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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산하처럼 낮은 구릉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산천은 푸르고 하늘에서는 구름 한점 찾아 볼 수 없었다.
프라하 시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프라하 성의 불야성이 지워지지 않고 그 잔영 만 더욱 뚜렷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위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디서 본 것도 같은 전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버스는 보헤미아 서쪽 카를로비 바리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는데 대청호 호반 길을 드라이브 하는 것처럼 가슴이 확 트이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을 계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이 들어 체코에 관한 역사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주어 담아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세계사를 지도하면서 늘 가슴 한쪽에 허전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대학교에서 교수들에게 주어들은 이론을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 한계를 느낀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럴때면 현장을 박차고 4대 문명의 발생지나 메소포타미아 지역 유적지를 찾아 답사 하며 이론을 뒷바침할 수 있는 현장 감각을 익히고 싶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현실로 실현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업이 지루하고 학생들에게 감정이입이 어려웠다.
이것은 현장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감성이 무딘 탓이었다.
여행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로 시기를 미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회가 드디어 나에게 다가왔다.
시기적으로 늦은감이 있었으나 “시작이 반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여행 순서 목록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뒤늦게나마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수록되어있는 지역들을 여행할 수 있게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여행의 목표를 최대한 달성해보리라 다짐했다.
중국 역사의 시작인 은허로 부터 인더스문명 권, 메소포타미아문명권, 이집트문명 권, 서구 문명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와 로마문명 권 등을 답사했다.
현재는 고대 서구문명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을 여행하고 있다.
바로 신성로마제국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게르만족의 이동때문이다.
게르만민족 이동의 발단은 한나라 무제때 흉노 족을 토벌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나라의 침략을 받은 흉노 족은 북부 유럽쪽으로 이동하였다.
그 여파로 북부 유럽에서 살고 있었던 게르만민족이 로마제국 영내로 이동한 것이다.
로마제국 영토내로 진입한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오래동안 번영을 누린 민족은 프랑크족 이었다.
이러한 프랑크 족은 메로빙거 왕조를 거쳐 카롤링거왕조 때 가장 전성기를 맞았다.
카를링거왕조의 가장 전성기시대는 서로마제국 황제로 대관되고 문예를 부흥시키고 성직자자를 임명한 샤를마뉴 대제 때다.
이때의 영토는 지금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에 해당한다.
샤를마뉴 대제가 죽자 그는 영토를 삼분하여 세 아들에게 주었다.
이것이 중부프랑크, 동 프랑크, 서 프랑크 기원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시초이다.
콜로나다
동 프랑크 왕국은 카롤링거왕조 샤를마뉴 대제의 장자가 계승했다.
때문에 중부 프랑크 이탈리아는 물로 서부 프랑크 프랑스 내정 까지도 동 프랑크왕조가 관여하였다.
이러한 동 프랑왕조에 프랑크왕국의 혈통이 단절되고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이 건설되었다.
현재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지역은 게르만민족과 마자르 족 등 여러 민족이 혼재 하면서 피를 말리는 전쟁을 계속했다.
자신들만의 영토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뉘른베르크
현재는 이들 지역에서 민족으로 편가름 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거의 혼혈이 되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가 구축되고 세계 역사 형성에 일조한 문화재가 찬란하게 꽃을 피고 있었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가 그곳이었다.
이지역은 일찍이 기독교에 귀의 했다.
때문에 서로마제국 과는 다른 순수한 기독교문화가 숨쉬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전같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지역의 문화재를 모두 탐사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한 지역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훌륭한 문화재 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망이 더욱 솟구쳤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점점 열정과 환희를 체험하기 시작하였다.
전공분야를 보완할 수 있다는 기회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행이 조금 익숙해져서 주변 산천의 맑은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버스는 프라하 시에서 빠져나와 E48번 국도로 차선을 바꾸고 있다.
