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현실은 모사(模寫)한다. 이건 고래로부터의 진리다. 그 어떤 빼어난 화가나, 작곡가 혹은, 소설가와 시인도 동시대에 발 딛고 선 이상 이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예순 여섯 늙은 캐나다 감독(할리우드 자본에 의해 움직이니 ‘미국 감독’이라 말하는 편이 옳다) 제임스 카메론도 예외일 수 없다. 그가 영화 한 편의 연출로 수 천 억원을 벌어들이는 재벌급 거물이건, <타이타닉>의 성공에 경도돼 “내가 세상의 왕이다”라는 철없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지껄이는 노인성치매 환자이건.
그 거물 또는, 노인성치매 환자가 2009년 제작한 영화 하나가 한국(정확히는 남한)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아바타>. 영화사 114년에서 보기 드문 걸작인지, 조잡하고 화려한 색깔로 범인(凡人)을 미혹하는 성인용 저급-싸구려동화인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이 영화 한 편이 찧고 까부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한국 언론의 입에 ‘뜨겁게’(영화가 무슨 불 난 집의 호떡이냐?) 오르내린지 1개월을 훌쩍 넘어섰다. 이미 1000만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이걸 봤단다. 한 번 보고는 아쉬웠는지 3D 버전으로 다시 보는 게 유행(유행은 언제나 천박하다)이란다.
인구 5000만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1000만명이 동시에 관람한 영화가 있다는 건 ‘폭력’이다. 그것도 수치스런 폭력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말이지 ‘감동적’이거나, 영화 자체로서의 완성도라도 가졌다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깡패(혹은, 조직폭력배) 만세!’ 외에는 어떤 숨어있는 의미도 읽기 힘든 <친구>(이건 1000만에 조금 못 미치나?), 조악한 내셔널리즘을 ‘형제애’라는 달콤한 당의(糖衣)에 덧씌운 <태극기 휘날리며>, 이도저도 아닌 변태적 성욕의 왕을 둘러싼 허구의 역사에 곱상한 어린 배우 하나를 끼워 넣어 제대로 장사해먹은 <왕의 남자>. 이런 것들이 이른바 ‘1000만 관람 국민영화’란다. 4.19 때 시위대에 밟혀 죽은 종로3가 개가 웃을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본’의 음모가 있다. 영화감독 개인, ‘1000만 영화’에 출연한 배우(재수 좋게 출연해, 별 볼일 없는 능력임에도 이후에 떼돈을 벌었건 어쨌건 그건 논외로 하고)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왜 다 알지 않는가? 독립영화는 단관 개봉도 어려운데, 거대 배급사만 등에 업으면 끝에서 끝까지 가는데 4시간이 걸리지 않는 나라에서 수천 개의 스크린이 한 영화만을 상영하는 ‘막장’ 시스템. 이 ‘막장’의 배후엔 재벌급 배급사 혹은, 영화를 장사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모리배들의 ‘수익용 전자계산기’가 있다는 걸.
잡설이 길었다. 말이 많으면 빨갱이고, 남한사회에서 ‘빨갱이’란 딱지는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다. 허니, 짧게 가자. 요즘 어린 애들 지향으로 심플하게.
앞집 처녀에 옆집 아저씨도 보고, 아버지 패던 뒷집 불효자 아들놈까지 제 엄마 데려가 함께 봤다니 나도 <아바타>를 봤다. 스머프(이 조그만 것들이 언필칭 ‘루저’ 발언을 들었다면 얼마나 슬퍼했을까)가 다이어트와 키 크기 요법에 성공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온통 ‘새파란’ 영화.
영화관에서 내가 들은 건 비명이었다. 학살당하는 ‘나비족(族)’만의 비명이 아니었다.
베트남. 사이공 인근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네이팜탄에 피부가 홀라당 타버린 초등학생들의 비명.
이라크. 제 아버지와 삼촌도 모자라 열네 살 형의 목숨까지 빼앗아간 미군의 미사일을 향해 울부짖는 바그다드의 꼬마 열 살배기 알리의 비명.
니카라과. 미국 CIA가 파병한 군대. 동생을 임신한 엄마의 배를 찢어 거기에 커피가루를 뿌리며 “세임 라이크 이구아나”라고 낄낄거리는 ‘자유의 군대’ 미 육군 혹은, 해병 군복 바지자락에 매달린 소년의 비명......
