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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조선전기 왜관의 치폐 | |||
치폐 시기 | 장소 | 浦所 수 | 비고 |
1407년(태종 7) | 부산포, 내이포(제포) | 2 | 포소 제한 |
1418년(태종 18) | 부산포, 내이포, 염포, 가배량 | 4 | <!--[if !supportEmptyParas]--> <!--[endif]--> |
1419년(세종 1)-1423년(세종 5) | 포소 1차 폐쇄 | × | 대마도정벌 |
1423년(세종 5) | 부산포, 내이포 | 2 | <!--[if !supportEmptyParas]--> <!--[endif]--> |
1426년(세종 8) | 부산포, 내이포, 염포 | 3 | 삼포개항 |
1510년(중종 5)-1512년(중종 7) | 포소 2차 폐쇄 | × | 삼포왜란 |
1512년(중종 7) | 제포 | 1 | 임신약조 |
1521년(중종 16) | 부산포, 제포 | 2 | <!--[if !supportEmptyParas]--> <!--[endif]--> |
1544년(중종 39)-1547년(명종 2) | 포소 3차 폐쇄 | × | 사량진왜변 |
1547년(명종 2) | 부산포 | 1 | 정미약조 |
1592년(선조 25)-1607년(선조 40) | 포소 4차 폐쇄 | × | 임진왜란 |
조선에 건너와서 사는 일본인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이들을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불렀다. 15세기 후반 삼포의 항거왜인 수를 보면 대략 <표 2>와 같다.
<표 2> 15세기 후반 삼포의 항거왜인 수 | ||||||||
연대 | 제 포 | 부 산 포 | 염 포 | 합 계 | ||||
호 | 구 | 호 | 구 | 호 | 구 | 호 | 구 | |
세조 12(1466) | 300 | 1,200여 | 110 | 330여 | 36 | 120여 | 446 | 1,650여 |
성종 5(1474) | 308 | 1,722 | 67 | 323 | 36 | 131 | 411 | 2,176 |
성종 6(1475) | 308 | 1,731 | 88 | 350 | 34 | 128 | 430 | 2,209 |
성종 25(1494) | 347 | 2,500 | 127 | 453 | 51 | 152 | 525 | 3,105 |
1466년 1,650여명이던 것이 1494년에는 3,105명으로 거의 2배 정도 늘어났다. 1494년 자료에 한정하여 보면, 제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80.5%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부산포는 14.6%, 염포는 4.9%이다. 따라서 삼포 가운데는 제포가 가장 비중이 큰 항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표 1>처럼 1544년의 사량진왜변 이후에는 포소가 폐지된 후 1547년 부산포만 다시 허용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 이후 부산에만 왜관이 설치되는 단서가 되었다.
㉠ “富山浦에 와서 거주하는 왜인이 혹은 商賈, 혹은 遊女라 칭하면서 日本客人과 興利倭船이 이르러 정박하면 서로 모여서 支待하고 남녀가 섞여 즐기는데, 다른 浦에 이르러 정박하는 客人도 또한 술을 사고, 바람을 기다린다고 핑계하고 여러 날 날짜를 끌면서 머물러 虛實을 엿보며 亂言하여 폐단을 일으킵니다.<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3월 2일(임자)>
㉡ 내이포에 정박했던 왜인들이 서울에 갔다 오는 길에는 모두 東萊溫井에서 목욕하는 까닭에.....사람과 말이 모두 곤폐하오니, 금후로는 내이포에 정박한 왜인들은 영산 온정에서, 부산포에 정박한 왜인은 동래 온정에 목욕하도록 하여 길을 돌아가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3월 1일(을유)>
4. 17-19세기의 부산 왜관
① 쇄국(鎖國) 속의 교류
17세기 이후 조선과 일본은 자국인이 해외에 나가 거주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였다. 물론 외국인이 자기 나라 안에 들어와 일정기간 거주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이런 정책을 海禁, 쇄국정책이라 불렀다. 그러나 닫힌 세계 속에서도 조그만 틈새가 있었다. 최소한의 필요에 따라, 일정한 지역에 ‘특별한 장소’를 만들어 머물게 하였다. 일본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 있는 네덜란드상관이나, 중국인 거주지, 중국의 복주(福州)와 일본의 가고시마에 있는 유구관(琉球館), 조선의 부산에 있는 왜관(倭館) 등이 그것이다.
