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사 이여송(處士 李汝松)
[생졸년] 1654년(효종 5)~1731년(영조 7) / 壽 77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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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 이공 묘지명(處士李公墓誌銘)
나는 외진 곳에 살아 견문이 부족하지만 사방의 어진 선비들을 수집하기를 좋아하여 듣는 대로 기록하였는데, 용인(龍仁) 지방에서 이 처사(李處士) 한 사람을 얻었다. 이후 화를 당해 집을 떠나 선영 아래에 우거할 적에 이 처사의 집과 30리 거리로 가까이 살았는데, 이때 이 처사가 옛 것을 좋아하여 독실히 행하는 군자임을 알고서 이전에 들은 말이 헛소문이 아님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
공의 휘는 여송(汝松), 자는 교년(喬年)으로, 전의(全義)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고려에서 태사를 지낸 도(棹)이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구직(丘直)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지냈고, 그 후로 관작을 지닌 이가 많았다. 고조 휘 충가(忠可)는 군수를 지냈다.
증조 휘 언념(言恬)은 선교랑을 지냈는데, 광해군(光海君)이 모후(母后)를 폐위하려 할 적에 홍무적(洪茂績)의 상소에 이름을 올리고는 용인 들판에서 유유자적하였으니 자손이 그대로 이 지방에 살았다. 조부 휘 정선(廷選)은 승사랑을 지냈다.
젊은 시절 연양(延陽) 이시백(李時白) 공과 같은 마을에서 자라며 친하게 지냈는데, 계해년(癸亥年,1632,인조 10)에 이공이 반정(反正)의 일로 찾아와 공에게 넌지시 말했으나 공은 사양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부친의 휘는 지인(志仁)이고, 모친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상안(尙顔)의 딸이다.
공이 겨우 네 살 때에 한번은 모부인에게 꾸지람을 들었는데 공의 대답이 공손하지 못해 부친이 종아리를 치면서 경계하니,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고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여섯 살에 부친을 잃고서 어른처럼 슬퍼하였다. 조금 자라서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1628
~1692) 상국에게 수학하였다.
노봉이 우계(牛溪,성혼) 선생이 찬집한《위학지방(爲學之方)》을 주자, 공이 공경히 받들어 읽으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온 힘을 기울였다. 노봉이 세상을 떠나자 1년 동안 심상(心喪)을 입었다. 노봉의 아들과 조카가 연이어 경상(卿相)이 되었으나 공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모부인을 섬김에 있어서는 밤새도록 곁에서 화순한 모습으로 모시고 잠시도 떠난 적이 없었으며,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 자신은 솔잎을 먹으면서도 모친이 좋아하는 음식을 빠뜨리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공이 이미 연로하였지만 상복을 벗지 않고 소식(素食)하면서 3년을 마쳤다.
공은 매일 새벽에 반드시 사당에 알현하고 물러나 방에 앉아 경전을 읽었다.《주자대전(朱子大全)》과《이정전서(二程全書)》에 가장 힘을 기울였는데, 모든 견해는 강학과 토론에 의지하지 않고 대부분 마음에서 터득하였다. 평소에 청(淸)나라 물건을 가까이하지 않아 크게는 서책과 작게는 관모(冠帽) 따위도 모두 접하지 않았으며, 또 자신이 죽은 뒤에 청나라 비단을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
매년 달력에 개인적으로 명(明)나라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정월(正月)을 초월(初月)이라 개칭하여 말하기를,
“왕정(王正)의 뜻을 어찌 오늘에 취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정에서 한번은 청나라에 구휼미를 요청하여 그 쌀이 와서 원근에 두루 퍼졌는데, 공은 받으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의리상 먹을 수 없다.”
하였으니, 그 강개함이 이러하였다.
포은(圃隱,정몽주) 선생의 무덤에 오랫동안 신도비가 없어 공의 백부 지유(志儒)가 우암(尤庵) 선생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미처 비석을 새기기 전에 백부가 화를 당하여 일이 중지되었는데, 갑술년(甲戌年,1694, 숙종 20)에 이르러 공이 원임(院任)으로서 끝내 완성하였다.
일찍이 포은 선생의 서원(書院)에〈백록동규(白鹿洞規)〉를 게시하여 그 대의(大義)를 거듭 밝히고 인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익혔다. 또 마을의 장로들과 함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여 오륜(五倫)이 있음을 백성에게 알게 하였으니, 공의 몸은 비록 초야에 있었으나 교화가 또한 고을 전체에 점차 행해졌다.
