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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 조호바루, 바탐을 다녀와서
기우현
2012년 1월 27일(금)부터 1월 31일(화)까지 3박 5일로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다녀왔다. 크게 말해서 3개국을 다녀왔지만, 정확히 말하면 싱가폴, 조호바루, 바탐 섬을 다녀왔다. 싱가폴은 도시 국가이고 조호바루는 말레이시아의 항구 도시이고 바탐도 인도네시아의 도서 중의 한 섬에 불과하다. 그러니 명목과 실제와는 다른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여행도 당곡고 부장 해외 연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재작년 당곡고 근무 시 중국 서안, 화산으로 이어지는 부장 해외 연수에 참여했다. 작년에도 베트남의 짱안, 하롱베이, 하노이로 이어지는 연수에 참여했다. 두 연수에서 재미와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도 동참하게 되었다.
사실 양승구 선생님이 구두로 해외연수 참여 의사를 물었을 때 나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모임에서, 친척끼리 해외여행을 할 계획이 있었다. 아무리 긴 겨울방학이라고 해도 해외로 세 번을 나간다는 것은 금전적인 문제도 있지만 지나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임에서의 해외여행 계획이 어그러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지체 없이 양승구 선생님께 참여하겠다고 전화했다. 계획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 가급적 빨리 참여 여부를 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 선생님은 이번에 참여숫자, 목적지, 출발일자, 예상 금액을 전해주었다. 나는 이번 연수에 참여숫자가 좀 적다는 생각을 했고 목적지가 작년에 이야기한 내용과 다른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 날짜 및 여행 기간은 작년에 베트남에 간 날짜와 기간이 똑같았다. 요일만 하루 다를 뿐이었다. 비용은 좀 많으나 1월말에 출발하니 감수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싱가폴은 그렇다 치고 조호바루와 바탐이 어떤 곳인지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검색해 보니 두 곳 모두 싱가폴에 인접한 도시와 섬이었다. 다소 실망했다. 아들 녀석이 퉁명스럽게 거기에 왜 가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놀러 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논다는 말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도외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놀러간다는 그 말 속에는 딱히 이번 여행은 본격적이 연수도 아니고 문화체험도 아니라는 속생각을 그리 표현한 것이었다.
검색해보니, 싱가폴 패키지는 오후에 출발하는 3박 5일 코스였다. 그런데 이정희 선생님이 여행사와 교섭해서 오전으로 당겼다고 했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고 속으로 이 선생님이 큰 일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비용에 3박 5일 코스를 사실상 4박 5일 코스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번에 참여하는 선생님은 윤오영 교장 선생님, 오승모 교감 선생님, 양승구, 김운상, 곽노일, 김종민, 이동희, 이한승, 조영종, 이정희 선생님 10분이었다. 모두 다 아는 분들이고 참여숫자가 전보다 늘어서 기뻤다. 나중에 사정을 여쭈어보니 양승구 선생님은 실질적으로 교감으로 승진하여 업무를 보고 있는 입장이고 곽노일 선생님, 김종민 선생님도 몸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김운상 선생님도 가족과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연수에 뜻을 두고 참여했다고 한다. 선생님들이 그만큼 이 모임에 가치를 둔다는 뜻이어서 참여하는 나도 좋았다. 특히 이번에는 교장 선생님도 참여해서 단합해서 일을 해 나가는 부장연수 성격을 띤 점이 더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130만원의 경비 속에는 공동 경비 내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날 나에게 온 메시지에는 5만원을 더 갹출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유류할증료 인상 때문이었다. 시기상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하는 몫으로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침 7시에 공항에 도착해야 하므로 아침 5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기상 시간도 문제이긴 하지만 준비물, 특히 어떤 옷을 준비해야 하느냐고 문제였다. 싱가폴의 기온은 28도의 여름 날씨이고, 뇌우를 친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요새 서울에 여름이 왔다고 생각하고 여름옷을 준비했다. 그러다보니 내 가방 속에는 특별히 든 것도 없이 옷으로만 가득 찼다. 실제로 입고 다닌 것은 그 반의 반도 아니었지만. 환전은 유에스달러로만 했다. 싱가폴은 싱가폴달러가 필요하다. 그런데 작은 돈은 이정희 선생님이 싱가폴달러로 환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큰 돈이 필요하면 카드로 쓰면 되니까 쉽게 쓸 수 있는 유에스달러로만 환전해 가지고 왔다. 그리고 선생님 만날 날을 기다렸다.
1월 27일(금)
아침 5시 전에 집에서 나왔다. 저녁 무렵이면 교통 체증으로 늦을 수 있지만 지금은 새벽이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안사람이 혹시 내가 택시를 못 잡을까 봐 걱정했는지 버스 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6시 40분. 만남의 장소에서 이동희 선생님을 만났다. 몇 분은 늦으셨지만 출발에는 큰 문제는 없는 상태. 그러나 면세점에서 상품을 고를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항 철도를 이용해서 제 시간에 탑승했다. 내 옆자리는 나이 든 아주머니. 말 없는 분이었다. 나도 말을 하지 않아서 그 분과 대화한 내용은 없다. 출발 예정시각은 9시인데 지체되어 10시가 다 되어 이륙했다. 싱가폴 항공이다. 딱히 이유는 듣지 못했으나 활주로를 보니 도로가 눈으로 덮여 있다. 비행시간도 길어져 6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낮이어서 비행시간이 지루했다. 아침에 자지 못했던 잠을 때우는 것이 그나마 지루함을 막았고, 깨어 있을 때는 책을 보거나 음악을 감상했다. 한국과 싱가폴은 시차가 한 시간 난다. 싱가폴 국제공항인 창이공항을 나와 가이드와 미팅한 시간은 4시 반이었다. 예정시간보다 무려 2시간 15분이나 늦은 것이다.
가이드 이름은 ‘한석영’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계약한 믿음여행사 소속 가이드는 아니었다. 의뢰를 받아서 대신 일을 해준다는 생각을 가진, 약간 소심하면서도 조용히 제 할은 차질 없이 수행하고자 하는 타입의 남자 가이드였다.
