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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삼척 오십천 줄기를 따라서(천은사-준경묘-환선굴) 글/사진: 이종원
천은사 삼척은 푸른 바다도 아름답지만 반도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자리로서 그 산자락마다 깊은 속내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동해 두타산이 무릉계곡과 삼화사를 거쳐 올라가는 길만 알려져 있지만 천은사에서 오르는 길 역시 묘한 매력이 있다. 고귀함이 느껴질 정도로 한적한 산행이 될 것이다. 자문 자답이야말로 이런 분위기에서 제격이다. 아스라한 산사의 추억을 느낄 수 있는 천은사.
때묻지 않는 정결함이 보인다. 산신각 주변을 뒤덮고 있는 나리꽃이 고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한 때 수 만번을 오르내리며 곡식을 찧었건만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통방아도 예전의 물줄기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세월의 무게 앞에 방아는 초록의 이끼를 머금은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이끼와 버섯
신라경덕왕때 창건된 천은사는 강릉의 굴산사를 개창한 범일국사가 극락보전을 건립하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후 고려 충렬왕때 이승휴가 중수하고 看藏庵이라 하였다. 즉 이곳에서 대장경을 다 읽었다는 뜻이다. 1899년 이성계의 4대조 묘인 목조릉을 미로면 활기리에 만들면서 이 절은 왕의 원찰이 되었으며 하늘에 은혜를 입었다고 하여 '天恩寺' 란 이름은 가지게 된다. 한국전쟁때 완전 폐허가 되어 1983년 중건되었다. 고려시대 강직한 관리였으며 대학자인 이승휴(1224-1300)가 이곳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귀중한 자료의 하나인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관직을 버리고 외가인 두타산 구동에 돌아와 용안당이라는 건물을 짓고 살면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칠언시와 오언시로 엮은 대서사시를 저술한 것이다. 단군과 발해의 역사까지 담았다.
청옥산, 두타산, 쉰움산에서 흘러온 물이 천은사를 거처 미로를 거쳐 오십천을 통해 죽서루앞을 지나간다.
천은사 입구의 이승휴 상징조형물..4개의 화강암 기둥은 삼척의 바다를 상징하고 가운데 기둥은 이승휴선생의 강직한 정신세계를 의미한다. * 가는길 삼척죽서루-38번국도-7.5km-38주유소 3거리-우회전-361군도-8.4km-천은사
영경묘 다시 38번 국도를 오십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제천부터 만난 38번국도는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38광땡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하긴 38국도상에 정선 카지노장이 있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미수 허목선생의 눈썹미(眉)자를 따서 이름 지었다는 미로면을 지나 상정역 가기 전에 우회전하면 태조의 5대조 할머니 묘소인 영경묘를 만난다. 묘 초입에 도라지 밭이 형성되어 있다. 도라지를 보면 나는 할머니가 생각난다. 태백의 속내로 깊이 들어갈수록 도리지향이 풀풀 풍겨나온다.
태조 이성계의 5대 조모이며 이양무의 부인이고, 목조의 어머니가 되는 이씨의 묘소이다. 1899년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세웠다. 이씨부인은 부군과 함께 전라도 전주에 거주하였으나,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별세하였다. 아들인 목조가 다시 함경도 의주로 갔기에 수백년동안 묘를 찾을 수 없었다. 이성계와 조선의 역대왕들은 이양무의 묘와 이씨의 묘소를 찾으려고 노력하여 묘를 찾았으나 그 진위가 확실치 않아 고심하다가 고종때 이곳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활기리 준경묘와 함께 명당중에 명당이며 5대 후손인 태조가 탄생하여 임금이 되었다는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왕실의 관리를 받아서 그런지 쭉쭉 뻗은 미인송이 묘역을 둘러싸고 있다.