현사(賢邪,현명과 간사함)의 구분에 더욱 엄격하고 시비(是非)를 밝게 분별하여 조금도 회피하지 않았기에 위험한 말이 자주 입에서 나와 큰 화를 당할 뻔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공은 노년에 곤궁하여 굶주렸으나 근심스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얼굴빛이 붉고 윤택하였다. 신해년(1731, 영조7) 5월 22일에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은 타고난 품성이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며 풍모가 굳세고 깨끗하였다. 마음씀과 일처리가 한결같이 곧아 항상 말하기를,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권도(權道)를 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학문은 깊이 연구하고 실천하여 스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남이 알까 두려운 듯이 문을 닫고 교유를 끊었다. 비록 은거 생활을 즐거워하였으나군민(君民)의 뜻을 차마 잊지 못했으니, 치도(治道)를 논해서는 “인재를 얻음이 요체이다.”라고 하였고, 잘못된 병농(兵農)의 제도를 한탄하여 “옛 도를 다시 행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병자년(丙子年,1636)과 정축년(丁丑年,1637) 이후 세월이 점차 흐르자 인심(人心)이 안일에 빠져 사대부들이 수치를 무릅쓰고 청나라의 금, 비단, 구슬, 옥 사이로 달려갔지만 공은 홀로‘함원인통(含寃忍痛)’네 글자를 이마 위에 걸어두었으니, 시속(時俗)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은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만일 우암 선생이 보았다면 가상하게 여기고 칭찬함이 어떠하였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드러내어 밝혀 쇠퇴한 풍속을 진작시키는 바이다.
공은 고을 동쪽 운주산(雲住山) 선영 간좌(艮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위 평양 조씨(平陽趙氏)는 공보다 8년 뒤에 세상을 떠나 합장하였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각(), 육(㻙), 숙(琡), 위(瑋), 원(瑗)이다. 손자는 경천(敬天), 경성(敬聖), 경행(敬行), 경현(敬賢)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옛날의 이른바한 고을의 선사가 / 古所謂一鄕之善士
바로 공의 짝이요. / 是公儔耶
옛날의 이른바천하의 고사가 / 天下之高士
공이 그러한 부류로다. / 子其流耶
장차 후세에 알아 줄 자를 기다려 / 且以俟夫後世之知者
우선 무덤에 기록하노라. / 姑識諸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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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처사 이공 묘지:
이 글은 이여송(李汝松, 1654~1731)의 묘지이다. 이여송의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교년(喬年)이다.
[주02] 왕정(王正):
《춘추》에 통용된 연대 표기 방식으로, 공자(孔子)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의(大義)를 명시하기 위하여 노(魯)나라 각 공후들
이 바뀌어 새로 시작할 때마다 ‘어느 해 봄 주(周)나라 왕이 쓰는 정월’이라는 뜻의 ‘춘왕정월(春王正月)’ 네 자를 기록하였다.
[주03] 군민(君民)의 뜻: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과 요순 때의 백성처럼 태평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 뜻을 말한다. 이윤(伊尹)이 상탕(商湯)의 초빙을 세 차례
나 받고 나서 “내가 밭두둑 사이에서 이대로 요순의 도를 즐김이 어찌 이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과 같은 성군을 만드는 것만 하겠으
며, 어찌 이 백성들로 하여금 요순 때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만 하겠으며, 내 어찌 그런 시대를 내 몸으로 직접 보는 것만 하겠는
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孟子 萬章上》
[주04] 함원인통(含寃忍痛):
“원한을 품고 아픔을 참는다.”는 뜻으로, 주희(朱熹)의〈여진시랑서(與陳侍郞書)〉에 나오는 말이다. 송(宋)나라가 금(金)나라
의 침략을 받아 양자강(揚子江) 이남으로 쫓겨난 것에 대하여 “아픔을 참고 원한을 품으며 절박하여 어쩔 수 없이 한다.[忍痛含寃,
迫不得已.]”라고 하였다.《晦庵集 卷24》
[주05] 한 고을의 선사:
《맹자》〈만장 하(萬章下)〉에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라야 이에 한 고을의 훌륭한 선비를 벗할 수 있다.[一鄕之善士 斯友一鄕之
善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6] 천하의 고사:
전국(戰國)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을 가리킨다. 위(魏)나라 안이왕(安釐王)이 천하에 고사를 자순(子順)
에게 묻자, “세상에 그러한 사람은 없으나 그다음이 될 만한 자는 노중련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노중련이 무도한 진(秦)나라를 황제로 받들려는 위(魏)나라 신원연(新垣衍)에게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가 되어 천하를 다스린다
면 나는 동해에 빠져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史記 卷83 魯仲連列傳》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