가이드는 싱가폴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서울 크기의 섬에 450만 인구가 살고 있다. 다민족이 살고 있지만 중국계가 78%를 차지하고 있다. 언어는 영어, 중국어, 타밀어(인도 남부어), 말레이시아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교육제도는 영국식을 따르고 있으며 영어와 중국어로 수업한다. 교육은 빡세게 시키는 편이다. 도시가 깨끗한 이유는 길에 전신주가 없고 간판을 잘 정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역중개업, 관광업으로 산업을 유지하며 소득은 4만불에 달한다. 그리고 싱가폴의 동쪽이 공항이고 서쪽은 주롱 공원이라는 새 공원이 있고 북쪽은 말레이시아 조호바루로 가는 길이고, 남쪽은 인도네시아 바탐 섬으로 가는 길이다. 주택은 임대주택으로 누구나 세 번은 살 수 있다. 8000만 원 정도 한다. 국민들 누구나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주요 정책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라의 부는 국민의 복지를 위해 쓰인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설명을 듣고 ‘멀라이언 파크’로 갔다. 가장 화려한 도시 건축의 미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는 멀리 거대한 배가 얹혀있는 쌍룡 건물도 보이고 플라이어도 보였다. 그리고 가까이는 유람선이 운행하고 있었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멀라이언 상’이었다. ‘멀라이언’은 싱가폴의 상징물이다. 인어(머메이드)를 뜻하는 말과 사자(라이언)를 뜻하는 말의 조합어다. 머리는 사자, 다리는 인어인 큰 멀라이언이 입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물줄기가 시원하기는 하지만 파이프가 그대로 노출되는 조잡한 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상징물을 싱가폴 도시국가의 이미지로 삼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차이나타운으로 이동했다. 가이드는 이동 중 육포를 먹는 모습을 보고 음식물을 버스 내에 떨어뜨리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 이유는 여기가 더운 지역이라 벌레가 올라 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미에게 물린 자리라고 바지를 위로 올려 보이는데 큰 흉터가 여러 군데 보였다. 우리가 본 차이나타운은 잡화를 팔고 음식점이 있는 평범한 야시장 같은 곳이었다. 간단히 둘러보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불아사(佛牙寺)였다. 부처님의 치아를 봉안하고 있는 싱가폴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고 한다. 1채뿐이었으나 4층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의 미를 보여 주는 불교 사원이었다. 전면으로 들어가 보니 강당 같이 넓은 곳에 거대한 금빛 삼존불상이 서있다. 삼존불상 위에는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불상 앞에 신도가 설법을 듣는 책상과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양쪽 벽에는 불상이 2층으로 꽉 채워 있다. 뒷문으로 나오면 팔이 6개인 ‘육비여의륜관음상’이 가운데 앉아있고 좌우에 신장상이 서있다. ‘육비여의륜관음상’에서 ‘륜(輪)’자가 간자체로 쓰여 있어 읽을 수가 없었다. 글자를 베껴 가지고 집에 와서 확인했다. 수레바퀴 ‘륜(輪)’ 자였다.
석식은 한식으로 김치찌개를 먹었다. 그리고 리버뷰 호텔에 투숙했다. 한자로는 ‘호경대주점(濠京大酒店)’이다. 교장은 독실을 썼고 교감과 김운상, 양승구와 조영종, 곽노일과 김종민, 기우현과 이한승, 이동희와 이정희 선생님은 한 방을 썼다. 3박 내내 그리 했다.
저녁 후에는 특별한 스케줄이 없다. 우리는 가이드에게 우리끼리 ‘클라키’ 야경을 자유롭게 즐기겠노라고 했다. 호텔 뒷문으로 나와서 강변을 걸어갔다. 조용히 흐르는 강물인데 실제로는 바닷물이라고 한다. 그리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았다. 강변은 양쪽인데 우리는 다리를 건너서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강변 호텔 쪽 강변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다리 건너편은 카페가 줄지어 있었다. 조명도 어둡지 않고 거리에 포장마차도 없다. 걸어가는 데 걸림이 없는 산책길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야경을 즐기면서 30분 정도 걸었다. 선착장에 도착했다. 관광버스가 수도 없이 이곳에 들어온다. 분수대가 있고 도로 한 곳에서는 용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잠시 머물다가 돌아왔다.
호텔 거의 다 와서 ‘해피아워’라는 호프집에서 잠시 쉬었다. 오늘은 호주 오픈 테니스대회 준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다. 영국 선수 머레이가 출전해서 조코비치와 상대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경기에 관심이 많은지 여기저기서 텔레비전이 켜있고 많이들 시청하고 있다. 당곡고 선생들은 테니스에 관심이 많아서 조코비치의 경기 내용과 결과가 화제 대상이었다. 여기서 해피아워란 9시까지 술과 안주를 시키면 할인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거기서 맥주, 과일안주, 소시지 안주, 주스, 아이스커피를 취향 따라 마셨다. 나는 맥주를 안 마시려고 주스를 택했다. 권해서 맥주를 마셔보니 은근히 순했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 ‘칼스버그’라고 했다. 술잔의 모양도 특이했다. 용량은 500cc는 안 돼 보였지만, 호리호리하고 야들야들한 술잔이었다. 테니스 경기 결과는 조코비치의 신승이었다. 우리는 술 한 잔씩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10시였다. 나에게 술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술 한 잔 하자고 밤에 불렀지만 술자리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한승 선생만 갔다. 다행히도 여기서는 와이티엔이 방영된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책을 보았다. 그리고 책을 베개 삼아 스르르 잠들었다. 나중에 들으니 2시까지 술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1월 28일(일)
오늘은 6시 모닝콜, 6시 반 식사, 8시 출발이었다. 큰 짐은 호텔에 맡겨 두고 여권과 간단한 짐을 가지고 호텔에서 나왔다. 차가 바뀌었다. 오늘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말레이시아 조호바루로 간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달리 흡연이 자유로우나 다시 싱가폴에 들어 올 때 술, 담배, 물소뿔 등은 가져 오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입국 신고서를 한 장씩 배부했다. 싱가폴은 도시 국가이므로 우선 출국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레이시아 입국 심사도 받아야한다. 매일 싱가폴에 출퇴근하는 사람은 복잡해서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이 출입국 하는 장소는 넓고 심사도 간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서류를 심사하고 지문 인식기에 지문인식하게 한 뒤에 이름 확인하고 보내주었다. 다들 예외 없이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유독 양승구 선생님만 지문 인식 없이 통과했다. 달리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심사관이 양 선생님을 말레이시아 원주민으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한 마디씩 했다.
