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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벳 여행관계로 아리 암각화 까지만 게재합니다.
나머지 무인지대인 아리지구와 창탕고원, 계산대판, 곤륜산맥 종단 등
카슈카르까지의 여행기는 http://blog.naver.com/taikim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해발4천300m 아리진(阿里鎭)에서의 지난밤은 편치 못했다.
뒤척이며 밤을 지새 다 새벽 6시30분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여명의 스췐허(獅泉河)
강변을 혼자 거닌다.
걸리적거림이나 얽매임, 구속이 없는 온전한 나만의 자유를 맘껏 누려본다.
새벽안개 속 강변길은 설레임으로 하루를 열고 있다.
세계의 오지 한가운데에 내 동댕이쳐진 채 나 홀로 맛보는 고독한 자유.
과거에도, 앞으로도 그 어느 곳에서도 맛 볼 수 없는 스췐허에서 만의 독특한
자유의 참 맛을 온 몸으로 느껴본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평생을 시간과 조직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밀리듯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자문 아닌 넋두리를 해본다.
이번 여행이 빈껍데기인 나를 버리고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여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면서....
여행은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자유이자 삶의 활력소이고 살아있는 독서다.
일상에 찌든 나에게 여행은 설레임과 모험심을 자극해 나를 새롭게 하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준다.
감각이 미친 유랑을 떠나 듯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눈길이 가고 귀, 코가 듣고 느끼는 대로....
방종에 가까운 자유는 여행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특권이다.
논어 옹야 편에 지지자 불여 호지자 호지자 불여 낙지자
(知之者 不如 好之者 好之者 不如 樂之者)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을 못 이기고 좋아하는 것이 즐기는 것을 못 이긴다는 말이다.
아무리 많이 알고 좋아해도 행하면서 즐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여행이 그렇다.
여행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여행을 배 부른자의 사치쯤으로 생각하거나 이것저것 재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실행에 못 옮기는 게 또한 여행인 것 같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독설가인 죠지 버나드 쇼는 묘비명에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라고 썼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평생 여행 한번 가기 힘들다.
카르페 디엠 ( Carpe Diem ), 지금 이순간을 즐겨라.
약간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앞 뒤 안 가리고 저지르는 약간의 무모함 또한 여행만이 갖는 묘미다.
오늘 일정은 이동거리가 1백km 남짓에 불과해 느지막한 10시에 출발 한다.
옆 동네 마을인 르투(日土)에서 하루 밤 자며 몸을 추스르고 내일 자치구 경계인
계산대판 고개를 넘어 신강위그루 지역으로 들어간다.
험지 초행길이라 스케줄 짜기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어제에 이어 오늘 일정도 너무 루즈한 것 같다.
티벳 식으로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볼 것도 없는 궁벽한 시골마을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까운 시간을 허송세월
하는 게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처음 가는 길인데다 열악한 잠자리와 식사환경을 고려하다보니 불가피한 측면도 있겠지만
시행착오가 너무 잦은 것 같다.
르투는 아리 암각화와 르투 사원, 판공쵸 호수로 이름나 있다.
티벳인 기사들도 암각화유적지의 정확한 위치를 몰라 물어물어 찾아 나선다.
벌거숭이산들이 사방에 솟아 있는 평원 같은 애매한 황무지 길을 두 시간 이상 달리는데도
암각화는 나타나지 않는다.
르투 현청소재지에 거의 다가서 로브(티벳인 기사)가 제법 큰 냇물이 흐르는 도로 옆 높은 암벽을
가리키며 차를 세운다.
산줄기 모퉁이 10여m의 북쪽 바위 절벽에 선사시대에 새겨진 희미한 암각화가 군데군데 그려져 있다.
그 옆으로는 최근에 새겨 넣은 듯한 6자 진언인 옴마니반메훔이 선명하게 보여
부자연스럽고 생뚱맞아 보인다.
아리 암각화 중에 대표 격으로 유명한 노일랑잡 암각화(盧日郞卡 岩刻畵)다.
