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2025) 안전산행기원 시산제
보림사주차장에 가지산 등산안내도가 있습니다.
보림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의 선문인 가지산문을 연 유서깊은 절입니다.
<가지산>
높이 510m이다. 산세가 좋고 돌을 깎아 세운 듯한 정상에 큰 바위 4개가 높이 솟아 있다. 꼭대기에 큰 니바우(바위 넷)가 높이 솟아 있어 니바우산이라고 부른다.
달마(達磨)의 선법(禪法)을 처음 전한 통일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보림사(寶林寺)가 있다. 보림사는 9산문(九山門:선법의 절을 뜻함)의 하나이다. 고려 말기 9산문이 모두 그 기운을 다하여 퇴락하였는데, 이 산문의 태고화상(太古和尙)이 왕사(王師)로 1356년(공민왕 5)에 구산문을 통합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그 후 문풍(門風)을 전하였다고 한다. 사찰 내에는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남쪽으로 탐진강을 막아 장흥댐이 건설되어 있다. [출처]가지산 [迦智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김삿갓의 시비 과보림사 김삿갓리 다녀간 기록이네요. 그리고 함평 용천사에도..
김삿갓이 보림사를 지나며 쓴 시비
정상부의 거대암봉
<보림사>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체징이 창건한 사찰.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으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은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시켰다.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다. 그러나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였던 이 절에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이었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방으로 만들고,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하였는데,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이다. 이후 주민들은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출처] 보림사 [寶林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가지산 보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입니다.
신라시대 창건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이었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습니다.
《산문》
《일주문》
《사천왕상 , 보물 제 1254호》
서기 759년 경, 원표대사가 이곳에 절을 세워 가지사라 하고 이후 도의선사와 염거선사를 거쳐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어받은 보조선사 체징에 의하여 '보림사'라는 이름으로 재창건 되었습니다ㆍ
《남ㆍ 북 삼층석탑, 국보 제44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제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조성기》
《대적광전의 신중탱화》
《매화보살 불화》
보조선사는 김씨로서 충남 공주 사람인데 860년경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가지산에 들어와 대찰을 창건하고 선종(禪宗) 도입으로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가지산문의 중심사찰로 발전하였습니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