2층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을 버스를 향해 가다가 선생님이 콜라를 사려고 했다. 그러나 여기는 말레이시아 나라. 말레이시아 돈이 필요했다. 순간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국장에서 나온 사람들, 그들을 태우는 버스로 해서 입국장은 혼잡했다. 문제는 우리가 탈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릴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현지가이드도 나타났지만 그도 속수무책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이드는 회사에 전화하고 기다리고 현지 가이드와 상의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버스 기사와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가이드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여기가 공기가 나쁘니 다시 2층으로 올라가 기다리라고 했다.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선생님들은 지금 처지가 난민 같다며 답답해했다. 나도 가이드에게 그 버스기사와 전에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가이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 기사는 어제 전화로 통화해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슨 사고가 난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사고가 났더라도 그가 즉사하지 않는 한 가이드와 어떤 연락 조치가 분명 있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 후 몇 차례 그에 대해서 물었지만 가이드는 그 기사와는 연락두절이어서 사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끝내 미스터리로 남았다.
그렇게 해서 50분이 지연되었다. 가이드는 새 차를 수배해서 그 차를 탔다. 같은 회사 차다. 기사만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조호바루에 들어갔다. 이제는 중국계 말레이시아 현지가이드가 안내했다. 이름은 ‘나미’라고 했다. 밝은 성격의 여인이었다. 그는 조호바루는 ‘새로운 보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제2의 도시라고 했다. 가이드가 제일 먼저 안내한 곳은 조그만 공연장을 갖고 있는 가게였다. ‘앙크롱’이라는 대나무 악기에 가이드가 음악 연주 시연을 보인다. 가게에서 한 남자가 와 아리랑과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연주했다. 주렁주렁 매달린 대나무에서 어찌 그런 소리가 날까 의아했을 뿐 프로연주 솜씨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대에서 짧은 전통춤 시연을 하더니 우리들에게 같이 춤추자고 했다. 이내 마치고 단체사진 찍고 가게에 들어갔다. 과자, 과일 등을 팔았다.
그리고 나왔다. 이번에는 100년 전에 지었다는 회교 사원에 들어갔다. ‘술탄아부바카르’ 사원이라고 했다. 건물이 깨끗했고 경내는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강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었다. 건물 안에 신도가 아닌 사람은 내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가 있다. 우리는 표지판 있는 데까지 가서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지난여름에 터키 이스탄불에 갔었다. 내부에 들어가서 기도드리는 사진도 찍고 나왔다. 블루 모스크라고 밖의 모스크도 훌륭한 미관을 갖고 있지만 기둥도 내부 모자이크도 훌륭했다. 그러나 이 사원에서는 그런 아름다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나왔다. 그것으로 조호바루의 투어는 끝이다. 해프닝만 없었더라면 기억이 나지 않을 투어였다. 나는 더 볼거리가 많지만 잃어버린 시간 때문에 더 이상 가지 않았는지 의심이 났다. 심지어 어느 선생님은 조호바루에서의 기억은 소변 보고 온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절차는 또 그대로 밟아야 했다. 출국심사를 해야 하고 입국 심사도 받아야 했다. 번거롭게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다 보냈다.
어쨌든 예정은 어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쥬롱공원에서 1시에 볼 예정인 앵무새 쇼는 3시로 변경되고 번화가인 오챠드 거리의 면세점에 들를 계획도 취소되었다.
먼저 식물원에 갔다. 130년 전에 세워졌다는 공원이었다. 진기한 나무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고목도 있고 수종도 다양했다. 연못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는 잘 꾸며진 도심 공원이었다. 가다가 스위스 분수라고 밑에서 올라오는 물줄기가 큰 둥근 돌을 받쳐 돌이 빙빙 도는 설치물도 보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우리가 공원 전체를 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다지 다를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나오는 길목의 오키드 공원 앞으로 왔다. 난초 공원이다. 어른 5불의 유료 입장이었다. 사실 식물원에 왔으면 그것을 보러 오는 것일 터인데 옵션에 들어 있지 않았는지 가이드는 우리에게 들어가라고 안내하지 않았다.
우리는 버스로 이동해서 이번에는 주롱 새 공원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가기 전에 아프리칸 펭귄을 보았다. 펭귄이 남극 대류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울음소리가 당나귀 울음소리와 비슷하다고 하는데 들어보지는 못했다. 열대 지방에 사는 펭귄도 있음을 처음 알았다.
우리는 공원에 입장했다. 이미 시간이 1시 반이 넘어 식사부터 했다. 뷔페이었다. 한쪽에서는 앵무새 공연을 했다. 앵무새를 가지고 묘기를 부리게 하고 말도 시키고 그림도 그리게 하는 쇼였다. 식당 앞 건물 기둥은 대나무로 건축을 했다. 속은 시멘트를 사용했겠지만 겉은 대나무로 감싸 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이런 식의 건물은 대나무를 훌륭히 건축 자재로 활용한 것으로 우리나라 담양에서도 이런 식의 건물을 많이 지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모노레일카를 타려다가 승객이 많아 코끼리 열차를 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표 한 장에 어느 차든 세 번을 탈 수 있다고 한다.
