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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
우표로 본 오늘~ 10/01
국군의 날, 세계 채식인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청계천 야경 (안양 유용상 님 자료제공)
2005 - 청계천 복원공사 2년 3개월만에 완공, 개통
청계천복원사업 - 2003년 초 입찰공고와 현장설명을 거쳐 같은 해 6월 조달청을 통해 사업자를 선정하고, 7월 1일부터 청계고가로 철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가 2005년 10월 1일 복원공사가 완료되었다. 총 사업비는 약 3,600억 원, 연인원 연인원 69만 4천여 명이 투입되었다. 이는 청계고가로와 청계로 철거비, 청계천을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하는 데 드는 비용이며, 보상비는 제외하였다. /naver
[청계천복원]통수식 거행된 청계천 47년만에 새물맞이 축제[김수진]
[통수식 거행된 청계천 47년만에 새물맞이 축제 현장/광통교]
● 앵커: 반세기 가까이 콘크리트 더미에 묻혔던 청계천이 새롭게 단장을 하고 서울 시민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새로 흐르는 물이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소망의 물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곳 청계천 일대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몰려 들뜬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현장 연결해서 시민들 표정 알아보겠습니다. 김수진 기자!
● 기자: 저는 지금 광통 아래 청계천 변에 나와 있습니다.
● 앵커: 그곳 분위기 좀 전해 주시죠.
● 기자: 밤이 깊어가고 있지만 청계천에 가득한 뜨거운 축제 열기는 여전히 식지 않고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서울의 젖줄을 만나기 위해 청계천에 나온 수많은 시민들은 보시는 것처럼 밤을 즐기고 있습니다. 청계천 통수식은 저녁 무렵부터 시작됐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가져온 물이 거대한 물 항아리에서 쏟아지면서 청계천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 이명박(서울시장): 우리 1천만 서울 시민은 청계천이 어둠의 세월을 용서하고 본래의 모습을 찾아 우리의 품으로 돌아왔음을 온 천하에 고합니다.
● 기자: 오늘 통수식에는 이명박 서울시장을 비롯해 노무현 대통령과 여야 대표 등이 참석해 청계천 복원을 축하했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청계천이 새로 태어나는 이 사건이 서울의 새로운 역사를 상징적으로 열어줄 것입니다.
● 기자: 통수식에 이어 유명 성악가와 가수들의 축하 공연이 펼쳐졌고 지금 이 시간 서울 광장에서는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씨가 이끄는 야외 음악회가 펼쳐지는 등 축제 열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청계천 광통교에서 MBC뉴스 김수진입니다.
(김수진 기자) /MBC 뉴스 2005.10.1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5/1915472_3844.html
2000 -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폐막
"2004년 아테네에서 만납시다" 제27회 시드니올림픽이 2000년 10월1일 11만7000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쉬운 막을 내렸다. 남자 마라톤 시상식이 끝난 뒤 열린 폐막식은 그리스를 시작으로 각국 올림픽위원회의 깃발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시드니 시장이 올림픽기를 아테네 시장에게 넘긴 뒤, 17일간 주경기장인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를 밝히던 성화가 서서히 꺼졌다.
1956년 멜버른 대회 이후 44년 만에 남반구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이 여전히 스포츠 강국임을 입증한 무대였다. 뉴 밀레니엄 첫 올림픽에 걸맞게 남북한 동시 입장과 동티모르 출전 등 스포츠를 통한 화합에도 기여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이 각각 금메달 39-32-28로 1위-2위-3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금메달 8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12위에 머물러 당초 목표에 미달했다. 북한 역시 기대했던 역도-유도-체조 등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 1980년 모스크바 대회 이후 20년 만에 노골드의 수모를 당했다. /조선
- Independence Day
1994 - 팔라우, 미국으로부터 독립
1543년 에스파냐 항해가 R.L. 비얄로보스가 이 섬에 온 뒤로 300년 동안 명목상 에스파냐령이었다. 1899년 팔라우제도는 마리아나제도·캐롤라인제도와 함께 독일에 팔렸다. 제1차세계대전 때인 1914년 일본군이 점령하였고, 독일 패망 후 1921년부터 일본이 지배, 제2차세게대전 때는 일본 해군기지였다. 1944년 미국이 점령, 1947년부터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1979년 자치정부가 발족되었고 1980년 비핵(非核) 조항을 담은 헌법이 제정되었다.