준경묘 입구의 미인송 준경묘까지는 삼림욕트레킹 코스로 제격이다. 조선왕실이 줄곧 관리했기에 하늘을 찌를 듯한 송림과 원시림이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멋 모르고 차를 가져갔다가 급경사 때문에 몇 번이나 돌아갈려고 했는지 모른다. 고개를 넘어가니 온몸에 식은 땀이 절로 난다. 원래 입구부터 차가 못들어가게 막았는데....벌채차량이 들어서면서 잠시 잠시 열어 놓았을 때 하필 내가 들어간 것이다.
밑에는 천길 낭떠러지이고 차 한대 간신히 빠져들어가는 비포장 도로는 곳곳에 홈이 패어져 있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미인속 숲길을 벗어나자 드 넓게 펼쳐진 준경묘...밀림속에 묻혀 있었던 앙코르왓을 발견했던 기분이랄까? 이 산골에 이렇게 너른 곳을 조성해 놓았을까?
남한의 소나무중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곳이 활기리 소나무다. 황장목이라고 하여 경복궁 중수때 이 곳 나무를 베어 자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큰 나무를 달구지에 싣고 서울까지 옮겼다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정이품송과 혼례소나무 산림청 임원연구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소나무의 혈통보존을 위해 10년의 연구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형질이 우수하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찾았는데..바로 이 소나무가 미스코리아 소나무에 1등으로 선정된 것이다. 나이 95살, 키32m 둘레 2.1,m 인 이 소나무는 충북 보은의 정이품송을 신랑으로 맞아 2001년 5월 8일 신순우 산림청장이 주레를 맡고 보은군수가 신랑혼주로 ,삼척시장이 신부혼주로 참석하여 이곳 준경묘역에서 많은 하객들을 모시고 세계 최초의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거행함으로써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이 행사를 계기로 삼척시와 보은군이 사돈관계를 맺었다.
준경묘 준경묘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장군의 묘이다. 이양무의 아들 이안사(목조)는 전주에서 살다가 백성을 괴롭히는 관원과의 불화로 삼척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는데. 어느날 산에 올랐다가 피곤하여 풀숲에 누워 바람을 쐬고 있었던 차에, 근처 산길을 지나가던 고승과 동자승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5대 후손이 왕이 될 것이다. " 이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여 스님에게 달려가 자세히 물었다. "이 자리는 천하의 명당이다., 묘를 쓰되 말 백마리를 잡아 제물로 하고, 황금으로 만든 관을 쓰면 5대 후손이 왕이 될 수 있는 자리다. " 이 말을 듣고 이안사는 고민에 빠졌다. 욕심은 나는데 돈이 없었던 것이다. 가난했던 그는 百牛를 白牛로 대신하여 처가의 흰소를 잡고, 금관은 황금색 귀리풀로 대신하여 제를 지냈다. 이렇게하여 준경묘가 마련되었으며 마침내 5대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왕조에 많은 시련과 풍파가 이어졌던 것은 바로 황금관과 백 마리의 말로써 제를 지내지 않고 편법으로 무덤을 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인근 궁평리 공양왕릉에서는 고려왕의 죽음이...이곳 활기리는 조선왕의 탄생이... 역사의 아리러니가 아닐까? 활기리의 지명 역시 왕조의 창업을 예시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황제가 나왔다 하여 황터, 황기가 변한 말이라고 한다.
전주이씨 실묘로는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시조묘이며 해마다 4월 20일 전주이씨 문중 주관으로 제레를 지낸다. 제각, 비각, 재실 홍살문이 있다. 삼척-38번국도-미로-상정-노곡입구-활기리-준경묘 입구 (도보 30분 거리) 적송과 야생화 트레킹 코스로 좋다.