② 통신(通信)의 나라, 무상(貿商)의 나라
일본의 대외교섭관계 사료집 通航一覽(1850-1853년경 편찬)에는 17세기 이후 일본의 외국과의 교섭 관계를 通信의 나라[조선․유구]와 貿商의 나라[중국․네덜란드]로 구분하였다. 무상의 나라는 단순한 교역국이었다. 유구가 1609년 이후로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통신의 나라는 조선뿐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신이 상경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17세기 이후 상경한 것은 예외적으로 1629년 1번뿐이었다. 동평관도 폐지되었다. 양국간의 외교 무역은 부산에서만 이루어졌다. 부산은 한일 교류의 유일한 통로로 자리잡았다.
③ 동래부의 읍격(邑格)
동래부: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경상좌병영) 관하 경주진관에 속함. 1655년 독진(獨鎭) 설치. 경주진관의 통제에서 벗어난 독자적 진영. 외침시 병력을 이동하지 않고, 독자적 병력 운용. 1739년(영조 15) 동래부사가 守城將 겸함. 동래진병마첨절제사이며 독진겸수성장의 직함.
동래부사 지위 강화. 직속의 군사력을 보강하는 조치의 일환.
동래부 동헌 앞에 東萊獨鎭大衙門 현판이 걸린 문. 문 양쪽에 鎭邊兵馬節制營, 交隣宴餉宣慰司)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진변병마절제영: 동래부가 변방을 지키는 군사 중심지. 교린연향선위사: 동래부가 다른 나라와의 외교를 담당.→국방과 교린의 중심지. 상반된 이념.
5. 부산 왜관의 변천
① 절영도왜관
1601-1607년까지 존속. 薩摩堀(임진왜란 때 薩摩藩 島津義弘 군대가 배를 정박시키기 위해 해안의 모래톱을 파서 만든 정박지)의 남동 일대, 현재 영도구 대평동 2가 일대. 절영도왜관의 불편함으로, 새 왜관의 필요성은 1606년에 대두. 부산진 구진(舊鎭)과 멀지않은 곳, 즉 새 부산진의 서쪽 5리 정도 떨어진 곳을 결정하여, 1607년 봄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② 두모포왜관
1607년에서 1678년까지 존속하였다. 위치는 동구청, 수정동시장 부근 일대로 보고 있다. 왜관 동문 밖에는 좌자천(좌천)이 흐르고 있었다. 3면에는 담장이 서 있고, 앞 바다에는 수책이 세워져, 4면이 모두 둘러싸여 있는 형태였다. 왜관 중앙에는 연향청이 있었다. 그 좌우에 서관 동관이 있었다. 연향청은 곧 왜관 밖으로 옮겨졌다.
규모는 약 1만평 정도. 일본측은 부지 협소, 선창의 악조건 등 문제점을 거론하면서 이전을 요구. 새 왜관터로 다대포, 절영도, 초량 등이 물망. 일본과의 항로가 편하고 앞산이 남풍을 막아 선창의 조건이 좋은 초량이 선정되었다.
왜관은 1678년 용두산공원 부근으로 옮겨졌다. 이 왜관이 초량왜관이다. 신관인 초량왜관에 대해 두모포왜관을 고관, 구관이라 불렀다. ‘고관 입구, 고관파출소’ 등 고관이란 이름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두모포왜관은 왜관도가 없어서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두모포’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 기장에 두모포진성. 부산포 진관 소속의 수군기지를 부산으로 옮기는 군사개편에 따라 두포포진은 1629년(인조 7) 성을 그대로 두고 영을 부산 수정동으로 옮김. 두모포왜관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큼.
③ 초량왜관
가장 중심되는 건물은 왜관 책임자가 있는 관수가(옥).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부산호텔 쪽)과 서관(대각사 쪽)으로 나뉨. 동관에는 관수가, 개시대청, 재판가<동관 3대청>, 역관숙소, 절(東向寺), 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동족 해안에는 선창, 뱃사공 숙소, 창고, 경비숙소 등. 동관은 생활, 행정, 무역 공간적 성격. 서관에는 일본 사절의 숙소가 있었다. 서관은 3대청에 2행랑씩 딸려있는 ‘3대청 6행랑’의 모습이다.
