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에서 아이에게 요즘 꿈을 꾸냐고 물어보았어요.
아이 엄마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저는 그 옆자리에, 아이는 제 뒷자리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는 서투른 배드민턴을 치는 것처럼 끊어졌다 이어지곤 했어요.
아이는 처음에는 꿈을 안 꾼다고 하다가 잠시 간격을 두고는 무서운 꿈을 꾼대요.
무슨 꿈이냐고 물어봤더니
할머니가 나온대요. 할머니가 자꾸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청국장 먹어라 그런대요. (음식이름은 청국장만 말했음)
그럼 너는 어떻게 하는데? 물었더니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한대요.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한테 와서는 이렇게 말했대요.
"이제 예전처럼 아빠랑 같이 살기로 했단다."
자기는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대요.
왜 깼는데? 물어보니, 너무 깜짝 놀랐대요.
잠시 대화가 끊겼고, 아이는 대뜸 엄마한테 "나는 엄마랑 자면 무서운 꿈 안 꾸는데." 이렇게 말해요.
자리를 옮겨서 아이 엄마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녀는 남편이 이혼을 해 주지 않아 현재 재판 준비 중이예요. 별거한 지는 한 달이 넘었고, 회사까지 찾아와서 폭언을 일삼는 남편과 시누이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린 상태지요. 도망치다시피 집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이들은(위로 고등학생인 누나 둘이 있음) 아빠가 데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못 키우겠다 데려가라 해서 지금은 그녀와 함께 살고 있어요.
그녀는 준수(가명)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책감이 많이 든대요.
딸들은 그냥도 아니고 빨리 이혼했으면 좋겠다며 엄마를 지지하고 있어요. 하지만 준수는 그간 제발 아빠와 같이 사세요, 등을 골자로 하는 여러 통의 편지를 엄마한테 건네 주었고 일기에도 그런 내용을 썼으며 곧잘 엄마를 설득하는 말(제가 더 말 잘 들을 테니까, 예전처럼 살아요 등)을 해 왔거든요.
그런데 준수의 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어요.
시집 살이에서 좀 벗어나 볼까 하여 낳은 늦둥이 아들이 준수예요. 남편이 경제적 능력이 없는 관계로 그녀는 결혼한 후 단 한 번도 직장을 쉬어본 적이 없어요. 어린시절 아이들은 할머니 손에서 컸는데 위로 두딸이 천대받으며 자란 것에 반해 준수는 금이야옥이야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랐어요.
준수는 무서운 꿈이라고 했고, 그 다음에 할머니가 나온대요.
비이성적으로 늘 자기편인 할머니가 나오는 꿈인데 무섭다고 한 것.
또 먹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실제로 비만이기도 함) 아이인데 할머니가 먹으라고 하는 데 풀이 죽어 있었다는 것.
끝까지 이혼은 하지 말라고 애원하던 아이가, 같이 살기로 했다는 엄마의 말에 잠에서 깬 것. 깜짝 놀랐다는 아이의 말은 그 뒤 "엄마랑 자면 무서운 꿈 안 꾸는데" 를 통해 두려워서 깬 것으로 추측이 돼요.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 경우 잠에서 깨고 우리는 그것을 악몽이라 부르지요.
열악한 가정환경 속에서 훌쩍 내면이 깊어져버린 열한살 짜리 아이.
할머니와 아빠에 대한 연민과 의리 때문에 감추어 두고 있었던 속내가 꿈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보며, 대견하기도 하고 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고 그랬습니다.
준수에게 "꿈은 꼭 꿔야지, 생각하고 자면 꾸거든. 꿈 많이 꾸고 엄마랑 꿈 얘기 많이 해." 했더니, 아이 하는 말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꿈 많이 꾸면 꿈도 이뤄져요?"
"그럼 이뤄지지. 근데 꿈이 뭔대?"
"바둑기사요. 나 꿈 많이 꿀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