이내 하차해서 먼저 앵무새 공원에 들어섰다. 입구에 서로 다른 종류의 새들이 나무위에 앉아 있었다. 위에서 내려가며 연결되는 길을 따라 새를 관찰하도록 되어 있다. 아이들이 새들의 음료를 사가지고 와 가까이서 새에게 먹이고 있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보았다. 이한승 선생님은 브라질에서도 새 공원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여기가 그 시설보다 잘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사실 작은 도시 국가가 살아남으려면 모든 것을 다 잘해서 보여 줄 필요는 없다. 한 가지라도 특색이 있고 잘하면 그것으로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구름다리도 지나고 일순해서 다시 원점으로 왔다. 잠시 쉬었다가 이번에는 모노레일을 탔다. 승객이 많아 다 타지 못하고 나누어 탔다. 가이드는 2번째 정류장에서 내리라고 했다. 가는 도중 여러 새들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정류장은 종점이었다. 다음 팀이 올 때까지 잠시 ‘플라맹고 풀’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사실 새 공원은 타고 다닐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걸어서 찬찬히 구경하면 반나절 이상 관람할 수 있는 공원이었다. 이렇게 주마간산하듯 구경하면 한 번 보았다는 데 뜻을 두는 것이다. 싱가폴만 패키지로 올 수도 있고 나중에 가보았지만 센토사(SENTOSA) 섬만 3박 4일 코스로 지내도 만족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어디에다 가치 기준을 두느냐에 있다. 많이만 돌아다닌다고 능사는 아니겠기에 드는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앵무새 쇼 공연을 보러 갔다. 이곳에서 쇼 공원은 유명한지 어느새 그 넓은 관객석이 관객으로 꽉 찼다. 나는 더운 날씨와 짜증스런 스케줄. 그리고 식사 뒤라 조름이 몰려왔다. 3시가 시작되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 공연은 새때들의 비상으로 시작되었다. 시원한 그 맛에 잠이 확 깼다. 이내 홍학들이 단체로 인사하듯 등장하고 퇴장했다. 그리고 무대 위의 진행자와 관객석 끝에 서있는 공연자와 사이에 새의 왕래가 각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붉은 새와 흰 새를 등장시켜 새 부리로 공 주워 담는 경기도 했다. 어느 새가 이길지 관객과의 경쟁도 시도했는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기면 살짝 먹이를 던져 주어 경기 속도를 줄이는 꼼수 부리는 장면도 보았다. 재미있었다. 그 다음 새가 지정된 관객에게 선물을 물어준다든지 관객이 들고 있는 원을 통과해서 날아간다든지 창호지를 뚫고 통과하는 쇼도 보여 주었다. 또 앵무새가 인사말도 하고 영어로 숫자도 세고 노래도 하는 묘기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새의 군무로 마감을 지었다. 아무튼 나는 졸린 상태에서 시원한 주스 한 잔 마신 듯 깨어났다. 30분간의 공연이었다. 전에 싱가폴에 오셨다는 교감 선생님께 그간 새 공연 내용에서 변한 것은 없었느냐고 여쭈어보니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셨다. 그러나 처음 보는 관객에게는, 특히 어린이에게는 볼 만한 구경거리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인도네시아 바탐으로 간다. 페리 편으로 타고 간다. 역시 출국 심사를 했다. 선착장에서 가이드가 표를 사는 동안 5시까지 간단히 쇼핑하라고 했다. 인도네시아에 이 가이드는 동행하지 않는다. 현지가이드가 우리말 잘 하니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정희 선생님, 양승구 선생님은 가기 전 거기서 먹을 포도주, 맥주, 과일을 샀다. 가이드는 조영종 선생님에게 인도네시아에서 만날 가이드에게 전해 줄 현금을 배달하게 했다. 우리는 출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분배하고 6시 배에 탑승했다. 큰 배이고 속도를 내서 달렸다. 말래카 해협을 건넌다. 선실에서 영화도 상영했다. 잔잔한 파도였지만 롤링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불안한 생각도 속이 메슥거림도 없는 편안한 항해 길이었다. 바탐 섬까지 거의 50분 걸렸다.
하선해서 다시 입국 심사를 받아야 했다. 가이드는 구두로 11명의 승객 확인했다. 또 심사를 받느라 긴 시간을 기다릴 줄 알았는데 우리는 별도의 줄로 빠져 나갔다. 그 대신 경찰이 여권을 다 회수했다. 베트남에서는 가이드가 그랬는데. 여권 없이 다니게 되었다. 여기는 표준시가 다르다. 싱가폴과 한 시간 시차가 난다. 나는 시침을 한 시간 뒤로 돌려놓았다.
우리는 승합차에 올라탔다. 가이드는 조그만 체구의 사내였다. 염소 같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이동희 선생님 말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길어 외우지 못하고 닉네임은 행기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자신을 ‘유재석’이라고 소개했다. 제 딴에 농담을 던져놓고 스스로 웃는 낙천적 타입의 사나이였다. 그가 주로 사용한 말은 ‘이브자리 까르르 - 르’였다. ‘르’ 자를 세게 굴렸다. 엄지를 뜻하는 말로 ‘다 예뻐요. 최고예요’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게 들리는 말이었다. 가이드에게 발음에 문제가 있어 처음에는 절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몇 가지 어려운 구분 예를 들면 존경과 존중의 뜻을 구분하지 못하고, 조선공장은 알아도 조선소는 처음 듣는 듯한 점은 있었다. 그러나 ‘문화 상징’이라는 고급 어휘도 구사할 줄 알고 ‘수수하다’는 고유어도 쓸 수 있을 정도로 한국어 공부를 많이 한 친구였다. 이슬람교도이고 결혼도 해서 자식을 둔 애 아빠였다.
식당까지 가는 도중에 바탐 섬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다. 이번에는 교장 선생님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가이드에게 질문을 했다. 바탐 섬에 대한 현황을 자세히 파악하려는 뜻이었다. 덕분에 가이드에게 설명을 잘 들을 수 있었다. 반탐 섬은 면적이 415평방 킬로이다. 행정상으로는 리아주 제도에 속한 여러 섬 중의 하나다. 주도는 음이 비슷한 빈탐이라고 한다. 반탐의 인구는 250만 명이다. 조선 공장이 세워져서 이주민들이 이 섬에 많이 들어왔고 원주민보다 이주민에 의해서 발달하고 있다고 했다. 상권은 중국인, 인도인이 쥐고 있고 행정은 인도네시아 원주민이 하고 있다고 했다. 네덜란드의 오랜 지배를 받았고 일본의 3년 반 동안 지배를 받았다. 문자는 네델란드 식 알파벳을 사용한다고 했다. 실제로 시내를 나고야라고 했는데 이는 일본 지배 시 쓴 지명을 그대로 바꾸지 않고 쓰고 있었다.