관수가 자리에는 1876년 개항 이후 일본 영사관→ 부산이사청→ 부산부청이 들어섰다. 1936년 부산부청이 옛 시청 자리로 옮겨갈 때까지, 250여년(1678-1936년) 동안 부산의 일본인을 다스리는 중심지였다.
약 10만-11만평 방대한 규모에 일본인 마을과 같은 모습. 500명 정도의 일본인(대마도 사람) 관리와 상인이 거주. 가족 동반 금지. 남자만의 마을. 국가 기밀 누설, 밀무역, 조선인과의 자유로운 접촉 등을 막기 위하여, 2m 높이 돌담. 출입문 守門을 나서면 주위로 6개의 복병소(초소). 특별한 허가 없이 왜관의 경계를 벗어나는 경우에는 사형을 당하였다.
왜관 밖에는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연향대청(연대청, 광일초등학교 부근. 대청동 지명), 일본 사신이 국왕의 위패에 절하는 객사, 역관들이 거주하는 성신당․빈일헌 등 조선측 건물.
6. 초량왜관 그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왜관 그림은 申叔舟가 1471년(성종 2) 편찬한 『海東諸國記』가 다시 간행될 때 추가 수록된 1474년(성종 5)에 그린 제포, 부산포, 염포 그림. 「東萊富山浦之圖」에 보면, 현 부산 子城臺 옆에 ‘倭舘’ 표시와 함께 일본인 마을의 지붕과 건물.
草梁倭館圖는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음. 초량왜관 그림 중 그린 사람과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동래 출신 화가 卞璞이 1783년에 그린 왜관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유일. 이 그림에는 50여 개 건물 이름이 적혀 있어 왜관의 내부 구조를 아는 데 매우 유용.
釜山浦草梁和館之圖(국사편찬위원회 소장)는 초량왜관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펼쳐진 부산포의 전경을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한 10m 그림. 왜관과 부산포를 묘사한 그림 가운데는 가장 장대한 스케일. 해안가에서 3명이 후릿그물을 하는 모습, 雙岳 앞쪽과 좌우쪽 바다 세 곳에는 竹防簾이 묘사. 당시 어업기술, 어민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7. 草梁村과 小通事
① 設門과 新草梁村
초량왜관 밖에 있던 조선인 마을 초량촌의 호수는 18세기초가 되면 대략 70~90호 정도. 훈도청, 별차청, 출사청 등이 모두 초량촌 안에. 일본인들은 훈도․별차에게 출입한다는 것을 핑계로 초량촌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난출(闌出)․교간(交奸) 등 사회경제적인 문제.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 1708-1711년 재임)의 주장에 따라 1709년 담장을 쌓고 「설문(設門, 新門)」이라는 문을 만들어 출입 통제. 문안에 있던 민가는 모두 담장 밖으로 이주시켰다. 설문밖에 신초량촌이 형성되었다. 1709년에는 초량왜관의 담장을 흙담에서 돌담으로 바꾸었다. 설문은 조선인 사회와 일본인 사회를 구분짓는 중요한 경계였다.
조시(朝市)는 아침장이다. 일본인이 먹을 생선, 과일, 채소, 쌀 등을 공급할 통로가 필요. 이를 위해 조선 정부가 허락한 시장. 매일 아침-정오에 왜관 수문(守門) 밖에 서는 장.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왜관 주변 사람. 중심되는 사람은 왜관에 인접한 초량촌 사람들.
조시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 점차 여자, 나이 어린 여자들이 참여하는 비중이 늘어났다. 여성이 늘어나고 거래가 빈번해지면서, 조선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 사이에는 단골관계. 초량촌 여자들에게 버선․토시 등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할 정도. 초량촌 남자는 왜인의 물화를 받아 다른 지역의 장시에 매매. 남자들은 왜인들의 사환이 되는 등 경제적으로 유착.
초량의 지역민과 왜관의 일본인이 직접 만날 수 있는 공간은 조시밖에는 없었다. 밀거래, 교간, 난출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왜관 담장을 넘나들며 교류. 기생도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다. 매매춘의 폐단. 조선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이를 교간사건(交奸事件). 조선 풍속상 일본인과 교간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못하는 커다란 사회문제였다.