1982년 미군이 주둔하는 대신 팔라우에 경제원조를 약속하는 미국과의 자유연합협정에 조인하였다. 이 협정의 핵조항과 팔라우 헌법의 비핵조항이 상치되어 헌법 비핵조항 폐지를 위해 5차례 국민투표를 실시하였으나 75%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하여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팔라우인은 1987년 헌법을 개정, 미국과의 협정을 인가하였다. 유엔의 위임으로 미국의 신탁통치령이던 팔라우는 1994년 10월 1일 독립국가가 되었다. /yahoo
1990 - 인간게놈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시작 (미국)
1990년 10월 1일 유전자 지도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게놈 계획이 정식 출범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연구팀은 이 날 인간 염색체 내의 모든 염기서열(유전정보)을 밝혀내기 위한 연구 계획을 실행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출범 당시 인간 게놈 계획은 15년간에 걸쳐 5년씩 3차로 나누어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1차에서 전체 유전자 지도의 절반 정도를 완성하고 1% 정도의 염기서열을 밝히고, 2차에서 나머지 절반 유전자 지도의 완성과 10% 정도의 염기서열을 결정하며, 3차에서 나머지 90%의 염기서열을 밝힘으로써 인간 게놈 전체의 염기서열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세계 18개국의 연구진들이 참여하는 국제 컨소시엄으로 발전하면서 속도를 더하게 되었다. 1998년에는 미국의 민간 생명공학회사인 셀레라 제노믹스사가 이 계획에 뛰어들면서 HGP와 경쟁을 하게 되자 유전자 해독 작업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5년까지 완료하기로 한 애초의 목표가 2003년으로 앞당겨졌고, 2000년 6월에는 HGP와 셀레라 제노믹스사가 공동으로 인간 게놈 지도 초안을 완성하여 발표했으며, 마침내 수정된 목표보다 2년여가 더 빠른 2001년 2월에 두 회사는 전체 인간 게놈 지도를 완성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브리태니커
- 동아일보 2만호 기념 (1986.9.30. 발행)
1986 - 동아일보 2만호 발간
1986.10.10 - 동아일보 주최로 지령 2만호 기념 창극 <윤봉길 의사> 공연
http://www.yunbonggil.or.kr/sub01/sub01_01_01.html
1982 - CD(콤팩트 디스크) 플레이어 발매 시작
콤팩트 디스크(Compact Disc)는 지름 12 cm 디스크에 미세한 홈을 형성한 후 레이저 빔을 이용하여 홈에 저장된 신호를 검출 재생하는 장치로서 흔히 줄여서 CD라고 한다. 재생 방법은 레이저 광선에 의해 비접촉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잡음이 적고 음질이 우수하며 기록을 할 수도 있다. 프로토타입 플레이어는 1977년, 1979년 필립스사(社)와 소니사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1982년 첫 제품이 시장에 나왔다. /naver
- Return of Canal Zone to Panama, Oct. 1, 1979, Gen. Torrijos and Pres. Carter
1979 - 파나마운하지대 파나마에 반환
파나마운하지대 [Panama Canal Zone]
1903년에 체결된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에 따라 파나마 운하의 운영과 방위를 위하여 미국이 파나마로부터 조차(租借)한 운하 연변지역으로 너비 16km, 총면적 1,680km2이며 운하 자체의 반환과 함께 모든 지역이 파나마의 주권 밑에 놓이게 되었다.
너비 16km. 총면적 1,680km2. 주민의 대부분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1977년에 조인되고 1979년 9월 30일부터 효력을 발생한 새 운하조약에 따르면 커낼존은 폐지되고 미국 · 파나마 두 나라가 운하를 공동 운영 ·방위하기 위하여 미국이 필요로 하는 부분(면적의 약 35%)을 제외한 지역은 파나마에 반환되며, 1999년 말까지는 운하 자체의 반환과 함께 모든 지역이 파나마의 주권 밑에 놓이게 되도록한 약속이 실제로 1999년 12월 31일 이행되었다. 그간 미국은 열대에 속하는 이 지역에 위생적인 환경을 만들고 근대적 시설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어 놓았다. 미국은 또한 세계전략적 관점에서 이곳에 남부 방면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라틴아메리카의 게릴라 운동에 대처하기 위한 훈련시설을 설치하였다.
