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불교의 현황과 역사
인구 4,700만 명의 타이왕국은 전인구의 93%가 불교도다. 전국에는 24,000개의 사원이 있고, 승려 수는 176,000 명이나 된다. 불교가 국교인 이 나라에서 국왕은 불교의 수호자이며, 남자는 만 20세가 되면 일정기간 삭발하고 사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습관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태국의 승단은 마하니카야(大衆派)와 담마유타니카야(正統派) 두 파로 나눠져 있다. 교세(敎勢)는 2만여 개의 사원을 가지고 있는 대중파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에 비해 정통파에 소속된 사찰은 2천여 개에 불과하다. 이 두 개의 승단은 방콕에 각각 승가 최고의 교육기관인 마하추라콩코른(마하탓사원 소재) 대학과 마하마긋(미원니엣사원 소재) 대학에서 학사 승려들을 양성하고 있다. 비구들의 최고 교육기관인 두 대학은 상좌부 불교의 내전(內典)을 주로 강의하고 있으며, 특히 팔리어는 중요한 과목이다.
대학교육을 받은 승려들은 기꺼이 마을로 돌아와 교육의 혜택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민중들에게 자기의 학문을 베풀어 준다. 대부분의 초등교육기관도 사원에 설치돼 있어서, 일반 청소년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불교교육을 받고 있다.
승려의 사회적 역할은 미미한 정부시설(학교ㆍ의료시설ㆍ경찰ㆍ사회복지시설 등)에서 분쟁을 해결하고, 고아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들은 건축계획을 세우고, 사원에서 배운 건축ㆍ목공ㆍ타일ㆍ벽돌쌓기ㆍ시멘트제조, 심지어 의학적 치료까지 해준다.
태국의 불교는 민중의 생활에 깊이 침투되어, 사원은 사회생활의 중심역할을 한다. 태국 국민들은 출산ㆍ결혼ㆍ장례 등 모든 일상생활을 불교의식으로 하고 있으며, 사원은 주민의 집회장이자, 병언, 양로원 구실도 하고 있다.
남방불교의 전통을 지키는 태국에서는 포살(布薩)과 자자(自恣)를 엄격히 시행한다. 이때가 되면 신도들은 사찰로 가서 스님들을 공양하고 설법을 듣는다. 안거가 끝나고 실시하는 자자에는 신도들이 법의(法衣)를 지어 스님들께 바친다. 매년 이맘때 태국의 국왕은 방콕시에서 차오프라야 강을 건너 태국 제일의 아룬사원을 찾아가 금욕수련이 끝난 스님들에게 법의를 공양한다.
태국이 불교 역사는 불사리가 봉안돼 있다는 다트 파놈사원의 전설을 고려하면 2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절은 불멸(佛滅) 후 8년에 최초로 착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따진다면 태국에 상좌부 불교의 전통이 확립된 것은 14세기 아유티야왕조 때다.
태국에는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중국 운남(雲南) 쪽에서 이주해 온 타이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인 수코타야왕조는 1288년에야 메남 강 중류지역에서 생겨났다. 타이 지방에 수코타야왕조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크메르족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대승불교와 힌두교를 혼합한 형태의 불교를 수용했다.
이보다 조금 앞서 11세기에는 미얀마의 파간왕조가 들어서서 스리랑카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그 영향은 이 지역에서 잡다한 불교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수코타야왕조의 라마캄헹왕(1275~1315)은 독실한 불교신도로 미얀마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코타야왕조는 1350년 리타이왕 때 메남 강 하류 아유타야에서 일어난 아유타야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새 왕조의 출현은 태국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라마티파티를 개조로 하는 아유타야왕조는 18세기까지 400년간 계속된다. 이 왕조의 시리 슈리아밤사 라마왕은 1361년 스리랑카에 사신을 파견해 상좌부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여 국가적 종교로 삼았다.
철학과 문학을 통달한 학자였던 왕은 이때 스리랑카에서 상가라자(僧王)를 초청하여 팔리어 성전과 계율ㆍ의식을 전래하도록 했다.