(환선굴입구: 폭 14미터 높이 10미터. 왕복 1시간소요 ) 환선굴 (천연기념물 178호) 여름철 피서지로 최적인 곳은 계곡과 바다가 아니라 바로 동굴이다. 평균수온이 10도를 유지하고 있어 소름이 돋힐 정도로 한기가 느껴지며 기기묘묘한 석순과 석주가 있는 지하세계는 귀신이 사는 곳처럼 느껴져 마치 공포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하다. 삼척은 동굴의 땅이다. 대이리 동굴지대는 백두 대간의 주능선의 하나인 덕항산에서 분기된 V자형 협곡지대로 삼척 시멘트가 말해주듯 석회암지대가 발달되어 있다. 환선굴, 관음굴, 바람굴, 양터목세굴등 총 6개의 동굴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중 우리나라 개방동굴중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이 삼척의 환선굴이다. 1998년에 총 연장 6.5KM중에서 1.6KM만 개방되어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촛대바위) 그 옛날 대이리마을 촛대바위 근처에 있는 폭포와 소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멱을 감고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이 이곳을 찾자 환선굴 부근에서 천둥, 번개와 함께 바위더미가 쏟아지면서 촛대바위 근처의 폭포와 소가 마르고 환선굴에는 물이 넘쳐 현재의 선녀폭포를 이루었다. 그 후 사라진 여인을 선녀가 환생한 것이라 믿고 주민들이 제를 올리고 마을 평안을 기원하였다.
선녀폭포
미녀상이다. 늘씬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백색유석이 자한후 황생유석이 그 위를 덮으면서 형성되었다. 환선굴 주변에서 삼엽충, 극피류의 화석이 나타난 것은 이곳이 열대지역의 수심이 낮은 바다속에 있었으며 지각변동으로 현 위치로 이동 된 것을 보인다.
제 1폭포다. 커다란 싱크홀로부터 폭포와 소를 이루고 있다.
용식공이다. 작은 동굴에는 볼 수 없는 지형이다. 동굴 한가운데로 지하수가 흐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검룡소의 물이 한강으로 흐르지 않고 이곳으로 흘러 오십천으로 빠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많은 물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도깨비 방망이. 거대한 종유석으로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면서 형성되었다. 표면엔 산호와 커튼이 형성되어 있다.
대머리형 석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이렇게 오묘한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물과 시간의 역사가 빚어낸 태고의 신비다.
한반도 모양의 광장. 환선굴의 상징으로 돔형 평정석순인 옥자대가 자리잡고 있다.
하트모양. 동굴이 확장되기 전에 형성된 용식지형으로 천장 가까이에 하트모양이 그려져 있다.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고 사랑의 다리를 건너면 된다.
악마의 발톱...무시무시하다. 이밖에 지옥소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다.
성모마리아상, 종유석위에 성모마리아가 두손을 모으고 있다.
제 2폭포
만리장성. 동굴 상류부터 흘러 내려온 퇴적물이 유입되어 최적층을 형성하여 만리장성 모양으로 쌓이게 되었다. 퇴적물의 윗높이가 광장의 입구보다 높은 것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수도승 주거지. 그 옛날 수도승이 이 굴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스님이 신선으로 환생했기에 이 굴의 이름이 환선굴이 된 것이다. 스님의 온돌터, 아궁이, 돌절구등 유물이 남아 있다.
대이리 돌방아 100여년전 만들어진 대이리마을 방앗간이다. 일명 물방아,벼락방아라고 부른다. 곡식을 넣는 돌통, 공이 그리고 물받이, 물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통에 물이 담기면 그 무게에 공이가 올라가고 그 물이 쏟아지면 공이가 떨어져 방아를 찧게 된다. 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개울가 옆에 설치되며 공이 위에는 굴피를 덮은 덧집을 만들어 놓았다. 풋풋한 시골내음
대이리 굴피집 300년된 집이다. 원래 너와지붕이었으나 1930년경 너와채취가 어렵자 굴피로 교체하였다 굴피는 처서를 전후하여 참나무, 떨갈나무,껍질을 벗겨 돌이나 통나무로 눌러 평평하게 건조시켜 적당한 크기로 자른후 겹쳐서 지붕으로 사용한다. 수명은 20년, 3-5년마다 교체한다. 산촌마을이 대표적 가옥
강원종합박물관 1층에는 세계 최대의 상아가 전시되어있고 2층원 도자기, 3층은 금속공예를 전시했으며 야외에는 석공예와 폭포, 종유석,팔각정이있다. 관람소요시간은 1시간. 개인박물관이어서 입장료가 비싸디. (일반 8천원) 38번국도에서 환선굴 들어가는 초입에 있다.
