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l walking, well working!’ 재계에 걷기 붐이 일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운동 = 걷기’를 외치는 CEO도 늘었다. 몇몇 회사는 CEO를 필두로 아예 동호회까지 만들어 본격적인 걷기에 나섰다. 마라톤, 등산 등 기존의 취미모임이 워킹동호회로 세분화된 경우도 생겨났다. 이들에게 걷기는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다. 이미 중요한 습관이자 일상생활이 된 지 오래다. 남녀노소와 시공간의 구분도 없다. ‘워킹족’은 언제, 어디서든 기회만 되면 걷는다.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 트렌드가 불을 지핀 결과다.
무엇보다 CEO를 중심으로 한 경영진의 걷기 열기가 뜨겁다. 중후한 고급세단과 배불뚝이 중장년으로 굳어진 전형적인 CEO 이미지도 수정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탄탄한 근육질에 나이를 의심케 하는 몸매의 소유자가 적잖다. 집무실로 향하는 직행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선택한 CEO까지 생겨났다. 사무실 한쪽에 워킹머신을 두고 수시로 걷는다는 CEO도 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아예 걸어서 출퇴근하는 적극적인 ‘뚜벅이족(族)’ CEO도 일부 확인됐다. 이쯤 되면 출퇴근 전후를 활용해 산책을 즐긴다는 CEO는 특별한 축에도 못 낀다.
걷기는 이제 CEO의 보편적인 운동으로 봐도 무방하다. CEO를 대상으로 한 몇몇 기관의 조사결과를 보면 즐겨하는 운동 1순위에 걷기가 꼽혔다. 아이로니컬하게도 CEO가 선호할 것 같은 골프는 그 순위가 뒤로 밀린다. 어떤 경우는 등산보다 후순위다. 이들은 휴가는 주저할망정 운동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특히 여러 운동을 즐기는 CEO라면 걷기는 반드시 포함된다. LG그룹 계열사의 홍보담당자 K씨는 “사실 외로운 의사결정을 도맡은 CEO에게 걷기만한 운동은 없을 것”이라며 “골프만 해도 경영의 연장인 케이스가 많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어쩔 수 없이 필드에 나가긴 해도 진정한 운동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걷기는 대기업 총수부터 벤처기업 대표까지 두루 아우른다. 한국의 대표적 간판기업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자택 주변의 남산자락을 걷기 장소로 애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이회장은 부친인 고 이병철 회장처럼 대단한 골프 마니아였다. IMF 이전에는 과장급 직원들까지 골프를 치라고 권유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98년 일본 출장길에 발목을 다치면서 골프를 중단했다. 그후 건강이 악화돼 폐암수술을 받는 시련까지 겪었다. 의료진이 내놓은 돌파구는 감량과 함께 걷기였다. 몸무게를 10kg 이상 줄였고, 격렬한 운동보다 가볍게 걷기를 반복했다. 건강은 금세 호전됐고, 걷기는 지금도 멈추지 않는 습관이 됐다.
구본무 LG그룹 회장 역시 걷기를 좋아한다. 워낙 강골 체질이라 특별한 건강관리법은 없지만 굳이 꼽는다면 규칙적인 걷기가 비결로 꼽힌다. 평일에는 실내의 러닝머신을 이용해 걷기와 웨이트트레이닝을 주로 한다. 주말에는 근교로 나가 체력강화와 스트레스 해소를 동시에 해결한다고 그룹 관계자는 귀띔한다. LG그룹에서 분리된 허창수 GS홀딩스 회장도 평소 걷기와 등산을 통해 체력을 다진다. 그간 철저한 2인자로 외부에 거의 노출된 적이 없는 허회장이지만 재계에서는 일찌감치 ‘아침형 인간’의 선두주자로 꼽혔다. 오전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걷기부터 가벼운 조깅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이 됐지만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출근시간을 활용해 걷기를 실천했다. 당시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 사옥까지 자녀, 측근과 함께 출근하는 정명예회장의 모습은 하나의 진풍경으로 기억된다. 이는 84년부터 거동이 불편할 때까지 계속됐다. 노익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도 걷기를 통한 꾸준한 체력보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생전에 왜 걸어서 출근하느냐는 질문에 “멀지도 않은데 걸어가는 게 뭐가 이상하냐”며 되레 기자를 타박했을 정도로 왕회장의 걷기는 일상적이었다.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걷기도 둘째 가라면 서럽다. 분초를 쪼개는 바쁜 일정과 연중 이어지는 해외출장을 너끈히 버텨내는 비결로 박회장은 “걷기운동 덕택”이라고 잘라 말한다. 유일한 운동이자 습관으로 야외걷기를 꼽는다. 요즘도 주말이면 한강둔치, 홍릉수목원 등을 일부러 찾아 걷는다.