카를로비 바리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카를로비 바리는 보헤미아 서쪽 독일과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카를로비 바리에서 카를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카를 4세가 온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카이저부르크성
14세기 중반 카를 4세가 보헤미아 숲에서 사냥하던 중 다친 사슴이 원천에 들어가 상처를 치유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온천의 효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왕족과 정치가 등 유명인사와 수많은 예술가들이 장기 체류하거나 즐겨 찾는 휴양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를 비롯해 쇼팽, 바그너, 브람스, 리스트 등의 음악가나 카프카, 괴테 등의 문인들도 자주 방문했다.
이러한 카를로비 바리는 온천도시로 휴식은 물론 웰빙과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서 많은 여행객들이 즐겨찾고 있었다.
프라하 시에서 카를로비 바리 까지는 2시간이 소요 되었으나 지루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특히 카를로비 바리, 마리안스케 라즈네, 프란티슈코비 라즈네 등 3개 도시는 ‘보헤미아 온천 삼각지대’로유럽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뉘른베르크
‘보헤미아 온천 삼각 지대’ 중에서 가장 경관이 아름답고 뛰어난 곳은 카를로비 바리로 보였다.
넋을 온통 빼앗다 시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지역에서 솟아오르는 온천수는 알칼리성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고 약리 적 효능 뛰어났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부터 최고의 “콜로나다” 투어 지역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온천수를 시음해 볼 수 있도록 여러 곳에 수도를 설치해 놓았는데 그 수도를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어놓은 건물을 “콜로나다”라 하였다.
뷔르츠부르크 돔 대 성당
계곡을 따라 양 옆에 건물이 들어섰고 건물 사이사이에 “콜로나다”가 눈에 띄었다.
골짜기에서 시원스런 맑은 물이 쫄쫄 흘러내리고 양 옆으로 신 르네상스 풍의 아름다운 건물이 들어서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하고 눈길을 사로잡았다.
온천은 우리나라에서 처럼 몸을 온천수에 담그는 것이 아니라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콜로나다”를 돌며 온천수를 컵에 따라 마시는 개념이었다.
각기 다른 곳에서 분출하는 온천수를 마시며 걷는 기쁨은 또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레지던츠 궁전
도로 가는 가지각색의 수종과 화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저마다 독특한 빛깔을 자랑하며 꽃송이와 잎사귀들이 은은하게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짙은 향기때문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내음에 취하여 행복에 잠겨보기도 했다.
지치고 고단하여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음에도 화단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귓가를 간지럽게 하였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중앙 광장에 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 중앙에 거대한 기념석주가 솟아있었는데 이집트에서 볼 수 있었던 오벨리스크와 비슷했다.
분수가 높이 솟아오르지 않는 것은 기념석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아 한적하고 고요 했으나 자신을 수양하는데는 이곳 만한 곳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진던츠 정원
카이저부르크 성 성문 앞에서
다시 골짜기를 따라 이동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골 물은 명경처럼 깨끗 했으며 도로가에 휴지조각 하나 떨어져있지 않았다.
건축물 또한 신 르네상스 풍으로 같은 모양의 구조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로 경쟁이나 하듯 옆집과 다르게 건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비경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진을 찍었는데 실제보다 훨씬 화려하게 보였다.
모두 좋은 작품이 촬영 되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사진을 촬영 했으나 그것은 희망사항이었다.
사진촬영 경험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장비 또한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곳 보헤미아 사람들은 온천을 즐기는 것 보다 시음을 통해 치료 법을 찾아보도록 도로 가 곳곳에 수도꼭지를 설치해 두었다.
이곳을 '콜로나다, 라고 하였다.
마이엔부르크 성당
마인교
우리나라 같으면 수도꼭지 옆에 컵이나 앙증맞은 바가지 정도는 비치해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컵이나 바가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온천수를 시음해보려면 마트에서 컵을 구입해야 했다.
뛰어난 상술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컵을 파는 마트가 여러군데 있었다.
컵을 마트에서 구입 하려면 현지화폐나 유로화폐로 지불하면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스름돈은 현지화페로 반환했다.
