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시인" 김용택
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개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 김용택 시인
김용택(金龍澤, 1948년~ )은 1948년 전북 임실 진메마을에서 태어났다.
1982년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시 ‘섬진강 1’ 등을 발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모교 덕치초등학교에서 30여 년을 교단에 서며 시에 대한 열정을 이어왔다.
섬진강 연작으로 유명하여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칭이 있다.
시집 <섬진강>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꽃산 가는 길> <그리운 꽃 편지> <수양버들> 등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등을 출간했다.
산문집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등도 펴냈으며,
조만간 산문집 2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한국 농촌시와 서정시의 전형을 창조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소충사선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뀌어 봄이다.
하지만 시작을 알리는 기운은 아직 우리 마음까지 오지 못했다.
88만 원 세대, 중산층 붕괴, 세계 경제 불황 등 고된 현실은 봄바람의 따스함을 품기엔 척박하다.
김용택 시인은 “이 지난한 겨울의 침묵을 깰 수 있는 힘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는 데 있다”고 말한다.
발전과 성장만을 좇던 지난날의 오만을 반성하라는 소리.
그가 유독 봄을 사랑하는 것도 ‘혁명의 시기’이자 ‘반성을 가장 빨리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61).
요즘처럼 시에 대한 관심이 시들한 때도 인기몰이 중인 스타 시인.
하지만 그는 거대하고 화려한 것보다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에 관심을 보인다. “시인은 세상 모든 일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중심에 서서 관찰하고, 새로운 눈으로 해석하죠.
이것에 진정성이 있다면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그 감동은 생명력에 기인하는데, 이는 대개 자연에 있어요.
결국 생명은 자연에서 비롯한다는 뜻이죠.
다행히 자연 속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저는 몸과 마음에 배어, 스스로 넘쳐 흘러야 비로소 시를 쓸 수 있거든요.”
그래서일까, 그의 글들은 여느 시와 달리 이해하기 쉽다.
읽는 동안은 특유의 재미가 넘쳐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썰렁하던 마음 한구석에 위안이 깃든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말한다.
문학은 분명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인생을 잘 사는 거라고.
김용택 시인이 끝없이 세상에 관심을 갖고 소통하는 것도 궁극적으론 ‘참 행복’을 찾기 위해서다.
|
지난해 교단을 떠난 김용택 시인. 환갑이 지났건만 아직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때론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가슴이 쩌릿쩌릿할 정도로 설렌다고.
하지만 그 역시 처음부터 다르게 보는 혜안이 있던 건 아니다.
“본디 농민이 꿈이었어요. 농고 졸업 뒤 돼지와 오리 사육을 하다가 망했죠.
딱히 할 게 없어 상경했다가 다시 고향인 진메마을로 돌아왔어요.
그때 친구들이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건 어떻겠냐고 했죠.
얼떨결에 시험을 봤는데 붙었고, 1970년부터 교단에 섰죠. 그런데 혈기왕성한 20대라 좀 무료했어요.
그러던 중 산골로 책을 팔러 온 월부 책장사에게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구입,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죠.
사실 책 표지가 멋져서 산 거라 내용은 아무것도 몰랐어요.(웃음)
한데 그 조그마한 책 속에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다니….
한마디로 충격을 받았죠. 책을 읽고 나니 느티나무, 앞산, 강가의 돌멩이 등 세상이 달라 보입디다.
그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섬진강을 테마로 자연을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세를 타 ‘섬진강 시인’이라는 칭호까지 얻은 김용택 작가.
그의 작품은 대부분 자연주의에 기반, 서정성이 강하다.
하지만 1980년대 초기작들은 날카로운 사회 비판, 저항 정신이 바탕이 된 게 많다.
“시인은 현실을 얘기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제 눈에 들어온 건, 우리 사회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는데도 늘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농민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시대가 아무리 오랫동안 괴롭히고 성가시게 해도,
인간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인간성을 포기한 건 오히려 시대를 이끈다는 지식인들이죠.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생각이 아주 ‘저글저글’합니다.
오랜 독재와 한국전쟁, 지역 갈등 등 우리 역사가 생각을 쪼그라들고, 쩨쩨하게 만들었죠.
사람들이 신비와 신기함을 잊은 채 얼굴이 경직되었어요.
한마디로 되바라진 거지.
세상이 삭막하고, 황량하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민 탓만 하고, 그러니 인생에 감동이 없는 겁니다.”
|
김용택 시인은 뒤늦게 시의 세계에 눈을 떴다.
자기 생각을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일기처럼 쓰기 시작한 시.
습작 시절만 무려 13년,
과연 본인이 쓰는 것이 시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딱히 자문을 구할 곳도 없었다.
완성도가 있는 시를 골라 잡지사에 보냈더니 시집에 싣겠다며 답이 왔고, 그는 서른다섯에 등단했다.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른 요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시를 쓰고, 책을 읽는 등 공부를 한다.
“인간에게 중요한 건 공동 문명체를 생각하는 인류 정신입니다.
하지만 이걸 학교에서 가르치면 난리 나죠.
시험을 잘 보는 인간을 만들라는 게 요즘 교육 이념입니다.
다들 아닌 척해도 결국 ‘자기 자식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게 현실이죠.
더불어 사는 삶,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생각하는 삶의 태도… 이런 아이들을 키우고 싶었습니다.
무한 경쟁을 부추겨서 남을 짓밟는 사고방식은 저와 안 맞아요.”
|
|
자연과 나누는 대화만큼 즐거운 게 없다는 김용택 시인은 특히 봄을 사랑한다.
혁명의 시기라 할 정도로 거듭 상황이 변하는 게 좋다고. “봄은 끊임없이 모습을 달리해요. 자기를 바꿔나간다는 건 곧 반성을 엄청 빨리 한다는 소리죠.
우리 인간들이 배울 점이 참 많아요.”
하지만 그가 정말 좋아하는 건 아내와 대화다.
그는 삶에서 진짜 중요한 건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거라 했다. “세상은 물론 아내를 새로 보는 눈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함께 사는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해야죠.
풀 한 포기, 물고기 한 마리 중요하다면서 아내한테는 ‘물 떠 와라, 리모컨 가져다 달라’ 이게 말이 됩니까.” 그는 조건 없이 자연을 좋아하듯 배우자를 사랑하라고 했다.
이유를 부여하는 순간, 그 사랑은 퇴색되기 때문이다.
결혼기념일, 생일 등 특정일을 챙기고 상대에게 바라는 대신
지금 이 ‘순간’ 마음껏 사랑하라는 김용택 시인.
그는 바로 ‘지금’을 소중히 할 줄 아는 행복한 ‘순간주의자’다. |
참 좋은 당신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