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려면 감각기관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어야겠어요. 누군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말에 공감을 한다. 항시 안테나를 달고 다니는 사람, 메모광, 기억력이 특별한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 불아감까지 가졌던 적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 가지 한 가지 일에 대해 유별나게 감각적으로 그걸 붙들어내고 그려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이 봤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그녀는 그토록 전문적인 깊이의 이야기를 해낼 수 있을까. 항시 그런 도전을 받는다.
[매번 그렇게 안테나를 세우고 다니는 건 아니죠. 처음엔 많은 부담을 갖지만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지요.]언젠가 구효서씨가 한 말이다. 문제는 그런 느낌들을 어떻게 자기 식의 표현으로 정착을 시크느냐 하는 것이다. 똑 같이 경험한 느낌이라고 해도 그것이 구체적인 언어로 살아났을 때의 느낌은 특별한 것이다. 그들은 그저 떠도는 말들을 자신의 말로 붙잡았던 것이다. 꽃이란 것이 꽃이란 말을 만났을 때 정말 꽃이란 것이 탄생되는 것처럼 그 이름을 불러 우리는 꽃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
일상의 느낌들이나 생각들을 그렇게 이름부르듯 느낌의 촉수로 건드려 보고 또 맛보고 냄새맡아보며 보고 들어보는 일이란 그런 면에서 그 음미의 색다름을 분명히 구분해내는 일이다. 아 당신의 혓바닥은 당신의 뇌리와 너무 가깝군요. 당신의 손바닥에는 특별한 감각기관이 더 발달된 것인가요. 어쩌면 마음일 것이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맛을 보아도 맛을 모르고 냄새를 맡아도 냄새를 모른다. 그렇게 보면 마음의 눈이 뜨이는 것과 언어의 대비가 같은 궤를 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구체적인 느낌의 언어로 더 세밀하게 세상과 인생을 그려내는 일, 갈등과 화해, 일상과 특별한 세상의 연결고리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감각의 특별함이 언어의 특별함을 통해 살아난다면 그건 대단한 전달력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의 감각이 둔해졌는지 아니면 우리가 언어를 갈고 닦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는 바로 작품이란 창을 통해 그 바깥과 안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감각의 음미는 기타 연주를 하는 사람의 그 차분하고 느긋한 마음처럼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있는 마음과 오래도록 그 실수를 넘어서면서 결국 완성된 소리를 듣고자 하는 인내를 통해 다가온다. 한 때 많이 고민했던 문제이고 지금도 다가서면 멀어지고 또 다가서면 멀어지는 것이 바로 그 감각의 문제다. 언어감각... 언어로 세상을 느끼는 예민함이 어느 정도나 깨어야 하는 걸까. 밤이 되어 한꺼번에 열린 청각과 은밀한 촉감은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바람에 나는 잎새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의 서시처럼 정말 우리는 그렇게 곳곳의 작은 것들에서 필연적으로 느껴야 할 세상과 인생을 보고 있는 것일까. 가을의 낙엽 속에 담긴 자기 인생의 의미처럼, 곳곳에 우리를 깨우는 느낌의 촉수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지 않는가. 형태며 색상 혹은 움직임이라든가 그 세밀한 감촉과 소리가 그것 자체만으로 너무 생생해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또 살려내는 이야기들이 주위에 가득하다. 약한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런 예민한 것들을 작품에 반영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고장난 감각을 회복함으로써 다시금 인생의 먼 강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