소), play(놀다) + ground(땅, 토양)라는 뜻인데, 내 가슴에 새겨진 말은 play나 spiel이 아니라 ground와 platz이다.
나는 놀이터 이야기를 ‘놀이’가 아니라 아이들의 땅, 대지, 바탕, 토대, 터 등을 뜻하는 ground와 platz에서 시작한다. 놀이터란 단지 play를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도시와 자본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삶을 든든히 일굴 수 있는 ground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놀이터 철학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놀이터를 새롭게 가꾸거나 만들려는 움직임이 부쩍 늘었다. 나는 올해를 ‘놀이터 원년’이란 규정한다. 가까이 가보면 거품이 있다. 대기업이 본격적으로 뛰어들 기세고 지자체나 정부 부처도 이에 가세하고 있다. 이 거품이 앞으로 3년은 갈지.... 나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이 글은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 뜬금없는 놀이터 거품의 쓰나미가 밀려오기 직전에 내놓는 나의 대응이다.
한국의 공공놀이터는 부모와 아이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이렇게 공공놀이터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과 맞물려 동네와 마트에 상업적 놀이터가 만들어졌고 부모는 아이와 함께 여기에 간다. 우리가 공공놀이터를 돌보지 못하고 잊어버린 사이에 돈 만원을 내고 아이들을 마트에서 한두 시간 놀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들이 노는데 돈이 들고 이를 돈벌이로 삼는 기업이 등장한 것이다. 내가 그동안 아이들 놀이터를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놀이터 사유화’로 이름 붙일 수 있다. 철도와 의료 민영화 혹은 사유화가 철도와 의료의 질과 국민의 삶을 끝없이 뒷걸음치게 하듯 ‘놀이터 사유화’는 아이들 삶을 뿌리부터 소비에 절게 할 것이다. ‘놀이터 사유화’는 이런 가공할 탐욕이 아이들 놀이터까지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내가 놀이터의 공공서 회복에 관심을 두고 모든 놀이터가 ‘1급의 공공영역’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이다. 지금은 자본의 ‘놀이터 공공성’ 밀어내가 질주에 비판을 가하면서 동시에 내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공공놀이터 커뮤니티에 뿌리를 둔 공유 놀이터로, 주민과 아이들, 시민단체가 알뜰하게 디자인하고 가꾸는 일이 필요한 때다.
한국은 부침이 심한 사회다. 아이들 놀이터 공간에 관심을 두는 것은 기껍고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아이들을 둘러싼 사회, 다시 말해 부모와 교사와 행정의 사고방식 그리고 시스템이 바뀌지 않은 채 놀이터만 개선하고 혁신한다고 아이들 삶이 나아질 것이란 생각은 순진하다.
그럼에도 놀이터는 바꾸어야 한다. 한국은 세월호 이후 ‘안전’이라는 주술에 사로잡혀 여전히 ‘안전빵 놀이터 찍어내기’를 무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놀이터에서 이 ‘안전 신화’라는 장막을 걷어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15년 안에 한국의 바깥 놀이터는 모두 폐쇄될 것이고 놀이터에서 위험과 만나고 그것을 다루는 법을 익힐 수 없었던 아이들은 더 큰 위험 앞에 놓일 것이다.
미세먼지와 자외선의 위험에 바깥 놀이터는 수명이 얼마나 남은 것일까. 나의 놀이터 생각은 이런 절망에서 출발한다. 좀 더 험하게 말하자면 편의점 수의 두 배에 이르는 한국의 6만 개 가까운 공공놀이터를 바꾸지 않고는 아이들 삶이 제자리에 놓일 수 없다. 지금처럼 탐험할 것도 없고 상상도 빈곤한 놀이터에서 십 년을 보낸 아이들이 10년, 20년 뒤에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지 아득해지기 때문이다.
지루한 놀이터가 오히려 위험하다. 놀이터에서 생기는 아이들의 부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회복 가능한 부상이고 또 하나는 회복 불가능한 부상이다. 회복 불가능한 부상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에 서야 하고 이런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놀이터는 철저히 계획, 시공, 관리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회복 가능한 부상에 대해서는 열린 태도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복 가능한 부상이라는 것은 피부가 찢기거나 팔다리가 부러지는 정도를 말한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와서 다른 아이들과 놀 때는 적어도 이 정도의 부상은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물에 목이 걸리거나 난간의 볼트가 풀려 떨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애초에 일어나서는 안된다. 다행히 현재 ‘놀이터 안전규정’이라는 것이 마련되어 있어 주변의 놀이터 대부분은 이규정에 따라 걸러진 놀이터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한국의 6만 개 놀이터가 오랫동안 이런 안전만을 유달리 강조하며 만들어지고 관리되다 보니 현재의 재미없고 지루한 놀이터가 되었다. 선전만은 그의 책 「어린이 놀이시설」에서 놀이기구가 기능적 놀이, 기술적 놀이, 사회적 놀이 단계로 발전한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놀이터의 놀이기구는 아직도 기능적 놀이 단계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2단계로 넘어가려고 하면, 위험하다며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사회적 놀이 단계까지 간 놀이기구를 이미 오래전에 만들었다. 이 놀이기구와 놀이터에서 놀았던 아이들이 오늘날 일본 사회의 주축이 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 놀이터는 어떠했고 지금은 어떠한가. 변함없다.