땅바닥과 10여m 높이 절벽바위 면 사이에 끌 같은 뾰족한 것으로 쪼아 그린 것 같은
20여점의 암각화가 고루 분포되어 있다.
양, 사슴, 야크, 사냥개 등의 동물과 춤을 추는 사람, 말 타고 사냥하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눈에 들어온다.
아무런 보호막 없이 혹독한 기후환경에서 수많은 세월을 견뎌 낸 선사인 들의
그림을 마음속에 담아 둔다.
놀라운 것은 아리지구의 라일랑 암화유적지라는 비석과 안내 간판만 달랑 놓여있고
철책이나 보호관리 시설은 전혀 없다.
여기저기 근래에 새겨 넣은 것 같은 6자 진언과 낙서 같은 그림들이 널려 있다.
세계적으로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희귀한 유적이 훼손에 그대로 방치돼 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 진다.
아리지구는 7개 현 중 르투, 가이저, 거지, 자다 등 4개현에서 선사시대 암각화가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세계적인 암각화 군집지역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아리지구에서 자치구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 공포된 암각화는
모두 13곳으로 이중 르투(日土)현에만 11개가 몰려있다.
나머지 두 개는 가이저현과 거지현에 한 개 씩 있다.
르투 암각화는 티벳과 신강을 잇는 신장공로, 즉 옛 실크로드 근처인
판공쵸 주변 300㎢안에서 주로 발견된다.
아리지역 암각화는 대개 해발 4천200~4천800m 사이의 산골짜기와 강 유역,
선상지, 호숫가 근처 산의 바위에 그려져 있다.
특히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거칠고 황량한 고원지대일지라도 수렵을 할 수 있는
앞이 트이고 물이 가까운 곳에 새겨져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머지 암각화는 아쉽게도 위치를 몰라 들러보지를 못했다.
아리 암각화는 지역별로 제작방법이나 시대특징이 서로 다르다.
티벳 고원 선사인 들의 생활과 정신세계를 형상화한 그림으로
티벳민족의 기원과 인류문명 발달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리지구는 고원문명의 주요 발상지 중의 하나로 구석기시대 말기의 석기와 토기, 고대무덤들이
대규모로 발굴돼 이시기에 이미 인류가 살고 있었다.
아리 암각화가 세계적인 유명세를 탄 것은 이태리의 유명한 학자인
투치(1894~1983)교수가 그의 저서 ‘히말라야 횡단기’에서 티벳 아리지구의
암각화를 서방에 대대적으로 소개하면서 부터다.
티벳 암각화는 아리지구 외에 라싸와 나취, 시가체, 산난, 창두, 린즈지구에서
드물게 발견되고 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여러 갈래의 물줄기와 제법 큰 규모의 방죽들이 보인다.
마을을 지나고 고개를 넘으니 초록의 물가 풀밭에 몽골 게르 같은 천막 10여동이
서있는 유원지가 나온다.
개울 위로는 예쁜 다리가 놓여 있어 어느 호반공원에 온 느낌이다.
두세 가족이 잔디밭에 누워 담소를 하고 있고 인부 서너 명이 작업 중이다.
천막 안은 거실과 부엌, 침실 등 취사가 가능한 우리의 콘도처럼 잘 꾸며 놓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판공쵸 호수가 있어 물이 넘쳐날 정도로 흔하다.
물이 있는 곳에는 초록이 있고 생명체가 꿈틀거린다.
오랜만에 초록의 싱그러움에 취해 풀밭에 누워보기도 하고 흐르는 물에 얼굴을 적신다.
안쪽 샛길로 20여분을 달려 거의 폐허가 된 르투 사원을 오른다.
르투 사원은 판공쵸와 그 밑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직 벽에 가까운 바위산 꼭대기에 있다.
절 밑으로는 퇴락한 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을 돌아 뒤편 1차선의 좁고 가파른 자갈길을 90도로 꺽으며 지그재그로 오른다.
위험천만으로 아슬아슬한 게 손바닥에 땀이 난다.