하루 온종일을 잡아먹는 골프는 시간이 아까워 못 치겠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대신 걷기는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운동이라고 치켜세운다. 박회장은 걷기와 소식 덕에 건강관리에도 성공했다. 요즘은 근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70kg대에 진입했다며 날렵한(?) 몸무게에 자부심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말기계 2대로 부총리까지 오른 김준성 이수그룹 명예회장은 만보계로 본인의 걷기를 체크한다. 하루 평균 6,000~7,000보는 꾸준히 걷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래서일까. 실제 나이보다 20년 이상 젊어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여든이 넘은 고령이지만 여전히 그룹 명예회장으로서 주례회의를 주재할 정도로 건강하다. 김명예회장은 오전 6시에 기상해 약 1시간 동안 걷는다. 동시에 경락마사지와 냉ㆍ온수마찰도 곁들인다. 본사 집무실에도 러닝머신을 놓아두고 틈나는 대로 걷기운동을 한다. 왕성한 소설 집필 활동으로 지금껏 30편 이상을 엮어낸 데는 걷기를 통한 끊임없는 육체ㆍ정신의 자극 덕이었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노기호 LG화학 사장도 ‘매일 꾸준히 걷기’를 건강비결로 소개한다. 퇴근 후 집 주변 산책로를 4km 걷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 4km’는 반드시 지켜지는 원칙이다. 노사장에 따르면 4km는 1만보를 상징하는 거리다.
만일 퇴근 후 걷기가 불가능할 때는 사무실에서나 이동시 최대한 의도적으로 걸음수를 늘려 운동량을 채운다. 주말에는 비즈니스 골프나 등산을 하지만, 즐겨하는 운동은 역시 걷기다. 주변에 걷기경영의 파워를 전파하는 데도 열심이다. 그는 “걷기는 열의만 있다면 누구든 손쉽게 할 수 있다”며 “머리를 식히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되면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전한다.
최근 SI업계의 강자로 떠오른 정병철 LG CNS 사장의 걷기는 독특하다. 주변에서는 이를 ‘시계’라는 단어로 요약한다. 김응경 홍보실 대리는 “업무를 비롯한 모든 활동이 시계처럼 정확하다”며 “운동으로 즐겨하는 걷기만 해도 한번 세운 원칙은 반드시 고수하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가령 정사장에게 운동습관을 물어보면 “시속 7km로 42분30여초를 걸어 5km를 걷는다”고 대답할 정도다.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헬스장에서 주로 걷는다.
증권가 CEO의 걷기도 화제다. 배호원(삼성증권), 김병균(대투증권), 김남구(동원증권) 사장 등이 대표적인 ‘워킹파’ CEO다. 대투증권 관계자는 “헬스장에서 주기적인 걷기로 건강을 챙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김남구 동원증권 사장은 측근에 따르면 한때 허리띠에 만보계를 차고 다닐 만큼 걷기에 애정이 깊다. 굳이 걷기라고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벼운 등산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금융권 CEO는 수두룩하다. 격렬한 운동보다 신체에 부담 없는 걷기가 CEO의 운동으론 제격이라는 주변의 추천도 걷기 확산에 한몫을 한다.
사실 운동하면 벤처업계가 가장 필요하다. 직무 특성상 야근이 많은데다 엉덩이를 뗄 일이 별로 없어서다. CEO라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벤처업계의 걷기 선두주자로는 정문술 전 미래산업 사장을 들 수 있다. 정사장은 보약, 영양제 대신 식사와 운동을 건강비결로 꼽는다. ‘기본에 충실하라’는 경영철학이 건강관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셈이다.
요즘은 오후 산행을 위해 3시30분이면 퇴근한다. 청계산 기슭의 자택을 출발해 주변을 1시간30분 가량 걷는다. 산길 3~4km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게 원칙이다. 처음에는 천천히, 나중에는 속도를 높인다. 현업 시절에는 제자리걸음을 2시간 정도 하면서 신문이나 책을 봤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는 부인도 제자리걸음에 나섰다.
최근 별세한 이상헌 전 한국썬마이크시스템즈 사장도 걷기예찬론자였다. 출근 전 승차에 앞서 10분을 걸었고, 점심을 먹은 뒤에도 회사 근처인 코엑스 주변을 도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슬슬 걷는 습관은 계속됐다. 헬스장에서는 속보로 20분 정도를 걸은 후 맨손체조로 몸을 풀었다고 한다. 사장실이 별도로 없을 만큼 사무실 안에서도 늘 서서 움직이는 스타일로 유명했다.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직원들과 수시로 대화하는 방식을 고수해 일석이조의 걷기효과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CEO의 ‘걷기경영학’은 여러 장점을 갖는다. 무엇보다 건강관리에 제일이다. 가장 안전하고 쉬운 운동으로 시공간이 부족한 CEO에게 적합하다. 꾸준한 걷기를 통해 피로감 없이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데다 면역체계를 향상시켜 질병으로 인한 업무공백을 막아준다.
고질적인 CEO 질병으로 알려진 심장질환, 뇌졸중 등의 확률도 떨어뜨린다. 자연스러운 다이어트 효과를 통해 과체중을 사전에 차단할 수도 있다. 게다가 비용면에서도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한국형 파워워킹>의 저자 선주성씨는 “많이 걷는 게 웰빙의 지름길”이라며 “걷기를 통한 체력강화는 경제활동 연장과 직결된다”고 말한다.
