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사람의 이익 먼저 생각” “너도나도 불국토 자원봉사자”
성운스님<대만 불광산사 조실>
<약력>
- 1927년 중국 강서성 강도(江都) 출생
- 1939년 중국 남경 서하산 대각사에서 출가
- 중국 서하율학원 · 초산불학원 수학
- 백탑 초등학교 교장, <노도월간> 주간 역임
- 중국 남경 화장사 주지 역임
- 1949년 대만으로 옴
- 1967년 대만 불광산사 창건
- 서래사 등 북미 · 호주등에 200여개 사찰 건립
- 1991년 국제불광회 조직, 총재로 선출.
- 현재 100여개 국제 불광회 활동
불교의 생활화란 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생활과 불법이 여일한 신행을 말한다. 불교의 생활화를 실천하면서 부처님의 제자로서 여법하게 살아가는 생활이야말로 불자들의 이상이다.
대만의 불광산사에 주석하고 계시는 성운 스님에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불자의 도리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다. 스님의 저서인 <선한 존재(Being Good-Buddhist Ethics for Everyday Life)>와 법문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의 진리(One Truth For All)’, ‘평등과 평화(Equality and Peace)’, ‘불교에서 보는 원인과 조건(Buddhist Perspective on Cause and Condition)’ 등에서 중요 부분을 뽑아 대담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이 세상을 흔히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고해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싸우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는 등 온갖 고(苦)의 원인을 서로서로 제공하며 아귀다툼하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잘못은 어디에 있는지요.
▲이 세상이 우리에게 ‘고통의 바다(苦海)’로 다가오는 원인에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잘못된 마음과 행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환경을 지키겠다는 의식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아무런 의식없이 자기 멋대로 살기에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산과 강 그리고 땅을 오염시킬 것입니다. 또 물욕과 허영에 젖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그 또한 물욕과 허영을 좇아 이 세상을 사치와 폭력으로 물들이고 결국에는 우리를 다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하는 데에는 입과 손 그리고 발과 같은 신체를 잘 다스리지 못해, 이것들이 병든 것에서 비롯됩니다. 즉 조화를 이루지 못해 몸에 병이 나게 된 셈입니다. 탐·진·치와 의심 그리고 삐뚤어진 생각 등과 같은 ‘잘못’이 한 순간 시작되면서, 입으로는 이간질·욕설·거짓말 등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입이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죠.
또한 얼굴이 무표정하거나 적의나 살기를 띤 사람들을 가끔 보게 돼요. 그런 사람은 얼굴에 병이 있는 것이라고 봐도 됩니다. 손으로 살생·상해·도적질·사음 등을 저지르면 사회에서는 사회적 문제로 되고 이것이 고(苦)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예요.
신체의 병은 의사를 찾아 치료받으면 되지만, 마음의 병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깨어나야만 고쳐집니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병의 원인을 찾고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약처방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자비한 속마음, 진실한 본성, 복을 아끼는 생각, 감사하는 마음, 실질적인 말과 언행, 덕목을 간직하는 넉넉함, 부끄럼을 아는 것, 인연과 과보, 근검절약, 믿음과 행원, 방편 등의 ‘약’들이 필요합니다. 이 약들을 커다란 포용의 냄비에 볶다가 넉넉한 마음이란 화로에 고아야 하는데, 졸이거나 태우지 말아야 하고 화기를 다소 줄여 성질을 부리지 말고 부드럽게 요리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단체라는 절구에 한 마음으로 곱게 빻아야 합니다. 세번 생각해보는 것을 근본으로 하여 격려라는 알약으로 만들어서 매일 세번씩 계속해서 먹어야 하는데, 사랑으로 관심을 주는 물과 함께 복용해 나간다면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어요.