식당에 먼저 갔다. 날은 이미 깜깜해졌다. 수상 식당이다. 물/ 콜라/ 망고주스를 선택하라기에 망고주스를 선택했다. 식사는 밥, 그리고 나물 무침, 그리고 새우, 게, 생선 튀김, 어묵 등이었다. 식탁은 둘로 나뉘었는데 우리 식탁에 앉은 조영종, 이한승, 김운상 선생님이 잘 드셨다. 특히 교장 선생님이 입맛에 맞는다고 잘 드셨다. 덕분에 따라 먹기는 했지만 나는 과히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마지막에 나온 망고 주스는 그야말로 큰 망고 열매에 물이 가득했다. 시원하지도 않고 달지도 않고 마치 고로쇠 물 같았다. 내가 고로쇠 물 같다고 했더니 공감하는 눈치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판매점에서 전시하고 있는 제비집을 보았다. 말로만 들었던 제비집을 처음 보았다. 가격은 특대가 싱가폴달러로 2,000달러다. 180만 원 정도가 되겠다. 어마어마한 가격이다. 누가 과연 이 음식을 사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판매원도 소개만 할 뿐 우리가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식사 후 우리는 숙소로 갔다. 근 50분 걸린다. 왜 이렇게 먼 곳에 잡아 놓았는지 의아했다. 이정희 선생 말로는 숙소를 좋은 곳으로 바꿔 달라고 했는데 숙소가 이렇게 먼지 몰랐다는 것이다. 지참금 제도에 대해 설명했다. 남자에게는 돈이 최고라고 했다. 여자도 마찬가지 돈, 학벌, 미모 순으로 흥정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한국 사람과 결혼하면 행운이라고 했다. 지참금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가이드는 공무원이 최고의 직장이라고 했다. 교사도 존중받는 직업이라고 했다. 그는 공무원과 경찰의 부패상에 대해 설명했다. 연줄로 해서 들어가고 테스트를 통해서 들어가기는 힘들다고 했다. 공무원, 경찰이 상납을 해야 하니 뒷돈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자기 나라 부패상을 저렇게 재미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다니. 가이드의 이런 모습이 고객을 웃기기 위한 뜻도 있겠지만 제 나라 꼴이 정말 우스워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숙소는 ‘홀리데이 인 리조트’였다. 홀에 입장하니 맨유와 아스날 경기를 하고 있었다. 마침 박지성이 골을 넣어 맨유가 이기고 있었다. 청소년 수련 단체도 와 있었다. 야외 수영장 시설도 있는 큰 리조트였다. 우리는 수영장을 지나 별관으로 갔다. 우리는 큰 거실에 객실이 두 개 있고 화장실도 두 개 있는 방을 사용했다. 우리는 각자 한 방씩 썼다. 여 선생님의 경우에는 한 방을 썼다고 한다. 그 대신 방이 크다고 했다. 시설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내일은 9시 반에 출발한다고 한다. 모닝콜도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쉬러 온 곳이 여기가 아닌가 싶다. 객실에서 축구 경기를 계속 보았다. 결과는 박지성의 분전에도 맨유의 2대일 패배였다. 여기는 와이티엔은 안 나왔다. 아리랑만 나왔다. 그 점은 아쉬웠다. 밤에 거실의 의자를 501실로 옮기고 가져온 맥주, 양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었다. 내일은 늦게 일어나도 되니 늦은 시간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1월 29일(일)
오늘은 느긋하게 일어났다. 짐도 꾸릴 필요가 없다. 이틀 숙박하는 곳이다. 식사를 마치고 홀로 나왔다. 예정된 시간 9시 반에 출발했다. 오전은 사원과 민속촌을 들른다. 오후는 특별한 예정이 없다. 그래서 미니 발리로 가기로 했다. 마사지는 그리 탐탁지 아니한 분이 있어 가지 않는다고 했으나 달리 시간 보낼 일도 없어 점심 식사 때 하겠다고 전했다.
우리는 먼저 중국 화교가 세운 불교사원으로 갔다. 현대에 들어와서 세운 큰 건물이었다. 회랑이 굉장히 길고 높게 세운 건물이었다. 재신인 관우 상을 모신 사원, 부처님을 모신 사원, 관음상을 모신 사원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관우 상 모신 사원으로 들어가는 바로 앞에 달마대사 상이 앉아있다. 가이드가 달마대사의 몸에 뜻이 있다며 엄지발가락은 남성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리 말하니 그리 보였다. 여기서는 관우가 주신이고 오른쪽에 유비, 왼쪽에 장비가 자그마한 체구로 서있었다.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누고 이동했다.
이번에는 민족촌이었다. 먼저 나무, 가족제도, 집, 화장실, 우물에 대해서 설명했다. 야자나무, 망고나무, 바나나 나무, 고무나무 등. 실제로 망고가 나무에서 몇 개 떨어지기도 했다. 이장 집도 소개했는데 나무를 많이 소유해서 부자라고 했다. 가족제도는 다처제라고 했다. 요일 정해서 잠자리를 갖고 문이 여러 개인 것은 그 처의 수를 나타낸다고 했다. 화장실은 나무줄기로 얼기설기 지었는데 냄새가 잘 빠진다고 했다. 우물도 가리막으로 지붕이 있는데 공동 우물이었다. 물이 많고 수심이 깊어 보였다. 그리고 전시용으로 뱀, 원숭이, 다람쥐를 보았다. 밤에 원숭이가 자주 나타나고 다람쥐는 보양식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연장으로 갔다. 여기서도 짤막한 공연을 보았다. 무녀는 여기 여자는 아닌 듯 피부가 희었다. 악사도 있었다. 노인들이었다. 우리 몇 사람은 권유에 의해 무대에서 같이 춤췄고 단체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가게에 들어갔다. 단체 비용으로 커피 한 봉씩 샀다. 그리고 야자 음료를 맛보고 나왔다. 이번에는 애들이 떼 지어 붙었다. 예뻐요, 멋있어요, 오빠 하면서 따라 붙었다. 주로 바나나를 1달러에 팔거나 환전하라는 이야기였다. 선생님들이 많이 사주었다. 가이드에게 애들이 이렇게 많으냐고 하니 오늘 일요일이라서 애들이 많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현대, 삼성이 유명하지만 말레이시아는 무슨 공장이 최고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대답을 못하니 자답을 했다. 아기공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실제로 산아제한하려는 사례를 소개했다. 콘돔을 배부하는 과정에서 성기에 쓰라는 말을 엄지손가락으로 끼워 설명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해서 산아제한 효과가 없었다고 하다. 농담으로 하는 말 같지만 우리 옛 가족 모습이 아직도 여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립학교는 그렇지 않지만 공립학교는 이부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했다.
점심은 선착장에 있는 식당에서 했다. 여기도 수상식당이다. 식당에서 보니 맹그로브 숲이 펼쳐진 모습이 시원하게 보였다. 투어는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간혹 뱀이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위험하고 재미없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식사는 어제와 같은 해물이다. 김치도 나왔다. 나는 밥과 김치로 식사를 했다. 치킨 몇 개도 먹었다. 식사 후 나오다가 누가 소리 질러 가보니 왕도마뱀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래서 식당으로 오가는 길도 높여 회랑을 세웠나 보다. 우리는 나와서 새 차로 갈아탔다. 에어컨 성능이 더 나은 차로 바꾼 것이다.
