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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병원성 전염 프로젝트 원문보기 글쓴이: 흐르는 물
당신의 삶에 자극이 될 연극 <두더지들> |
감동이란 무엇일까? |
소외된 밑바닥 사람들의 인생을 다룬 보편의 연극 혹은 드라마가 조금 윤색되거나 메시지전달을 위한 의도를 품은 것과 달리 <두더지들>은 부딪히고 싸우며 서로의 욕망을 위해 남을 짓밟는 그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그려냈다.
폐쇄되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지하철역.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들의 굴레를 탈출하고픈 소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공통의 목적의식 아래 부딪히는 저마다의 주체하지 못하는 소망은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부딪힘으로 서로에게 거듭 생채기만을 남길 뿐이다. 아프게 살아온 삶조차 부정하고 싶지 않은 고집과 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각자의 너무나도 다른 욕망은 그 순수성을 잃고, 방식의 오류와 이기주의마저도 정당성을 가지려 한다.
자신의 아집으로 인해 눈이 퇴화되어버린 두더지들. 그들은 오늘도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상대로 그다지 높지 않은 행복지수를 구걸한다.
자기의지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로부터 내 삶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고, 발버둥치는 모습에 연민을 느낌으로써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두더지들>.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삶 인 듯 하지만, 우리의 반응 방식이 상처의 아픔에 비해 정직하지 않다는 면에서 어쩌면 더욱 자신의 삶에 솔직한 에너지를 쏟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현대사회에서 불가능해져버린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훔쳐봄으로써 삶에 자극을 줄 연극.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어줄 연극. 그를 통해 그들이 말하는 감동을 전달받을 수 있는 연극. 그래서 나는 <두더지들>을 권한다.
/ 김도희 기자 happydohi@naver.com
/ 사진제공 : 사진팀 한성진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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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스토리가 흡입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돋보였던것은 배우분들의 연기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등장인물의 캐릭터설정이 잘 되어있어서 보는동안 지루하지 않았어요.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극단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랑티켓 게시판에 올라온 오선미 님의 글 중에서
고병원성 전염프로젝트 <두더쥐들>
우울하다. 덥다. 답답하다. 일상을 달래려 연극을 보러온다. 무대 위에서 만큼은 빛나고 화려한 인생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찾은 극장.
그런데, 이 연극, 기대를 저버린다.
등장부터 심상치 않다. 웬 거지 같은 해설자가 나와서 자기를 화가라고 소개한다. 이게 과연 설정인가 싶을 정도로 노숙자의 포스가 자연스럽다. 해설자의 소개가 지나고 밝혀진 무대를 보니, 한숨이 나온다. 공사판에서나 볼 수 있는 가설재료가 덩그라니 놓여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데 비발디 사계중 <겨울>이다. 심각함을 강조하는 방식이 참 일부러다. 그리고 줄줄이 거지같은 배우들이 나온다. 그리고 거지같은 연극이 시작된다. '작품성' 이 거지같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말 그대로, 지하철역에서 기거하는 지하생활자들이 나오는 연극이란 말이다.
이 연극, 가난하다.
가난이란, 거지란 뭔가? 돈이 없다는 거다. 현대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꿈도 없다. 희망도 없다. 고로, 구원도 없다. 대체로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그러다보니 '인간' 들이 보인다. 이들의 사연이나 갈등이 참 노골적으로 보인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정신과 치료는 정말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필요한건 아닐까? 근데 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정신과 치료는 부자들만 받을까? 가난한 사람들의 피폐한 정신세계는 누가 돌볼까. 이 가엾은 뇌들이여.
그래서, 이 연극, 우울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탈출을 꿈꾸지만, 쉽지 않다. 그러다가 보면 지하에 적응되고, 또 그러다 보면 두더쥐처럼 살게 된단다. 눈이 점점 퇴화되어 없어 진단다. 게다가 두더쥐는 고양이에게 잡아 먹힌단다. 이들이 사는 건, 그냥 사는게 아니라 발버둥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이들의 광기는 순간순간 표출된다. 잘 지내다가도, 화를 내고, 으르렁대며, 치고 박는다. 믿고 기댈게 없으니, 소리라도 지를 수 밖에. 성경 말씀을 읊조리지만, 참 귀에 안들어온다. 아무래도 얘네들한테는 종교적 구원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게다가, 이 연극, 참 깬다.
노숙자의 설교에, 뒤통수 치는, 깨는 음악, 갑자기 신파의 한 장면이 나오지를 않나? 복화술에다가, 관객에게 조명을 비추질 않나, 참 몰입을 다양하게 방해한다. 알았어, 알았다구. 이거 연극이야, 안 믿어, 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들수 밖에 없다. 세상에 저런 화가라고 우기는 노숙자가 해설자인데 거리두기는 당연하거 아냐? 게다가 중간에 광기라니? 솔직히 무섭다.
그러다보니, 이 연극, 계속 보게 된다.
갑자기 하는 결혼도, 갑자기 나오는 라디오도, 갑자기 튀어 나오는 숨겨온 사연들도 산통깨지만서도, 이들이 어느 순간 측은하면서도 잘됐으면 싶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반지하에서 산 적이 있었다. 지하는 참, 음습하다. 앗, 연극을 보고 있는 이 장소도 지하다. 대체로 가난한 연극이 올라가는 무대도 지하다. 지하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겠구나. 지하에서의 삶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는 마음이 모쪼록 들었다. 화가는 이런 걸 그리고 싶어서 햇빛도 없는 지하세계로 스며들었구나. 근데 왜 자꾸 눈을 팔라고 충동질 치는 거야. 자기는 눈으로 그리고, 눈으로 느끼는 사람이면서 왜 남의 눈을 뽑으라고 그러는 걸까. 결론적으로 가난은 느낌도, 행위도 거세한다. 그러니까 눈도 뽑히고, 미치고, 뵈는 게 없는 더 무참한 상황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두더쥐꼴이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이 연극, 참 고민스럽다.
답답한 마음 좀 풀려고 했더니만, 더 복잡해졌다. 이들이 연극을 마치고 인사를 할때도, 보답의 마음으로 열심히 박수를 쳤지만, 마음 한켠은 야속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연극은 즐거운 것이야, 관람평도 즐겁게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지만, 이 연극 한편으로 다시 진심으로 진지하고 심각해졌다.
이런 이유로, 이 연극, 생각하며 살 힘을 준다.
-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관람평 게시판에 올라온 '진삼'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