동굴엑스포타운 삼척시 오십천변에 위치한 동굴엑스포 타운에는 동굴의 신비와 지형등이 전시된 동굴신비관이 있다. 세계 7대동굴모형이 있는 동굴탐험관에서는 동굴에 대한 각가지 탐험을 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특히 동굴신비관의 아이멕스 영화관은 신비로운 동굴세계에 흠뻑 빠져 들어갈 수 있다.
죽서루 오십천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 큰 누각이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또한 유일하게 바다를 접하지 않고 내륙에 들어와 자리잡은 것도 색다르다. 태백산맥으로 부터 흐르는 물줄기가 50번을 굽이 돌았다고 한 '오십천' 죽서루 앞에 흐르고 있다.. 죽서루 앞에 있는 삼척동굴박람회장도 바다로 빠지기 전에 한 굽이 돌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 굽이가 없으면 사십구천인가? 천혜의 자연경관 그대로 놔두었어야... 전부 밀어 내고 이렇게 신식 건물을 올렸으니 또 다시 안면도 꽃박람회나 여주의 도자기 축제처럼 시장판이 될 우려가 크다. 죽서루는 정자니 만큼 조용히 자연과 교감을 하면 감상하는 것이 좋다. 죽서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층에는 길이가 모두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그 중 8개는 잘 다듬은 주춧돌 위에 세우고 나머지 9개는 자연석 위에 세웠다. 기둥사이는 벽이나 창호문 없이 모두 개방되어 있으면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내부는 기둥이 없어 공간이 탁 트여 시원스레 오십천을 바라보게 하였다. 사실 죽서루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장소는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누각이었을 것이다. 죽서루는 조선시대에 일종의 관아시설로 활용된 누각이있다. 즉 조선시대 삼척부의 객사였던 진구관의 부속건물이었다. 객사란 지방에 파견된 중앙
관리들이 묵던 숙소를 말한다. 따라서 조선시대 죽서루는 공공시설로서 접대, 향연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물론 무릉계곡을 넘어온 시인,
묵객들의 정신 수양을 위한 휴식공간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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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장님 덕분에 동굴 여행 잘 했습니다.
으~~음!! 좋으네요. 좋군요..좋습니다...좋다니까요!! ㅎㅎ
이종원대장님 유익한 여행 답사와 정보 참으로 훌륭한 작품입니다 스크렙이 안 되어서 안타깝군요 늘 메일로 받아 보며 유익한 여행에 마음으로 동참합니다 고맙습니다 합장
준경묘 ,미인송 , 계곡수에서 더위에 지친 詩想 하나 떠오르는 듯 해 감사드립니다 합장
4년전 아이들과 무턱대고 갔다 왔던 장소를 이리 섬세한 글과 사진으로 다시 보니 새록새록 더 정겹습니다 ^^ 감사합니다
대장님의 유익한여행정보 감사드립니다 좋은여행하고 갑니다
님이여 감사함을 표할길이 없군요 님의 글 사진을 감상하며 컴맹에서 벗어난게 이렇게 감사할줄 정말 감사합니다
대금굴에 이어 구경한번 잘 하고 가면서...감사 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너무 멋있습니다. 꼭 가보고 싶습니다. 학생들에게 사진으로라도 보여주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지요? 무단!
감사합니다. 항상 좋은 글 좋은 사진 볼 수 있어 너무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