한편 이 지역의 북쪽 끝(대서양쪽)에 있는 콜론시(市)는 자유무역지구이다. 세계의 대기업들은 이 지역에 보세창고를 설립하여 대(對)제3국 상품수출의 발판으로 삼고 있으며 대규모 은행들이 지점을 개설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파나마에 대한 수출량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naver
1975 - 히로히토 일본 천황 미국 방문 (1일~14일)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는 연합국이 요구하는 항복조건을 무조건 수락한다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을 하여 침묵을 지켜온 왕실의 전례를 깨뜨렸다. 1946년 1월 1일에 있었던 역사적인 2번째의 방송에서는 일본 왕의 전통적인 신격성(神格性)을 부인했다.
미국 점령당국이 기초한 새 헌법 아래 일본은 입헌군주국이 되었으며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에게 있고 왕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었다. 국민들이 왕실에 더욱 친근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히로히토는 자주 공석에 모습을 나타냈고 자신의 사적인 생활과 가족생활에 대한 사진이나 글의 공개를 허용했다. 1959년 큰아들이자 왕세자인 아키히토(明仁)는 1,500년간의 왕실 전통을 깨고 평민 출신인 쇼다 미치코(正田美智子)와 결혼했다. 1971년에는 다시 한번 왕실의 전통을 깨뜨리고 유럽을 순방해 일본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재위기간 중 외국을 방문했다. 1975년에는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1986년 재위 60년 기념식전이 거행되었다. 1989년 히로히토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 천황인 아키히토가 왕위를 계승했다.
http://enjoyjapan.naver.com/tbbs/read.php?board_id=teconomy&page=5&nid=3612430
- Joe Frazier and Muhammad Ali
1975 -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에게 14라운드 TKO 승
1975년 10월 1일 : 필리핀에서 열린 타이틀 방어전에서 조 프레이저에 14회 TKO승.(드릴러 인 더 마닐라) /위키백과
1969 - 콩코드기(Concorde) 초음속 비행에 성공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 1호'가 1969년 10월 1일 9분동안 마하1을 넘은 비행을 기록, 3월 2일 첫 비행이래 처음으로 음속을 넘어섰다. 45번째 비행만이었다.
1970년 11월4일 1백2번째 시험비행에서 마하 2(시속 2천1백55km)의 굉속으로 53분간 순항하는 기록을 세웠다. 영국과 프랑스의 화합을 상징하는 '콩코드' 프로젝트 출범 18년 만의 개가였다. 이제까지 더글러스 DC8 여객기가 강하비행중 음속을 돌파한 적은 있어도 수평비행에서 마하1을 기록한 여객기는 콩코드가 세계최초였다. 소련의 초음속 여객기 Tu144는 이미 비행테스트를 개시했지만 아직 음속을 넘지는 못했다.
초음속여객기는 미국에서도 국가적 사업으로 콩코드보다 크고 더 빠른 보잉2707 여객기 개발이 진행됐지만 1972년 봄에야 비행에 성공했다. 콩코드는 1976년 1월 21일 상업운행을 개시함으로써 민간 항공여행의 초음속 시대를 열었다. /조선
콩코드기 연혁
1969.03.02 - 콩코드기 첫 시험비행 성공 (프랑스)
1969.10.01 - 초음속 비행에 성공
1970.11.04 - 102번째 시험비행에서 마하 2(시속 2천 1백55 km)의 굉속을 기록
1976.01.21 - 상업운항을 개시
1979 - 콩코드기 생산 중단
2000.07.25 - 파리 북부지역에 추락 사고 (113명 사망)
2003.06.14 - 파리 에어쇼 개막-콩코드기 고별비행
2003.10.23 - 마지막 상업비행 (런던-뉴욕)
2003.10.24 - 마지막 상업비행(귀항)(뉴욕-런던)
2003.11.26 - 콩코드기 마지막 퇴역비행 (히드로공항-필턴비행장)
1967 - 후세인 요르단 국왕, 소련 방문
1967년 오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한다.
후세인 국왕은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의 영접을 받고 모스크바 시민들의 환영속에 의장대를 사열한다.
