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시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내 나고 처음으로 제주도 가는날 남편과 함께지만 큰 기대는 않고 그냥 일상을 벗어난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났다.
왜냐면 남편은 여러번 가본곳이고 코레일에서 주관하는 단체여행에 참가했고 또 산악회 회원 20여명이 함께 간단다.
둘이 오붓이 가는날을 옛날엔 늘 기대했었지만 나와 남편 사이는 살수록 늘 그사람의 일방통행 이런식이다.
익산역에서 7시15분 KTX에 오르니 우리 칸이 아닌곳으로 남편이 간다.
따라가니 먼저 타고 온 일행들이 남편에게 농담을 하고 반기는 체를 한다고 난리다.
"와이프야" 한마디로 소개라고 인사하란다. 가벼운 미소와 목례를 하고 나니 남편은 우리자리에 가 있으란다.
우리자리에 이미 다른 남자가 짐과 함께 앉아 있어 확인하고 있는데 이내 남편이 왔다.
좌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다 상무대라는 글자를 보며 잠시 옛날 생각에 젖는다.
형편이 어려워 붙은 대학도 못가고 간호학원 다니다 입시철이 되니 몸살이 나서 못견뎌 가까운 사람에게 학원비를 빌려 서면 입시학원 등록을해 낮에는 병원서 간호실습 나가 일하고 밤엔 학원 다닌다고 오로지 대학이란 델 가고픈 마음밖에 없는 내게 몇몇 남자애들이 접근해 왔다.
하나는 우리 또래의 젖비린내 나는 남자 재수생이었는데 그당시는 세상이 왜그리 삐뚤게 보였던지 모든것이 못마땅 하던터라 사귀자고 추근대는 이 남자애에게 이담에 저승문 앞에서나 만나자고 똑 부러지게 말했더니 그담부턴 내근처엔 얼씬도 안했다.
또 한명은 그당시 군대도 갔다오고 직장생활도 하는 나보다 너댓살 많은 남자였는데 늘 웃고 좋아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능글맞고 징그럽던지 한동안 택택거리다 입시시험을 보고 그 다음부턴 본적이 없다.
연산동 이모집에서 통학하고 다녔는데 학교 다니면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 함부로 이모집 전화도 알려줄수 없었고 이름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름이 이상무였다.
남편옆에 가만히 앉아 그생각을 떠올리며 그때 그런 남자랑 이루어졌더라면 내 삶은 더 아기자기하고 알콩달콩 재미났을텐데 그때는 그런 남자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로지 대학도 가야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그생각밖에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까시락지게 군 그때의 사람들께 미안하기도 하고 혹시나 죽어 저승문 앞에 얼굴도 모르는 그때의 남학생이 나를 기다리면 어떡할까 덜컥 겁이 날때도 있다.
그래서 자나깨나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조심이라니까 또 생각이 나는게 김해 의료기 체험실 처음 오픈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올케언니가 사무실에 온다고 왔는데 하필 그 시간에 직원 하나가 자기 올케 얘길하면서 별 감정있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귀여운 손아래 올케를 "올케년이" 하는데 우리 올케언니가 사무실에 들어 왔다.
얼마나 무안턴지 지금도 그 무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
누가 보든 안보든 항상 고운 말을 쓰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야길 하면서 바깥을 보니 어느듯 유달산이 보인다.
20년도 전에 남편과 같은 회사 다닐때 유달산에 내친구랑 유달산 와서 떨리는 가슴으로 전화 통화하던 생각이 난다고 했더니 그때가 좋았는데라고 한다.
또 설악산에 친구들이랑 등산 가서 까만 계란 같이 생긴 돌맹이에 날짜를 새겨 기념품으로 선물 해줬는데 결혼해 보니 그것을 고이 간직하고 있어 김해 살던집에 있다고 했더니 챙겨오라고 한다.
목포역에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목포항으로 갔다.
듣기만 했던 크루즈선! 스타크루즈, 어마무지하게 큰 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오르는데만도 꽤 시간이 걸렸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 돗대기 시장이 따로 없었다.
방 배정을 받고보니 한방에 인원이 삼십명 가량 되었다.
