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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는 정확했다. 확연히 많은 사람들이 둘러선 틈바구니 사이로 저쪽 벽에 걸린 모나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접근 제한선을 멀찌감치 쳐놓은 데다 유리 막까지 씌어 놓아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기엔 답답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오래도록 모나리자 앞에 머물렀다. 연인의 창문을 올려다보듯. 모나리자를 보며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갖는 것일까? 모나리자의 미소가 신비하다는 말 자체에 식상해서 한번도 그녀를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던 나는 호텔로 돌아와 화집 속의 모나리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도취감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고, 차츰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가 본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 지가 궁금해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초등학교 때부터 잘 외고 있던 이름, 그러나 아는 거라곤 그 이름뿐이던 이 5백 년 전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림은 그림 그리는 이를 닮게 마련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레오나르도도 이렇게 말했다. “화가들이 그리는 인물은 대개 그 화가를 닮았다”고. 그런데 이는 그가 화가들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사물을 그들 자신과 흡사하게 만드는 것은 화가들의 공통된 악덕이라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화가 개인의 정서나 감정을 담은 그림에는 가치 부여를 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이 같은 태도는 레오나르도의 전 생애에 걸쳐 견지되었다.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기록 어디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의 세계는 철저한 분석과 조합에 의해 창조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예술에서 출발해 수학, 물리, 천문, 식물, 해부, 지리, 토목, 기계, 음악, 문학 등 온갖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의 성과를 제목만 대략 꼽자 해도 한참 이다.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비롯한 미술 작품들. 5천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 원근기록기, 수력장치, 수중호흡기, 자동수레 등의 기계장치와 돌격용 전차, 회전 기관총, 선박용 대포 같은 무기 개발. 칠현금 등의 악기 제조. 성당 돔 설계. 회전식 건조대, 왼손잡이용 병마개뽑이, 자동구이장치, 후추 가는 기계, 다기능 혼합기 같은 주방 도구 발명… 이 발명품들 중에는 ‘거대한 믹서’처럼 사람이 기계 안에 들어가 으깨질 위험을 감수하며 작동시켜야 하는 심각한 단점을 가진 물건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레오나르도는 경이로운 천재로 일컬어지며 그의 당대에 전설이 되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다양하고 창의적인 재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레오나르도의 기막히게 다채로운 행적들을 살펴보면 그것은 언제나 왕성한 탐구심과 치밀한 기록에서 출발한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출생 배경으로 인해 보편적인 직업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그는 자신의 탐구 영역을 제한할 필요가 없었다. 수집한 자료를 분석하고 세밀히 기록하는 작업은 과학적 연구 과정에 해당했다. 그래서 그에겐 그림도 하나의 학문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모나리자 그림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레오나르도가 ‘자기와 닮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하고는 달리 만인이 느끼는 아름다움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성분을 추출한 다음 그것을 완벽한 비율로 조합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가, 과학자, 공학자 등으로 불리는 레오나르도의 대표 직함은 단연코 과학자여야 할 것이다. “교량, 성채, 석궁, 기타 비밀장치를 제조하는데 본인과 견줄 사람은 다시 없다고 확신하는 바임. 회화와 조각에 있어서도 본인에 버금갈 사람은 없음. 수수께끼, 매듭 묶기에 있어서도 대가임을 자신함.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빵을 구워낼 자신이 있음.” 이 ‘겸손하기 짝이 없는’ 글에 깊은 인상을 받은 루드비코는 레오나르도의 알현을 허락했고 마침내 레오나르도는 축성위원회 자문과 궁정 연회 담당자 일을 얻었다. 궁정 연회 담당자 시절 레오나르도의 노트에는 새로운 메뉴와 주방도구 개발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넘쳐났다. 개중에는 주방에 음악을 제공하기 위해 고안한 반자동 북 같은 것도 있고, 냅킨을 접는 수십 가지의 방법이 스케치 되어 있기도 하다. 새 모양, 꽃 모양, 궁정 모양…. 청년 레오나르도의 한 시절은 이렇게 요리와 상차림에 바쳐졌다. 이 무렵 루드비코는 레오나르도를 가까운 수도원으로 보낸다. 수도원 식당 벽에 벽화를 그릴 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그 작업을 맡았고 이후 3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연회 담당자이기도 했던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제일 먼저 그림 속 식탁 위에 어떤 음식을 그려 넣을까 고심했다. 많은 화가들이 숭고한 주제에 주눅 들어 상 위에 놓일 요리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것에 비해 레오나르도는 이에 관한 구상에만 장장 2년을 매달렸다. 당시 수도원장은 참다못해 루드비코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각하께서 레오나르도 선생을 보내주신 지도 어언 열두 달 째입니다. 하지만 이 선생이라는 작자, 벽에 물감칠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각하, 요즘 저희 수도원 술창고가 큰 손실을 보고 있고 이제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선생이 걸작에 걸맞은 포도주를 찾아내겠다며 하나하나 맛을 보고는 모조리 퇴짜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수도사들이 굶주림에 허덕인 지도 오래입니다. 이 레오나르도 선생이 밤낮 주방을 들락거리며 상 위에 차릴 요리를 만든다고 설쳐대는 바람에 그런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만족을 모릅니다. 아니다 싶으면 하루에도 두 번씩이나 제자, 하인 등을 불러 싹쓸이로 먹어치워버립니다. 각하, 어서 작업을 서두르라고 재촉하소서. 레오나르도 선생 일당이 우리 모두를 절단 낼까 두렵사옵니다.” 벽화가 완성된 이후 레오나르도와 수도원 모두 큰 명성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자연의 모방은 레오나르도에게 있어 ‘과학적 접근’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고, 그래서 그에겐 ‘경계’가 의미 없었다. 다만 대상의 발견과 발명만이 이어질 뿐. 동물을 좋아하고, 특히 새를 매우 좋아하여 새장의 새를 사서 놓아주곤 했다는 레오나르도는 평생 채식을 했고, ‘배고플 때만 먹고 가벼운 음식으로 만족할 것’ 등 17가지 건강 수칙을 남기기도 했다. 동성애자였고, 자신의 생각을 도둑맞을까봐 거울에 비춰야 바로 보이는 왼손거울글씨를 썼다는데, 글쎄, 그가 정말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해석을 뛰어넘는 독창성과 자유로움을 지닌 존재를 평범한 도식 안에 넣어 설명하는 것은 소득 없는 일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일컬어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자고 있는데 그는 혼자 어둠에서 너무 일찍 깬 사람 같다”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신화는 거의 부인되고 있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닐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신화로 남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우리 중 대부분은 그저 이 독특하고 경이로운 존재의 실존적 면면을 한 줄이라도 더 느끼고 싶을 뿐이다. 그는 한순간 이렇게 토로했다. “사는 법을 배운다고 믿었는데 사실 나는 죽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이를 자책이나 탄식으로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삶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 역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는 열정은 탐구 자체에 대한 것이지 생에 대한 애착으로 읽히지 않는다. 결국 모나리자의 얼굴에 서린 병색과 입가의 웃음에서 배어나는 초월성은 레오나르도 자신의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분석과 조합을 아무리 거듭한들 그 결과치는 어차피 그것을 행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니까 말이다. 글│방은진 jeena@powerbrain.co.kr |
출처 : http://www.brain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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