약을 복용하는 동안에는 쉽게 함부로 내뱉는 말과 그릇된 행동,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안보이게 행하는 편법,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칼을 가는 것, 이간질,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행위 등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죠. 또한 질투를 하지 말아야 하며 의심하지 말고 방종하지 않으면서 자아를 바로잡고 불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옷을 입을 때 거울을 보면서 바르게 입도록 다듬는 것처럼, 마음의 병을 거울로 삼으면 바른 생각을 낼 수 있고, 우리의 불심을 예쁘게 단장할 수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석가족의 태자였던 시절에 세간의 질병과 괴로움을 보고 불쌍하고 가여운 마음을 일으키고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수행할 서원을 세워, 결국에는 불도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 병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부처님처럼 질병을 거울로 삼아서 나와 남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질병을 계기로 삼아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몸(身)으로, 입(口)으로, 뜻(意)으로 업을 짓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몸과 말과 뜻을 잘 챙겨 나쁜 업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는 말 때문에 시끄러운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말 많은 사회에서 말로 구업을 짓지 말아야 하겠는데 구업을 짓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들에게 말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말은 나와 남이 상호 작용할 수 있는 막강한 수단이자, 우리의 업(業) 대부분을 만드는 매개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어떤 단어를 선택해 어느 정도의 목소리로 하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폭언이나 나쁜 의도의 말은 종종 몰이해와 의심 그리고 분노를 낳습니다. 사람들이 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폭언이나 나쁜 의도의 말에 현혹된 까닭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에게 항상 자비심 가득한 아름답고 진실한 말씀을 반복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스승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지를 정확히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말하는 방법상에 문제가 있다면, 그때마다 부처님께서 우리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말씀하실 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구업을 짓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때로 바보처럼 보여도 그러한 순수함이 거짓과 영악함으로 의미를 왜곡시켜 말하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세간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칭찬과 상으로 자랍니다. 보살 단계에 머물러 있던 석가모니가 진정한 부처님으로 거듭 날 수 있었던 것도 좋은 언어 습관에서 비롯됐어요. 따라서 우리는 좋은 말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간에 퍼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불법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널리 알려질 수 있습니다. 말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절에 다니고 염주를 걸고 법명을 받았다고 해서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진실한 불자가 되기 위해 우리가 꼭 실천으로 옮겨야 할 도리는 무엇인지요?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은 불교를 연구하고 이론화시키는 데 열중하고 있을 뿐 실제적인 수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학자가 아니더라도, 불자라는 사람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며, 채식을 하고 소원을 비는 것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자신의 인격과 도덕을 높이는 데는 소홀히 하고 우리의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불교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수행하는 수행자들도 자신의 수행에만 급급한 나머지, 산 속에 살거나 혹은 개인의 수행처에 머물면서 세상의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이같은 모습은, 요즘 유행하는 ‘나만 좋다면 못할 게 뭐 있냐’ 하는 말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사회 혼란은 바로 이 짧은 한 마디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러나 2500여 년 전에 우주의 상호의존의 연기법을 찾으신 부처님께서는 “자기의 편안함만을 추구하지 말고 중생의 아픔을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만을 원할 뿐이지 자기의 안락을 추구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를 따르기는 하지만, 만약 불타는 집과도 같은 고해의 바다 속에 우리 자신이 빠져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어찌 안일함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좋아한다 해서 꼭 좋은 것이 아니며, 싫다 해서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실생활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일이란 복잡하고 현란한 교리보다는 현재의 생활을 중시하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남을 배려하고 남의 아픔에 관심을 갖고 자리이타(自利利他)하는 생활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다 보면 우리의 몸도 마음도 청정하게 정화되어 감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평소 생활하는데 있어 ‘가치’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실천 수행법인 육바라밀 중 으뜸이 ‘보시’입니다. 스님께서는 불자들에게 자원봉사를 많이 하라고 늘 말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자원봉사는 우리 현대인들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소중한 보시행이 되겠지요.
▲자원봉사의 즐거움은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고 또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크게 깨달은 대덕들은 한결같이 “불가의 기둥이 되려면 먼저 중생의 소와 말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삶에서 유용한 지식과 총명함보다 자비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수많은 경전을 읽어보더라도, 선대의 스님들은 모두 이 같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설봉 선사는 동산 스님 아래서 공양주를 지냈고, 경제 스님은 위산 스님 아래서 쌀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았습니다. 임제 스님은 소나무를 키웠고, 양산 스님은 소를 길렀습니다. 동산 스님은 차를 심었고, 운문 스님은 쌀을 이고 날랐습니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소리를 좇아가 고난으로부터 중생을 구해 주시는 자원봉사자이시며, 지옥을 찾는 중생이 없을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말한 지장보살은 지옥에서의 자원봉사자입니다. 또 아미타부처님은 극락정토에 온갖 칠보의 나무를 키우는 자원봉사자라 할 수 있어요.