요르단은 같은 해 4월 발발한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요르단강 서안을 빼앗겼다.
후세인 왕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이처럼 소련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영토를 되찾기 위한 외교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YTN
1964 - 세계최초 고속전철 신칸센[新幹線] 개통
일본 국철이 5년반의 기간동안 3천8백억엔의 비용을 들여 건설한 동해도 신칸센이 1964년 10월 1일 개통됐다. 신칸센은 세계최초로 개발된 고속전철로 동경올림픽에 맞춰 도쿄에서 오사카간 운행을 개시했다.
신칸센은 전후 급속하게 증가해가는 동해도 본선의 수송량을 분산할 목적으로 구상돼 1957년 일본국유철도간선조사회가 설치된 후 본격적으로 심의에 들어가 1958년 국무회의에서 건설을 결정했다.
처음에는 시속 200Km로 운행했으나 1997년부터 신차종 'JR 500'을 투입해 시속 300Km로 운행하고 있다. 신칸센은 도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도카이도선(東海道線) 이외에 1972년 3월에 개통한 산요선(山陽線), 1982년 6월에 개통한 도호쿠선(東北線)이 있다. /조선
1962 - 한국-가봉, 국교수립
가봉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한국 1962년 10월 1일, 북한 1974년 2월 1일)이며, 남북한의 상주공관이 설치되어 있다. 주한 가봉공관은 1975년 6월 설치되었으며, 1975년 7월에는 대통령 봉고가 방한하였다. 1982년 8월 대통령 전두환이 가봉을 방문한 데 이어, 1984년 9월 대통령 봉고가 내한하여 양국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1996년 8월에는 비공식적으로 방한하였다. 두 나라는 1969년 의료협력협정, 1975년 경제·기술·문화·과학협력에 관한 협정, 공동위원회 설치에 관한 협정, 무역협정, 1984년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naver
1961 - 미국 프로야구 선수 로저 매리스, 연간 61홈런 신기록 수립
"넘어갑니다… 넘어갑니다… 넘어갔습니다!" 로저 매리스는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1961년 10월 1일, 매리스는 61번째 홈런을 쳤습니다.
1998년 시즌에 세인트 루이스 카디널즈의 마크 맥과이어와 시카고 컵스의 새미 소사가 이 기록을 깬 것을 기억하고 있죠? 이들이 깬 기록이 바로 로저 매리스의 기록이었습니다. 이 기록을 37년 동안 아무도 깨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매리스는 누가 세운 기록을 깼을까요? (힌트: 사진을 한 번 보세요.) 그러면, 매리스는 정말로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깼을까요?
베이브 루스의 팬들은 매리스가 실제로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깬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베이브 루스가 1927년에 60홈런을 쳤을 때, 한 시즌 경기 수는 154게임이었습니다. 그러나, 매리스는 162게임 만에 신기록을 작성했습니다. 이 때문에, 매리스의 기록은 1991년까지 공식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로저 매리스와 베이브 루스는 모두 양키즈 선수였습니다.
/U.S. Embassy KIDS /주한미국대사관 자료정보센터
http://kids.americancorners.or.kr/KOR/05_history/history_1112.asp?pageid=11&subpage=12
1960 - 나이지리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영국은 1861년 라고스를 보호령으로 하고, 1885년에는 비아프라만안 지역을 보호령으로 하였다. 1890년대에는 왕립 나이저회사를 이용하여 내륙부의 지배영역 확대에 노력했다. 1900년 왕립 나이저회사 대신 영국정부가 직접 지배에 나섬으로써, 남·북나이지리아보호령이 탄생하였다. 1914년 루가드경에 의하여 남·북보호령이 합병되어 현재의 나이지리아 원형이 형성되었다.