② 小通事
소통사는 사절 宴享의 준비, 양국인의 왕래 규제, 왜관의 물품 관리, 통역 등 왜관의 일상적인 직책은 물론, 통신사행․문위행의 수행 등 실로 다양한 대일교섭 실무를 맡고 있었다.
일본측은 외교․무역을 위해 조선측 역관이 누구이며, 성향은 어떤지 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마도주는 역관에게 각종 물화를 지급하여 교섭을 有利하게 이끌었다. 매일 훈도에게 丁銀 1兩 8銭, 별차에게 銀 8銭을 지급하였다. 즉 연간 銀 1000兩, 丹木 400斤, 水牛角 10桶을 주었다. 뇌물 중 일부는 조금이라도 일본인과 관련있는 사람에게 지급되었다.
소통사에게 지급하는 것도 정례화하였다. 1713년에 銀 3貫目이 지급되었다. 소통사들은 이 은으로 ‘義田’이라는 토지 구입. 銀은 원조인 동시에 회유책. 대마번의 恩義를 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서 대대로 편의를 보장받음.
소통사는 “자신들은 조선인이지만, 오로지 대마도를 위해 일한다”고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도 「小通事의 무리가 태반은 倭奴들의 복심이 되었으므로, 누설되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해지지 않는 말이 없다」고 하여, 일본인 심복으로 인식. 대마도와 소통사는 상호 共生的인 관계 유지.
소통사는 초량촌민 중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 대표적 인물이 朴琪淙. 1869~1871년 당시 동래부 소통사였다. 소통사의 후손들은 그 선조들이 대일 외교 업무에 종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06년 박기종의 주도하에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柔遠閣先生埋案感古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8. 음식문화의 교류
① 조선식 요리
왜관에 사는 일본사람들이 조선 요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일상식보다는 향응요리가 더 많다. 사신이 왕래할 때마다 외교의식이 되풀이되고, 의식이 끝나면 조선쪽에서 술과 향응요리를 내놓았다. 소, 돼지 같은 육식 재료를 사용하는 조선식과 그렇지 않는 일본식은 서로 취향을 달리 하였다. 일본에서는 멧돼지, 사슴고기는 식용으로 쓰였지만, '네 발 달린 짐승'은 기피 대상. 조선 요리는 쇠고기나 돼지고기가 반드시 들어가기 마련. 왜관 사람들은 쇠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나, 대마도의 통역관 小田幾五郞은 고기맛을 알았기 때문인지 육식을 매우 즐겼다 한다.
조선 요리에서 김치를 빼놓을 수 없다. 1736년 당시 메뉴에는 아직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으며, 김치 재료도 배추나 오이가 아니라 무, 파, 미나리, 외 등이었다고 한다. 과자나 떡도 조선 요리에 등장하는데, 모양이나 제조 방법 등을 왜관 사람들은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었다.
② 일본식 ‘스기야키(杉燒) 요리’
조선인에게 대접한 향응요리 메뉴 중 가장 많은 것은 스기야키. 왜관에서 조선인에게 접대된 스기야키는 일본 본토와 몇 가지 점에서 다른 특징. 우선 '스기야키'에 들어간 재료의 수가 많다는 점. 일본에서는 보통 3-4가지 종류 정도, 왜관에서는 그보다 3-4배가 더 많은 재료가 들어갔다. 또 하나는 도미, 전복, 달걀이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는 점. 도미, 전복, 달걀을 넣고 여러 가지 야채를 추가하여 일본된장과 함께 끓여서 만든 왜관판 '스기야키'를 조선인들이 매우 즐겼던 모양. 일본요리는 맛은 좋지만 양이 적다는 불만을 고려한 배려인 것이다. 왜관판 스기야키 요리는 조선요리와 일본요리의 장점을 결집시켜 놓은 두 나라 음식문화가 교차하는 왜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메뉴.
