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시대를 함께 진단하라
– 신경쇠약 시대와 천왕보심단 -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식민지 시대인 1930년대의 작품이다. 주인공인 소설가 구보는 어느 날 특별한 목적 없이 서울 거리를 배회한다. 천변, 다방, 백화점, 버스, 대합실 등은 그의 의식이 흘러가는 무대가 되며, 거기서 구보는 관객 없는 객석을 향해 자아분열적인 독백을 내뱉는다. 어디를 갈까 생각해보다가 그가 갈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그는 이를 신경쇠약이 틀림없다고 스스로 단언한다. 식민지 치하의 파행적 근대 안에서 길을 찾을 수 없었던 당시 지식인의 우울한 고뇌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구보의 배회 혹은 방황을 해방 후의 전환기, 심지어 지금의 서울이라는 무대 위로 옮겨 놓아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정치적 민주화도 확보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길을 잃고 불안해하면서 신경쇠약 증세를 호소한다. 시대적인 사태가 개인의 안위를 위협하는 상황이 종료되면 미시적인 사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다고 개인이 느끼는 번뇌의 크기는 그렇게 줄어들지 않는다. 알랭드 보통은 과거와 지금의 경제 사정을 비유하면서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알랭 드 보통, 정영목 옮김, 『불안』, 이레, 56쪽)고 지적했다. 신경쇠약 역시 시대적인 상황이 좋아진다 해도 발병률이 더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어떤 병리적 현상이 시대에 관계없이 발생된다면 시대적인 특수성으로만 병리를 분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더 중요한 점은 그의 신체가 반응하는 개체적 특이성이다. 즉, 어떤 시대이건 그 신체의 습성이 병리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의 구보이건, 88만원 세대의 구보이건, 그가 앓는 신경쇠약의 병인은 시대가 주는 영향력과 함께 시절 인연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더 긴밀하게 찾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구보의 분열증적인 욕망과 파편화된 의식은 오늘날 우리의 습성과 닮아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지역을 넘어 그리스 시대에도 통한다. 미셀 푸코는 그리스로마 철학자인 세네카의 글을 통해, 동시에 여러 가지를 욕망하며 금방 후회하는 사람을 ‘스툴투스(stultus)’라 부르며 이들을 자기배려가 없는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 구보는 하루 동안 많은 욕망과 의식의 전변을 겪는다. 벗을 만나고 싶었다가, 어떤 사내의 재력을 탐내보기도 하고, 스스로를 의심을 하고, 죄악을 느끼기도 하며, 기쁨을 찾아 길을 나서기도 하고, 성욕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에도 일상에서 수많은 욕망과 좌절, 후회가 파도를 치며 일렁거린다. 이때 욕망을 이루지 못한 책임을 시대에 떠넘기는 것으로 병리를 마감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욕망의 성취가 아니라 욕망이 일어나는 방법 혹은 패턴에 있다. 어떠한 조건에 있든지, 이런 식으로 욕망을 부산하게 사용하고 망상적인 의식에 일상을 맡겨버리는 것이 바로 병리가 된다.
시선이 가 닿는 곳마다 욕망이 피어오르고 불필요한 의식을 소모해버리면 정(精)의 소모가 많아진다. 한의학적으로 정을 저장하는 장부는 신장이다. 정이 고갈되면 신장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구보의 경우처럼, 요의빈수(尿意頻數)와 만성 위확장이 나타날 수도 있다. 신경쇠약 역시 신장과 관련이 있다. 신장의 음정(陰精)이 고갈되면 상대적으로 양기운이 치솟는다. 물과 화합하지 못한 남은 화기(火氣. 相火)는 심장의 안정성을 떨어뜨리고 정신활동(심은 정신활동을 주관한다)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구보에게 나타나는 불면과 현기증, 두통 등의 증상도 이런 이치로 인해 동반된다. 이밖에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꿈이 많으며, 유정이 생기고, 손과 발바닥에 열이 나고, 무릎과 허리가 시리고 아픈 증상이 함께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심신불교(心腎不交)’라 부른다. 즉 심장과 신장이 서로 교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과한 욕망으로 의식을 소모하면 신장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래도 괜찮지 않아!
이때는 ‘천왕보심단(天王補心丹)’이라는 방제를 쓴다. 이 방제의 군약(君藥)은 생지황이다. 생지황은 차갑고 물이 많아서 진액을 보충하고 열을 끄는 역할을 한다. 신약(臣藥)도 생지황을 도와 음을 보충하고 화기를 제어하는데, 현삼, 맥문동, 천문동으로 구성된다. 특히 현삼은 상화(相火)를 잘 꺼준다. 상화는 수(水)와 교류하지 못하는 잉여의 화기(火氣)로 여기서는 신음(腎陰)의 부족함으로 인해 남는 양기(화기)로서 존재하며 위로 올라가 심장을 교란시키는 작용을 한다. 현삼은 이런 화기를 잘 제어한다. 군약이 현삼이 아니라 생지황인 이유는 화기의 제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음의 확보라는 의도에서다. 상화가 음의 부족으로 인해 생겼으므로 상화를 끄는 일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음(진액)을 확보하는 일일 것이다. 여기에 인삼, 당귀, 단삼이 들어간다. 기와 혈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음정(진액)의 소모는 그로부터 화생되는 기혈의 부족을 초래한다. 따라서 진액이 보충과 함께 기와 혈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당귀와 단삼은 보혈하면서 인삼은 기를 생산해 낸다. 그리고 심장을 안정시키는 역할도 한다. 본격적으로 심장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약물은 산조인, 원지, 백자인, 주사, 복령, 오미자 등이다. 상화의 망동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잠이 잘 오지 않으며 정신이 산만하고 피로한 신경쇠약의 증상에 잘 어울리는 본초들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적을 모르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진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배한다.”
- 손자, 손영달 풀어읽음 『낭송 손자병법/오자병법』 39쪽
적을 알고 나를 안다는 것은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 모두를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내적인 요인이란 병을 일으키는 습성이고, 외적인 요인은 시대와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정신적인 혼란과 방황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동안 너무 시대적인 병인론으로만 해석해온 경향이 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요인인 개인의 습성을 배제한 채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면 오치(誤治)의 가능성이 높다. 시대의 병리를 읽는 일은 개인의 습성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지키고 다스리는 힘을 잃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제도가 바뀌어도 삶의 태도가 여전하다면 어떠한 조건에서도 병리는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한 건강한 저항과는 별개로, 제도에 덫 씌웠던 책임을 찾아와야 한다. 〈대학(大學)〉에서 치국이나 평천하에 이르기 전에 수신(修身)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수신, 나를 아는 것이 먼저 필요할 수도..
글_도담(안도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