비단 베트남과 이라크, 니카라과뿐일까? 민간인 거주 라오스 북부에 대한 무차별 폭격, 쿠바 전복 기도, 동티모르 학살방관, 이란 쿠데타 지원, 선거로 당선된 좌파지도자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살해, 남한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암묵적 지원.
아시아 곳곳, 아프리카 곳곳, 더불어 남아메리카 곳곳에서 행해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비인도적인 공작과 공공연한 학살. 그 주체가 미국이었다는 건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 행위에 배후에 복마전의 군산복합체와 유대인 자본이 있었다는 것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 묘하다. 이런 범죄 행위를 죄책감 하나 없이 저질러온 국가가 자신들의 세계지배 수단의 하나인 ‘영화’라는 가장 대중적인 경로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있다니. 게다가 그 ‘범죄’가 저질러지는 순서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니.
10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관람한 영화의 줄거리를 중언부언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포털 사이트에 영화 제목을 쳐 넣고, 엔터 키만 누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생략해도 무방할 듯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심플하게 가는 거다.
<아바타>의 복선 없는 단순한 스토리는 미국 혹은, 미군(美軍)의 제3세계 정복-살해의 역사와 너무나 닮아있다. 영화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런 공식이다. 수십 년간 변하지 않은 일종의 약소국 요리 레시피.
1. 자원 확보(또는, 공공의 평화유지)를 위해 타민족의 땅을 강제로 점유한다.
2. 회유와 협박을 통해 굴욕스런 항복을 강요한다.
3. 진실을 알고 있는, 그래서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는 용감한 이들을 제거한다.
4. ‘자국의 이익 확보’라는 본래의 목적을 숨기며 자신의 정당성을 선전한다.
5. 대상국의 저항을 끝까지 참아주는 척 하며 학살계획을 면밀하게 준비한다.
6. 최후통첩을 통해 공포를 유포하고, 공격의 정당성을 주도면밀하게 마련한다.
7. 제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말하는 이들의 아가리에 미사일과 총탄을 먹인다.
8. 재건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미국의 부자 기업가들을 끌어들인다.
9. ‘우리에게 까불면 죽는다’는 걸 주변 다른 나라들에게 은근슬쩍 보여준다
10. 되지도 않는 이유를 만들어 다시 먹잇감이 될 국가를 찾는다.
현실에서의 이 ‘레시피’와 영화 <아바타>가 딱 한 가지 차이점을 보이는 대목은 현실과 달리 영화에선 침략 받은 약소국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놀랍다. 정의가 불의를 이기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든 지구에서.
참, 나...... 신(神)과 정의라는 두루뭉술한 명분으로 수많은 제3세계를 ‘박살’내온 진정한 ‘악의 축’(Axis of Evil)-전직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북한과 리비아, 이라크 등이 ‘악의 축’이라 했지만, 미국에 비하면 이들 나라가 행하는 악이란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란 걸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미국다운 유치한 결말이고, 고급스런 거짓 선동이다. 바로 이런 이유 탓에 나는 <아바타>가 ‘아동용 영화’라고 생각한다.
“최첨단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실현이다”, “달라진 21세기 영화의 전범을 보여준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크로스오버 한다”...... <아바타>에 쏟아진 천편일률적인 찬사들이다. 허나, 그 찬사에 가려있는 비명과 눈물을 비단 나만 듣고, 본 것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당신의 착각이라고? 그러면 또 어떤가. 영화는 보는 이에게 ‘감상의 전권’이 맡겨진 예술장르인데.
장황한 글의 말미의 드는 의문 하나.
밥 굶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이들 7억1500만 명에게 ‘구수한’ 700원짜리 안성탕면 한 그릇씩을 끓여 먹일 수 있는 5000억원이란 돈으로 <아바타>를 만들어 미국의 ‘제3세계 지배전략 패턴’을 우회적으로 보여준 제임스 카메론. 그는 혹시, ‘반미’라는 명확한 구호를 내걸고 대통령이 된 남미의 좌파 지도자 우고 차베스(베네수엘라 대통령)와 에보 모랄레스(볼리비아 대통령)의 드러나지 않는 지지자가 아닐까?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