사원은 형체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폐허의 흔적만 남아 있고
스님이 거주하는 법당만 가까스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절벽 사이사이의 건물과 벽, 계단의 잔해규모가 엄청나 당시의 사원이
얼마나 웅장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관리미비와 문화혁명의 미친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결과의 흔적이다.
찾는 이가 없는 오지의 폐사지만 복원공사를 시작했단다.
법당 쯤 되어 보이는 건물잔해가 널려있는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민둥산 사이로 푸른빛의 호수가 일부 보인다.
판공쵸 호수다.
판공쵸는 인도 국경을 가로질러 라다크까지 이어져 있다.
그 앞으로는 여기 저기 초록으로 물들여져 있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판공쵸에서 흘러내린 인삼뿌리 같은 강줄기 사이에 조그만 마을이 손바닥만 하게 보인다.
마치 예쁜 수를 놓은 듯 아름다운 풍경이다.
반대편인 법당 쪽으로 돌아서니 아담한 저수지가 무너진 불탑 옆으로 내려다보이고
그 밑 개울가 옆 도로 변에는 흰색의 대형 스투파(불탑)들이 나란히 서 있다.
무너진 건물 창문 너머로 만년설을 머리에 인 산 봉오리가 보이고
절벽 바로 밑 마을이 아늑하게 내려다보인다.
이풍경 또한 여러 갈래의 물줄기와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르투 사원은 중국에 점령당하기 전까지 이 지역을 관리하는 행정관서 역할도 함께 했다.
라싸 세라사원서 파견된 승관(僧官)이 르투사원 라짱(拉章)에 주재하면서
지방정부의 속관과 함께 이 지역을 다스렸다.
아리지구는 기존 지방정부와 세라, 타쉬륀포 등 대형사원들이 나누어 함께 통치했다.
티벳은 달라이 라마가 다스리는 신정국가로 중앙정부는 물론 전국의 지방정부에서 승려들의
정치, 행정참여는 당연한 일이었다.
르투현은 아리지구의 최 서북단 신강성과 접해있는 오지로 1961년
현 설립 당시는 신강위그루 자치구 관할이었다.
1978년 티벳자치구로 편입되면서 아리지구 관할로 바뀐다.
르투는 실크로드의 주요 교역, 군사요충지로 수많은 전쟁에 시달린 취약지구였다.
르투라는 지명도 자주 겪은 전쟁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티벳어로 르(日)는 구식총기의 받침대, 투(土)는 윗부분이라는 의미로
‘총기 받침대의 윗부분’을 뜻한다고.
르투라는 지명이 이곳의 산 모양에서 따왔다는 다른 얘기도 들린다.
한낮에 도착한 르투는 계획된 신도시로 티벳다움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도로, 건물, 집 등 도시전체가 번듯하지만 국적불명의 어정쩡한 도시 모습이다.
현청소재지로서 한족관리들이 많아 그런지 음식 맛이 괜찮고 서비스도 비교적 좋다.
루트는 워낙 궁벽한 변방이어서 숙소사전예약이 불가능해 이리저리 찾아 헤메다가
군인초대소 한군데를 간신히 잡았다.
초대소는 스위트룸 형태로 시설은 최고급이나 너무 낡은데다 관리가 엉망이다.
화장실은 물이 안내려가고 화장대 유리는 깨져 없고 집기들도 성한 데가 없다.
방마다 크기 등 시설이 다른 것을 보니 공산당원이나 군인, 관리들이 직급별로
차별해 숙박을 했던 것 같다.
일행 중 일부가 시설이 괜찮은 다른 초대소를 찾아 옮겼는데 경찰이
위수지역(신고지역)을 이탈했다며 원위치를 요구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르투는 변경지역이어서 외국인들은 신고한 장소 외에서는 숙박을 할 수 없단다.
우리와 2주 가까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티벳인 기사들도 심성은 착하고 순박한데
손님에 대한 서비스는 개념이 없다.
자기들 멋대로 편한 대로 행동을 해 우리도 불편하지만 가이드가 마음고생이 큰 것 같다.
공산주의의 비효율, 비생산적인 관료적 잔재가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모습이다.
첫댓글 좋은사진자료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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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글,사진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