비좁은 바닥에 베낭을 내려 놓고 남편의 대전 산악회 팀들이 준비해온 산낙지도 먹고 따끈따끈한 백반에 묵은지랑 김이랑 식사를 하는데 아침인지 점심인지 분간도 안가고 젓가락이 없어 불편함이 그지없었다.
그런 식사를 마치고 갑판 위에 올라가 사진도 찍고 찬바람도 쐬었지만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큰배는 안 흔들릴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멀미 날 땐 이온음료가 좋다던 아들 말이 생각나 매점에 가서 2%를 사고 안내원에게 물어봤다. 진짜 효과 있냐고 그랬더니 조금은 있다고 했다.
이 배안에선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으니 지금 너울 파도가 쳐서 좀 힘들텐데 선실에 들어 가지 말고 갑판 뒷쪽은 엔진소리도 시끄럽고 흔들림이 심하니 앞쪽으로 가란다. 그리고 머리는 숙이지 말고 들고 있어라는 말까지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바람이 세찬 갑판 한모퉁이에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으니 훨씬 멀미가 가라앉아 춥기도 해 선실로 들어가려니 냄새가 또 멀미를 나게 해 되돌아와 다시 앉았다.
근 다섯시간 동안 배를 탔고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은 별 눈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게 힘들었다.
그중에 잠깐 바라 본 선체에 부딪히는 물살이 만들어내는 파도가 엄청 하얀색이었다는 기억이 나는걸 보니 물이 참 맑았던가 보다.
제주항에 도착하니 우리를 기다리는 관광버스가 대기해 있고 개인이 운영하는 선녀와 나뭇꾼이라는 우리나라 6~70년대 생활상을 아기자기한 지점토로 정스럽게 만들어 놓은 모형들과 원티드 같은 신나는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오고 암튼 한눈에 그때를 알수 있도록 정겹게 잘 꾸며져 있었다.
시간이 되어 차에 올랐는데 두사람이 20여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오십대로 보이는 시누이와 올케가 함께 왔는데 옛날이야기 하다가 까마득히 시간가는 줄 몰랐단다. 벌칙으로 아이스크림 하나씩 돌리라고 가이드가 애교있게 입안에 군침돌게는 해줬지만 그 둘은 끝끝내 아이스크림은 사지 않는 쫌생이 들이었다.
근 사십여명의 시간을 20여분씩 훔쳐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염치도 없는 얌체 아줌마들 나는 안저러고 살아야지 했더니 남편은 알뜰한 살림꾼들이라 그런가 보다고 했다. 은근히 나를 씀씀이가 헤픈 여인네 취급하는것 같아 장사하거나 돈 버는 사람의 쓰임새와 살림만 하는 사람과는 다르다고 말해줬다.
두번째 간 곳은 승마체험 함양에서 말을 타 봐서 그런지 남편이 있어 든든해서 그런지 편안하게 사진도 찍고 말타기도 잘했다.
다만 어린 말들이 일하는 엄마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모습들이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안되어 보였다.
그 다음은 한라생태 숲을 돌아 보았다.
구상나무 단지와 하얀 잎이 네가닥이 나 있어 꽃도 아니면서 벌나비를 유혹하는 산딸나무, 잎이 병아리 눈물만큼 작은것들이 꽝꽝 다져진 모습의 꽝꽝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벚나무 그 중에서도 산딸나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알프스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하러 내려갔더니 음식이 너무 아니다.
같이 온 일행중 네명들에게 연락해보니 이미 시장에 회 뜨러 갔단다. 우리도 택시를 타고 동문시장에 가서 합류하여 동해횟집이란 곳을 찿아갔다.
5월에 오픈한 집이라고 입구에 현수막이 걸려 있어 그집을 찿아갔는데 두 부부가 너무 순박해 보이는 인상에 경상도 경주 사람들이었다. 제주서 13년동안 텃세 때문에 무지 고생했단다.
이제 조금 자리가 잡혀 간다고 수도없이 발전하라고 위하여를 외치고 맛나게 회를 잘 먹고 기념 촬영도 하고 2차로 노래방에서 1시간 이상을 놀다가 남편과 일행 한명이 적당히 취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출출한 남편 뱃속을 채우려 국수의 거리에서 남편만 한그릇하고 숙소로 돌아와 제주도의 첫째날 밤이 깊어 갔고 편안한 숙면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