아이들이 다니는 길과 어른이 다니는 길은 다르다. 아이들은 막히면 돌아가지 않고 넘으려 한다. 아이들은 다르게 하고 싶고 그게 놀이이기 때문이다. 놀이터가 지루하게 만들어져 있으면 사고가 일어날 위험은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놀이터나 놀이기구가 재미없고 흥미를 끌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본디 용도와 기능에 맞지 않는 방법으로 놀이터와 놀이기구를 써보려는 강력한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나는 놀이터에서 나타나는 이런 ‘반달리즘(vandalism)의 원인이 대부분이 지루한 놀이기구에 있다고 본다. 재미없는 놀이기구는 ’놀이가구 망가뜨리고 부수기‘ 놀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지루함은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덮개가 있는 미끄럼틀에 붙여놓은 <절대 거꾸로 올라가지 마시오> 문구는 아이들에게 거꾸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문구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꼭 해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마치 놀이터에서 하면 안되는 안전수칙이 놀이터 필수수칙으로 읽히는 것처럼 말이다.
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늘 고만고만한 ‘조합놀이대 1개, 그네 또는 시소 2개, 바닥은 고무매트나 고무칩 포장’이라는 ‘놀이터 3종 세트’를 찍어내고 있다. 탄성 고무칩이 아이들의 부상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모래 혹은 작은 크기의 콩자갈 또는 멀치(mulch)라는 나무껍질과 견주어 좋지 않다. 최근 국가 표준이 만들어져 개선되었지만 한여름에는 열기가 위로 솟구쳐 놀이터로서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는데도 고무매트나 고무칩을 고집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먼저 아이들 건강이나 놀이터 기능의 무엇인지보다는 유지관리만 쉬우면 된다는 편의주의 때문이다. 또 하나는 놀이터 전체 예산 속에서 바닥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놀이터 바닥에 모래 몇 차 부어놓으면 그게 무슨 돈이 되겠는가.
이처럼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놀이터가 있는 것은 놀이터에 영혼이 없음을 말해준다. 다양성이야말로 놀이터의 영혼을 증명한다. 대한민국 아이들은 영혼 없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지 짚어볼 일이다. 가장 큰 원인은 편의주의이다. 귀찮으니까 쉽게 해결해버리는 태도이다. 또 하나는 놀이터가 지녀야 할 두 덕목 가운데 하나 즉 안전에만 집중한 까닭이다. 나머지 중요한 덕목을 고려하지 않거나 전혀 염두에 주지 않아 불균형하고 재미없는 놀이터가 완성된 것이다. 안전이라는 기둥 옆에 ‘도전과 모험’이라는 기둥은 세워야 한다. 그러니까 놀이터는 안전과 도전이라는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도로고 설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안전검사에 합격했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놀이기구가 「어린이 놀이시설 시설기준 및 기술수준」에 따라 안전 검사에 합격한 것과 그것이 아이들이 놀이게 안전하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서 합격은 시설과 관리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이용하는 아이들에게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반드시 놀이기구를 다른 용도로 가지고 논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안전을 강조해왔지만, 한국 아이들이 위험 속에서 안전을 찾아가는 능력은 바닥을 치고 있다. 여기서 길게 말할 수는 없지만, 세월호 참사 원인 가운데 하나도 이런 형식적 안전 강조에 있다. 한국에서 놀이터 이야기를 꺼내면 이제는 누구나 안전부터 말한다. 그런 자리에서 ‘도전과 모험’을 이야기하면 펄쩍 뛴다. 안전은 아이들을 조심스럽게 키울 때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위험을 스스로 다루어볼 때 확보될 수 있다는 기본 명제가 부정되고 있다.
놀이는 도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안전에 안주하는 것이 놀이가 아니라, 이전에는 하지 않던 일, 할 수 없었던 일에 날마다 조금씩 도전해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놀이다. 이것은 놀이터로 논의를 확장해도 마찬가지이다. 놀이터는 아이들이 도전하고 모험할 수 있는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만약 어떤 놀이터가 이런 도전을 막고 있다면 그 놀이터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생명력을 잃은 죽은 놀이터이다.