③ 화려한 향응요리
스기야키나 나베(鍋)요리는 본격적인 향응요리는 아니다. 코스요리처럼 순서에 따라 나오는 정통 일본요리는 중요한 의식이 거행될 때 제공. 1736년 2월 2일 아사이 요자에몽(淺井與左衛門)이 개최한 석별의 잔치에서 정통 일본요리가 나왔다. 첫번째 주된 요리인 혼젠(本膳), 두번째 주된 요리인 니노젠(二の膳), 거기에 히키데(引て)와 後段(후식)까지 화려한 향응요리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날 요리에 사용된 음식재료만 해서 71가지. 이 밖에 식단의 내용은 명확하지 않지만, 별실에 있는 조선 하인 23명에게도 '1즙 3채'의 요리가 제공. 왜관에 프로 요리사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두 나라의 음식문화가 상호 침투를 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9. 부산․김해 등지의 일본풍 유행
왜관을 통해 부산과 주변지역 사람들이 일본인과의 만나는 것이 늘어나면서, 일본의 생활․문화․풍습이 왜관 주변으로 침투하여 갔다. 이학규의 낙하생전집에는 19세기 전반에 일본인의 습속과 문물이 동래, 김해 등지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일본식 무늬가 물들여진 붉은 비단을 두른 접부채를 들고 다니고, 좋은 집 처마에는 파려로 만든 일본산 풍경이 달려 있고, 아낙네는 일본 양산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장날에는 자기로 만든 일본산 벼루가 매매되고, 일본산 미농지(美濃紙)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일이 생겨났다. 스끼야끼를 먹는 풍조가 유행하고, 일본제 모기장으로 여름을 보내며, 일본 소면과 일본귤을 찾는 사람도 생겨났다. 일본의 무력을 상징하는 일본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호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또 일본식 도박이 성행하였다.
미농지는 일본 미노(美濃) 지방에서 생산되는 최상품 종이였다. 동래 학소대 아래에 사는 김이원(金彛源)은 미농지에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정섬이라는 서울사람은 낙동강변 후포에 있는 섬에 내려와 살면서 해산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방에 대마도에서 온 국화를 키우면서 즐기곤 하였다. 스끼야끼 등 음식은 이제 김해의 아전이나 부호 등도 즐기는 음식이 되어 갔다. 동래부 사람 김경화는 칼을 애호하는 벽이 있어, 일본 단도 한 자루를 순금 30냥 값을 치르고 3년만에 구입하였다. 이러한 일본풍의 유행은 왜관 주변의 초량이나 동래지역은 김해지역보다 더 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0. 朝鮮藥材 조사 Project
17세기 이후 가장 중요한 조선산 수출품은 人蔘. 약용 인삼 수요의 증대와 함께, 약재 처방을 위한 체계적인 의학서적이 필요하여, 『東醫寶鑑』, 『醫林撮要』, 『醫學入門』, 『醫學正傳』, 『和劑局方』, 『痘疹源論』, 『備急草本』 등 다양한 의학서의 구입을 요청하였다.
특히 8대장군(1716-1735) 德川吉宗은 대마도에 조선약재조사를 명하였다. 이 조사는 1718년부터 막부의 명에 따라 부산 왜관에서 실시되었던 조선산물, 특히 약재로 쓰이는 동식물에 관한 조사이다. 이 조사를 위하여 대마도는 전담 관리, 화가, 庭師들을 왜관에 파견하였다. 조선측의 일본어 통역관 등의 협력을 받으면서 조선 전역에 걸쳐 동식물의 포획․채집작전을 전개하였다. 조사 지시는 1718년, 1721년, 1732년 3회 이루어졌다. 중간에 중단된 적도 있지만, 1751년까지 30년 이상 진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 약용인삼의 생초(묘)나 종자를 입수하여, 막부의 약원에서 재배하여, 국산화를 시도하였다.
11. 왜관을 통한 경제 교류
① 公貿易
거래 주체가 국가 또는 국가기관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수출품은 일본산 동, 납, 동남Asia산 水牛角(물소뿔), 丹木, 明礬. 胡椒 등이다. 조선에서는 이들 수입물품에 대해서 교환비율에 따라 목면을 지급하였다. 물소뿔은 조선 활을 만드는 원료로 수입되었다.
17세기 전반 이후 일본에서 목화가 재배․보급되어, 면포생산과 더불어 조선산 목면의 수요가 감소하였다. 쌀이 부족한 대마도의 요청에 따라 목면의 일부를 쌀로 바꾸어 주었다. 이 쌀을 公作米(公木作米)라 불렀다. 공작미제가 실시된 것은 1651년이다. 목면 300同(1同=50疋, 15,000疋)에 해당하는 米 12,000石(1疋=米 12斗. 15,000疋×12斗=180,000斗. 米 1石=15斗. 180,000斗÷15=12000石)을 수출하였다. 1660년에 16,000석으로 증가하였다.