회사경영보다 사실 건강경영이 먼저다. 몸을 경영하는 게 회사를 잘 꾸리는 전제조건인 셈. CEO는 공인으로 건강을 잘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CEO의 건전한 생각과 판단은 기업성패와 직결된다. CEO 한명은 수백 수천명에 이르는 근로자의 생존과 국가 경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CEO의 역할은 그만큼 막중하다.
특히 경영환경이 불투명해질수록 CEO의 건강한 사고는 더 중요해진다. 실제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로라하는 유명 CEO는 일벌레이면서 동시에 건강 마니아다. 나이가 들수록 이들 CEO의 건강비결은 단연 걷기처럼 가벼운 운동이 주력이다. 자연스러운 노화조차 방어해 장수 CEO의 명성을 얻은 사람도 많다. 일례로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이나 존 템플턴은 남들이 은퇴할 나이에도 냉정한 판단력을 유지했다.
INTERVIEW 김인 삼성SDS 사장
걷기경영 예찬… “즐겁게 많이 걸어라” 김인 삼성SDS 사장은 걷기 예찬론자다. “수시로 걷는다”는 그의 말처럼 때와 장소가 따로 없다. 아침출근 때 24층(집무실)까지 걷고, 퇴근 후 귀가할 때 14층 아파트를 또 걸어올라간다. 걷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기도 한다. 오전 6시 헬스클럽에서는 40분을 속보로 걷는다. 저녁식사 후 밤 10시에는 또 집 근처 공원을 30분 이상 산책한다.
근무시간 중 어지간한 거리를 걷는 것까지 포함하면 김사장의 걷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당연히 ‘걷기경영’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임직원에게 걷기를 권장한다는 차원에서 저층 엘리베이터 운행은 아예 중지시켰다. 앉아서 생활하는 직장인일수록 평소 많이 걷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걷고, 또 즐겁게 걸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걷기에 입문한 계기는 뭐죠. 15년 전 우연한 기회에 걷기운동에 관한 책을 읽고 관심을 갖게 됐죠.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걷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걸을 때는 어떤 생각을 하나요. 걷다 보면 잡념이 들지 않아서 좋아요.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 있죠. 아침출근 때는 계단으로 올라가는 데 7분이 걸립니다. 이때 주로 하루 일과를 미리 점검해요. 반대로 저녁 산책 때는 하루 일과를 정리하죠.
얼마나 걷습니까. 하루에 정확하게 얼마를 걷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거리는 무조건 걷습니다. 2003년 취임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거르지 않고 출근할 때 테헤란로 삼성SDS 사옥 집무실(24층)까지 걸어서 올라가요. 퇴근길 14층 아파트뿐만 아니라 오전 6시부터 1시간 정도 헬스클럽에서 운동할 때도 40분 이상 속보를 기본으로 하죠. 이 걸로 끝은 아니에요. 퇴근 후 오후 10시에는 집 근처 공원을 10분 이상 산책하는 일도 빼먹지 않죠. 걷기와 아침형 생활 덕에 아직도 대학 때 체중(65kg)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걷기가 경영에 도움이 되나요. CEO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평상심을 유지하고 의사결정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당연히 건강한 신체는 필수조건이죠. 단언컨대 걷기가 가장 좋아요. 걷다 보면 신체건강은 물론 위기 때도 흔들림 없죠.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걷기를 통해 특정문제를 해결한 사례가 있다면요. 사실 걸으면서 모든 걸 해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절대적으로 걷는 시간이 많다 보니 당연한 결과죠. 취임 초에 7,000명이나 되는 직원 규모에 놀랐습니다. 임직원간의 커뮤니케이션 활성화가 큰 고민거리였죠. 이를 ‘편지경영’으로 완벽히 해결했어요. 지금까지 86주 연속 전직원에게 e메일로 ‘CEO의 월요편지’를 보내고 있죠. 원고지 2,000장에 단행본 3권 분량이에요. CEO로서의 어려움과 희망, 비전, 경영계획 등을 진솔하게 담고 있죠. 결과는 기대 이상이에요. 이 ‘편지경영’ 아이디어를 걸으면서 착안했죠.
주변에서는 걷기 전도사라는데요. 많이 걷다 보면 체력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업무효율도 높아집니다. 직원들에게 걷기를 장려하기 위해 건물 저층은 아예 엘리베이터를 운행하지 않을 정도예요. 직원들에게 <걷기혁명 530-마사이족처럼 걸어라>와 <걷는 인간, 죽어도 안 걷는 인간>이라는 책을 추천하기도 했죠. 자연히 직원들 중에 걷기 마니아가 늘고 있어요.
걷기의 경영 외적인 효과가 있다면. 제일 우선은 건강이죠. 바쁜 현대인들, 특히 IT업계 종사자는 앉아서 생활하는 일이 많아 평소에 가볍게 할 수 있는 운동을 실천해야 합니다. 걷기는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건강, 특히 집중력 향상에 많은 도움을 줘요. 이 밖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효과가 있습니다.
걷기를 잘 하는 방법은요. 걷기에는 정도가 없어요. 원칙은 두 가지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걷고, 즐겁게 걸어라’예요. 이 둘만 잘 지켜도 걷기 예찬론자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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