이번에는 ‘미니 발리’로 간다. 5불의 선택 관광이다. 별칭만 미니 발리이지 명칭은 ‘투비비치(TUBI BEACH)’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항아리 분수가 도열되어 있다. 그리고 멀리 요트가 여러 대 떠있고 내려다보는 전망이 시원하다. 수영하는 사람은 없다. 수영장 가에 백인들이 선탠하고 있었다. 우리는 해변에 설치되어 있는 다리를 건너 정자 있는 데까지 갔다. 5층의 전통가옥 형태인데 1층은 장사는 하고 있지 않지만 스탠드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검은 실로 드리워진 초가집 형태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족나무라는 야자에서 실로 뽑아낸 것이라고 한다. 백년 간다고 했다. 우리는 거기서 나와서 해변가로 갔다. 리조트가 있는 곳이다. 정식 통로는 전번에 해일이 와서 보수 중이라 돌아서 갔다. 거기서 바지 올리고 물에 담갔다가 왔다. 특이한 것은 바닷물 속에 나무 몇 그루가 죽지 않고 서있는 것이었다. 놀라운 적응력이다. 거기서 잠깐 언덕으로 올라가 정자를 보고 왔다. 우리나라에 흔히 있는 정자 형태였다. 그리고 요트클럽에 들어가 주스 한 잔하고 나왔다.
이번에는 나고야 시장으로 갔다. 우리 도심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시장과일가게에서 망고스틴, 투쿠일화 1킬로씩 샀다. 둘 다 까면 마늘 모양의 열매가 들어있는데 달았다. 그리고 전신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유에스 30달러라고 했다. 김종민, 이정희 선생님은 원하지 않아서 하지 않았다. 나는 내릴 때 돈을 가져 오지 않아서 교감 선생님께 빌려서 냈다.
방에 들어가서 마사지를 받았다. 약간 더러웠다. 발을 담그고 씻는 과정도 없이 바로 마사지를 시작했다. 발, 다리, 팔을 하더니 엎드리라고 해서 발로 허리를 밟았다. 그리고 두피를 잠깐 만지더니 끝이었다. 그리 시원한 마사지는 아니었으나 한 시간 반이 지났다. 팁도 물론 없어서 교감 선생님께 빌려서 아가씨에게 주었다. 다들 썩 좋은 표정은 아니다. 교장 선생님은 다시는 안 한다고 했고, 교감 선생님은 아가씨가 너무 힘을 세게 주었다고 했고, 김운상 선생님은 아가씨가 잘못 밟아서 어깨 한 곳이 아프다고 했다. 이정희 선생님은 우리의 표정을 눈치로 안 듯했다. 우리가 마사지 받는 도중 커피도 마시고 쇼핑몰에서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이었다. 한식이었다. 아리랑 레스토랑. 가장 한식다운 한식을 내놓은 집이었다. 소주는 유에스달러로 12달러였다. 선생님들이 소주 생각이 났는지 한 병 사서 마셨다. 잔이 아주 작아 한 병에서 무려 14잔이 나왔다. 돈은 김종민, 양승구 선생님이 같이 반분해서 냈다. 호텔에 들어오니 경찰이 버스 검색을 한다. 테러 이후 으레 받는 절차라고 가이드가 말 했다. 6시 30분이었다.
우리는 수영하자고 했다. 객실에서 샤워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7시 30분에 수영장에 나왔다. 객실에 타월이 없어 카운터에 이야기를 먼저 했다. 그리고 선생님들끼리 모여 잠시 맥주 한 잔 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가격이 비싸다. 마시지 않았다. 몇 분은 테니스 경기를 보느라고 나오지 않고 또 나오신 분도 물속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김운상, 양승구, 이한승 선생님만 수영했다. 나는 수영할 줄 몰라 우물쭈물 하다가 저편 가족들이 모여 있는 얕은 곳에서 몸을 담갔다. 몇 번 머리를 물속에 담갔다가 나왔다. 그리고 8시 30분에 객실로 올라가 샤워했다.
객실에서 쉬다가 다시 201호실에 모였다. 여기 가게에서 사온 캔 맥주, 낮에 사온 과일을 먹었다. 오늘은 조코비치와 나달의 결승전이 벌어지는 날이다. 역시 경기에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 조코비치의 우승이었다. 모여서 오늘 받은 마사지에 대한 이야기, 내일 일정 문제, 팁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내년 여행에 대한 의견도 나누었다. 유럽 국가, 터키, 홋카이도, 중국 등 여러 의견이 나왔다. 내일은 6시 모닝콜, 6시 반 식사, 7시 반 출발이다. 짐도 싸야 한다. 그래서 일찍 술자리는 끝났다. 10시 반이었다.
1월 30일(월)
이제 바탐에서 여유로운 시간도 지났다. 오늘은 오전은 이동하다가 끝날 판이다. 배도 타야지 출입국 심사도 해야지 시차가 달라 싱가폴에서는 시간도 한 시간 뒤로 해야 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가이드는 아랍식 모자 꼬비약을 쓰고 나타났다. 이내 탑승해서 어제 점심 식사하던 선착장에 8시 반에 도착했다. 이정희 선생님이 가이드에게 팁을 주었다. 우리는 여권을 돌려받고 출국심사를 받았다. 부두는 혼잡했다. 어제보다는 작은 배다. 가이드가 한국 배라고 할 정도로 한국 사람으로 가득 찼다. 늦게 들어온 우리는 좋은 자리는 차지하지 못하고 접의자에 불편하게 앉아서 갔다. 우리는 이층에 일부 선생님은 삼층에 앉았다. 나는 잠시 가운뎃자리에 앉았다가 김운상 선생님 권유에 따라 창가에서 바람 쐬며 말래카 해협을 바라보았다. 잠수함을 본 선생님도 있었다는데 나는 보지 못했다. 구축함 같은 큰 배는 보았다. 물동량이 많다. 많은 화물선이 떠있었다.
50분 정도 걸려서 싱가폴 선착장에 도착했다. 역시 입국 심사를 마치니 10시였다. 입국 심사할 때 이번에는 양승구 선생님의 가방 조사가 있었다. 왜 유독 양승구 선생님에게만 그런 혜택(?)이 가는지 모른다. 김종민 선생님은 이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면서 이 이 이야기는 꼭 글로 써달라고 했다. 작년에 쓴 여행기가 인상 깊었는지 선생님들이 자주 내 여행기에 대해서 언급하셨다.