이러한 불편정도는 현지 체험에서 얻는 경험이라 생각했다.
현지 체험은 금으로 도 살 수 없는 산지식이 아닌가 그래서 경험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컵을 사들고 ”콜로나다”로 걸어갔다.
성 로렌스교회 내부
“콜로나다”는 많은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온천수를 시음해보기 위해서였다.
온천수를 시음해 보고 두번은 마시고싶지 않았다.
유황냄새가 나고 입안이 개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오색에서 나오는 약수 하고는 차이가 있었다.
건강에 좋을 수도 있었으나 많이 마실 수는 없었다.
계속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콜로나다” 외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자연 풍광과 인위적인 건축물이 어우러진 조화는 어느 관광지 보다 더 아름답고 빼어났다.
산 중턱 까지도 신 르네상스식과 고딕 풍 건물이 즐비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건물마다 독특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어서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장관이었다.
계곡 말미에 넓은 분지가 나타났다.
분지 중앙에 화려하게 단장된 화단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단연 압권이었다.
Sound of Music 의 배경이 되었던 오스트리아 짤쯔부르크 미라벨 정원을 연상하게 하였다.
아마도 그곳보다 도 더 아름다울 듯 싶었다.
화단 중앙에 용이 승천이나 하려는듯 하얀 구름이 모락모락 휘 감기면서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성 마리아 교회
그 아래는 온천수가 암반사이에서 콸콸 솟아오르고 있었다.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시냇물이 화단으로 관통하고 가장자리는 격자 모양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정원은 가지각색의 화초가 만개하고 독특한 모양의 수형을 이룬 정원수가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신선이 아닌 인간이 기거하는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계곡으로 깊숙이 더 들어갈수도 있었으나 일정상 버스가 있는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자연 풍광과 가지각색의 건물이 어우러지는 조망이 넋을 잃게 하였기 때문이다.
카를로비 바리가 본래 온천지역인데 다가 첩첩 산중이어서 공기가 아주 깨끗하였다.
그 동안 오염된 체내 공기를 이곳에 모두 배출시켜버리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카를로비 바리를 구경하고 되돌아가면서 조그마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성 로렌스 교회
식당은 사람들이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건물 뒷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내부는 포근하고 아늑하여 나그네의 울적한 기분을 녹이는데는 더할나이 없이 좋았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메뉴는 다양했으나 돈까스를 곁들인 닭요리를 시켰다.
친구와 단 둘이 무궁화호를 타고 군산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삼국시대이후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일제의 잔인한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군산시 월명공원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서천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려말 우왕때 왜구가 침략 했던 진포 해변이다.
그러나 진포대첩이 발생한 지 530년만에 조선은 일본에 병합이 되고 말았다.
슬픈일이다.
우리는 진포대첩을 거울삼아 비약의 계기로 삼아야 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허송세월을 보내다 한반도를 일제에 내주고 말았다.
일제의 잔인한 흔적은 군산시만 비단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어느 곳에 가나 흔히 일재의 잔재를 발견할 수 있다.
군산시에 갔던 이유는 군산시가 일제 식량 약탈의 전초기지 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식량약탈의 전초기지는 근대문화 역사 거리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외도 근대문화 역사박물관, 동국사, 일본식 가옥 등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현장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지론이다.
그래서 일제의 착취현장을 실제 탐방해보기로 하였다.
얀 후스 군상
무궁화호가 군산 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구 항구로 이동했다.
이곳에 가면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량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운송 했던 화물선이나 옛 항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도 수탈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일본 상업은행과 수탈한 토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설립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터를 쉽게 근처에서 목격할 수있었다.
그외에도 일본인이 거주 했던 일본식 가옥이나 정원, 조선사람들을 사역시켜 건축한 불교사찰 등 조선 침략과 관계있는 시설을 탐방하여 일본인들의 수탈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방을 맞이하기 전까지만 해도 목포, 군산, 나주가 일본 제국주의 자들의 침략 전초 기지라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군산시를 여행하다가 희희락락 하는 일본인들을 우연히 목격할 수 있었다.