이런 불보살들의 가피를 받고 있는 우리들이 어찌 힘든 것을 마다하고 편안함만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삼보에 봉사하는 것 외에도 불보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중생제도의 정신을 본받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누는 자원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중에는 자비심과 이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자비심을 갖춘 사람의 것”이라는 말로써, 그들이 남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유한하다는 걸 알면서도 무한정으로 살 줄 알고 욕심을 부리며 많은 물질을 자기 곁에 쌓아두려고 합니다. 설사 불자들이라도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일’, 또 ‘나중에’하고 미뤄 버립니다. 금생에는 어렵다고 지레 포기하고 “내생에나 열심히 닦아 성불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진정 중요하고 당장 해야할 일이 마음닦는 수행정진 아닐까요.
▲인생이란 우주 속에 이어지는 생명을 창조해 나아가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지, 좀더 오래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침 이슬은 쉽게 자취를 감추지만 대지를 윤택하게 하고, 겨울 햇살은 짧지만 얼음과 서리를 녹여 내리게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 때를 활용해서 노력하고 생명의 불꽃을 태워서 찬란한 빛으로 후세 사람들을 밝혀주어야 합니다.
옛 선사들은 입멸하는 순간까지 커다란 원력으로 정진하였으며, 최후의 한 순간까지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안 스님은 염불소리 속에서 극락왕생하셨고, 현장 스님은 붓을 들고 경전을 번역하시다가 입적하셨습니다.
죽음으로 목숨을 다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인생의 마지막 같지만 실은 모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삶을 마감할 때, 우리들의 의식과 몸은 비록 썩어서 흐트러지지만 심식(心識)은 업력을 따라서 돌고 돕니다. 우리들 범부들은 시작을 알 수 없는 겁(劫)을 거쳐서 수없이 죽고 태어나면서 혹은 말이나 소로 혹은 아귀를 거치면서 잠시라도 쉬어 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지함으로 인해 죽이고 훔치고, 사음과 거짓 등 온갖 죄업을 저지르니 현재의 생(生)에서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 없고 다음 생에서도 물론 괴로운 업보를 받아야 합니다.
불성은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는 것으로 밖에서 구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내생의 안락과 복덕을 멀리서 구할 필요도 없고, 불보살님이 나타나서 구해주기를 바랄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을 계발하는 노력을 해야 하며, 삼세(三世) 부처님의 화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달리는 마라톤 주자의 정신을 배워서 금생(今生, 지금의 삶)이라는 끊임없는 길을 달리며 나와 남을 제도할 수 있는 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영원히 쉬게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째서 지금 정진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까?
< 2000년 8월 16일 현대불교신문과의 인터뷰> |
첫댓글 _()()()_
대만을 대표하는 스님 성운스님과의 인터뷰입니다. 대만의 불교를 일으키고 또 세계 200군데 절을 세워 불법을 전파한 대단한 스님이십니다...()...
도사님 감사합니다. 정말 귀한 자료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성운대사님의 귀한 인터뷰이십니다. 이런 귀한 자료를 우리 도사님이 컴에 모우고 계실 줄이야...*^*^*_()_
참으로! 참으로! 감명깊은 우리 성운대사님 말슴이십니다! 저 말씀 한마디 한마디 어디 불보살의 연민 아닌 곳이 있습니까! 비록 번역한 글이겠지만, 대사님의 밝고 자비로운 마음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우리 대사님! 참으로 올바르게 우리를 이끄시는 대사님...*^*^*_()_
성운대사님은 제가 참으로 존경하는 외국의 선지식이십니다. 이분의 법문을 보노라면, 달라이 라마도 그러하시지만 이미 깨달음의 경계를 넘으신 분이에요. 법문 말씀 하나하나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경을 읽거나 지식이 밝아져 하시는 법문이 아닙지요...
제가 존경하는 성운대사님이 태어나신 해가, 우리 광덕큰스님과 같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우리 광덕큰스님도 1927년(음력 3월 3일, 양력 4월 4일)에 태어나셨거던요??? 그리고 두 분의 새 불교 운동 이름이 똑같이 [불광]입니다...*^*^*_()_
도사님, 잘 읽었습니다. 현대 불교 신문 초창기때부터 받아 보고 있습니다만 좋은 글은 다시 보아도 또 읽고 싶습니다. 감사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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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관세음 보살 !!!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