③ 私貿易[開市貿易]
조선의 무역상인과 대마도 상인의 무역이다. 왜관의 開市大廳에서 매월 6회(3, 8일) 실시되었다. 조선측 사료에는 개시라 불렀다. 그러나 실제 열리는 개시일수는 시기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부산지역 5일장: 독지장(1․6日)→ 읍내장(2․6日)→ 부산장(4․9日)→ 좌수영장(5․10일) 체계. 3․8일장이 존재하지 않음. 倭館開市(3․8일)가 5日場의 일환으로 기능.
月 6回 열림. 그러나 18-19세기에 시기가 내려가면서 개시의 비율이 점차 줄어들었다.
㉠ 개시무역의 물품 변화
18세기 중엽을 기점으로 하여 인삼․견직․白絲↔銀 무역에서 牛皮↔銅 무역으로 바뀌었다.
㉡ Silver Road(은의 길)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절이 파견될 때 무역자금으로 막대한 은을 가지고 갔다. 이 은은 일본에서 수입된 것으로 일본 → 조선 → 중국을 경유하는 Silver Road가 형성되었다.
㉢ Silk Road(비단․ 生絲의 길)
일본 생사는 長崎와 대마도를 통해 수입되었다. 長崎貿易은 1658-1662년, 對馬(朝鮮)貿易은 1684-1687년에 최전성기를 이룬다. 이후 일본에서는 白絲를 자체 생산되는 18세기 중엽까지 조선을 경유하여 중국산 백사를 수입하였다. 중국 → 조선 → 일본을 경유하는 생사의 길이 형성되었다.
12. 倭館의 終末
1868년 明治政府 수립. 조선과의 관계에 큰 변화. 대마도는 사절을 보내 신정부 수립을 알리는 書契 전달. 서계 내용의 표현이 종래의 외교 관계와 맞지 않음. 조선측은 서계 거부. 교린체제를 어길 경우는 교섭을 거부한다는 의지.
명치정부, 1869년 조선과의 교제는 외무성 소관, 대마도주는 사절을 파견하지 말라고 지시. 일본, 1871년 廢藩置縣 실시. 1872년 5월 왜관 사무를 외무성 소관. 9월 외무성이 왜관 접수. 관수를 외무성 9등출사에 임명 館司에 임명. 대마도 외교권 상실.
조선, 외무성 관리 귀국 시킴. 왜관에 대한 식량 지원과 교역을 중지하는 撤供撤市 단행.
1873년 3월 초량공관을 완전히 접수하여 大日本國公館이라 명칭을 바꾸고, 館守를 면직시켰다. →왜관의 종말. 종전의 교린외교의 舊態를 유지. 최소한의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다.
13. 맺음말
17-19세기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조선의 通信使, 일본의 年例送使나 差倭와 같은 외교사절의 파견과 왜관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 통신사는 약 200년 동안 12번(3번은 회답겸쇄환사) 파견된 한시적, 제한적, 명분적 교류였다. 왜관은 일상적인 교류의 공간으로 복잡, 구체적, 실리적인 교류였다. 조선 정부는 왜관을 조선 사회와 격리된 닫힌 공간으로서 닫혀 있기를 바랬으나, 실제는 기대와 달리, 왜관은 두 나라의 사람, 재화, 문화, 정보가 교차되고 교류하는 열린 공간의 기능하기도 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부산의 개항이 확정되었다. 그후 부산에 일본의 단독조계인 일본전관거류지 설치하였다. 초량왜관의 일본식 건물 등은 전관거류지를 설정할 때, 새로운 부지를 설정하고 건물을 지을 필요없이 그대로 이용되었다. 관수옥(館守屋)이 있던 곳에는 그후 영사관, 이사청, 부산부청 건물이 들어섰다. 전관거류지는 초량왜관의 땅을 승계한, 약 11만평 규모였다. 거류지 내에 영사관 건물을 중심으로, 경찰서, 은행, 병원, 상업회의소, 전신국 등 공공건물 배치되면서, 일본의 시가지 방불하는 거류지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오늘날 부산 시내의 원형을 만들었다. ‘성신(誠信)의 교린’ 외교의 상징인 부산 왜관은 일본인 거류지로 승계되면서, 이제 일본의 조선 침략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