우월감 때문 이었을 것이다.
과거 자신의 선조들이 개척한 식민지라 생각하고 옛 고향을 방문하는듯 군산시를 여행하고 있었다.
조상의 떼가 묻었던 곳이니 만큼 희열을 느꼈을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욕구를 적당히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군산시는 일제의 잔재물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경제적 이익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일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니 실재로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여기에 내국인의 역사관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여망이 축적되고 있었다.
군산시는 목표가 초과 달성되고 있었다.
군산시를 방문했을 때가 7월 초순 이었다.
그래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콜로나나에서 가이드님
목은 타들어가고 등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인내심을 가지고 무더위를 참아가며 선열의 고된 역사 현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더위를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도로를 따라 역사 현장으로 걸어가다가 그만 지치고 말았다.
마트앞에 놓여있는 의자를 바라보고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맥주를 주문해놓고 한 잔씩 마시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갈증이 깔끔하게 해소되었다.
그때의 추억이 생각나서 맥주 세 잔을 주문했다.
마침 앞좌석에 젊은 여성 두분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젊은이들로 부터 맥주를 대접받았다.
콜로나다에서 온천수를 마신 컵
그 답례로 이번에는 내가 맥주를 사고 싶었다.
한 잔씩 두잔을 여성들에게 내밀었다.
그때부터 젊은이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하여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우물안 개구리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은 세계일주라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지난 과거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내가 역사와 세계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세계일주를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 뇌머광장
경기가 조금 호전되면 실천해보리라 생각했던 것이 끝내 시기가 늦어지고 말았다.
나는 지금부터 세계일주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이미 앞서가고 있었던 것이다.
신세대의 사고는 나를 놀라게 했고 여행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 각 나라의 역사를 꿰뚫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행에 대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주저없이 주장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돋보였다.
이러한 선구적인 발상과 의지가 결합된다면 그들의 여행 목표는 달성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작은 맥주잔으로 맥주를 한 잔만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맥주 한 잔을 더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이 들과 대화는 하룻밤이 지새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들과 대화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다음 일정때문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목표가 달성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삶을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것이 삶의 의미 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다시 보헤미아 지방의 서부 카를로비 바리에서 신성로마제국의 보석상자러 불리는 독일 뉘른베르크시로 이동했다.
시간 상으로는 3시간 30분이 소요될 것 같았으나 도로 상황이 어떨지 알 수 없었다.
버스는 체코에서 E48 번 국도를 타고 이동해가다가 독일 영토내로 진입했다.
체코와 독일 사이에 국경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언제 독일영토 내로 진입 했는지는 가이드가 말을 해주어서 야 알 수 있었다.
유럽공동체 라고는 하나 국경에 검문소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유럽은 단일국가처럼 느껴졌다.
입∙출국이 너무 편리하고 시간이 단축되어 즐거웠다.
독일 뉘른베르크시로 가는 도로는 편도 2차선 이었다.
그러나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원스럽게 버스는 뉘른베르크시를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만 가끔 오락가락하고 있을 뿐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러다가 소나기가 쏟아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이동하는 동안은 비가 쏟아지지 않았다.
축복받은 여행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일기가 변덕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강한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풍속이 강해지더니 먹구름이 버스를 휘감아버렸다.
시야가 가려지면서 어둠이 밀려와 만물의 활동이 정지되고 말았다.
독일의 기온이 하강할 수 있다는 가이드의 말이 맞아떨어졌다.
지면을 달구웠던 햇볕이 사라지자 차가운 냉기가 몸을 움추리게 하였다.
지금까지는 차량 소통이 원활 했는데 갑작스런 비바람때문에 차량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알고보니 도로확장 공사때문이었다.
오늘 독일 뉘른베르크 시에서의 밤이 여행 일정 중 마지막이다.
