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집 제16권 / 비갈(碑碣)
장례원 사의 이공의 묘갈(掌隷院司議李公墓碣)
명가(名家)의 자제가 작위가 비록 높지 않더라도 절조(節操)는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는 것은 전해 받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망우(亡友) 한산(韓山) 이창원 길보(李昌源吉甫) 역시 그런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산 이씨는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선생으로부터 이 세상에 크게 드러났다. 대대로 고관대작이 이어졌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분으로는 목은공으로부터 4대를 내려와 휘 훈(塤)이란 분이 있어 의정부 좌참찬을 지냈다.
또 5대를 전해 내려와 휘 유청(惟淸)이란 분이 있어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으며, 9대를 전해 내려와 휘 덕형(德泂)이란 분이 있어 의정부 우찬성을 지내어 모두 상부(相府)에 있었다. 찬성공은 세상에서 어진 재상이라고 칭하며, 계해년(1623, 인조1)의 반정(反正) 때 큰 절개가 더욱 드러났다. 공은 그분의 큰아들이다. 어머니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예조 참판 신담(申湛)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 8월 18일에 태어났다. 26세 때 음보(蔭補)로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에 제수되었다. 그 뒤에 의영고(義盈庫)와 전생서(典牲署)의 주부(主簿), 금부 도사(禁府都事),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제수되었으며, 외직으로는 과천(果川)ㆍ양덕(陽德)ㆍ태천(泰川)ㆍ안협(安峽)ㆍ지례(知禮)ㆍ예산(禮山)ㆍ양성(陽城)ㆍ덕산(德山)ㆍ당진(唐津) 아홉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이상이 공의 이력(履歷)이다. 갑오년(1654, 효종5) 11월 15일에 졸하였는데, 수는 67세였다.
전부인은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의 딸이고, 후부인은 현감 원종식(元宗植)의 딸이다. 원씨는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선경(先慶)은 진사이고, 차남은 장경(長慶)이며, 측실 아들은 신경(愼慶)이다. 장녀는 좌랑 강욱(姜頊)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 강문수(姜文粹)에게 시집갔다.
선경은 2녀를 두었고, 장경은 2녀 1남을 두었다. 강욱은 2남을 두었는데, 석빈(碩賓)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으로 있고, 석신(碩臣)은 진사이다. 강문수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사인(士人) 이성(李煋)에게 시집갔다. 공은 천성이 순후하고 근실하였으며, 내행(內行)이 독실하고 두터웠다. 후모(後母)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들었으며, 숙모(叔母)가 전염병에 걸리자 약을 올려 드렸으나 끝내 죽고 말았는데,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직접 염빈(斂殯)을 하니, 들은 자들이 어려운 일을 했다고 하였다.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청렴결백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고을을 맡아 다스렸는데도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매번 고을을 맡을 때마다 찬성공께서 반드시 계칙(戒勅)하였는바, 비단 공의 절조가 그렇게 만든 것일 뿐만이 아니라, 역시 가정에서의 가르침이 있어서였던 것이다.
공은 젊어서 김자점(金自點)과 더불어 알고 지냈으나, 김자점이 귀하게 되어 행실이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는 교유를 끊은 채 통하지 않았다. 장상 유(張相維)와 이상 시백(李相時白)과는 포의(布衣) 때부터 경상(卿相)에 이를 때까지 서로 공경하는 예를 변치 않았는바, 추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분주하게 오가면서 승진하기를 도모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고요하게 지내는 것을 편하게 여겼는데, 항상 금(琴)을 타면서 스스로 즐겼다. 또 역수(易數)에 정통하여 자못 미래의 일을 알았다.
연천(漣川)의 화진동(禾津洞)에 있는 갑좌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공을 장사 지냈다. 원씨 부인은 병신년(1656, 효종7)에 졸하여 부장(祔葬)하였는데, 내가 그 부인의 부덕(婦德)에 대해서는 진작 들었다. 사위인 강욱은 나의 아내의 동생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 명 지어 달라 청하는 것은 / 請銘于我
내가 공에 대하여 잘 알아서이네 / 我知公之故
오른 지위 덕에 차지 못하였거니 / 位不滿德
아아 몹시 슬프구나 우리 길보여 / 嗚呼吉甫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