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두를 달리는 SK에는 유난히 연습생출신 선수들이 많다. 그 가운데 조웅천(32)은 '늦깎이 중의 늦깎이'. 고진감래라고 조웅천은 프로 14년 만인 올해 구원 1위에 오르며 야구인생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조웅천은 지난 5일 인천 롯데전에서 개인통산 100세이브포인트(통산 12번째)의 대기록을 세웠다. 다른 11명의 투수들이 165∼263경기에서 100SP를 달성한 데 비해 조웅천은 무려 504경기만에 이뤄냈다. 올해 전담 마무리로 뛰고 있는 조웅천의 사연 많은 야구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 투수 맞아?
조웅천은 순천상고 3학년이던 88년 태평양의 입단 테스트를 받기 직전까지 투수와 타자를 놓고 고민했다. 광주 남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야구와 인연을 맺은 뒤 유격수로 뛴 시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광주상고에 들어갔을 때는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야구부에서 쫓겨나 2학년 여름까지 야구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다 2학년 가을 '공부로 대학에 붙을 자신이 없으면 야구라도 해보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순천상고로 전학을 갔다.
순천상고를 맡았던 한일은행 출신의 정찬성 감독은 팀내 투수진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깨가 좋은 조웅천을 마운드에 올렸다. 쉽지가 않았다. 조웅천은 오버핸드로 던지는 것이 힘에 부치자 팔을 아래로 내린 것이 언더핸드 투수가 된 출발이었다. 그러나 연습경기 도중 베이스러닝을 하다 팔꿈치를 다치는 바람에 다시 유격수로 돌아갔다.
결국 조웅천은 방망이를 살 돈이 없어 타자를 포기하고 투수로 프로 입단테스트를 받았다. 조웅천은 "집안 형편도 어려웠지만 어린 마음에 타자보다 투수가 비전이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개천에서 용났다
고교시절 뚜렷한 성적을 남기지 못해 고향팀인 해태(현 기아)로부터 외면을 당한 조웅천은 계약금 500만원의 연습생 신분으로 태평양에 입단한 뒤 94년까지 거의 2군에서 지냈다.
조웅천은 "동갑내기들보다 어깨가 싱싱한 이유는 투수로 늦게 전향했고, 프로에서 처음 6년 동안 2군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투수로서의 재능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타자로 전향하거나 야구를 그만둘 결심을 한 것도 여러번이었다.
전환기는 95년이었다. 조웅천은 "당시 '올해도 안되면 유니폼을 벗겠다. 칠 테면 쳐봐라'는 각오로 마운드에 올랐다"며 "무조건 가운데만 보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던졌는데 슬슬 먹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95년부터 꾸준히 1군에서 뛰기 시작한 조웅천은 현대 시절인 97년 플로리다 마무리훈련에서 현지 사이드암 인스트럭터로부터 서클체인지업을 익혔다. 99년에는 일본 오릭스의 인스트럭터로부터 '공을 던지는 요령'을 배웠다.
조웅천은 98년 한국시리즈에서 LG가 왼손타자가 많다는 이유로 엔트리에 들지 못한 때와 '한물 갔다'는 평가를 받았던 99년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2000년 초대 홀드왕을 따내며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해 눈물을 닦았다.
▲마무리로 산다는 것
조웅천은 최고구속 138㎞를 찍는 직구와 커브, 싱커를 던진다. 직구처럼 가다가 스트라이크존에 똑 떨어지는 싱커가 주무기다. 공이 위력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중간계투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조웅천은 수첩에 적힌 좌우명대로 살고 있다.
'무인불승(無忍不勝:참지 못하면 이기지 못한다)'.
조웅천은 "LG 이상훈이나 기아 진필중이 마무리에 실패했을 때 위로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주위에서는 마무리들이 난조를 보일 때 '불쇼를 한다'고 혹평하지만 마무리들이 느끼는 심리적인 부담은 해본 사람만 안다는 것. 가끔 힘들 때면 '가장 늦게 나가는 중간계투'라고 다짐하며 마운드에 오른다.
조웅천은 올시즌 팀 우승만 생각하기로 했다. 2000년 한국시리즈 5차전 때 '이번만 잘 막으면 MVP를 타겠다'고 내심 욕심을 부렸는데 패전투수가 된 경험이 있어 개인성적에 대한 잡념은 일찌감치 버렸다.
올시즌 삼성 이승엽에게 두차례 9회에 역전 3점홈런과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은 조웅천은 언제나처럼 대답이 씩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