지금까지 아무 사고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체코 영토를 벗어 났던 버스는 독일 영토로 진입하여 303번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다시 2번 국도로 차로를 변경하고 있었는데 검은 구름이 가득 낀 하늘은 빗방울을 흩뿌리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조급하게 했다.
그러나 강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동안 버스는 중세도시 뉘른베르크시로 진입하고 있었다.
뉘른베르크 시는 성곽으로 둘러싸여있었다.
성곽의 길이는 헤아릴 수 없었다.
성곽안으로 들어서자 중세시대 건물과 성당이 눈을 뒤집었다.
가슴이 떨리고 호흡이 멈출 것만 같았다.
중세때 형성된 성곽도시가 눈앞에 전개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때 형성된 성곽도시 그대로 현재 보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중간중간이 끊겨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때문이라고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 이었던 독일은 1944년에서 1945년까지 연합국의 공격으로 문화재가 파손되고 전국토가 황폐화되었다.
뉘른베르크 시에 있는 성곽도 예외일 수 없었다.
부분적으로 파괴 되었던 성곽은 현재 보수, 복원공사가 진행중에 있었다.
그러나나 피해가 엄청났기 때문에 전체적인 복원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쟁의 상처때문에 분위기가 우울하고 감상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였으나 관민 공동으로 복구작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성곽의 본관 건물 내부에 왕들이 사용했던 방과 예배당, 연회실 등이 있었으며 당시 사용했던 무기와 기구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쟁의 피해만 아니었더라면 중세시대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아쉬움을 남긴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행궁 이었던 카이저부르크 성으로 이동했다.
카이저부르크 성 역시 전쟁의 피해가 컸다.
카이저부르크 성도 뉘른베르크 성곽과 비슷한 상황 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건물과 반 목조 건물이 즐비한 중앙광장을 거쳐 성 로렌스 교회로 이동했다.
높은 첨탑만보고 걸어 갔는데 다행히도 쉽게 성 로렌스 교회를 찾을 수 있었다.
성 로렌스 교회는 중세시대 고딕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교회광장과 마찬가지로 교회광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교회를 중심으로 명품상가들이 사통팔달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의약품이나 면도기를 사고도 싶었으나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성 로렌스교회를 감상하고 되돌아 가기로 하였다.
교회 정면은 프라하 성 성 비트 대성당과 다를 바 없었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로 교회 외모는 장엄하고 엄숙했다.
다시 교회 내부로 들어갔다.
교회 내부의 분위기는 서 로마제국의 교회와는 차이가 있어 보였다.
장식이 단순하고 허례적인 치장을 지양하고 있는 것은 마르틴 루터의 성서주의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추진 하였던 사람이다.
그가 종교개혁을 추진하게 된 계기는 교회의 부패와 신비주의 때문이었다.
당시 교황은 성 베드로대성당을 수축하기 위하여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장 후진국 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을 선택하여 면죄부를 판매해야 했다.
국민이 우매하여 신비주의가 먹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주의를 강조한 마르틴 루터의 생각은 달랐다.
면죄부의 판매는 성서주의에 반하는 길이고 국민을 속이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최고의 지성인 이자 비텐베르크 신학대학 교수 였던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교황청의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 행위를 거부하며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95개조 반박 문이다.
루터의 95개조 반문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모든 농민들이 동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 가톨릭적 행동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발단이다.
교회 내부에서 외부로 나와 교회 전체 모습을 촬영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위치가 없었다.
교회 첨탑이 하늘을 찌르듯 치솟고 있어 사진이 짤리기 때문이었다.
성 로렌스 교회의 정문 옆에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보헤미아인 얀 후스의 군상이 있었다.
얀 후스 역시 마르틴 루터 처럼 신학자 이면서 지성인이었다.
이러한 지성인들이 하필 신성로마제국에서 로마교황청에 반기를 들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였으나 단지 후진국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후진국 국민일수록 세상물정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중앙정부의 명령에 모든 것을 순응하며 살아야 하겠다는 타성때문 이었을 것이다.