그 후 이 왕조의 제왕들은 불교를 신봉하여, 수도 아유타야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은 사원과 불탑이 건립되어 불교국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과시했다. 또 국위도 크게 떨쳐 동쪽으로 메콩 강 지방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 북쪽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750년에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고향인 스리랑카에 불교를 역수출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스리랑카 최대의 승단인 시암니카야다.
400년에 걸쳐 번성했던 아유타야왕조는 1769년 미얀마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이와 함께 대소의 왕궁과 사원은 많이 파괴되고 말았다.
타이의 새 왕조는 아유타야 시대의 유장(遺將) 파라야 탁신에 의해 단초(端初)가 열렸다. 탁신은 아유타야가 멸망한 뒤 6개월 만에 미얀마인을 몰아내고 톤부리를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그는 포악한 정치를 하여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왕궁으로 고승들을 초청해 ‘나는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다. 너희들 가운데 수행이 나보다 낮은 자는 나에게 예배를 하라’고 했다.
이에 대개의 고승들은 그에게 예배를 했으나, 승단의 최고 원로승은 ‘출가자가 재가자에 예배하는 것은 불법에 없다’면서 이를 거부했다. 화가 난 탁신은 그를 따르던 스님들을 체포해 태형에 처하고, 아첨하는 승려가 승정(僧正)이 되도록 했다. 새로 승정의 자리에 오른 아첨꾼들은 왕을 향해 ‘시암 최고의 수행자이며, 부처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왕자’라고 추켜세우며 그의 비위를 맞췄다. 그러나 탁신은 그의 악정(惡政)에 반대하는 부하 차크리 장군의 반정에 의해 살해됐다.
차크리는 왕궁을 톤부리에서 강 건너의 방콕으로 옮긴 뒤 이곳을 새로운 왕도(王都)로 정하고 1782년 방콕왕조(일명 차크리왕조)를 세웠다.
새 왕은 즉위 즉시 구금되어 있던 승정을 풀어 지위를 회복해 주고, 탁신 왕에게 아첨하던 승려들은 불도를 문란하게 한 죄를 물어 모두 환속시켰다. 이어 그는 경(經)ㆍ율(律)ㆍ논(論) 삼장(三藏)을 교정하는 회의를 열어 교정된 삼장을 특별한 법당에 봉안했다.
1851년 새 왕으로 즉위한 몽구트는 태국불교의 개혁자로 유명한 라마 4세. 그는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26견간 승원에서 비구생활을 한 인물이다. 환속하여 왕위에 오른 뒤에는 불교교단을 개혁하여 계율의 엄수를 강조했다. 그 결과 교단은 개혁파인 담마유타니카야와 정통파인 마하니카야로 나누어졌다.
담마유타니카야는 몽구트 왕의 아들이 부친의 뜻에 따라 1894년에 독립한 파로서 특히 계율을 엄정하게 지켰다. 이리하여 탁신 왕에 의해 어지럽게 된 승단은 안전한 숙정(肅正)을 이루었다. 몽구트 왕은 이 밖에도 노예제도ㆍ도박ㆍ음주ㆍ아편 등을 금지시켰고, 여성의 지위향상, 학술의 장려, 서적출판 등 문화정책도 적극적으로 펼쳐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태국은 그 후 1932년 6월 인민당에 의한 입헌혁명으로 종래의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 정체를 바꾸고, 근대적 독립국가로 면모를 일신했다. 국호를 종래의 시암(Siam)에서 타이(Thai)로 바꾼 것도 이때다. 타이는 ‘자유’라는 뜻이다.
태국은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서구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다. 이는 태국의 지리적 위치가 백인세력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 탓이기는 하지만, 불교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민족적 단결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전후(戰後) 태국불교는 1950년 스리랑카와 함께 세계불교도우의회(WFB)를 창설하는 유력한 멤버로 참여했으며, 1958년 11월에는 방콕에서, 1966년 11월에는 쳉마이에서 5회와 8회의 세계불교도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