초등 아이들이 놀 놀이터를 유아 수준의 놀이터로 만들어놓고 안전하다면 자만하는 것은 마치 기린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니라는 것처럼 아이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다. 이런 놀이터는 자연스럽게 아이들로부터 외면 받을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놀이터에서 아이들 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한국의 많은 놀이터가 이 상태에 있다.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진취적인 행동과 사고를 배우기보다 오히려 순응적이고 보수적이 되도록 놀이터가 방조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 걸음 더 들어가 우리가 흔히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을 좀 더 자세히 구분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놀이터는 위험과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 놀이터에 관한 책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Design for play』를 쓴 리처드 대티너는, 놀이터는 안전을 고려해 짓지만 그 경계를 넘어가려는 아이가 늘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위험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놀이터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독일의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 또한 안전한 놀이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놀이터는 아이들이 위험과 만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물론 놀이터에 도전과 모험만 있어서는 안 된다. 상식선에서 보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안전과 도전이 공존해야 한다. 오랫동안 안전만을 강조하고 그렇게 놀이터를 만들어 온 관행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주장은 다시 안전이 강존된 놀이터를 만드는데 일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산 그간의 내 경험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안전만을 강조하면 놀이터의 재미는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놀이터는 재미있어야하고 흥미진진해야 한다. 가고 싶어야하고, 일단 놀이터에 왔으면 집에 가기 싫어야 한다. 조금 위험해 보이고 다소 도전적으로 보이는 놀이터에서 놀 때 아이들은 스스로 안전에 집중한다. 그래서 오히려 덜 다친다. 나는 이 대목을 놀이터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주제로 삼고자 한다. 위험을 스스로 겪지 않고 그것을 넘어보지 않고는 아이들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Risk, Peril, Hazard 등이 한국에서는 똑같이 위험이라는 뜻으로 혼란스럽게 쓰이고 있어 구분할 필요가 있다. 놀이터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으려면 조금 공부가 필요하다. 흔히 위험이라고 말하는 danger는 아이들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일컫는다. 이 위험을 좀 더 세분화해서 보면 Peril은 우연한 사고를 말한다. 교통사고, 낙상, 벼락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심각하고 즉각적인 위험을 뜻한다. 반면 Risk는 부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포함한 개념으로, 부상당할 가능성은 있으나 그것을 극복하려는 주체의 자주적 의지에 따라 피할 수 있는 위험으로, 도전의 성격을 진다. Risk는 라틴어 ‘risicare’에서 온 말인데 용기를 내서 도전한다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Risk는 단순히 ‘위험’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Hazard는 사고 발생 가능성을 높이는 위험의 근원을 말한다. 나는 Hazard를 ‘위험요인’으로 번역해 쓰고 있다. 다시 말해 그날 비가 많이 내력 미끄럼틀이 미끄럽다거나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거나 뛰어내리는데 바닥에 날카로운 것이 박혀 있다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Hazard는 Peril만큼 긴박하지는 않지만, 뜻밖에 맞닥뜨리게 되는 위험을 일컫는다. 결론적으로 Risk는 도전과 맥락을 같이하는 긍정적 능동태를 의미하는 반면 Peril과 Hazard는 부정적 수동태의 의미가 강하다. 이것이 Risk와 Peril, Hazard의 다른 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알 수 있는 위험은 Risk, 아이들이 도무지 헤아리기 어려운 위험은 Hazard로 보면 좋다. 놀이터에는 이러저러한 눈이 띄는 Risk가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 Risk를 스스로 인지하고 그 너머로 나아가면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 놀이터는 이런 Risk를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 사고는 날수 있지만, 그것은 회복 가능한 부상일 것이다. 이러한 도전과 작고 잦은 부상은 아이들을 자라게 한다. 자신감을 높여주는 것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놀이터에서 Risk란 아이가 통제할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가 놀이터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아이들이 전혀 인지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는 사고인 Hazard이다. 이에 대한 인식과 신속한 대처는 놀이터를 관리하는 사람이나 놀이터에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의 꾸준한 관심과 점검의 영역이다. 놀이터 체크리스트를 활용한다면 사고를 줄일 수 있다.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Hazard는 아이와 함께하는 어른이 늘 살피고, 아이가 다룰 수 있을 만한 Risk는 도전과 모험을 위해 허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놀이터에서 아이는 Risk를 만나고 어른은 Hazard를 살펴야 한다. 아이들이 도전을 위해 위험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곳으로 놀이터가 자리 매김해야 한다.
아이들은 놀이기구에서 떨어질 수도 있고 뛰어내릴 수도 있다. 그래야 어떻게 해야 떨어지지 않고,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 아이들은 뭐든지 기어오르고 뛰어내리고 매달리고 미끄러진다. 모두 다 위험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러지 않고는 세상을 배울 수 없다. 그동안 우리는 위험을 스스로 겪어낼 수 있는 아이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 평가해왔다. 아이는 할 수 있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은 아직 할 수 없는지 아는 아이가 강한 아이다.
유럽의 ‘놀이기구 안전요건 및 시험 방법’ 또한 완벽하게 안전한 놀이기구나 놀이터를 설계하고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놀이터는 위험을 제공해 아이들이 위험에 대처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 유럽 놀이터 안전기준의 대명제이다. 어찌 보면 놀이터의 위험(Risk)는 아이들이 안전에 대해 더 깊이 알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위험을 피하려고 고도로 집중하기 때문이다. 놀이터는 이렇게 아이들 각자의 위험을 대하는 전방위 감각이 길러지는 곳이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마저 위험을 만날 수 없다면 놀이터 밖의 세상에 나와서도 그것이 위험한지 않은지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안전하기만 한 놀이터가 오히려 아이들을 삶의 위험에 빠뜨린다는 역설이 가능하다.
- 민들레 99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