후진성을 탈피하고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지배계층과 싸워야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타까웠다.
종교는 도덕이다.
이것이 평소 나의 신념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가 이러한 교육이 교육현장에서 먹혀 들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사회가 격변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은 동유럽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내일 밤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시에서 인천공항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뷔르츠부르크시로 이동했다.
뉘른베르크시에서 뷔르츠부르크시까지는 2시간이 소요되었다.
마지막 일정을 소화 시키며 마무리를 하고 있는 단계이긴 하였으나 기대했던 것만큼 소득이 없었다.
지나온 일정이 가물가물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묵은 생각, 낡은 사고를 팽개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버스가 뷔르츠부르크시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하늘은 구름 한점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도로는 직장인들이 출근하느라 차량이 이전보다 훨씬 증가하고 있었다.
혹시나 차량의 지체로 일정에 차질을 빚지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뷔르츠부르크시는 독일 로맨틱가도의 첫 관문이었다.
헤르만 해세가 뷔르츠부르크시를 여행한 후 “내가 만일 고향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뷔르츠부르크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는 말처럼 뷔르츠부르크시는 아름다운 도시로 손색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뷔르츠부르크 궁전으로 걸어갔다.
타임 머신속의 중세 시대로 흡입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성곽아래서 한 여인이 물건을 팔고 있었다.
여인은 중세시대 농노처럼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현실과는 맞지 않는 중세시대 옷차림이긴 하였으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예기치 못하게 증세시대 평범한 한 농민을 보는 것 같아 기대이상의 감동을 받았다.
중세시대는 왕, 영주, 기사, 농노로 신분이 나뉘어 있었다.
왕이나, 영주, 기사는 경제적으로 풍요를 구가할 수 있었으나 농노는 그렇지 못했다.
신분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주나 기사의 토지를 소작 하면서 생활을 영위했다.
노예 보다는 신분이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현실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 같은 의식주는 생각해볼 수 없었다.
그런데 농노의 옷차림으로 변장한 한 여인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길가에서 물건을 팔며 서있는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뷔르츠부르크 궁전에 들어섰다.
뷔르츠부르크 궁전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세계 최대의 프레스코 화를 비롯하여 많은 명작이 소장되어 있었다.
뷔르츠부르크 궁전은 대부분 시청으로 활용되고 있고 그 일부만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그러한 궁전을 녹색의 숲인 레지덴츠 공원이 에워싸고 있었다.
주변 숲속 이나 강가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집들은 마치 그림같았다.
날씨 또한 화창하여 어느 무릉도원에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뷔르츠부르크 궁전은 과거에 주교가 상주한 주교관 이었다.
때문에 주교 관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돔 주교 대성당, 성 마리아 교회 등 교회관련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다시 뷔르츠부르크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했다.
프랑크푸르트시에 도착하여 시청사가 자리잡은 뢰머 광장과 괴테 광장을 걸었다.
모든 가로수가 아름답게 조경되어 있었다.
거리가 깨끗하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나라다.
연합국의 공격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전쟁의 잔해가 가끔 눈에 띄긴하였으나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가고 있었다.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이 맞는듯 싶었다.
일구워낸 부를 토대로 지난 역사의 과오를 청산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거리는 풍요롭고 활기가 넘쳤다.
마치 20대 문학도가 된 것처럼 괴테를 연상하며 프랑크푸르트 시를 활보했다.
그의 최대 역작이라 할 수 있는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 슬픔”을 연상하며 프랑크푸르트시를 걸었다.낭만과 사랑을 갈망 했던 과거 게르만 민족의 정신을 독일이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다.
화려했던 중세시대 건물은 볼 수 없었으나 게르민족의 정신은 살아있었다.
그들의 혼과 얼을 계승하기 위하여 대성당에서 황제의 대관식이 지금도 거행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