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2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나오는 이성계의 고향 和寧화령
위키백과에 화령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전부 개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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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D%99%94%EB%A0%B9
화령
화령(和寧)은 함경남도 영흥의 옛 이름이며 조선 왕조를 수립한 이성계의 출생지이다.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수립한 이성계가 명나라에게 제시한 두 가지 국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역사
삼국 시대에 고구려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955년(고려 광종 6년) 요새가 건설되었으며 995년(고려 성종 15년) 화주(和州)로 개칭하였다. 1258년(고려 고종 45년) 원나라에 점령되면서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4년)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함락한 이후에 화주목(和州牧)이 설치되었고 1369년 화령부(和寧府)로 개칭하였다.
국명 선택
1392년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수립한 이성계는 새로운 국명을 정하기 위해 예문관 학사 한상질을 명나라로 파견했다.(음력 11월)[1 ] 이성계는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가운데 하나를 새로운 국명으로 채택해 줄 것을 요청했다. 1393년 2월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동이(東夷)의 이름은 오직 조선(朝鮮)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름다우며 그것이 오래된 이름이니 이 명칭을 근본으로 삼아라. 하늘의 뜻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 후세에 번영토록 하여라.(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는 자문(咨文)을 전달했다.[2 ] 이로써 조선은 새로운 국명으로 채택되었으며 화령은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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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년 만들어진 강리도에 보면 和寧화령이 투르판으로 기록되어 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c/%ED%98%BC%EC%9D%BC%EA%B0%95%EB%A6%AC%EC%97%AD%EB%8C%80%EA%B5%AD%EB%8F%84%EC%A7%80%EB%8F%84_%28%EA%B7%9C%EC%9E%A5%EA%B0%81_%EC%86%8C%EC%9E%A5%EB%B3%B8%29.jpg
강리도에 나오는 함경남도 원산만 영흥과 함흥
강리도에 나오는 천산 오른쪽의 투르판에 있는 화령, 천산너머 카자흐스탄에 있는 唐당, 신라, 철륵,
1402년 태종 2년 조선의 왕 태종 이방원과 고관대작들, 그리고 대학자들의 지리인식에는 지금 한반도 함경남도 영흥에는 화령이 없다. 천산 옆 투르판이 화령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천산너머 카자흐스탄에 당과 신라 철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369년 화령부(和寧府)로 개칭하였다.”는데 1402년이면 33년이 지난 시점인데, 실록과 역사서에 이성계의 고향 화령을 영흥으로 고쳤다는 기록은 왜 없을까?(안고쳤으니까 기록이 없는 것이고, 화령은 처음부터 투르판에 그대로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역대적으로 문과와 무과들 동시에 급제했던 총명하기 그지없는 이방원이가 아버지 이성계의 고향이고 자기가 나고 자란 화령이 어딘지 몰라서 투르판에 갖다두고 좋아했다면 정말 웃기는 이야기가 아닌가? 조선의 왕 태종 이방원과 고관대작과 대학자들이 인정한 강리도가 잘못되었다고 망발하기 없기다.
그렇다면 이방원이 보낸 이성계의 함흥차사가 함경남도 함흥으로 간 것이 아니라 투르판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역사학자가 아닌 내 눈에도 和寧화령이 보이구마, 박사학위를 가진 역사학 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눈에는 먹물이 다 증발했나 왜 강리도에 和寧화령이 안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