1951년과 1954년 헌법 개정으로 북부·서부·동부의 3대부족권의 지방정부 자치권이 확대되었다. 1930년대 남부 엘리트층에 의해 시작된 반식민지투쟁도, 1940년대에 들어 부족적 색채를 더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 10월 1일 나이지리아는 독립하고 1961년에 독일식민지였던 북카메룬을 편입하고, 1963년에 4개주로 된 나이지리아연방공화국이 성립하였다. /yahoo
1958 - 한국-태국, 국교수립
1949년 10월 21일 대한민국을 승인, 1950년 11월 1일 6·25에 참전하였다. 1958년 10월 1일 공관급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며 북한과는 1975년 5월 8일 수교하였다. 두 나라는 무역협정(1961.9)·무역전시품면세통관협정(1963.5)·항공협정(1967.7)·관용여권사증 및 수수료면제협정(1967.10)·이중과세회피 및 탈세방지협정(1977.10)·운수소득면세협정(1981.1)·일반여권사증면제협정(1981.11)·과학기술협력협정(1984.4)·해운협정(2002.5) 등을 맺고 있다. /yahoo
1956 - 제1회 국군의 날 기념식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서 1950년 10월 1일 3사단 23연대 병사들이 강원 양양 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한 것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다. 종전의 육군기념일은 10월 2일, 해군기념일은 10월 11일, 공군기념일은 10월 1일 등 3군이 기념일을 각기 달리했다. 이날 오전 10시 제1회 국군의 날을 맞이한 서울운동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과 다우링 주한미국대사, 외국외교관 등 내외귀빈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거행됐다. /조선
1953 -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6ㆍ25 휴전협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이승만 대통령의 고민도 한층 깊어졌다. 휴전회담을 깨고 북진통일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휴전반대를 무기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미국으로부터 분명한 안보공약을 얻어낼 것인지... 단독으로 북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이승만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안전보장이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미국도 안보공약의 필요성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자칫하면 전쟁위험이 상존하는 이 지역에 발이 묶일 것을 경계했다.
그들 손에는 3장의 카드가 놓여있었다. 이승만을 축출하는 안과 유엔사령부 철수안은 채찍이었고 휴전협정을 준수한다는 조건하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안은 당근이었다. 그들은 당근을 선택했다.
이즈음 미국의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이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이다. 자신의 협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승만의 고단수 전략이었다. 당황한 미국은 특사를 파견해 의견을 좁혀나갔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까지 달려와 최종안을 조율했다.
마침내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 워싱턴에서 조인됐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200만달러 상당의 경제원조를 제공받고 한국군 20개 사단병력을 증강한다는 계획을 승인받은데 비해 미국이 얻은 것은 이승만이 작성한 ‘휴전 불방해’ 친서 한 장 뿐이었다. /조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1953년 10월 1일 조인되어, 1954년 11월 17일 비준 발효되었다. 이 조약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는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을 강화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한국군의 대미의존은 구조화되었고, 이 조약의 영향으로 한국전쟁 중에 미군에 이양된 한국군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휴전 이후에도 여전히 미군이 장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53년에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모태로서 1954년 한미합의 의사록, 1966년 한미 주둔국 지위협정(SOFA), 1991년 한미 전시지원협정이 체결되어 한미사적 불평등성은 법적으로 보장되기에 이른다. 자주적인 평화통일과 바람직한 한미관계를 위해서 이와 같은 불평등한 한미군사관계는 재검토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김창수(민화협 정책실장, 통일뉴스 편집위원)
http://www.tongilnews.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107
1949 - 공군 창설, 초대 참모총장에 김정렬(金貞烈) 대령
1949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8 - 한글전용법 국회 통과
1946 - 김일성종합대학 개교
1936 - 프랑코, 스페인 국가주석 취임
1926 -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
1926 - 나운규 감독 영화 '아리랑' 단성사에서 개봉
1924 -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카터(Carter, Jimmy) 출생
1908 - 구세군 한국 선교
1908 - 포드 자동차 'T카' 생산
1905 - 북한의 화학자, 교육가 이승기(李升基) 출생
1903 - 미국 프로야구 제1회 월드시리즈 개막
1881 - 미국의 항공기 생산업자 보잉 (Boeing, William Edward) 출생
1865 - 프랑스의 작곡가 뒤카스(Dukas, Paul) 출생
1842 - 프랑스의 발명가, 시인 크로스(Cros, Charles) 출생
1791 - 러시아의 소설가 악사코프(Aksakov, Sergey Timofeyevich) 출생
1507 - 이탈리아의 건축가 비뇰라(Vignola, Giacomo Barozzi da) 출생
1207 - 잉글랜드의 왕 헨리 3세(Henry III) 출생
BC 331 -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 대왕 다리우스 3세의 최후 결전-가우가멜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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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