싱가폴 시간으로는 11시다. 가이드가 나와 있었다. 나는 가이드에게 싱가폴 호텔에서 책을 두고 온 사실을 말했다. 가이드는 알아본다고 했으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일명 ‘아랍스트리트’로 갔다. 표지판을 보니 원 거리명은 ‘칸다하르 스트리트’였다. 여기에 줄지어 있는 건물은 1920년대에 지은 포르투갈 식 건축양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스지드는 영어로 모스크를 뜻한다고 했다. 가이드 지식은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설명은 없었다.
우리는 ‘마스지드 술탄 싱가푸라’ 이슬람 사원에 들어갔다. 5개의 모스크가 있는 사원이다. 역시 규모는 컸으나 화려한 기둥이나 모자이크는 없다. 1820년대 지은 건물 옆에 1928년에 새로 지은 사원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옆 건물에 가보니 '리라(RIHLAH)'라는 건물이 서있다. 특색이 없다. 역사는 더 오래된 건물이나 지금은 모스크 사원의 부속 건물로 쓰이고 있었다.
잠시 지켜보니 선생님들이 안 계셨다. 찾으니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70퍼센트 세일한다는 가게였다. 이동희 선생님 추천에 의해 몇 분이 목에 두르는 천을 사셨다. 우리는 오던 길로 버스에 돌아가지 않고 그냥 진행방향으로 가서 버스에 돌아왔다. 교장 선생님은 늦게 올라오셨다. 우리를 찾다가 물건도 못 사고 돌아왔다고 불평했다. 그간은 교장 선생님이 사진 찍는 데 열중하다가 대열에 자주 빠졌는데 이번은 반대 경우였다.
점심 식사를 하러 로얄호텔 2층에 있는 ‘회빈루’라는 식당으로 갔다. 샤브샤브 식당인데 상당히 다양한 음식이 진열되어 있다. 우리가 먹고 싶은 대로 골라서 샤브샤브해서 먹으면 된다. 끓기 전에는 밥, 치킨, 과일을 먹었다. 새우, 버섯, 쇠고기, 야채, 오징어, 어묵 등 넣을 거리가 다양했다. 무려 한 시간 동안 천천히 먹었다. 이번 여행 중 가장 잘 먹은 식당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번에는 센토사(SENTOSA)를 향해 간다. 1시 50분에 출발했다. 그런데 10분도 못 지나서 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트럭이 끼어들기를 한 것이다. 트럭을 다시 만났을 때 기사끼리 언쟁을 했다. 그러더니 또 버스기사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이번에는 아예 트럭이 버스를 가로막았다. 기사의 욕설에 트럭 기사가 화가 난 것이다. 다행히 접촉사고는 아니었다. 다시 언쟁이 계속되고 경찰 오기만을 기다렸다. 오챠드 번화가 길이다. 교통이 혼잡한데 하는 짓거리가 한심하다. 가이드는 회사에 연락해서 트럭을 치우게 하겠다고 했다. 버스 안에서 보니 트럭기사는 전화로 회사를 상대로 계속 뭐라고 하는 듯 했다. 선생님들은 버스 안이 위험하다고 많이 내렸다. 나와 몇 선생님은 도로 가운데서 내려가느니 차라리 버스 속에서 있는 게 나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버스 속에서 보니 가이드와 트럭 기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이동희, 교감 선생님과 트럭 기사와 이야기가 이루어졌다. 이동희 선생님의 말의 힘이었는지 버스는 다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잡한 도로에서 20분간의 사고였다. 그러나 기다리던 경찰은 끝내 오지 않았다. 소문과 달리 싱가폴 경찰은 그리 눈에 띠지 않았다. 담배 피는 사람도 몇 번 보았으나 적발되는 경우도 보지 않았다. 시범 케이스로 걸린 경우가 혹독해서 소문이 그리 널리 알려진 것뿐이다. 아무튼 이번 여행은 해프닝이 많은 여행이다. 결과적으로 오차드 관광은 취소되었다. 사실 거기 가봐야 우리 백화점과 같다. 꼭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가이드는 라텍스 매점이라든지 보양식품을 판매하는 쇼핑센터에 우리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물론 시간 지체 때문이고 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었다. 그 점이 일련의 사건의 혜택(?)이라면 혜택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센토사(SENTOSA) 섬에 간다. 15층 건물에 올라가서 케이블카를 탔다. 바다를 가로지르기는 하나 요금이 34싱가포르달러나 된다. 내려다보니 아래 거대한 유람선이 있다. 선상에 수영장, 농구대가 다 설치되어 있는 호화유람선이다. 우리는 이내 섬 정상에 도착했다. 표를 확인하는 것을 보니 케이블카를 타고 오는 손님은 공짜인 것 같다. 우리는 맨 처음 ‘싱가폴의 이미지’를 홍보하는 영상 홍보관으로 들어갔다. 4개의 민족(영국,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이 바람을 타고 이동하여 이곳에 조화로운 나라를 건국했다는 홍보 내용이었다. 홀로그램기법을 이용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역사체험관을 들렀다. 역사를 길게 잡아 1819년을 기점으로 삼아 그동안 시대별 역사와 각 민족이 살아온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이번에는 걸어서 ‘멀라이언 상’으로 갔다. 입장권을 내니 동전 하나를 주었다. 이 동전은 기념품도 아니고 무엇에 쓸까 의아했다. 조영종 선생님은 전망대에서 전망을 볼 때 쓸 동전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역시 홍보영화를 먼저 보았다. 사슴을 쫓던 왕자가 섬을 발견하고 이상향을 향해 가던 중 바다의 용을 만난다. 왕자는 왕관을 바다에 던지고 무사히 섬에 도착한다. 거기에서 사자를 만난다. 왕자와 사자는 마음으로 통했다. 그래서 여기가 사자의 섬이 되었고 바다와 친근해서 사자와 인어의 조합 ‘멀라이언’이 탄생했다는 내용이다. 터무니없는 신화 조작으로 보였다.
