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은 즉위하던 해인 661년부터 한시도 쉴 날 없는 정복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가 재위했던 기간의 중요한 활동을 정리해 보자. 먼저 백제 부흥군을 물리치고자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된 손인사(孫仁師)의 증원병과 연합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 전쟁은 665년 백제 왕자였으며 웅진도독(熊津都督)인 부여 융(扶餘隆)과 화맹(和盟)을 맺으며 일단락된다.
이어 문무왕은 666년부터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평양성을 공격하여 668년에 함락시켰는데, 당나라는 점령지의 지배를 위해 평양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이때부터 신라와 당나라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문무왕은 고구려 부흥 운동과 연결해 당나라 및 당나라와 결탁한 부여 융의 백제군에 대항하였다. 670년 백제의 63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671년에는 가림성(加林城)을 거쳐 석성(石城) 전투에서 당나라 군사 3,500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당나라는 672년 이후 대군을 동원해 한강에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신라와 전투를 벌였다.
당나라는 674년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으로 삼아 신라를 치는 한편,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왕(新羅王)에 봉하였다.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이었다. 전쟁은 675년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해에 설인귀(薛仁貴)가 장수가 되어 쳐들어왔는데, 신라 쪽에서는 문훈(文訓)을 내보내 이에 대항하였다. 신라는 당나라 군사 1,400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000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전세는 신라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당나라도 더 오래 전쟁을 끌고 가기가 벅찼다. 드디어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겼다. 문무왕이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길고 긴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물론 신라의 삼국통일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대동강부터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 정도에서나마 한반도를 통일한 일은 이후 한민족(韓民族)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데 획기적인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일의 거의 전부가 문무왕의 수고로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중앙과 지방 행정조직의 개편 또한 문무왕의 업적에 들어간다. 특히 진흥왕 때부터 설치한 소경(小京)을 확충한 것이 눈에 띈다. 678년의 북원소경(北原小京), 680년의 금관소경(金官小京)의 설치가 대표적이다. 경주는 한반도 전체로 보아 지나치게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소경은 이 때문에 생기는 비효율성과 불편함을 극복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는 신문왕 때에 와서 5소경제(小京制)로 완성되었다. 한마디로 문무왕은 신라를 신라답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