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의 정: 공감에서 연대의 정으로
2023.12.17.(대림절제3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18/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19/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 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마태 14:14-19)
들어가는 말
예수님이 가지신 연대의 정(compassion, 불쌍히 여기시고, 14)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아니, 연대의 정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던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가 인간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다면,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활동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 점에서 요한과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여전히 죄인인 인간에게 연대의 정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들과 ‘공감’(sympathy)하는 예수님을 본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그들과 함께 있는 것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고 그들과 공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시각장애인이 되지 않는 한 어떻게 시각장애인과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체장애인이 아닌 한 어떻게 지체장애인과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병든 사람들과 같은 병에 걸려 보지 않는 한 그들과 ‘같은 감각적 체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자전거를 타다가 고관절 바로 아래 대퇴골이 부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수술하기까지 이틀 동안 순간순간 밀려왔던 고통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경험하지 않은 고통에 공감할 수 없음을 압니다.
공감(sympathy)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예언자들을 통해 ‘내가 너희에게 공감한다’고 말하면서 하늘에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들과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자신처럼 온전해 지도록 했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자기를 찾아온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들에게 ‘공감’만을 표한 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은 여전히 하늘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일으킨 현상을 보고 기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을 보고 존경심과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이나 혹은 마술사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그리스도)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기적’을 예수의 메시아 됨을 증거 하는 ‘능력’으로 여기며 읽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일으킨 동인(動因)은 떠올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왜 기적을 일으킨 것일까요? 기적의 동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늘에 머물도록 할뿐입니다. 더구나 현대 과학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적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며 교회에 나가 보지만 기적을 보지는 못합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더 이상 이 땅에 없기 때문일까요? 그렇습니다. 교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신앙 속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갇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연대의 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대의 정이 없는 곳에 기적은 없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연대의 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은 연대의 정에 뒤따르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연적인 결과물입니다. 연대의 정을 지닌 사람은 타인을 외면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연대의 정(compassion)
공감을 표하면서 그저 그 앞에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지도 않습니다. 연대의 정을 가진 사람은 타인과 함께(com)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의지와 열정(passion)을 다합니다. 그 때 타인에게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변화, 그것이 기적입니다. 사실 저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의 뇌는 기적이라는 단어에 민감하여, 기적 앞에 있는 연대의 정이란 단어를 잊어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기적으로 이해할 때, 연대의 정이 가려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대의 정이 드러난 곳에는 반드시 뒤따르는 결과가 있습니다. 기적은 연대의 정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15)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모여든 많은 무리들이 날이 저물 때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팠고,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제자들도 똑같이 배가 고팠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의 배고픔에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공감은 같은 처지에서 똑같이 혹은 동시에(sym) 느끼는 감정(pathy)입니다.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똑같이 굶었다면, 그들은 모두 동시에 같은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칼에 베이고 나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누구나 슬퍼합니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내 사랑을 받아준다면 누구라도 기쁨을 주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공감은 주어지는 상황이 같을 때 드러나는, 인간 본성에 따른 감정적 반응입니다. 따라서 공감이란 의지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감 능력’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저는 공감하기 위해 능력까지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일 뿐입니다. 저는 현대인들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공감
반대로 인간은 본성상 같은 처지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배고픈 사람과 ‘공감’하기 위해, 지금 배부르지만 갑자기 배고파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성은 어떤 식으로든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감 능력’이란 허구의 단어일 뿐입니다. 단지, 배고픈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 배부른 사람이 과거에 배고팠던 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공감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여러분의 배고픔과 지금 배고파하는 사람의 배고픔은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그것은 공감을 방해할 뿐입니다. 과거의 배고픔과 현재의 배고픔을 이해하는 서로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적대감을 키우기도 합니다. ‘나 때는’으로 시작되는 세대 간의 갈등은 많은 경우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나는 세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른 너를 공감하지 못하며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공감은 어떤 ‘가치’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며, 의지를 수반하는 말도 아닙니다. ‘나는 너와 다르기에 공감할 수 없지만, 나는 너와 함께 하고 싶다.’ 우리는 분명 서로 다르지만 함께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대의 정, 즉 ‘동정’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우리가 멀리한 이 단어는 우리가 타인과 더불어 사랑하며, 공동체를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가치입니다. 여기서 기적은 시작됩니다. 사람들과 똑같은 상황에서 제자들이 느낀 공감은 배고픔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제안했던 것입니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 무리는 각각 마을로 가서 그 배고픔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를 채울 것입니다.
나가는 말
마태복음에서 ‘오병이어’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는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므로 헷갈려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을 읽는 지금, 우리는 마태복음에 충실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공감’은 타인을 향한 열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 해결로 나아갑니다. 이로써 나와 너의 간격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제자들의 공감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드러냈던 연대의 정(14)을 제자들에게도 가르쳐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공감을 연대의 정으로 바꾸는 결정적이며 위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물러갈 필요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6) 우리교회가 지금까지 해 온 사역은 이 구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찾아온 이들을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때론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돈을 가지고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물러가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머리가 명령하는 바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지체로서의 교회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선한목자교회의 존재 이유는 충분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