우리는 다음 층으로 올라가서 멀라이언 상에 동전을 넣었다. 동전은 그런 용도였다. 카드가 한 장 나온다. 상품권 추첨 번호라고 했다. A와 B로 구분되어 있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갔다. 멀라이언 상 머리끝이다. 거기서 사방 전망을 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층 내려오니 멀라이언의 이빨이 보이는 곳이었다. 거기서도 사진을 찍었다. 장소가 협소해서 몇 명씩 나눠 찍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카드별 기념품 교환을 했다. 다른 상품을 받은 선생님도 있었으나 나는 열쇠고리를 받았다. 잠시 앉아 쉬다가 선생님들이 커피 한 잔 하자고 했다. 가이드는 시내에 적당한 카페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동차를 타고 다시 도심으로 가려고 했다. 물건 고르느라고 좀 늦은 이동희 선생님이 제동을 걸었다. 센토사 섬이 볼 것이 많은데 왜 이대로 돌아가느냐는 것이었다. 이동희 선생님도 전에 센토사에 온 적이 있었다. 우리는 동의했다. 그래서 반대 방향의 전동차를 탔다. 그리고 코끼리 열차를 타고 해변 카페로 갔다. 이 선생님이 여기서 탈 것은 다 무료라고 했다. 나는 코끼리 열차를 타고 제법 멀리 갈 줄 알았다. 간 거리는 겨우 한 코스다. 기다리는 시간이 차라리 더 길었다. 우리가 가려던 카페는 문을 닫았다. 좀 더 걸어 ‘웨이브 하우스’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교장 선생님이 아이스커피를 시켰다. 선생님들도 다 아이스커피로 통일해서 시켰다. 비용은 교장 선생님이 냈다고 했다. 우리는 한 동안 쉬면서 더위를 잊었다. 이제 기운이 나는 듯하다. 떠날 때쯤 잠시 해변가로 나와 경관을 구경했다. 앞에 방파제 같은 작은 둔덕이 있어 안전하게 수영할 수 있는 장소였다. 저편에는 그곳으로 건너가는 다리도 있었다, 거리로 나와 돌아올 때는 코끼리 열차에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가이드, 양승구 선생님과 함께 걸어왔다.
돌아갈 때는 전동차를 타지 않았다. 가이드가 차를 불러 버스가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센토사는 꼭 케이블카만 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동차도 있고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가도 되는 것이다. 아무튼 하나의 섬을 이렇게 위락단지로 만들어 홍보하는 재주는 알아주어야 한다. 저녁은 첫날 저녁 식사를 하던 곳이다. 이번에는 된장찌개를 먹었다.
가이드가 클라키 수상야경을 무료로 해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거기서 배를 탔다.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기다리다가 탑승했다. 우리는 배에 먼저 들어가 맨 뒷자리를 선점했다. 이번 수상 야경은 우리가 묵었던 리버뷰 호텔에서 선착장까지 온 길의 반대 방향이다. 여기서 멀라이언 상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회선하는 것이다. 선실 내에서는 한국어로 싱가폴을 안내하는 영상을 보여 주고 있다. 선실 밖에 있는 우리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도시 야경을 보러 온 것이다. 밤하늘 시원하고 야경도 화려하다. 시간대는 저녁 이맘때가 좋은 듯하다. 당국에서 관광객들에게 선상 유람을 시키려고 도시 야경에도 신경도 쓰고 다리 장식도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교장 선생님은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이동희 선생님은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그러더니 이 선생님이 꼬마 여자애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준다. 부산하게 놀던 애들이 이 선생님의 자상하고 친절한 설명에 집중하며 보고 듣는다. 엄마 같은 모습이다. 그렇게 멀라이언 상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30분간의 유람이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정말 떼돈 버는 도시다.
다시 가이드를 만났다. 9시까지 시간을 준다. 한 시간 동안이다. 우리는 강변을 걷다가 술 마시기는 시간이 부족하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터키 사람인데 현란한 손놀림으로 묘기를 보여준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잘 팔고 있다. 그렇게만 팔아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남아 김운상 선생님과 이한승 선생님과 쇼핑몰 잠시 구경하고 나왔다. 이번 여행처럼 김운상 선생님과 대화를 많이 나눠 본 적이 없다. 여행 기간이 주는 덕이라고나 할까. 9시가 다 되었다. 이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간다.
이제 메모는 하지 않았다. 특별히 기록할 만한 여행지가 없기 때문이다. 공항으로 가는 도중 가이드는 운전사 팁에 대해서 언급한다. 자기는 회사에서 받았으나 약정에 나와 있듯이 운전사 팁은 운전사가 소개하는 물건을 사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상품을 소개한다. 각 유에스달러로 10달러라고 했다. 우리는 버스기사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지만 선의로, 그리고 쇼핑센터에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물건을 사주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사주었다. 나는 양산과 손톱깎이를 샀다. 버스 속에서 그간 여행을 주선하느라고 수고한 이정희 선생님에게도 선물을 사주자고 김종민 선생님이 말씀을 했으나 이제 총무에게는 돈이 없다. 이정희 선생님께 수고했다는 마음만 가질 뿐이었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했다. 티켓을 받고 짐을 부쳤다. 티켓을 보니 제3터미널이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창이 공항에 터미널이 세 개가 있다고 한다. 몇 선생님은 겨울철 옷으로 갈아입었다. 서울은 내일부터 한파와 대설예보가 내렸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오전은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가 인천 공항에 가는 데 문제가 없다. 우리는 가이드와 인사하고 헤어졌다. 이정희 선생님이 반탐 가이드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이드에게 팁을 전했다.
공항 안에 면세점이 많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리 많지는 않다. 물건을 살까 하다가 말았다. 그간 기내 속에서도 산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내 속에서 고른 상품은 기내에 없다고 했다. 사지 못했다. 버스 속에서 샀던 물건이 전부인 셈이다. 사실 안사람이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니 꼭 사야한다는 것은 없었다.
11시 50분에 이륙해서 7시에 공항에 나올 수 있었다. 기내에서 거의 아침에 식사했기에 시장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공항에서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이번에도 방향이 같은 곽노일 선생님과 같은 리무진을 탔다. 나는 그간 코드가 안 맞아 전기면도기를 사용하지 못해서 턱수염이 더부룩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간 놀고만 왔는데도 마치 고생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집이 편한 곳이다. (2012.2.1)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여행기>를 읽으면 간접 경험의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만끽하게 되는데, 선생님의 상세한 글을 통하여 그러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급히 쓰다보니 몇 자 오타와 비문이 있어 수정하였습니다. 혹 발견하시면 연락 주세요. 고치겠습니다.
선생님 이번에도 선생님들과 좋은 곳 다녀오셨군요. 끝까지 쭉 읽으면서 같이 여행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긴 여행기를 쓰시느라고 애쓰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